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변혁 실천 및 이론들과 페미니즘의 절합을 향해서
너부리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봉합하지 말고 열자(the worlds split open): 단결투쟁이 아니라
돌파
민주노총 보궐선거와 민노당 당직 선거를 멀리서나마 인터넷으로
보면서 나는 ‘진보’진영은 이제 자신의 ‘위기’를 팔아
연명하는군… 하는 생각을 했다. ‘위기’ 운운은 대체
<누구에게> 득이 되는 것일까. ‘진보’ 진영의 ‘위기’가
상투어가 된지 꽤 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위기’운운하면서
득을 보는 내부 세력이 이미 꽤나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이 ‘위기’는 ‘진보’의
이름으로 획득했던 지지의 많은 부분을 오래 전부터 상실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진영 내부에서
운운되는 ‘위기’는 세력의 위기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정당성의 위기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나 우선순위를 공유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넓은 집단의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혁과 진보의 정당성의
근거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정치적 실천에서 의견의 분화란 마땅히 일어나기 마련이고,
20세기 반체제 운동들의 역사가 일러주듯 진보운동들 역시
내부권력 투쟁에 휘말린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위기’든
‘내부 권력투쟁’이든 ‘단결’과 ‘통합’을 엉터리로
강조함으로써 의견의 분화와 다양한 입장들, 차이들을
억압적으로 봉합하려는데 있다. 변혁의 주체를 자임해 온
‘진보’(정치)운동 역시 (자기)변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정당성도 설득력도 떨어지고, 누가 변혁 혹은
진보의 구성-지지집단(constituency)을 구성(해야)하는지도
헷갈린다. 이런 ‘위기’는 알고 보면 겁나게 억압적인 엉터리
단결통합을 통해서나 쁘띠 부르주아적인 타협을 통해서는 결코
돌파될 수 없다. 오히려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 정체성에
있기 마련인 차이들, 불협화음들이 세상의 모순들을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돌파가능성이 뚫리기
시작한다.
이제 내부에서 점증적으로 드러나는 차이들과 불협화음들이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결이 아니라 돌파다. 돌파(break through). 엉터리
단결투쟁이나 통합이 아니라 자기성찰에 입각한 해방적인
상호조율 능력이다. 단결이니 통합의 이름으로 억압적으로
봉합하려 하기보다는 내부의 불협화음들과 차이들을 민주적으로
열어젖히는(split open) 것이야말로 변혁의 소중한 한 과정일
것이다.
사회변혁이라는 ‘장사’: 규범은 우리 자신이다
진보진영의 낡은 아비투스인 도덕적 엄숙주의를 버리고 사회변혁
역시 ‘장사’라고 생각해 보라. 물론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와
적극적인 자발성이 그 바탕과 동력을 이루어야 가능한
신나는-세상-만들기로서 ‘장사’말이다. 정당성 확보 및 확장은
‘장사’ 및 ‘흥행’의 논리, 방법들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정당성 확보, 구성-지지집단(constituency) 확장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 대중의 무의식과 리비도를
‘우리’편에 유리하게 끌어내는 가치포장 및 유통기술이다.
(물론 ‘사회적 대타협’이니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편가르기를 제대로 해서 사안에 따라 제대로 된 연대의 능력을
좀 실험, 발휘해 보자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배울 점이 있다. 온갖 변혁적 실천과 이론이 내놓은
어휘들과 가치들, 이데올로기들을 자기들의 이익에 유리하게
역이용, 둔갑이용하는 영악함과 이데올로기 계발 및 유통에
있어서 보이는 부르주아적 성실성과 바지런함.
무엇보다, 변혁세력은 다양한 해방적인 관점들에 스스로를
바지런히 성실하게 개방해야 한다. 특히나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온갖
미세한 억압들과 자기 안의 모순들을 성찰할 때 지금 여기
절박하게 필요한 새로운 가치들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것들을 어떻게 벼려낼 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페미니즘의 통찰로부터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이론적으로 혹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은 구태의연하기
때문에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고 또 위기‘만’을 운운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민주노총도 민노당도 바로 자기들의
위기를 팔아먹음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역설이다. 그들이 반대한다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비하자면, 너무나 작은 그 권력을,
그 기득권을 유지하겠다고, 자기들이 지니고 있(지만 실행할 줄
모르)는 더 큰 힘과 권력을 내주겠다는 근시안적 멍청함. 이것이
바로 조금이라도 권력을 쥐게 되면 생기기 마련인 자승자박의
지점이다.
범좌파진영의, 범자칭진보진영의 외곽에서 ‘동원대상’으로만
인식되거나 아예 외부에 있는 작은 운동들, 여성, 소수자, 게이
및 레즈비언, 성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줄기찬 움직임들을
유심히(attentively) 그리고 감정이입하여 바라볼 때, 변혁적
실천은 돌파지점을 찾고 변혁 이론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터이다. 역사적으로 변혁의 영감이요 원천지이자 동력이었던
것은 중심이 아니라 언제나 주변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라.
우리 시대, 변혁이론의 영감의 원천이자 변혁운동의 최대
보루이자 새로운 가치들의 생산지는 여성과 소수자들이다. (물론
여성들 사이에도 서로 화해 불가능한 차이들이 있다.) 비록
이들이 지금 여기 생산해내는 것이 온갖 종류의 맹안과 의도적인
집단적 무지/무시로 인해 재생산, 유통되지 못하도록 억제당하고
있을 지라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것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우리시대의 삶의 조건이라고 해서, 그것이 규범(norm)인 것은
아니다. 지향해야 할 규범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에릭 홉스봄이
본대로 20세기가 자본의 세기였다면, 21세기 전반부도 둔갑과
변신에 능한 자본의 시간이 될 것이다. 회고적으로 되돌아보았을
때, 20세기 맑스주의 운동이 가르쳐준 것은, 자본과 자본주의를
규범으로 설정하고서 거기에 대항(안티)질만 할 때 그것은
살아남더라도 성장(동식물이 자라듯)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지속되는 지리멸렬한 진보운동의 침체 원인들 중 하나는 바로
‘규범’을 멍청하게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거대한 힘, 거대한 체제일 뿐인 자본을,
자본주의를 규범으로 상정하고서 그에 대한 대항투쟁만 하기
때문에, 늘상 ‘위기’이고 자주 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항투쟁은 언제나 최소한의 투쟁일 뿐이다.) 소수자들을 보라.
이들은 자기 자신이 규범이다. 이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규범들을, 힘이 세다고 대세라고 지배적이라고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것들을 규범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단지
규범인 자기 자신보다 더 힘이 센 것일 뿐이라고 인식할 뿐.
물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반드시 언급해야 하리라. 수많은 변혁
운동들의 역사가 일러주듯, 사회적인 규범들의 체제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즉 ‘사회적 인정’만을 지향하는 그런 류의
소수자운동들은 언제라도 혹은 머지않아 그것들이 애초에
가졌던/가졌을 법한 근본적 급진성을 냉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해방적 네트워킹: 21세기 초반 변혁진영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핵심어
20세기. 맑스주의 세력이 자본주의 분석에 주력하며 그 분석에
기초하여 매서운 비판의 매질을 가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변신하면서 승승장구를 달렸다. 보수와 수구로 지배 위치를
점했던 이전의 지배집단들과 달리, 자본가 집단은 혁신을 통해서
지배를 점했던 최초의 지배세력이었고,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늘상 변신해야 만 살아남는 혁신의 생산체제로서 진화해 왔다.
이론으로서 맑스주의는 자본의 변신이 이루어지고 난 후 ‘황혼
녘에야 날개를 펴는 부엉이’였다. 궁극적으로 보아 보수적인
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자본의 세기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포스트모던, 포스트 포디즘적) 자본이
무의식이라는 대륙을 발견하고 이윤축적을 위해 욕망에 주력하는
동안, 맑스주의 세력은 창백한 금욕의 도덕으로 무장했다.
노동해방의 당위와 단결의 절박성 앞에서, 자본주의가 휘두르는
처참한 초강력 착취 속에서, 투쟁의 성과로 주어진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화에 직면하여, 쁘띠부르주아로의 상승 욕망에 끝없이
유혹당하면서. 니체의 말로 하자면, 20세기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의식(언제나 외부 자극이 있어야 반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반동적 힘)이었고 자본주의야 말로 능동적 힘으로서
무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를 떠받힌 거대한
무의식적 힘은 바로 노동자/여성/소수자 대중이다.
힘과 세력(힘의 크기와 힘들의 관계)에서 보자면, 대체로 그
강도와 크기가 작은 힘들은 의식을 앞세움으로써 훈장질한다.
니체가 맞다면, 의식,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탄생은 바로 이런
작은 힘들의 반동적인 활동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 반동성을
기반으로 해서만 움직이는 힘들이 그 강도와 크기에서 작으면
작을수록, 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한다.
여성들의, 노동자들의, 소수자들의, 소위 대중의 힘은 그 크기와
강도에서 가장 거대한 힘이어 왔다. 이 거대한 힘은 창조적이고
능동적(외부 자극이 있어야만 가능한 반작용으로서
반동적reactive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이다. 외부 자극이
필요없는 거대한 무의식을 이룬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동력으로서 이들의 창조적이고 능동적이며
무의식적인 거대한 힘들은 이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작은 힘들의
지배를 받아 왔다.
우리 시대 변혁적 이론과 실천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무의식들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 공동주체들(co-actors)로서 만날 때
스스로에게 더 큰 힘과 세력을 부여할 수 있고(empower), 보다
광범위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삶의 조건인
자본주의 반대가 사회변혁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주장 역시 경합중인 여러 입장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남성 좌파 이론가/활동가 마초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정당성에 관한 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점과 대면하기를
회피하고, 대신 반자본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입장을,
연대가능한 다른 소수 (개별/집단) 운동들에도 최우선사항으로
강제하거나 기본적으로는 ‘훈수질’ 하려 든다는 것이다.
합리적 핵심이니 핵심 논쟁 운운 하지만, 핵심도 합리도 연루된
이들의 특수한 이해관계와 욕망에 따라서, 복잡하기 마련인
권력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것이다. 근대의 초월적 남성주체가 착각했던 바와는 달리,
사람은 모든 곳에서(everywhere) 볼 수 없고 또한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에서(nowhere) 볼 수 없다. 연루된 이들마다 핵심이
다르다고 해서 경합중인 여러 핵심들이 균등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힘이란 질의 차이라기보다는 양의 차이에서 세력(=힘의
크기)이 결정되듯이, 힘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나오기 마련인
모순 역시 불균등하게 작동한다. 하여 핵심은 하나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하나가 아닌 것들을 제각각 핵심이라고 보는
여러 입장들을 억압한다. ‘핵심논쟁’ 운운하는 것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힘이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억압이 실질적인
효과를 생산할 때이다. 대화와, 지속적인 대화의 산물들 중
하나로서 연대란 핵심이 여럿일 수 있다는 점을 서로가
불균등하게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지금 여기 변혁세력의 변혁의 역능을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통찰이라고 본다.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각자 직접 공부하시라. 괜시리 묻는 척 하면서
훈장질하려 하지 말고. 수많은 자칭 ‘진보’남성들은 여성들의
실천을, 운동을, 텍스트를, 이론적 작업을 자세히는 커녕
들여다보는 제스쳐 조차도 하지 않는 자지중심적 특유의
게으름을 무슨 훈장인 줄 착각한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페미니즘은 자신의 정체성이 지닌 불협화음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며 그것들을 봉합하기보다는 민주적으로 열어젖힌다.
정치 실천에서 내적인 의견 분화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견분화를 통일성으로 해소하려는 욕망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을 해방적 실천이자 이론이 되게 유지시켜주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남성(노동자)중심적인 변혁적 실천과 변혁 이론은
페미니즘의 통찰과 조우해야만 자기변혁을 하고 살아남아
승승장구할 것이다. 우선 맑스주의의 계급, 노동 등의 핵심
개념들이 화석화된 지 오래라는 점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즉
변혁적 실천의 레토릭-망치가 되기 위해서는, 변화중인 상황에
정합적인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계급 개념의
경우, 성(sex/gender) 개념을 절합한다면 계급 개념은 강력한
변혁의 개념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노동의 경우는
예컨대 성노동 개념화가 (페미니즘을 포함한) 변혁이론 진영의
변혁역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역할을 할 것이다. 모순들이 가장
중층결정적으로 얽혀있는 것인 성노동(sex work)을 가부장적
자본주의 및 남성중심적 지배 질서에 맞서서 정교하게 벼려낼 수
있다면, 변혁(이론)진영은 단연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많은 구성-지지집단(constituency)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훗날 이렇게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동지인 남성 비판 이론가/실천가들이 다소 늦기는 했지만
실천이자 이론으로서 페미니즘의 전복적 날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디어 감지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정말로 바지런히
여성(운동)들의 성과와 통찰로부터 배웠다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제기하는 사회 쟁점들이 여성문제와
동외연적이라는 점을, 여성해방이 곧 남성들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따로 또 함께 깨닫게 됨으로써 급진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열어젖힐 수 있었다. 우리의 해방적
네트워킹을 통해서 세상이 쪼개어 열린(split open)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