[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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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 혹은 이데올로기로 본 『자본』
 지상강좌

현장에서 미래를  제117호
박영균

*) 이 글은 한노정연 2006년 1차 기획강좌 제2주제 “나는 자본론을 이렇게 읽는다”의 제5 소주제 ‘강의안’입니다. - 편집자 주.

지상강좌//

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 혹은 이데올로기로 본 『자본』


박영균 / 한노정연 연구원




1. 이데올로기, 닫힌 꿈으로의 여행!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안과 격동이 부르주아 시대를 이전의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시켜 준다.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모독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공산당 선언』, 403쪽)

→ 한국의 지배적 담론들과 내재화된 담론들
: 생산성, 효율성, 국익, 합리성, 공공성 등
(신자유주의 지배 코드- 자유시장경쟁, 생산성, 효율성, 합리성/세계화 지배 코드-국가경쟁력강화, 민족자본적 합리성/시민사회 지배 코드-공공성, 합리성) ex) 공기업 합리화, 구조조정(교육과 학문-시장)
▶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은 해체된다.’, ‘녹아서 사라진다.’: 신화와 상상력, 감성적 관계들과 윤리적 가치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들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배제된다. 사랑과 인간적 가치들, 정서와 유대는 봉건적 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오직 합리적인 것들, 눈에 보이고 실증할 수 있으며 이익이 되며 체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는 것들만이 ‘합리적’인 것으로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ex)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현실은 냉혹한 생존경쟁의 장이다.’/‘결국 승리자가 진실을 소유한다.’→‘인간은 이기적이다.’
: 여기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종교도 피해 갈 수 없다. 모든 것은 자본의 도가니로 녹아든다. 저항의 몸짓은 자본의 그물에 걸려들어 오히려 자기를 옥죈다. 총체적으로 닫힌 세계!, 이데올로기의 완고한 포획망!→‘전제 권력!’

▶ 나찌즘과 ‘황빠현상’
: 음모론을 통한 적 만들기와 적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형성하는 자기 동일성-집단성의 구획, 자기 동일성-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광기, 권력의 형성→이와 같은 폭력적 광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 자기동일성: 자기이해-이익, 집단적 동질성- ‘민족적 이익’, ‘국가적 이익’- ‘이익을 침해하는 음모적인 적들’(유태인, 미국-카톨릭)
· 타자에 대한 배제와 권력의 형성: ‘그깟 윤리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 ‘조작할 수도 있지!’, ‘원천기술만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문제될 것 없다.’
· 내재적인 폭력의 사용과 광기: 자발적인 사이버 테러와 집단적 광신

⇒ ‘굳게 닫힌 꿈’, 현실세계의 냉혹한 생존경쟁은 나의 왜소함으로 풀어갈 수 없는 거대한 장벽, 꿈이 없다. 그 꿈을 실현해 줄 주체, 대문자 주체(영웅, 카리스마의 형성)를 통한 꿈의 형성, 여기서 진실과 거짓의 구분은 없다!, 오직 내 꿈을 실현하는 대문자 주체와 그것을 방해하는 적이 존재할 뿐이다. 시뮬라크(환영)들의 세계!, 조작과 음모의 세계!
2. 주체의 종언, 혁명의 종말!

· 이데올로기: 상상적 동일화에 의해 형성되는 집단적 관념(‘Idee’→‘idea’: 플라톤의 두 존재 사이에 공유하는 공통 속성에 의해 형성되는 관념적 추상들)

· 특징: 자기 완결성, 폐쇄성, 독단성, 자기 순환성(자기 지시성), 배타성, 현실은폐성
: 너와 나의 집단체험, 또는 동일한 삶의 양식들(정치-경제-문화적 형태들)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형성되는 관념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그냥 ‘관념’이 아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왜곡시키고 심지어는 자기 이해에 상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부로부터, 아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에 의해 형성되고 실질적인 실천행위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하다.
→ 이데올로기는 ‘허구, 가상, 거짓’이 아님. 이데올로기는 ‘실재적(realistic)’이며 ‘실천적(practical)이다.

여기서 참과 거짓을 가르고 이를 통해서 인식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자기 행위를 창조하는 ‘주체’는 없다. 주체는 없다. 근대적 주체는 세계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인식론적 주체이자 자신의 이해(이익)에 맞추어 행위하는 자(agent)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런 주체는 없다.

· 맑시즘에서는 이런 주체가 없다. 사회의 물질적 구조의 변화에 따른 주체의 형성과 주체의 행위가 만들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탈근대적 주체’를 가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되는 집단적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적 주체’로서 사회의 물질적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 주체들과 다르다.

· 탈현대성(post-modernity)은 이와 같은 특징에 주목한다. 맑시즘에서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물질적 토대의 반영이자 그 한계 내에 존재한다. 그러나 탈현대성 논의는 기의(signified)를 상실하고 지시체가 부재하다고 본다. 따라서 기표(signifier)가 지배한다.(ex, 텔레비전)→ ‘매체는 메시지다.’(맥루한) 애초부터 주체는 불가능하다. 맑스식의 주체 형성은 불가능하다. 상징적 코드를 독점하고 있는 이상, 물질적 변화는 주체 형성을 낳을 수 없다.
→ 혁명적 주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주체의 종말, 혁명의 종말!’)

▶ 그럼 왜 그렇게 되었는가?
맑스: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물질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 이데올로기/탈현대성: 기표의 과잉과 의미의 부재, 대상의 소멸과 존재의 부재(데리다-‘흔적’, 보드리야르, 들뢰즈-시물라크라)→ 맑스: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중심성-노동-가치와 ‘사용가치’/탈현대성: 언어와 말의 독점, ‘코드’의 독점에 의한 지배와 교환가치, 상징가치(보드리야르), 권력과 지식의 연계효과(생체권력, 미시권력의 작동)→ 맑스: 물질적 구조를 뒤엎는 혁명(정치-사회혁명)/탈현대성: 이데올로기적 독점성을 파괴하는 혁명(문화-윤리혁명)

▲ 탈현대성 논의는 서구 역사의 ‘나찌즘’ 경험을 반성적으로 성찰한 결과이자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연되어 온 혁명,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권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다.

· 나찌즘의 형성과 발전, 독일사민당의 몰락→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정치·경제·조직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배블록으로 재편되어 갔다. 특히 노동조합운동의 성장이 체제내화되면서 지배권력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적 지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일부가 되었다.→ 이유에 대한 탐구(프랑크푸르트학파)/아방가드로운동에 대한 재탐구(일상에서의 내파화-‘거리두기’, ‘낯설게 하기’-브레히트)

· 현실사회주의권에 대한 성찰→ 왜 노동자해방이 아니라 전제적인 일당독재형태로 귀결되었는가?→ 맑스의 근대성: ‘노동중심성과 생산의 진보’-인간 해방이 아니라 인간을 생산의 담지자로서 생산의 도구로 존속시킴, ‘휴머니즘’-진화론적인 역사 발전과 인간 중심의 자연파괴 등을 유발하고 인간을 주체로 전화시켜 근대적 신화를 존속시킴, ‘변증법적 유물론’-모사론과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 등이 ‘과학’의 특권성과 배타성, 그리고 지식-권력의 연계효과를 통한 지배권력을 만들었음.

∴ 그러므로 단순한 정치혁명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구조를 바꾼다고 해서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은 유물론,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관점에서 단순하게 혁명을 바라보고 ‘정신-의식’, ‘윤리적 차원의 독자성’을 간과한 결과이다. 특히 유물론은 인식주체를 가정하고 현실에 종속시킴으로써 자유롭고 독자적인 ‘선택’에 의한 ‘자유’를 간과.→ ‘우연’, ‘비결정성’ 등에 의한 ‘자유’로운 ‘기획’과 ‘선택’, 구성의 정치학으로서의 새로운 문화·윤리적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


3. 문화혁명, 저항과 포획의 반복, 그리고 『자본』

· 90년대 이후 한국 문화의 발전. 탈권위·탈국가주의·탈봉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위한 기획 영화들, 문화적 양식의 창출과 발전, 일상에서의 저항적 운동들의 조직화, 시민운동의 발전 등. 그러나 90년대의 문화혁명은 일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일상적 파시즘’론과 타자에 대한 소통, 타자의 담론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사회는 ‘탈’정치화하고 보다 더 독단적으로 바뀌고 있다. 국가주의-민족주의는 강화되었고 타자에 대한 배제(이주노동자)도 형성되었다.(ex, 붉은 악마현상이나 황우석사태, 독도-북핵문제 등)
▶ 탈현대성 논자들은 ‘저항’과 ‘포획’을 이야기한다. 지연되는 혁명! 그러나 불가피하고 유일한 길이다. 끊임없는 ‘탈주’(도주)!, 독점성을 해체하라!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들을 이야기할 때, 탈현대성 논자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럼 왜 이와 같이 일상의 저항은 다시 ‘포획’되며 오히려 문화적 담론의 다양성이 ‘지배코드’를 강화하고 일상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가 하는 점이다. 문화혁명의 한계를 설정해 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자본』은 이에 대한 답변을 준다.
맑스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었으면서도 『자본』만큼 오해되어 왔던 작품은 없다. 『자본』은 15-20년의 작업 끝에 완성시킨 대작. 맑스 평생의 작업이며 완결판이다.
애초 『자본』은 자본주의의 파멸과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이론적으로 제기하기 위한 작업으로 기획되었고, 수많은 계획의 수정이 있었다.
『자본』은 흔히 정치경제학적 저작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맑스의 초기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별되어 『자본』은 ‘과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본』은 이와 같은 ‘과학’을 자본운동이라는 물질=경제시스템을 통해서 규명한 작품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자본』은 엥겔스가 말했듯이 정치경제학적 작품이자 철학적 작품이고 문화비평적 작품이다. 흔히 이야기하듯이 토대와 상부구조에서 토대에 대한 작업이 『자본』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역동성을 ‘계급투쟁’이라는 코드를 통해서 해명해내려고 했던 작품이다.
여기에는 레닌이 말했듯이 논리학=변증법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계급투쟁을 총체적인 이론적 그물망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다. 물론 맑스가 죽음으로써 미완성에 머물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본』의 마지막 장이 ‘계급’이라는 점은 상징하는 바가 있다.
따라서 『자본』은 ‘토대’에 대한 작업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며 상호역동적인 유기체를 규명하는 작업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자본』은 ‘자본’의 추상을 통해서, ‘자본’운동의 일반성을 추출해 낸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맑스 작업 방향이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4. ‘물신성’ 이론과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서 과학의 길을 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가 실질적인 힘으로 전화하는 것. ‘비판의 무기가 대중을 사로잡을 때, 실질적 무기로 전화한다.’는 점이다.
①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의 자기순환성, 자기폐쇄성, 현실은폐성을 파괴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현실’을 과학의 대상으로 바꾸는 것.→실천적 유물론
②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얻은 현실과 이론과의 소통을 과학으로 정립하는 것.→『독일이데올로기』이후『자본』까지의 작업들.: ‘과학적 사회주의’

그러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었음. 첫째,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개념화와 부정적 개념화의 문제이며 둘째,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규정하는 존재와 존재 의식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첫째 문제에서의 오해는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이 조작한 ‘허구’라는 관점(초기 우세)/특정한 집단의 이해를 표현한 관념이 이데올로기는 관점(후기 우세)이다.
둘째 문제에서의 오해는 존재=존재의식, 토대=상부구조라는 결정론적 관점, 또는 양자가 병행해서 움직인다는 병행론적 관점/의식, 상부구조는 자율적이라는 관점이다.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완성되는 것은 『자본』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근거하고 발생한 중심점을 자본운동 속에서 규명해 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데올로기를 파편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자본』에서 맑스는 ‘모든 것을 녹아서 해체하게 하는 힘’, 즉 내재적인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물질적 토대인 자본 운동의 중심성 위에 근거한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 물신성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다만 상품형태가 인간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하는데 있다.”(91쪽)

① 상품물신성
자본주의에서의 세포는 상품이다.: 데카르트의 ‘실체’와 주체 개념은 모두 다 근대 자본주의 상품화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에 불과하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을 일반적으로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근대 자본주의는 이중의 해방-인신적 구속으로부터 해방과 생산수단으로부터 해방-을 만들어 놓는다.
여기서 노동력을 사고파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계약자이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흥정하듯이 자본을 가지고 노동력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파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양자는 주체이다.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주체’인 것이다.
→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기 이익을 따라 합리적으로 행위한다.’
: 경제학-자유시장경쟁체제, 정치학-자유민주주의와 다수결, 1인1표의 등가성, 사회학-개인들의 결합, 윤리학(생물학)-이기성과 이타성-사회계약론과 공리주의

② 화폐물신성
돈은 모든 것과 교환된다. 따라서 돈은 상품 중에 상품이다.: 상품의 유용성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자립화된 형태인 화폐가 생산활동의 목적이 된다. 교환체계에서의 물신화, 황금만능주의

③ 자본물신성
사회적으로 맺어진 생산력은 모두다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의 힘에 대한 신비화가 나타남. 자본은 생산을 조직하는 힘이자 생산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잉여가치는 자본 자신의 힘으로 나타난다. 삼성에 대한 국민적 환상, 국가경쟁력=자본의 힘.

이런 ‘물신성’의 특징은 자신에게 ‘보이는 현실’ 그 자체를 자기의 관념으로 곧바로 투영하여 동일시하고 그에 기초하여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함. 대표적으로 로빈슨크루소에 기초한 고전경제학→노동가치론은 정립하지만 잉여가치론, 착취율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것은 계급적대의 문제이다.(ex, 맑스, ‘리카르도는 계급적대를 파악하기는 했지만 그의 부르주아적 후각이 잉여가치론으로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 결국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생산이라는 물질적 토대의 중심성 위에서 형성되고 발휘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 물질성은 객관적 토대(물질적 조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와 이데올로기의 물질화된 형태로서의 ‘매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 이로부터 기각되는 것은 첫째 문제에서의 오해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이 조작한 ‘허구’라는 관점(초기 우세)/특정한 집단의 이해를 표현한 관념이 이데올로기는 관점(후기 우세)이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허구’가 아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이데올로기는 자본의 물질성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특정한 집단(노동자)의 이해를 표현한 관념도 아니다. 이것은 기껏해야 노동조합적 이데올로기이며 오히려 자본의 이데올로기 내부에 있다. 둘째 문제에서의 오해인 존재=존재의식, 토대=상부구조라는 결정론적 관점, 또는 양자가 병행해서 움직인다는 병행론적 관점/의식, 상부구조는 자율적이라는 관점인데, 이것은 ‘중심성’이 직접적인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다만 중심성, 한계라는 의미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율성은 중심성 위에서 만개하게 되는 이데올로기간의 착종과 생산성을 포착하기는 하지만 한계를 설정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5. 지배를 넘어, 해체로, 해방을 위한 이데올로기 비판 기획

· 자본주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가정’, ‘원자적 개인주의’, ‘합리성’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단절해야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기 이익을 따라 합리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자본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틀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항상 저항적 몸짓은 언제나 자본의 포획으로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이 제시하는 토대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을 규정하는 중심성이다.

· ‘반자본’, ‘자본과의 근본적 단절’은 이런 상품-화폐-자본의 물신성과 단절하지 않고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단절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상은 자본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따라서 끊임없이 우리는 그 일상이 빗어내는 ‘이데올로기의 회귀’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 단절은 새로운 조직적 실천을 만들어내는 운동 그 자체, ‘반자본의 조직운동’,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반자본’으로 조직하는 운동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적 감염’과 ‘외부로부터의 도입’!

▲ 그럼, 해방의 주체 형성은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철학이나 인간이 주체라고 생각하는 ‘주체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고 작용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인식은 이성 이전에 인간이 세계에 대해, 또는 자신의 인식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한다. 따라서 이성 이전에 인간의 이성적 사유 작용을 하도록 추동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기반한다. 그것이 바로 감성적 활동이다. 내가 어느 날 비로소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평소에는 전혀 관심 없이 보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게 필요로 되거나 욕구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를 통해서 세계와 상호 관계하기 때문이다.
ex)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절점으로서 계급, 계급투쟁, 계급투쟁에서 노동자가 몸소 느끼는 감성적 욕망, 저항, 가치의식 등의 형성

- 노동자들은 그들이 체험하는 세계에서 그들 스스로 느끼는 문제들을 자신의 인식에서 출발적인 지향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만 노동자들의 인식을 다른 인식과 달리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이외에도 노동자들은 그들의 삶의 조건에 따라 다른 존재성을 가지도록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분업 속에서도 서로 협력하여 공동의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작업 환경과 관련하여 공동체적 성격을 부가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사실, 노동자들을 사회주의적 감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거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적 정치의 중핵으로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노동자들의 존재성 때문이다. 대공장 노동일 경우에 이것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노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소규모 사업장이나 고립적인 개인 작업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런 성향이 다소간 더 적을 수밖에 없다. cf) 공장제 대공업과 해방에 있어서 집단 노동자의 주력부대 설정

- 또한, 이런 측면에서 농민이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존재성은 다르다. 농민은 자기가 생산을 자율적으로 통제하면서 개별적으로 노동을 하기 때문에 지식인과 같이 집단적 규율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지식인은 지식인 관념성에 대한 성취욕이 높고 공동 생활을 싫어하는 반면 농민은 전통적인 양식에서는 서로 상부상조해야 했기 때문에 협동 양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계급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각 존재성이 지닌 가치 지향성, 또는 감성적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 그것이 의도하거나 욕구하는 지향성의 측면에서 그러하며 둘째,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느끼거나 습성화되어 있는 방식에서 그러하다.

▲ 그럼, 이데올로기는 항상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가?
: 과학/이데올로기의 대당적 구조(초기 알뛰세르)는 이와 같은 전제를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실천성’을 가진 것으로서, 집단을 ‘시멘트’로 묶으며 행위를 창출한다. 정치적 행위는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이데올로기라는 대당 구조가 전제하는 것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이데올로기는 과학=이성/이데올로기=비이성을 다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은 항상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과 가치, 관심들을 투영한다. 따라서 특정한 사실 자체는 동일하게 주어져 있고 또 이로부터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존재성(주어진 존재 조건으로부터 나오는 성향)을 반영하는 감성적 가치나 의도, 의향, 욕망들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비이성 없는, 투명한 이성적 인식은 없다.
cf) 약국의 발견이나 주관심사의 차이 등
→ 오히려 인식은 실천적 행위이다. ‘감성적 실천’을 행위로 파악해야 한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 ‘감성적 계급의식’
: 아직까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감성 영역에서 일회적, 돌출적, 파편적으로 제기되는 의식들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파토스이며 다른 하나는 에토스이다. 파토스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데 반해 에토스는 수동적이면서 소극적이다. cf) 윤리적 의식에서 근거한 분노, 반발과 전체 사회에 대한 근거 없는 파괴적 분노의 차이

· ‘경제적 계급의식’
: 경제적 계급의식과 정치적 계급의식은 모두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식들이다. 여기서는 논리적인 틀을 갖추고 나름대로 자신의 분노와 감정들을 정리해 낸 의식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자는 부르조아적 합리성, 계산적이고 상호 계약적이면서 타산적인 이성을 가진 의식인데 반해 후자는 이것을 넘어서 사회적 관계,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의식이다.

· ‘정치적 계급의식’
: 자생적으로 드러나기 힘들다. 왜냐 하면 이것은 그 스스로 정치권력의 주체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하며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경제와 정치를 조응시키는 ‘사회화’임을 자각하는 데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계급의식은 고도의 의식적 산물이다.

· ‘당파성’
: 실제로 어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나 이론은 실천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현실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실현된다. 하지만 이런 실천들이 개개인의 실천이 될 때, 그것은 여전히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의 한계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개인적인 한계의 극복과 실천적 협소함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것이 계급 전체로 최대한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실천을 계급 전체로 확대하고 자신의 경험을 집단화하는 것이 바로 조직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인 의식은 항상 조직과 이전의 경험들을 집단화한 것, 즉 이론을 전제한다. 개인의 협소함을 벗어나 조직적 실천들 속에서 현재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 방향을 결정하고 이 속에서 경험을 다시 집단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로 되는 것은 ‘반성, 성찰’이다. 이것은 자기 계급의 실천과 계급적 상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렇게 3가지 요소 이론, 실천, 반성적 성찰이 ‘조직’을 통해서 결합되면 현재의 주어진 사회가 움직이는 방향과 도래할 사회의 태동성에 주체이자 대상으로 노동자 계급은 과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성은 당파성으로 발전해야 한다. 여기서 당파성은 당 조직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계급의 정치적 실천 주체들의 조직이자 이론의 집단적 주체가 바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 조직으로서의 당이다. 따라서 당파성이라는 당 조직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이론, 실천, 반성적 성찰을 정치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6-02-27 17: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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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도 맑스를 과학으로 읽다니 흠 / 200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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