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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신 노동조합 96년 투쟁 평가서

현장에서 미래를  제13호
한국통신 투쟁 평가팀

현 ◦ 장 ◦ 통 ◦ 신

한국통신 노동조합 96년 투쟁 평가서


투쟁 평가팀


Ⅰ. 평가 총괄

96년 투쟁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투쟁의 한 단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96년 투쟁 과정 전반을 조망해야만 한다.
95년 투쟁이 눈물로 정리된 이후 간부들이든 조합원들이든 패배감과 실망감이 매우 깊어져 있어 조직력은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95년 투쟁 이전에 조합원들에게 지도부가 가졌던 권위와 신뢰는 많이 약화되었고 지도부의 투쟁노선에 대한 비판세력이 공공연히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악조건을 안고서 96년 투쟁이 준비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도부조차도 올해 투쟁의 승리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합이 존재하는 한 항상 총파업투쟁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 조합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기에 조합은 다시 한번 결의를 모으고 96년 투쟁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연극공연으로 시작하여 3.23 집회, 서명운동, 6.2 집회, 3.4 투쟁으로 이어지는 투쟁의 과정은 이처럼 어려운 상태에 있던 조직력이 한단계 한단계 회복되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95년도 4.2 집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조합원들이 집결하여 총파업을 결의한 6.19 총회는 조직력이 95년 수준으로 거의 회복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조직력의 회복에 기초하여 교섭에서 일정정도의 성과를 따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기초는 물론 조합원들의 분노와 열망이다.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철주야 뛰었던 간부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투쟁에 대한 높은 결의가 없었다면 조합원들의 열망과 분노를 투쟁과 조직으로 엮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올 투쟁이 성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한계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파업투쟁의 승리 가능성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충분히 높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즉 95년 투쟁과정에서 생긴 패배감을 극복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찬반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가 나온 배경에는 성과에 대한 나름의 긍정도 있지만 조합원들의 극복되지 못한 패배감 또한 작용하였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한계는 하반기 투쟁과 97년 투쟁의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평가에 들어가 보자.


Ⅱ. 경과

1. 연극순회 공연을 통한 조직 재정비

95년 임투가 끝나고 8월 말경부터 구속 간부들이 속속 석방되어 조직에 복귀하면서 조직 정비에 들어갔다. 중앙본부 개편이 이루어지고 유덕상 위원장의 복귀 후 신인사제도 저지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10월 21일 용산역 광장에서 공노대와 함께 한 집회는 조직의 침체를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따라서 지방본부 위원장단 단식 텐트농성이라는 선도투적 성격의 투쟁을 배치해 지부장들의 상경투쟁을 이끌어내면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고 연말 임금제도 개선투쟁까지 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조직의 힘은 높아지지 않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조합간부와 조합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 다시 한번 투쟁의 전망을 세우는 일이 시급했다. 중앙에서는 95년 투쟁을 소재로 연극을 준비하여 12월 지리산 전국지부장 수련회를 통해 시연을 하였다. 지부장수련회는 지부장들에게 95년 임투의 아픔을 일부나마 쓸어내려주고 힘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는 성과가 있었다. 이후 추진한 연극 순회공연은 조직력을 회복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전국 33개 지역에서 상연한 연극 공연은 애초의 “관람을 조직할 수 있겠냐”는 우려를 말끔이 씻어주면서 10,000여 명 이상의 조합원이 관람하였고 그 공연을 통해 95년 투쟁과정에서의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을 규탄하고 대중들의 분노와 결의를 다시 모아낼 수 있었다.

2. 임금 요구안 확정과 96년 투쟁 기조 설정

96년 1월 중앙본부 내에 임금요구안과 투쟁기조를 작성하기 위한 소위가 구성되었다. 소위는 95년 임투준비가 너무 늦었다는 반성 아래 조기에 안을 확정하여 논의할 필요에 따라 1월에 구성되었다. 소위는 임금요구안을 공노대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충실히 작성하였고 분할 투쟁과 임투를 축으로 대강의 투쟁기조를 완성하였다.

가. 임금요구안 확정

공노대의 인상요구안인 12.2% + α를 한통 조건에 맞게 일부 수정하여 12.8%를 기본급인상 요구안으로 하였고 기타 제도개선과 복지후생 요구안을 작성하였다. 이 중 초과근무수당 기본급화는 제도개선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으로 94년부터 3년째 요구하고 있는 사항이었으며 빼놓을 수 없는 요구였다. 요구안 작성 과정에서 전 조합원에게 설문을 통하여 대체적인 요구안의 수준을 결정하였고, 이를 공노대의 임금인상 요구안과 결합시키면서 임투소위에서 초안을 마련하여 중앙본부수련회, 전국 상집회의(2.22), 전국 대의원대회(2.27)를 거치면서 확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설문의 수준을 넘어 대중적인 참여가 더욱 강화되었어야 한다는 점과 전국 상집회의와 전국 대의원대회의 간격이 너무 짧아서 공유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 반성으로 남는다. 이러한 점은 이후 임투에 들어가면서 요구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낮은 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해고자복직이 요구안에는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요구로 조기에 정착시키는 노력이 부족하여 마지막 교섭에서 혼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 96년 투쟁기조 설정

96년 투쟁기조는 95년 투쟁의 평가 위에서 수립되었다. 임투소위는 95년 투쟁은 낮은 수준의 투쟁이 장기적으로 배치되면서 대중이 지쳐갔다는 점과 결정적인 순간을 투쟁으로 돌파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유연한 대중투쟁 전술과 임투와 분할투쟁의 결합, 공공부문 노조들과의 연대투쟁, 그리고 타결이 안될 시 분명한 쟁의돌입이라는 투쟁기조를 잡았다.
이 기조에 입각하여 낮은 수위의 투쟁에서 높은 수위의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 마지막에 총력투쟁으로 나간다는 것을 기본 안으로 잡고, 그 과정에서 조직동원이 필요한 집회는 회수를 최대한 줄여서 효과있는 집회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각 집회의 성격은 연대투쟁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공공부문 공동집회로 한다는 방침을 잡았다. 이 기조 역시 요구안을 확정해 나가는 절차를 거치면서 논의하여 나갔다.

다. 투쟁기조 설정과정에서의 조직 내부 논쟁

서두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직 내 95년 투쟁으로 인한 패배감과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은 96년 투쟁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장애물로 남아 있었다. ‘투쟁을 하면 더 나오느냐, 싸우면 승리할 수 있느냐, 조합원이 따라주겠느냐, 이제 조합원은 투쟁하기를 싫어해서 투쟁은 안된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조직 희생만 더 크다, 조합간부들도 투쟁을 동의하지 않는데 될 일이냐, 연대투쟁으로 승리하자고 하지만 우리만 다치고 남좋은 일 시켜준다…’ 는 등등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뛰어 넘어야 할 비난들이 무성했다.
이를 대체로 정리해보면 1) 투쟁으로 정부를 압박해도 정부가 제시한 안 이상 나오는 것은 없고 그럴 경우 투쟁의 성과는 더욱 적어질 수 있으니 교섭으로 몇가지 얻어내면서 조기 타결하자는 의견 2) 투쟁은 해야 하지만 조합원들은 95년의 기억 때문에 관심이 없어서 대중투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여기에는 대중들이 싸우지 말자고 하기에 싸우지 말자는 추수적인 의견도 포함됨) 3) 연대투쟁은 대중들도 동의하지 않고 타 노조가 우리를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의 잇속만 챙길 것이고 또한 연대투쟁이 정부의 강공만 불러올 것이라는 점에서 연대투쟁을 하지 말자는 의견 등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의견이 개진되면서도 투쟁기조를 잡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투쟁의 정당성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던 점과 95년에 하지 못한 투쟁을 96년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집행부의 책임감, 그리고 최대한 교섭과 투쟁을 병행해 나가도 안되었을 경우 쟁의를 할 수밖에 없지 않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제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세에 있어서도 95년 당시 정부의 한국통신 노동자 탄압은 정부에게 커다른 오점임과 동시에 다시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는 점과 이는 바로 4.11총선과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고 95년과 같이 전 지도부가 수배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도 없다는 점, 그리고 95년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주변에 수많은 아군을 확보했다는 점 등이 투쟁 불가론을 설득할 수 있는 근거로 존재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분할 투쟁과의 결합과 관련한 것으로 이는 투쟁이 마무리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일이다. 95년 투쟁과 마찬가지로 임투와 분할을 시기적으로 내용적으로 결합하여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대중의 관심과 조직의 힘을 어디로 집중해야 하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 항상 어려움을 준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었다. 특히 3월 6일 PCS 자회사 설립 방침이 발표된 이후에는 그러한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었다. 대중들로부터는 단기적으로 PCS 투쟁에 대한 요구가 올라왔다. 그럼에도 둘 간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PCS 문제는 사실상 4월 중순이 고비다. 이 때를 넘기면 장기적인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PCS 투쟁에 전념하기로 한다면 4월 중순 파업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파업으로 해결이 안되었을 시 임투도 한번 못해보고 조직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 점은 투쟁을 장기적으로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PCS 투쟁 중심론에는 임금 조기타결이라는 전제가 따라 다녔다. 가령 임금을 빨리 마무리 해야 (또는 임금은 필요없으니) PCS 투쟁을 힘있게 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노동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조합원들의 요구가 임금을 떠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견해이다. 그렇기에 임금이 교섭 몇 차례의 성과로 조기 마무리될 경우 그 이후 조직의 동력은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지극히 상식이다. 따라서 임금 조기타결론은 PCS 투쟁강화론이 아니라 사실상 투쟁불가론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3) 일부에서는 투쟁기조가 너무 혼란스러우니 임투를 하려면 아예 PCS는 포기해 버리고 임금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조합원 요구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조직의 동력이 급속히 무너질 것이 뻔하여 나머지 투쟁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4) 결국 두가지 투쟁 중 어느 하나가 마무리되면 그 마무리 수준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후속 투쟁이 강력하게 일어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렇게 몇가지 문제들을 조직 안에서 논의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공식적인 회의를 통해 진행시켜 나갔다.

3. 분할 보도 항의투쟁

2월 초순 언론을 통한 한국통신 분할방침 보도가 있은 후 조합원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집행부에서는 2월 5일 지부장회의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사측은 장소와 전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흥사단으로 장소를 확보하고 정통부와 신한국당사 항의집회 신고를 하고 투쟁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당황한 사측은 장소와 전임을 인정하면서 사장의 출석 답변까지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2월 5일 거의 전 지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시작되었고 상황에 대한 교육 후 사장이 나와서 질의응답을 하게 되어 이 자리에서 분할, 분사의 문제는 조합과 단체교섭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게 되었다. 이 약속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으로 당일 회의가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조직이 침체된 상태에서 지부장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회의였다.

4. PCS 항의투쟁 (3.8 정통부 항의투쟁, 3.14 신한국당 항의시위)

3월 6일 정통부의 PCS 사업자 선정방식 발표 후 다시 한번 조직은 혼란과 분노가 중첩된 상태로 되었다. 3월 8일 수도권 지부장과 상집은 정통부 항의 방문에 나섰다. 장관 면담이 성사되지 않자 70여 명의 방문자들은 1층 로비에 앉아 연좌를 하게 되었고 정통부 차관면담이 성사된 후 건물 후정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약속을 어기고 후정에 있던 방문자 68명을 연행하여 하루동안 경찰서에 유치시켰다. 이 투쟁은 조합 간부들의 선도투적 투쟁으로서 96년 투쟁의 포문을 여는 투쟁이었다. 사안이 대중적인 분노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기에 투쟁에 참여한 조합 간부들은 결의에 넘쳐 있었고 하루 유치장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았다. 경찰의 연행 소식을 접한 조합원들은 분노했다. 분노 속에는 조합에 대한 기대와 신뢰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조직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3월 14일 전국 지부장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도 사측은 장소와 전임을 인정치 않으려고 했다. 회의 전일 확인된 것이지만 당일 오후 김영삼대통령이 본사에 3개국 영상회의를 위해 방문하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사측은 곤경에 빠져 장소를 대전 또는 연개원 쪽으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지만 결국 15층 회의실을 확보하게 되었고 대통령 방문과 지부장회의가 약간의 간격을 가지고 이루어지면서 높은 긴장이 걸렸다. 회의 후 후정에서 경호원들이 진을 친 상태에서 가진 약식 집회는 긴장을 더욱 높여주었다. 대오는 여의도 신한국당사로 이동하여 항의집회를 가진 후 마무리 해산을 했다. 당초 이 회의는 PCS 발표 후 조직의 혼선을 정리하고 향후 계획을 발표하여 계획성있게 하기위해 준비된 회의였다.
이 두 투쟁은 위기감과 혼선에 빠진 조직을 정비하고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었으며 지부장들의 결의를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5. 공공부문 해고자 투쟁

96년 투쟁의 전면에 해고자복직을 배치하기로 하였으나 대중적으로 요구가 올라오지 않았고 96투쟁의 전체 분위기도 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공공부문 해고자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터뜨리기 위한 투쟁이 기획되었다. 한국통신,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전국의보, 병원노련의 5개 노조 해고자들은 철도청 앞 집회를 시작으로 1주일 간의 해고자 투쟁을 시작했다. 투쟁본부는 명동성당 농성장에 꾸렸고, 주간에는 집회와 항의방문, 가두선전에 힘을 쏟았고 야간에는 마무리집회, 회의, 농성을 하였다. 1주일 간의 투쟁을 마무리하려는 3월 15일 정통부 앞 집회에서 항의방문을 막는 경찰과 몸싸움 과정에서 기습적인 경찰의 공격으로 28명이 연행되면서 투쟁의 양상은 변해갔다. 이틀만에 대부분이 석방되었으나 3명이 구속되고 다수가 3∼5일간 구류를 받는 상황에서 농성은 1주일간 연장되었다. 2주일의 투쟁으로 해고자투쟁은 3명의 구속자를 남겨 놓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그 파급력은 큰 것이었다. 해고자문제에 대한 투쟁의 중요성을 조직 내에 공유시키고 참가 조직간에 연대의 분위기를 확산시켜 해고자문제를 해결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6. 3.23 공노대 임투전진대회

3월 23일 장충단공원에서 공노대 임투전진대회가 열렸다. 1월경 공노대 운영위원회에서는 두가지의 실천사업이 결정되었는데 그것은 3.23 집회와 6.2 총회였다. 3.23 집회는 공노대의 96임투를 선언하는 자리였다. 당초 한국통신 조직 내에는 3.23 대회와 관련하여 두가지 우려가 있었다. 조합원들의 무력감 때문에 조직동원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과 연대집회에서 지나치게 우리 조직만이 다수를 차지하면 이후 연대투쟁에 대한 기대가 감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첫번째 문제는 조직의 침체를 지나치게 우려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인데 하여간 집행부는 조심스럽게 조직동원을 준비하였고 수도권의 열성조합원 지역은 지부장, 집행위원이라는 범위를 설정하고 5,000명을 목표로 조직에 들어갔다. 결과는 여러가지 이유로 조직이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국통신 조합원들은 5,000여 명이 모였고 그외 조직까지 합하면 10,000명을 상회하는 아주 성공적인 집회였다. 오랜만에 조합원들은 열기있게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 집회의 백미는 행진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경찰병력과 신경전이 있었으나 조합원들은 전투적으로 거리에 진출하였다. 선두에 선 한국통신 조합원들은 명동성당까지 행진하면서 여기 저기서 경찰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95년 4.2 전진대회와 비교할 수도 없는 대중의 분노와 전투성이었다. 3.23 집회는 집행부에게 조직력의 우려를 씻어주면서 대중투쟁에 자신감을 갖게 하였고 대중들도 이 집회를 계기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공공부문 타사업장에 대한 기대와 연대투쟁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7. 지부정기대회

4월 15일부터 4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지부대회가 열렸다. 당초 지부대회는 96년 투쟁에 대해 조합원에게 교육을 통해 투쟁을 대중화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대회 격려사와 교안이 보내지고 많은 지부에 강사를 파견하였다. 3월 19일부터 진행된 교섭경과에 대한 교육도 함께 하였다. 대강의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요구안, 교섭과정과 진전내용, 임투일정, PCS 투쟁계획, 서명운동, 투쟁의 전망… 이러한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보름간의 대회를 마친 후 조직은 많이 정비된 듯이 보였다. 지부대회 기간의 성과는 임투를 홍보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는 데에 있다.

8. 비대위 구성과 투쟁체제 돌입

4월 27일 대전연수원 대강당에서 지부장, 분회장회의가 열렸다. 서명운동 계획을 발표하고 임투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위원장을 비대위원장으로 하면서 각 팀체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비대위 구성은 상황전개에 비해 조직의 긴장도가 떨어진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고 더욱 밀도있게 임투진행을 해야 하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준비되었다. 이날 투쟁명령 1호가 발표되어 본격적인 전술운용에 들어갔다. 내용은 지부장 이상 투쟁복 착용과 조직의 비상연락망을 구축하고 지부장 이상 조직의 대표는 2선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투쟁을 배치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일단 분위기를 조성하는 투쟁명령이 필요하고 지부장 이상 간부들의 긴장을 높이고 실제로 조직을 정비하는 명령이 필요한 것이었다. 투쟁복 입기를 제외하고는 명령이 신속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비상연락망의 경우 많은 지부에서 준비하면서 10인소조의 재구성이 이루어 지기도 하였다.

9. 5.18 공노대 간부 결의대회와 버튼패용

6.2 대회를 앞두고 5월 18일 대전 상지대학교 강당에서 공노대 소속 간부 결의대회가 열렸다. 지부장 이상이 참석하였는데 문화행사가 주로 배치되는 바람에 짜임새있는 결의대회로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었다. 한국통신 노조는 대회 후 동일 장소에서 투쟁명령 2호를 발동하면서 자체 교육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6.2 대회와 관련해서 사측의 탄압을 예상 발표하기도 했으며 10인 소조 구성, 비상연락망 구성 등 96년 투쟁을 위한 준비를 요청했다. 투쟁명령 2호는 투쟁버튼 착용이 주요한 것이었다. 투쟁버튼은 95년투쟁을 하면서 리본투쟁이 지루했던 점을 감안하여 새롭게 고안했던 것으로서 착용율이 높았고 사측의 탄압도 비켜갈 수 있었다.

10. 전국대의원대회와 쟁의발생 결의

5월 23일 지리산 수련관에서 정기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다. 쟁의발생결의 등 임투와 관련된 내용이 주종을 이루었다. 대의원대회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뜨겁게 진행되었다. 쟁발결의에 있어서는 95년 투쟁을 반성하면서 투쟁결의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대의원이 있는가 하면 대의원 모두는 쟁발결의가 됐을 때 책임지고 투쟁의 전선에 서야 한다는 등 투쟁적 분위기가 높았다. 본 대회에서 쟁발결의를 94%로 통과시켰고 투쟁명령 방기자 및 반투쟁 간부에 대한 처벌 조항, 쟁의기금 사용에 관한 건 등을 의결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또한 대의원대회 첫날 밤에 열린 지방본부 위원장 및 조직쟁의팀 합동회의에서는 3.4 투쟁에 대한 준비에 관해서 논의하였다. 6.2 대회와 3.4 투쟁 준비과정에서 지방본부마다 준비정도에 대한 상황을 공유했고 특히 3.4 투쟁에 대한 중간 이견이 있어서 이에 대한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하여 마무리하였다.

11. 6.2 공공부문 조합원 총회

6월 2일 보라매공원에서 개최된 6.2 조합원 총회는 96년 투쟁의 분수령이었다. 전 조직이 총력을 기울였다. 이미 이 시기 이전에 지하철노조는 교섭 개시와 함께 조합원총회를 열어 조직이 파업을 가능케 하는 정도로 올라와 있음을 확인하였다. 중앙본부는 계속 조직을 점검한 결과 목표한 동원은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총회를 며칠 남겨두고 사측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기관장회의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방해할 것이 지시되었고 기관장들은 1대1 면담에 나서 가가호호 방문을 하였으며 사장의 서신이 발송되는 등 다양한 방해공작이 있었다. 방해공작은 대회 전일에 이르러서 극에 달했는데 새벽까지 사측간부의 전화가 걸려오는 등 조합을 긴장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몇몇 지부에서는 실제로 출발시 상당수 조합원이 출발하지 못하는 등 조직동원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그러나 보라매공원은 계속 모여드는 조합원들로 인산을 이루었다. 대회장을 거의 메우다시피 한 조합원들은 서로 무너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기세가 높아질대로 높아져 있었다. 행진을 하고 여의도에서 마무리 집회를 열 때까지 이탈하는 조합원은 거의 없었다. 1년 동안 어디에 보관을 하였는지 푸른색 투쟁복을 모두 입고 있었다.
6.2 총회는 조합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노사간 힘대결에서 노측의 우위를 분명하게 해주면서 역관계를 역전시켜 놓았다. 1만명 이내에서 모일 것이라고 장담하던 사측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보에 의하면 6.2 이후 사측은 위원장의 대표권 시비를 더욱 강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출입을 통제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사측은 6.2 총회를 무력화하여 조합의 기를 빼앗고 이후 강공으로 밀어부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사측의 계획은 조합원들의 단결력으로 시작도 못하고 말았다. 6.2 총회는 4.2 전진대회와 함께 한국통신 노동운동에 커다란 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2. 3.4 투쟁

6월 3일, 4일 이틀동안 1,000여 명의 조합간부, 열성조합원들은 서울 시내를 휘저으면서 전투적인 투쟁을 해나갔다. 이 투쟁은 새로운 투쟁형태였는데 2일 총회를 마치고 잔류한 투쟁인원은 3개 대학(동국대, 고려대, 한양대)으로 분산하여 숙박하고 3일부터 투쟁에 나섰다. 애초 6.2 총회 이후 전원 농성에 돌입하여 승부를 걸자는 의견에서 발전한 안이었는데 모두가 참여하는 수준의 투쟁에서 단위를 좁혀 열성조합원 수준, 간부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강도높은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투쟁의 준비는 조직쟁의팀에서 해나갔는데 투쟁의 방법, 장소 등은 철저하게 보안에 붙여져 참여자들도 긴장감을 갖고 임했다. 그러나 준비가 활발하게 잘 된것은 아니다. 일부 지방본부에서는 결의를 모으는 작업을 충실히 해내 힘있게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지부장들만이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지방본부도 다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목표였던 1,500명에 도달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투쟁은 재경원, 정통부, 경총 등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중간 이동은 보안을 지키면서 지하철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경찰도 향방을 추적하지 못하고 혼선을 빚기도 하였다.
3.4 투쟁은 96년 투쟁의 성패를 걸고 벌인 투쟁이었으며 실험적인 투쟁이었다. 96년 투쟁에서 총력전을 어떻게 펼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도 점검하였으며 지부의 중심간부들의 결의를 높여 하부 투쟁력을 높인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 학생들과의 긴밀한 협의속에 숙식을 해결하였으며 3일 밤에는 참석자 전원이 모인 가운데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신나는 공연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부적 목표는 거의 달성하여 6.2 총회의 힘과 더불어 지부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6.2와 3.4 투쟁을 계기로 정부와 사측은 조합의 힘을 재평가하면서 새로운 대응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3. 공공부문 공동 쟁의발생신고와 파업찬반투표

6월 4일 공공부문 공동 쟁발신고를 내고 6월 12∼13일 양일간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한 후 공동기자회견을 가짐으로써 96년 투쟁은 다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파업찬반투표를 전후하여 조합 내 반조직자들과 사측이 아주 열심히 유인물을 내면서 역선동하였으나 조합원들에게 영향이 미치지는 못했다.

14. 6.15 투쟁

6월 15일 전국적인 범대위집회와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3.4 투쟁을 확대하고 중앙집중에서 지역분산투쟁으로 전환한 것이며 6.19 파업을 위한 집결투쟁의 연습을 겸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집회에 대한 조직부족으로 참여인원은 예상을 밑돌았다. 6.15 투쟁은 정세를 볼 때 파업전 정부에 마지막 압력을 줄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투쟁은 파업총회를 위해서 불가피한 투쟁이었다. 중앙본부는 각 지방본부에 파견나가 투쟁을 직접 지도하였으며 비상연락망을 전달하였고 6.19 투쟁까지 세부적으로 점검하고 왔다. 또한 이 자리를 빌어서 지도부는 대중들에게 파업투쟁시 지침과 투쟁의 전망까지 포함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5. 6.19 파업결의를 위한 비상 총회

6.15를 넘어 마침내 6.19 총회가 다가왔다. 6.15 투쟁때 하던 우려와는 달리 조직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6.15를 전후한 언론의 타결전망과 18일 잡힌 교섭의 영향이 조합원들에게는 승리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각 조직은 6.19 진입전술을 잡는데 여념이 없었다. 주로 학교로 진입하기로 결정을 하면서 광범위한 노학연대가 준비되었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7시를 전후해서 명동성당에는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농성에 돌입하였고 1,000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여들었다. 몇시간 후 지역상황이 전달되었다. 거의 전 지역이 빠짐없이 투쟁을 가열차게 하고 있었다. 25,0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전국의 각 대학에서 총회를 하고 농성에 들어가고 있었다. 집행부는 당일까지 진입투쟁에 신경을 쓰느라고 농성투쟁 준비가 부족하였다. 그런 이유로 식사, 잠자리 등의 준비가 되지 않아 새벽 1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등 혼선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몇가지 실무적인 실수를 덮어버릴 만큼 조직은 기세가 등등했다.
12시가 넘어가면서 조직운영에 어려움이 닥쳐왔다. 종합상황실은 명동농성장에 차려졌는데 지역과의 신속한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상황전달이 적절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새벽 타결시 전 조직이 단일한 반응을 나타내지 못하고 힘있게 정리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20일 새벽, 타결이 될 때까지의 상황을 대략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6월 15일경 언론은 공공사업장의 막판 타결가능성을 정부쪽 정보에 근거해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고자복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해고자복직의 카드를 정부가 내밀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다. 중앙본부는 사측에 교섭을 위한 마지막 시한을 18일 아침 10시로 제시했는데 사측은 오전 9시에 교섭재개 의사를 밝혀왔다. 18일 오후 시작된 교섭은 위원장의 참석으로 대표권시비는 이미 물건너간 상태이고 이러한 모습은 사측과 정부의 타결의지의 다른 표현 방식이었다. 약간 진전을 보이는 듯 했던 교섭은 다시 경색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임금안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었고 해고자복직도 사장이 알아서 하겠다는 등 터무니 없는 주장이 나와서 타결과 파업의 가능성은 반반인 상태였다.
중앙본부는 19일 지방본부 총회를 정상대로 소집하기로 하고 19일 17시까지 타결안이 안 나올 경우 침탈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실무교섭팀을 제외해 놓고 중앙본부를 빠져나와 조합원이 모이는 시간에 명동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명동과 전국적인 농성투쟁은 시작되었다. 그 시간에도 실무교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려스러웠던 것은 다시 언론이 오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 방송에서는 한통이 타결되었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농성장의 조합원들은 혼란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교섭에 진전이 없자 지도부는 20일 아침 7시에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발표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는 7시를 교섭의 마지노선으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새벽 3시 쯤부터 교섭에 진전이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 아쉬운 점은 있지만 타결이 가능한 안이 나왔다. 이 시간에 서울지하철노조는 이미 축조심의에 들어가 타결을 눈 앞에 둔 순간이었다. 명동에서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지방본부 농성장과 통화를 통해 의견을 접근한 지도부는 급히 중앙본부로 들어갔다. 지도부가 서두른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파업과 타결의 가운데서 혼란을 겪고 있는 조합원들을 어정쩡한 가운데 방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과 그렇기 때문에 빨리 교섭을 마무리하고 결과를 정확히 조합원들에게 전달하면서 투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계획대로 되지는 못했다. 중앙본부에 들어온 후 교섭의 몇가지 점(승진연한단축 4급 포함 등)이 다른 이유로 교섭은 쉽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결국 7시 30분 농성을 해산하는 순간까지 교섭의 결과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6.19 투쟁은 그다지 힘있게 정리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6.19 투쟁은 실무적인 과제 몇가지를 남겨 놓았지만 대중들의 결의를 알려주기에 충분한 투쟁이었다.


Ⅲ. 성과와 한계

1. 해고자복직의 물꼬를 텃다

해고자복직은 당초 해결이 불가능한 요구로 평가가 되었다. 그러기에 공공 공동투쟁의 파업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던 것이다. 단 몇명이라도 복직을 시키겠다는 공투의 목표가 발전하여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현실화한 것이다. 해고자복직은 96년 투쟁의 성과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이다.
그러나 조기에 해고자복직을 조직의 요구로 확고하게 하지 못한 점과 해고자복직 투쟁에 무게를 충분히 싣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 한계로 인해 막바지 교섭에서 해고자 문제를 타결하는데 복직자수가 적고 복직자 명단도 타결내용에서 빠지는 등의 아쉬움을 남겼다.

2. 임금가이드라인을 실질적으로 분쇄했다

기본급을 중심으로 인상하면서 가이드라인을 투쟁으로 돌파하여 정부의 공기업에 대한 임금통제정책을 무력화시킴과 함께 기본급을 중심으로 한 임금구조 개선을 이루어내 향후 임금인상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초과근무수당의 기본급화가 적게 이루어졌던 점과 이와 관련한 조합의 마지노선에 계속 혼선이 온 것, 그리고 합의사항이 조기에 이행되지 않은 점은 교섭과 관련한 한계였다.

3. 연대투쟁을 통해 본격적인 연대활동이 가능해졌다

96년 투쟁을 하기 전까지 조합원들은 연대투쟁에 대한 피해의식이 컸다. 이는 민주노총 가입이나 공공부문과의 공동집회 등을 결의하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왔다. 96년 투쟁의 성과는 대중적으로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넘어섰다는 데에 있다. 범대위 활동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노동, 시민, 학생, 농민 등 광범위한 연대활동을 하였고 공공부문 공동투쟁을 통하여 긴장감 속에 공공노동자들과 동지적 애정을 느꼈다. 이러한 대중적 경험은 향후 한국통신 노조의 민주적이고 전투적인 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공공부문 공투에 있어서 요구의 통일성이 미흡했던 점과 막바지 투쟁과 타결전술에 대한 공통의 고민이 부족했던 점은 한계였다. 이러한 한계가 공투의 성과를 극대화하는데 장애로 되었다.

4. 새로운 형태의 투쟁전술을 개발하고 실천했다

95년 투쟁까지 농성투쟁과 투쟁복 입기, 대규모집회 등으로 모두가 할 수 있는 투쟁만을 고려하면서 조직의 힘을 오히려 소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96년 투쟁에서는 결의 정도에 따라 다른 수위의 투쟁을 배치하였다. 3.4 투쟁과 6.15 투쟁은 그 전형적인 것이다. 투쟁실천에 있어서도 보안과 공개되는 지점을 분명히 하여 이에 걸맞는 방침들을 내왔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산개된 사업장 특성에 맞추어 지방본부, 지부별로 다양하고 창조적인 투쟁전술을 개발하고 실천해내지 못한 것은 한계였다. 대중들이 주체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투쟁에 동참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한계로부터 오는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5. 조직을 완전히 복구했다

96 공동투쟁에 있어서 우려했던 점은 한국통신이 1년만에, 서울지하철은 2년만에 다시 투쟁을 할 만큼 조직력을 복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내․외부에서 모두 우려스럽게 지켜본 사항이었으나 이번 투쟁을 통하여 두 조직의 힘이 다시 복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의높은 선진활동가층을 충분히 두텁게 하지 못한 점과 대중적인 투쟁의 결의가 95년 투쟁 당시보다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 점은 한계였다. 이러한 한계가 96년 투쟁에서 전술구사의 폭을 좁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Ⅳ. 향후 과제

1. 선진 활동가층을 두텁게 해야 한다

96 투쟁 뿐 아니라 94년 현 집행부 출범 이래 각종 투쟁과 활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종 집회에 참가하는 조합원 수는 대단히 많으나 집회의 수준을 뛰어넘는 투쟁과 활동에 참가하는 조합원들은 역으로 전체 조직의 규모로 볼 때 대단히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핵심 활동가층이 두텁지 못한 상황은 조직의 재생산을 어렵게 하고 투쟁전술 선택의 폭을 협애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선진활동가층을 두텁게 하는 것은 조직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과제이므로 집중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일상활동이 보다 풍부하고 폭넓게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지만 조직의 상설기구를 통한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각종 위원회제도를 활용하여 제반 활동에 자질이 있는 동지들의 참가를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이들 동지들의 자질과 결의를 높여내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면 조직 각 단위 별로 조직위원회, 편집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을 설치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2. 연대활동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번 투쟁의 성과가 연대활동에 대한 대중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극복하게 한 것이라면 이 투쟁의 성과를 조직화 해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세가지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공공부문들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지금의 대표자회의의 수준보다 통일성과 집행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총연합의 형태를 모색하고 그를 가능케 하기 위한 활동과 투쟁을 배치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보여진다. 둘째는 통신업종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안으로서 통신업종 노조 사이의 대표자회의 혹은 협의회 정도를 결성하기 위한 조직간 논의를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셋째는 제반 민주노조 및 각계 각층과의 연대 강화의 문제로써 민주노총 가입을 적극 추진하고 산재 문제, 노개투 문제, 통신주권수호 투쟁 문제를 매개로 보다 광범위한 연대활동과 투쟁을 적극 추동하고 참가하는 것이다.

3. 특별 단협 쟁취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95년도 단협투쟁이 직권중재로 마감됨에 의해 민주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단협은 전체적으로 보면 개선되기보다는 개악된 측면이 많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작년 직권중재로 인해 개악된 부분은 최소한 원상회복시켜야 하고 핵심적인 개선사항은 또한 반드시 쟁취하여야 하는 것이 현 집행부의 당연한 의무이다. 또한 하반기에 단협투쟁이 배치되는 것을 뒷받침하는 상황은 직권중재에서의 승소이다. 이번 단협투쟁에서 제기할 핵심적 사안은 아래와 같다.

첫째, 조합원 범위, 전임자수, 지부장 및 분회장의 조합활동 인정 등의 문제
둘째, 자회사 설립, 민영화 등에 있어서 조합 또는 조합원의 동의 문제
세째, VDT 증후군 등 각종 산업재해에 대한 예방 및 보상 문제
넷째, 96 임투 후에 후속처리와 관련한 노조 탄압 문제

4. 노개투를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하반기 노동운동의 최대 이슈는 노동법 개정이다. 정부가 노동법을 개정하려는 의지와 일정이 있는 한 이를 둘러싸고 노․자간, 노․정간 중대한 힘겨루기가 하반기에 전개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피하리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 노조도 전체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며 특히 공공부문에 가해지는 각종 제약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각종 노개투 일정에 적극 참가하되 공공부문 나름의 요구를 부각시키기 위한 별도의 노력 또한 요구된다고 보여진다. 이를 위한 대체적인 투쟁일정을 보면 8, 9월에는 특별단협 쟁취 투쟁으로 열려지는 공간 속에서 노개투 문제를 결합하여 선전․선동해 내고 10월 중으로는 공공부문 독자의 요구를 부각시키는 투쟁을 배치해 낸 다음, 11월에 민주노총과 함께 총력투쟁으로 나아간다는 정도로 대체적인 일정을 잡는 것이 가능하리라 보여진다.


◉ 첨부자료

파업강행여부와 관련한 현재의 쟁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아래의 글은 투쟁정리 이후에 우리 조직 내부에서 있었던 논쟁 및 외부 단체에서의 비판을 참조하여 그에 대한 지도부 나름의 입장을 정리한 글이다. 글이 다소간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이 있어 이를 공개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으나 이런 정도 수준의 논쟁은 간부들이라면 이제 누구나 소화해내고 고민해야 할 단계라는 판단을 하고 공개하기로 하였다. 동지들이 투쟁에 대한 평가를 하고 향후 과제를 세우는데 참조해 주기를 바란다.



잠정 합의를 하고 파업을 유보한 이후 파업을 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여러 간부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지도부가 애초에 파업의지가 없지 않았느냐는 불신과 결합되어 더욱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런데 냉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파업을 하는 것이 옳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지도부가 파업의지가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지도부가 파업을 강행하지 않은 것은 결의의 부족이 주된 원인일 수도 있고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지도부 나름의 판단이 주된 원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파업을 하는 것이 옳았는가 아닌가 하는 쟁점부터 정리를 해보고 나서 파업의지에 대한 문제도 다뤄보기로 하자.


ꁾ 실리주의를 뿌리뽑고 전투적인 투쟁기풍을 확립해야 한다는 근거에 대하여

파업을 했어야 했다는 동지들이 내세우는 근거의 첫번째는 이번에 파업을 감행함으로써 조합 내부의 고질적인 실리주의적 경향을 뿌리뽑고 전투적인 투쟁기풍을 확고히 뿌리내려야 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파업투쟁을 감행할 경우 대중들 사이에 투쟁의 경험이 축적되어 조직 내부에 전투적인 기풍이 강화될 수 있는 토대가 확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파업투쟁 이후에 투쟁적인 노선이 강화되느냐 아니면 실리주의 노선이 강화되느냐의 문제는 투쟁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올바르게 평가하고 조직할 조직력이 여하히 담보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지, 파업투쟁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파업투쟁을 감행함으로 해서 장기적으로 우리의 조직력이 과연 강화되는 방향으로 갔을 것인가 아니면 약화되는 방향으로 갔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파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누구도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명백한 것은 조직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파업투쟁에 대한 전체 조직의 결의가 대단히 높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의가 높지 못한 상황에서 투쟁이 감행되고 나면 투쟁이 승리로 끝났을 경우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투쟁이 패배로 끝났을 경우에 조직은 의견 차이로 심각히 분열되고 그만큼 조직력은 약화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일 조합원 총회에 모인 조합원 대중들의 수와 열기만 보고 조합원들의 결의가 대단히 높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19일 집회에 모인 조합원들의 수와 열기는 파업투쟁에 대한 높은 결의가 주된 측면일 수도 있고 막판교섭에 좀더 무게를 실으려는 충정이 주된 측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일 이전의 96년 투쟁의 전체 과정과 20일 이후의 조합원 대중들의 반응까지를 보다 총체적으로 보아야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있게 올해 조합원들의 파업투쟁에 대한 결의가 대단히 높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동지들은 많지 않으리라고 판단된다.

ꁾ 소생하는 운동에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근거에 대하여

두번째의 근거는 그동안 침체되어 왔던 노동운동 및 제반 민중운동이 다시 힘있게 진출하는 현 상황에서 공공부문 특히 한국통신 노조가 이에 대한 견인차 역할을 한다면 운동의 발전을 크게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운동 정황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처럼 객관적 정황을 근거로 해서 투쟁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 항상 가능하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운동이 침체되어 있으면 있는대로, 고양하고 있으면 있는대로, 87년 대투쟁과 같이 폭발하는 양상이면 그런 양상대로 제각기의 상황 속에서 우리 조합처럼 중심적인 사업장의 투쟁이 갖는 운동적인 의의는 항상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올해의 객관적인 상황이 자본과 노동 간에 중대한 힘겨루기를 하는 노동법개정 국면이라는 특수한 상황임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정권교체가 걸려 있는 내년도는 파업투쟁의 당위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며 오히려 올해에는 가능한 전력을 유지하여 내년도에 전체 노동계가 총력투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거 또한 충분히 성립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근거를 들어 올해 반드시 파업을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다지 강력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판단된다.

ꁾ PCS문제를 국민적으로 쟁점화시켜야 한다는 근거에 대하여

세번째로는 PCS 문제 등 현 정부의 정보통신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전국민적으로 쟁점화하기 위해서는 파업 이외의 수단으로는 어려웠으리라는 점이다. 물론 파업을 강행할 경우 이 부분을 쟁점화시키고 정권에 타격을 주는 성과를 얻었을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를 제기하는 동지들은 역으로 파업을 했을 경우 우리 조직이 또한 잃었을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도 같이 균형있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먼저 파업을 했을 시 우리 조합으로서는 임금이나 해고자문제에서 그 동안의 교섭과 투쟁 과정에서 얻은 성과가 직권중재로 인해 무효화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파업투쟁이 승리로 끝나 임금이나 해고자 문제에 대한 성과 외에 PCS 문제에 대한 성과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은 상당히 낮은 것이 사실이라는 점은 대다수 동지들이 동의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험도 지도부는 대중들의 결의가 높다면 그에 의지하여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중들의 결의수준이 그 정도로 올라와 있었는지는 많은 의문점이 생기는게 사실이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공공 5사의 그 동안의 연대투쟁과 활동의 성과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라는 점이다. 투쟁 막판에는 해고자 문제가 일정부분 수용되어 더이상 공공 5사 공동투쟁의 주초점이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에 당시에 파업을 감행할 경우에는 우리만의 단독파업이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그 상황에서 단독파업을 감행할 경우 우리 뿐이 아니고 투쟁에 참가한 5사의 조합원 대중들 간에 상호 불신과 오해가 확대될 것은 뻔하고 이는 향후 연대활동과 투쟁에 중대한 걸림돌로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파업투쟁이 강행되었을 시 하반기에 제기될 분리․분할․분제에 대해 조직의 힘있는 대응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파업투쟁 강행 이후 발생될 조직적인 피해와 손실이 복구되려면 최소한 1년의 시간은 요구되리라 판단하는 것은 지하철노조의 예를 보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분리․분할 문제가 제기된다면 조직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결국 분리․분할 문제는 사측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ꁾ 지도부의 결의에 대한 신뢰회복을 해야 한다는 근거에 대하여

네번째로는 지도부가 작년도에 파업을 감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을 씻기 위해서도 올해에는 파업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작년에 파업을 못한 상황에서 올해도 지도부가 파업을 강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투쟁 이후에 지도부의 결의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이 대중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여진다. 또한 향후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위해서도 지도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지도부에 대한 신뢰 문제는 (파업을 하느냐 안하느냐가) 영향을 미칠지언정 장기적으로는 지도부가 올바른 결정을 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는 것이지, 파업투쟁을 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년에 파업을 못한 것에 대해 지도부가 비판을 받는 것도 작년 상황 속에서는 적절한 시점에서 파업투쟁을 강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올바른 것이었기 때문이지, 지도부가 애초에 파업을 하기로 했는데 하지 않은 것이 주된 이유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일시적으로 욕을 먹고 불신을 받을지언정 지도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고 어렵더라도 이를 조합원들에게 이해시키는 책임 또한 져야 하는 것이다.

ꁾ 지도부의 파업의지에 대한 비판에 관하여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차치하고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지도부의 파업의지에 대한 불신 내지 의구심의 문제이다. 이 부분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95년 투쟁 마무리부터 시작해서 96년 투쟁의 전 과정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95년 투쟁 이후 조직 내에는 96년 투쟁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집회나 투쟁을 한번 조직하려 할 때마다 지도부는 조직 내의 숱한 반대와 이견을 설득해야만 이를 성사시킬 수 있었고 그처럼 어렵사리 조직한 집회나 투쟁도 목표치를 밑도는 것이 태반인 것이 조직의 현실이었다. 그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파업투쟁 일보직전까지 조직을 끌어올려온 과정에는 많은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있지만 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의지 없이는 또한 불가능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파업의지가 없었다면 모든 투쟁일정을 날짜까지 맟추어서 일관되게 진행해 온 5사 공투도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며 6월 19일 파업 결의를 위한 전 조합원 비상총회 또한 개최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지도부는 분명 지도부가 설정한 요구의 마지노선이 관철되지 않을 시 파업을 강행할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96년 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 온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지도부와 타결의 마지노선에 대해 의견을 달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한다고 해서 애초에 파업의지가 없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분명 비약인 것이다.

ꁾ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는 겸허한 자세가 요구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을 요약해서 정리한다면 올해 파업을 해야 할 일정한 객관적인 요인들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를 뒷받침할 전반적인 조직 내부의 결의수준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자를 강조하는 동지들은 파업을 했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고 후자를 강조하는 동지들은 파업은 무리였다는 입장에 서 있다. 일반적인 운동 원칙에서 보면 주체적인 조건을 우선해서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은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객관적인 여건을 더 중시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어떤 입장은 절대로 틀렸다는 극단론은 옳지 않다고 보여지며 서로 다른 입장에 서있는 동지들 간에 상대방이 주장하는 근거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고민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한/노/정/연

1996-07-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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