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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상반기 노동자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

현장에서 미래를  제13호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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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96년 상반기
노동자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


8월호 특집 ꡔ96년 상반기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ꡕ은 상반기 투쟁평가 차원에서 기획하였던 글이다. 원래 8월호 특집에서는 요구 투쟁을 중심으로 본 96년 투쟁 평가와 주요하게 제기되었던 이론․정책적 쟁점을 함께 다룰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들 주제에 대한 연구 성과가 대단히 미흡한 현재, 이 주제에 대한 정리는 일반적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였다.
ꡔ96년 상반기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ꡕ은 96년 들어 대중투쟁이 강화되어졌다는 문제의식 하에 이를 가능케 한 요인, 동력을 중심에 놓고 ‘대중투쟁 그 자체’를 검토한 글이다. 풍부한 논증이 아쉽지만 우리가 놓치거나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사안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96년 투쟁은 여러 각도의 분석이 가능한 투쟁이었다. 대중투쟁의 열기가 소진․누수되는 과정, 그것을 이제까지 보여왔던 모습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하는가? 대중 동력의 복원은 단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인가? 이를 위한 개입의 내용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보다 많은 문제의식이 제출되고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시기이다.

96년 상반기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

고 민 택 (편집위원)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봄이 왔다고 소리친다면 분명 성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 마리의 제비 속에서도 봄을 예견하고 다가올 봄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올해만큼 임투판이 당최 그려지지 않은 적도 없지 싶다. 민주노총 원년이라는 96년에 그 많은 상급단체들 어디하나 올해 임투를 제대로 그려주는 데가 없다. 답답한 노릇이다.” 월간자료 6월호 “96년 임투에 부쳐” 이종호


상급단체의 당사들에게는 부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위의 글을 따온 것은 노동조합 안팎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96년 상반기 임단투도 그 출발은 예년과 별다르지 않았다. 상반기 임단투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예상해 볼 수 있게 하는 준비된 투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민주노총 원년이 갖는 역사적 무게에 비하면 오히려 실망감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노동대중은 투쟁과정에서 이러한 우려를 상당 정도 딛고 일어섰다. 비록 대중투쟁이 전면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90년대 들어 가장 활발한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96 상반기 투쟁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중투쟁 그 자체이다.
대중투쟁은 종종 일반적인 예상이나 지도부의 지도력를 뛰어 넘는다. 사실 대중투쟁의 본질적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대중투쟁의 힘과 역동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96 상반기 대중투쟁도 부분적으로는 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만약 모든 계급투쟁이 언제나 지도부의 뒤만 쫓는다면 역사에서 급작스런 비약과 상승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적 시기에는, 노동조합 지도부는 ‘조합원이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털어 놓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작은 투쟁 하나를 만들기도 어렵다고 호소한다. 대중은 자신의 작은 이해관계에 얽매여 노동계급의 대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핀잔을 듣기 일쑤이다. 또한 그들은 교육의 대상으로 남으며 동원해야할 덩어리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대중투쟁이 불같이 일어나는 시기에 이르면 대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다. 대중은 순식간에 자신의 지도부를 뿌리치고 달려 나간다. 과연 저들이 바로 어제의 저들인가를 의심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급진화하기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이것을 해명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투쟁의 동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밝히는 일이며 동시에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일이다. 대중적 노동운동의 역사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 이 나라의 민주노조운동은 대중투쟁의 동력과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편 대중투쟁이 아무리 활발하게 벌어져도 대중투쟁의 힘과 급진성을 훼손하지 않고 투쟁을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급의 조직된 선진부분이 없다면 어떤 대중투쟁도 진정한 승리에는 이르지 못한다. 지금까지 세계노동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는 결정적 교훈도 바로 이 지점이다. 남한 민주노조운동도 투쟁의 역사에 비해 그 정치적 성과가 미약한 것은 계급의 조직된 선진부분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96년 상반기 대중투쟁도 또 다시 이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글은 96년 상반기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상반기 투쟁에 제한된 평가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남한 대중적 노동운동의 현단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바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모든 것을 다르게 이해하는 준거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상반기 대중투쟁에 눈감거나, 본문에서 얘기되겠지만, 이런 견해는 주로 민주노총 상층지도부의 태도를 도덕적으로 문제삼는 사람들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노동조합 상층의 관료화’ 경향이다. 이것은 남한 대중적 노동운동에서 이미 징후가 드러나고 있으며 앞으로 치열하게 논의될 성질의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관료화는 노동조합의 성격 자체와, 계급 역관계로부터 객관적으로 등장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것은 노조 상층과 대중과의 긴장형성을 내포하고 있다. 노조 상층에 대한 일방적, 도덕적 비판은 바로 이 점을 흐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역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성과를 아전인수 현재로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문제가 된다. 상반기 대중투쟁이 민주노총의 역량강화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과로 모아져야 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중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우려한 관료화를 강화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이다. 대중투쟁을 단순히 상층의 입지를 넓히는 압력수단으로 제한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으로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대중투쟁을 훼손하고 있는 견해와 경향을 비판적으로 경계해 나가겠다.
이 글의 구성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상반기 투쟁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는 과정이고, 두세 번째에서는 96 상반기 투쟁이 어떻게 해서 가능할 수 있었는가를 90년대의 정세 추적과 계급투쟁의 동력, 역동성을 해명하는 것을 통해 밝히고 있으며, 다음으로 상반기 대중투쟁를 역사적으로 위치지우고, 마지막은 96 상반기 투쟁이 남긴 문제가 무엇인가를 검토하는 부분이다.

1. 96 상반기 대중투쟁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기서는 상반기 투쟁에 대한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평가를 다루지는 않는다. 96 대중투쟁을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한 상반기 투쟁의 주요 특징에 대해서만 살펴볼 것이다. 상반기 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주요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공권력의 후퇴, 뒤떨어진 지도력, 지도부를 넘어선 대중투쟁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세 번째 항목의 둘째 내용은 하나의 추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주춤거린 공권력

96년 임단투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전국에 걸쳐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수배, 해고를 당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합섬, 만도기계 등에서는 임단협이 타결된 이후 구속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대한마이크로의 경우에는 여전히 원시적인 형태의 노조탄압이 자행됐다. 이 외에도 다수의 중소사업장 및 대기업의 계열사에서 여러 형태의 공권력 개입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90년대 들어와 공권력의 직접적인 물리적 탄압이 사실상 가장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93년 현총련 투쟁, 94년 전지협 투쟁, 작년 한국통신 투쟁까지 해마다 계속된 공권력의 무차별적인 탄압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를 두고 현 정부가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와 함께 노사개혁위원회의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공권력 개입을 자제한 것이라거나, 민주노총 상층의 정치력 내지 교섭력이 작용한 때문이라는 해석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위험하기조차 하다. 정부가 공권력 투입을 자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눈감아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공권력 개입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강화,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거나 힘으로 누른다 할지라도 정치적 손익계산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공권력 투입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서울지하철, 한국통신노조로 대표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96 상반기 임단투의 최고점인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90년대 남한 노동계급 대중투쟁의 한 분수령을 이룰 수도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세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93~95년으로 이어진 대중투쟁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측면이고, 둘째는 민주노총 원년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민주노총의 투쟁 기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는 김영삼 정부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노동계급이 어떤 원칙을 가질 것인가를 대중적으로 확인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는 근래 보기드문 것이었다. 교섭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합원들의 사기는 높아갔다. 공권력과의 한판 전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고 조합원들은 실질적인 대비를 하고 있었다. 누구도 파업이 불가능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조합원의 투쟁열기는 살아 있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은 노동계급의 사기를 눈에 보일 만큼 끌어 올리고 있었다. 특히 자동차 사업장은 이미 투쟁이 붙었거나 투쟁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정부의 공권력 개입을 막아낸 결정적 요인이다.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공권력을 멈추게 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도 처음부터 공권력 개입을 자제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무더기 구속사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탄압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압박해 들어왔고 노동자의 구속도 잇달았다. 특히 공공부문 사업장과의 본격적인 교섭을 앞두고는 공권력 엄격 적용, 제3자개입 엄단, 검찰의 전담반 구성, 조합원 자격에 대한 노동부의 유권해석 등 숨가쁜 대응이 연일 계속됐다. 임금 가이드라인 고수, 해고자 복직 문제는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방침도 여전히 강조되었다. 정부의 이런 태도와 실질적 위협을 단순한 정치적 제스춰로 보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지배계급의 힘을 절대화하거나 신비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을 일정 수준 이하로 가두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지배계급의 의도와 목적은 가능한 한 자신들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양보는 그것이 불가피한 조건에서만 이루어진다.
한편 부르조아 언론의 경제위기론 유포, 반노동자적 논조의 해설과 주장, 사실에 대한 일방적 보도가 진을 치고, 종교계 지도자들의 사실상 파업자제 호소도 예년과 같은 수순으로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중의 투쟁 의지는 수그러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전국전선도 점점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중은 자신들의 요구의 정당성을 스스로의 단결력과 투쟁 열기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중간계급 명망가의 개입을 자초하지 않을 만큼 투쟁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남한 대중적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은 막판에 이르러 거의 중간 계급 명망가의 간섭을 받아왔다. 그들은 언제나 양비론을 들이밀면서 결과적으로 진행중인 투쟁을 중단시키거나 투쟁의 정치적 성격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이들의 간섭은 뒤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포착되지 않았다. 이제 이 문제는 민주노총의 등장으로 인해 어느 정도 극복되는 문제로 보여진다. 다만 새로운 문제는 이제까지 중간계급이 해왔던 그러한 역할이 노동조합 내부에서 이루어 질 가능성이다. 이 역시 노조 상층의 관료화 문제로 귀결된다.

주춤거리기는 자본가계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공부문 사업장에서 해고자복직이 받아들여지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해고자복직이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이런 금기를 무너뜨린 정부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부르조아 언론마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배계급 내부가 단일한 입장을 가질 수 없을 만큼 그들도 불안해 한 것이다. 한편 자본가계급의 일부도 곧바로 자신의 성역이라고 여겼던 작업중지권과 파업시의 임금지급을 부분적으로 받아 들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도 바로 나머지 자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노동부와 자본가계급 간에 또한 자본가계급 내부에서 서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설전이 오고 갔다. 기존의 원칙이 훼손된 것이 아니라는 자족적 변명을 궁색하게 늘어 놓기 바빴다. 별 것 아니라면 왜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 지금 당장도 문제가 되지만 이것 때문에 노동계급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더 큰 요구조건을 내걸고 투쟁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일을 걱정하다가는 그 내일 벌어질 상황을 오늘 부딪쳐야 하는 것이 저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96 상반기 대중투쟁은 그렇게 강고하게만 보이던 지배계급의 공조체제를 충분히 허둥거리게 만들었다.

굼뜬 지도력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노총은 96 임단투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것을 자신의 조직적 임무로 상정하지 않았다. 임단투는 연맹 및 부문의 책임하에 진행하고 민주노총은 정치, 정책적 지원과 대응력을 높이는 것으로 역할지웠다. 이같은 결정은 투쟁의 집행력을 연맹 및 부문이 담보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주노총과 연맹의 역할 분담을 조직 형식적으로 바라본 결과이기도 하다. 이후 임단투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민주노총을 투쟁본부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제안에 그치고 말았다.
민주노총이 취한 또 하나 주목할 내용이 있다. 김영삼 정부의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 이후의 태도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여 자체의 옳고, 그름이나 민주적 절차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관심은 민주노총이 노사개혁위원회에 참여를 결정하는 과정이나 이후 진행 속에서 상반기 임단투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는가이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노총을 투쟁본부 체계로 전환하자는 제안은 그 속에 민주노총의 노사개혁위원회 참여가 오히려 상반기 대중투쟁을 혼란시킬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주노총이 상반기 임단투를 적극적으로 이끌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대중에게 비쳐진 것이다. 민주노총 출범 원년에 거는 객관적 기대와 민주노총의 실질적인 역할과는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고 읽혀지는 지점이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명동성당 농성 합류 이후에 비로소 이 같은 분위기가 약간은 수그러들 수 있었다.
민주노총의 이런 태도에 비해 각 연맹과 공공부문의 집행부는 임단투를 실질적으로 이끌 책임을 지는 단위여서 상대적으로 열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전체적으로는 평균적 수준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요구조건을 끌어내고, 투쟁시기를 집중하기 위한 교섭일정 조정과 일정에 따른 사업을 평면적으로 배치하는 정도의 지도력은 이미 수년간 반복되어온 것이었다. 물론 이런 측면의 노력을 과소평가 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기업별 노조 아래에서 이 정도나마 이끌어 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 올해만 해도 이 같은 일을 상대적으로 적극 추진한 공공부문과 연맹의 노력이 가져온 효과는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이를 넘어서는 전 계급적, 정치적 지도력이 96년에도 특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에 진행된 대중투쟁에 비하면 지도력은 최근 몇 년간 반복되고 있는 의례적인 지도내용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면 임단투를 연맹, 부문 차원에서 각각 진행함으로써 투쟁의 전국적, 정치적 성격을 오히려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도부를 넘어서다

96년 상반기 임단투 과정에서 나타난 대중투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지도부의 지도력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지도부의 예상을 훨씬 웃돌 만큼 투쟁의 의지와 열기를 보여준 것이다. 민주노총이 초기의 태도를 바꿔 명동성당 농성을 사실상의 전국투쟁본부로 삼으면서부터 상반기 임단투는 전국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늦게나마 민주노총이 자신의 역할을 찾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명동성당 농성장에 민주노총 지도부를 불러들인 것은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압력이었다. 노사개혁위원회 참여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대중의 적지 않은 불만에 부딪쳐야 했다. 대중은 민주노총 합법화가 가져올 장미빛 미래를 기다리기에는 당장의 고통 해결이 더욱 시급했으며 그동안의 투쟁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직접적 힘에 바탕하지 않는 협상은 결국은 더 많은 것을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중은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를 근본적으로 믿지 않았다. 대중은 오로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만큼만, 자신들이 투쟁한 정도에 의해서만 무엇을 얻더라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에 오랫동안 묶여 왔던 까닭에 더 이상 참기 힘들 만큼 분노가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연대투쟁의 힘을 믿었으며 민주노총 및 상급단체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도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아래로부터의 동력이 살아나고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각기 진행되고 있던 상반기 임단투를 순식간에 단일한 전국적 투쟁의 성격으로 모아냈다.
서울지하철과 한국통신 노동자들은 마지막 타결의 순간에 많은 아쉬움과 불만을 삼켜야 했다. 그들의 불만은 더 많이 얻을 수도 있었다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투쟁의지를 단지 압력수단화하는 것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더 많은 요구의 쟁취를 원했던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실리만을 원해서가 아니라 이 투쟁을 둘러싸고 형성된 계급간 이해관계의 근본적 대립을 조금이라도 더 돌파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며, 자신들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파업은 원칙적으로 투쟁전술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파업 여부로 투쟁의 모든 것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조합원의 투쟁의지를 단순히 요구 쟁취를 위한 압력수단으로 묶어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중투쟁은 많은 경우 처음 출발 때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을 창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더 이상의 투쟁은 그나마의 실리도 놓칠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논리이다. 노동자의 투쟁을 소위 명분과 실리로 분리시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분열을 노리는 것이며, 투쟁이 계급 속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결과적으로 투쟁의 정치적 성과를 빼앗기 위한 지배계급의 고전적 수법이다. 노동계급의 입장에서는 명분과 실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원칙을 구체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를 대중적으로 합의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올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잠정 합의안의 부결 현상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방금 지적한 대중의 투쟁열기가 높았던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공공부문의 임단투가 타결된 이후로 이런 현상이 대거 나타난 것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공권력의 개입을 차단하고 해고자복직을 비롯하여 90년대 들어와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냄으로써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회복된 데 기인하는 측면이 많다.
그러나 이 측면만으로 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부족할 듯 싶다. 합의안 부결이 어용노조가 아닌 민주노조진영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합의안 수준이 예년에 비해 오히려 높았음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작게는 공공부문의 연대투쟁이 막판에 대중의 열기에 못미치는 수준에 머무른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이며, 크게는 민주노조진영 상층 지도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비판이 아닌가 싶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에 폭 넓게 퍼져 있는 노조 상층부와 대중간의 분리를 노동대중이 은연 중에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주노조운동 상층 지도부의 최근 지도 내용에 대한 불만이 합의안을 거부하는 수준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로서는 하나의 추정이다. 이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래로부터의 문제제기가 공공연하게 일어나지는 않은 까닭이다.

2. 90년대 정세 인식

민주노총 결성 원년, 각 산별연맹 및 공공부문 대표자회의 출범이라는 주체적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조직 결성 과정이 노동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힘을 결집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상층 지도부 사이의 논의에 의존하여 진행된 까닭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반기 임단투를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동안 남한 대중투쟁의 구심을 형성했던 투쟁 중심 사업장의 조직력이 약화되었고 특히 그들 사업장들은 자본의 신경영전략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대응하기에도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95년 한국통신투쟁에 이어 올해도 관심은 공공부문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서울지하철은 조직력의 약화 때문에, 한국통신은 작년 투쟁의 기억과 아직 민주노조의 경험이 짧아 어느 정도나 투쟁이 가능할 지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반기 투쟁은 90년대 들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서울지하철과 한국통신이 파업투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을 두고 올해의 투쟁이 예년과 별 다를 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민주노조운동 상층 지도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에 평가의 중심을 두기도 한다. 비판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심적으로 설정하면 노동대중의 투쟁과 지도부와의 긴장관계가 사라지고 대중은 단순히 지도부에 얽매인 피동적 존재로 떨어지고 만다.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잘못하면 의지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비현실적인 논리 다툼을 벗어나기 힘들 수 있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같이 버리는 우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96년 상반기 임단투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 넘은 대중투쟁의 열기이다. 상층 지도부는 빙산의 윗 부분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러한 빙산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 있다. 물론 대중투쟁에서 지도부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흐름을 형성하는 조건을 이루며 때로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96 상반기 투쟁에서 주목할 것은 계급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그러한 운동은 어떤 정세 아래에서 가능할 수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계급투쟁은 현장의 조건에도 물론 영향을 받지만 근본적으로는 계급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해 규정받는 바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의 성격, 남한 자본주의의 축적 조건, 세계자본주의의 운동방향, 그리고 노동자의 상태, 북한의 동향이 정세를 이루는 기본 동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압축하면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대립과 갈등의 내용과 강도라고 말할 수 있다. 현 정세는 기본적으로는 87~89년 노동자 투쟁과 김영삼 정부의 등장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의 논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운동의 힘은 약해져 가는 추세이며 남한 부르조아의 지배력은 점점 강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구스탈린주의 나라의 격변과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자본의 전지구적 단일화 속에서의 자본의 전면적 경쟁시대라는 것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자본의 유연화 전략이 노동계급을 개별화, 해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일종의 패배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태도는 노자관계를 사회적 합의주의 아래에서의 참여와 협력적 노자관계로 전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게하고 있다. 사실 민주노조운동 진영 내에도 이러한 경향은 이미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과 투쟁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정치적 협상과 시민운동과의 결합에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의 투쟁은 이를 위한 압력 수단 정도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를 단순한 다수의 시민으로 되돌려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표찍기로 바꿔치기 하고자 하는 시도마저 도처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이러한 내용 전부를 구체적으로 논증할 여유는 없다. 다만 김영삼 정부의 등장으로 노동계급에게까지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있다는 생각은 사실과 맞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의 상황 때문에 노동자가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또한 90년대 정세의 특징을 전망과 결합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넘치는 민주주의, 과잉된 투쟁일까?

냉전해체라는 세계사적 변화와 김영삼 정부의 등장은 국내 계급 정세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은 90년대 들어 운동방향을 상실하고 있었다. 부르조아 야당은 이제 지배계급의 한 분파로 자리를 잡았으며 세계적 차원에서도 신보수주의 물결이 거세게 진행되고 있는 조건에 맞춰 급격히 보수화되어 갔다. 한편 80년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거나 노동운동에 몸 담았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부르조아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가고, 또 일부는 시민운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변혁운동을 위해 실천했던 사람들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의회진출을 위한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겨 갔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정치적 세력 구도는 그 정치적 타당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전에 인적 자원의 해체가 먼저 일어나 이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함께 부르조아 민주주의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다는 찬가가 여기저기서 들려 나왔다. 이제는 보수와 진보의 경쟁시대라느니 심지어 수구와 개혁 세력의 싸움이라는 주장이 이른바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곳에서 공공연히 나오고 있었다.
한편 87~89년의 대중투쟁에 비해 90년대의 대중적 노동운동도 통계적으로만 보면 조직률, 파업건수, 파업일수 등 주요 지표들의 수치가 떨어졌다. 현장의 노동자들도 더 이상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각종 보고서가 줄을 잇고 있었다. 이 땅에 민주노조운동의 씨를 내린 노동대중의 투쟁에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한국 노동운동 과연 위기인가’, 박승옥 『창작과 비평』1992, 여름
노동운동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신하지 않으면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고립된 소수의 불만 세력으로 왜소화하고 만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다. 『경제와 사회』김형기, 1992. 가을
93~95년의 대중투쟁도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하고 오히려 대중투쟁이 시들어 가고 있는 증표로 해석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활짝 핀 서유럽에서 대중적 노동운동이 활기를 띠어가는 90년대의 상황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다. 그들은 서유럽 사민주의 세력의 급격한 퇴조와 맞물려 터져 나오는 대중투쟁은 외면한 채 사민주의의 실패를 마치 노동운동의 실패인양 둔갑시키는데 정력을 쏟았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의 복지정책의 철수, 심각한 고용위기, 세계적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생활 조건의 악화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고,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의 손을 들어주기 바쁘다.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는 계급의 이해를 떠나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라는 견해에 지배계급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
심지어는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주장이 신한국당 민주계가 아닌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그럴싸하게 치장된 언어로 활개를 치고 있다. 그들도 입으로는 투쟁을 강조한다. 그러나 투쟁이 김 정부의 개혁을 어렵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더욱 강조한다. 수구세력이 반기를 들고 나오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노동대중의 투쟁이 민주주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논리가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더디고 부족한 민주주의가 진실이다

91년 3당 합당에 이어 올해의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조체체에서 볼 수 있듯이 부르조아 정치권은 합종연횡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권력을 쫓기에 급급한 부르조아 정치인들의 비도덕적 행위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 조건이 변화하는 것에 맞춘 남한 정치집단의 숨가쁜 이합집산의 과정인 것이다.
현 정세를 규정하는 힘은 87~89년의 계급투쟁이 낳은 국내적 요인과 무한경쟁 체제에 들어선 세계자본주의의 운동 방향이다. 남한에서의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김영삼 정부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말았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분위기와 남한 자본의 성장을 배경으로하여 싹이 돋고 있던 변혁운동은 냉전체제의 해체와 김 정부의 등장이라는 상황을 맞이하여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대중적 노동운동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것은 87~89년 계급투쟁의 여진이 아직도 남아 있고 대중적 노동운동을 체제내화할 정도로까지 아직은 지배계급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는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동시에 성공시켜야만 했다. 하나는 세계 자본운동의 변화를 쫓아 갈 수 있을 정도로 남한 자본주의를 구조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 질서를 개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오랜 군부독재가 낳은 관행은 자본의 이윤 창출에 역으로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안정적 정치체제로서도 더 이상 부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본의 구조변화를 가로 막는 지배계급 내부의 장애를 거두어 낼 수 있는 추진력을 갖는 정부가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출범과 함께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기운과 노동대중의 불만을 등에 업고 이를 시도하고자 했다. 변화와 개혁이라는 선동적 구호는 한때 민중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 표적 사정이라는 반발이 있었지만 구시대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아 변화의 사도 행사를 할 수 있었다.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부동산 실명제의 도입을 최대의 정치적 치적으로 포장하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자본의 직접적 이해를 돕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쓸데 없는 부담만 주는 개혁이 아니라 각 종 규제완화와 비용삭감을 위한 실질적이고 획기적인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김 정부는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하지 못했다.
한편 김 정부 앞에는 또 하나의 과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의 저항을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영삼은 자신의 성격 만큼이나 단호했다. 고통분담론, 국가경쟁력 강화, 세계화를 외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집단 이기주의, 선진국 진입의 걸림돌로 몰아 세웠다. 노동대중은 93년 현총련, 94년 전지협, 95년 한국통신 투쟁으로 답했다. 민주화 운동세력이 썰물 빠지듯 다 가버리고 변혁운동 진영도 지리멸렬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김 정부는 민주노조운동을 무력화하거나 체제 내로 이끌지 못했다.
김 정부의 개혁 프로그램은 노동대중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지도, 노동자가 원하는 민주주의를 진전시키지도 못했다. 김 정부의 개혁 조치는 누구하나 만족시킬 수 없었다. 김 정부의 인기는 어느 새 사라지고 불만의 소리가 이를 대신했다. 그러자 다죽은 줄 알았던 구기득권 세력도 이 틈을 비집고 다시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부르조아 야당은 이를 정권을 잡을 수 있는 호기로 이용하기 위해 날뛰었다. 95년 6. 27 지자체 선거의 결과는 부르조아 야당을 고무시켰으며 김 정부를 위축시켰다. 이것은 다시 5. 18 정국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고 급기야 김 정부는 노, 전을 구속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96년 4․11 총선의 결과는 김 정부에게 그야말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주었다. 그것은 선거에서 승리해서가 아니라 예상보다 덜 패배한 까닭이었다. 김 정부는 이제 다시 새롭게 노동대중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부릅뜬 눈의 힘이 조금은 빠진 상태로였다.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와 노사개혁위원회에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들어올 것을 요청해야만 했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을 체제내화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제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상반기 노동자 투쟁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얻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미 때를 놓친 수순이었다. 김 정부는 4․11 총선을 승리라고 강변했지만 국회 개원 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나약한 정부에 불과했다. 지배계급의 분열과 혼란도 심해져만 갔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현 정부는 일관된 정책을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중간계급의 한약분쟁 앞에서도 지배계급은 아무런 조정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교육개혁, 사법개혁을 추진하는 데에도 힘들어 했다. 꼬리를 물고 터지는 각종 대형사고는 현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자연히 김 정부를 위주로 한 현 지배 정파는 물론이고 지배계급 전반의 권위는 날로 퇴색해가고 있었다. 지배계급 내부의 자중지란은 반대로 노동계급에게 투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특히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는 저들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노동계급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결과를 낳았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는,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이 상반기 임단투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측면이다. 민주노총은 노사개혁위원회 참여과정에서 밑으로부터의 불만에 부딪치게 되고 바로 이것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명동성당 농성에 합류하는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다음으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노사관계 구상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도와는 별개로, 일차적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대중적으로는 민주노조운동의 정당성이 확인되는 과정이고, 동시에 투쟁의 전리품을 확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 동안 누적된 불만과 분노를 노동대중은 더 이상 가슴에만 묻어둘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해서 96 상반기 대중투쟁은 터져 나온 것이다. 별 성과없이 지루하고 힘겹게 이어온 93~95 대중투쟁은 96년에 와서 드디어 부활할 수 있었다. 93~95년의 끈질긴 대중투쟁이 없었다면 96년은 그냥 지나쳐 버렸을 지도 모른다. 김영삼 정부 아래에서 노동자계급은 더디고 부족하기만 한 민주주의 때문에 고통받아 왔던 것이다.

전망

전반적으로 남한 부르조아 계급의 지배력은 여전히 강하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지배계급의 분열을 촉진시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지배계급이 정권 창출을 위해 이합집산과 이전투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체제에는 이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한 선진국으로의 진입과 남한 지배계급 주도의 통일 실현이라는 지배전략은 분명 노동계급에게 많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민의 직접적 선거로 정권을 세울 수 있게 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완충시킬 수 있는 조건도 갖고 있다. 남한 독점자본은 경기순환에 따른 부침은 있겠지만 무한경쟁 체제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노동현장에서는 신경영전략과 기업문화전략을 구사해 노동조합을 아래로부터 무력화하고 위로는 민주노조진영을 체제내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김영삼 정부의 시도도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조건이 장기적으로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 그리고 공식 정치권의 역량으로 자본축적과 노동통합을 동시에 달성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은 체제 안정의 조건이 아니라 역으로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체제의 권위를 흔들고 있으며,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체제가 뿜어내는 온갖 문제를 뒤치닥거리하는 데에도 숨돌릴 새가 없는 현실이다. 세계적 대세를 이루고 있는 신보수주의는 노동계급의 체제 이탈을 촉발시킬 위험부담을 동반하고 있다. 자본의 전면적 경쟁은 노동계급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체제가 이들을 흡수할 여유는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진 자본주의의 오늘의 모습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장기불황에 빠져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남한 자본주의가 선진국 수준의 복지사회로 자연스럽게 이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선진국의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조건 속에서 후발 자본주의국이 순조롭게 자본축적을 진행시킬 가능성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보다 생산력이 훨씬 발전할 가능성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재도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심각한 수준의 경기 양극화 현상은 불가피하다. 이른바 국력은 좀더 신장되겠지만 그것이 곧바로 전체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설령 생산력이 선진국 수준에 근접한다하더라도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 예컨대 복지의 전면적 후퇴, 심각한 실업, 노동강도의 강화, 실질 임금의 감소, 부의 편중 심화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동반할 것이다.
김 정부의 세계화 논리는,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밑받침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노사관계가 대립적, 투쟁적 관계에서 참여와 협력적 노사관계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에서 나왔다. 이것이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국가적 과제라고 강조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남한 자본의 축적을 주도하고 있는, 따라서 남한 지배계급의 사활이 걸려 있는 산업 분야에서의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은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과 노동자의 창의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지속적 성장을 보장받을 수 없다. 기존의 노동탄압, 노동배제 정책을 그대로 가지고는 노동자의 참여와 협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 산업기술의 발달 속도가 매우 빠르고 새로운 산업과 낡은 산업의 교체가 수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노동력을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자본과 기술력은 선진 자본주의 수준에 못미치고 있으며 기존의 경쟁력을 갖춘 산업은 자본주의 후발 주자국의 급격한 추격에 쫓기고 있는 것이 남한 자본주의가 처한 현실이다.
상대적으로 남한의 대중적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올해의 투쟁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투쟁성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의 결성으로 민주노동운동 진영의 조직적 단결을 이루어내었으며 산별노조 건설을 향해 나가고 있다. 물론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도 적지 않다. 자본과 정권의 새로운 도전을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투쟁 중심사업장의 조직력 복원과 민주노조운동의 확대를 어느 정도 이루어 낼 것인가와 중, 장기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에 기초한 대중투쟁을 이끌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문제가 앞으로의 정세를 형성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북한의 움직임과 남북문제의 향방도 정세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은 틀림없다.

3. 계급투쟁의 동력과 역동성

대중투쟁이 언제 활발하게 일어나는 지를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나 올 상반기 대중투쟁도 그것이 터지기 전에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대개의 대중투쟁은 일차적으로는 경제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경기가 호황일 때 노동자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며 경기 불황으로 노동자의 생활 조건이 악화되는 시점에서는 방어적 성격의 투쟁이 나오기도 한다. 87년이 전자의 경우라면 96년은 후자에 가깝다고 알다시피 남한경제는, 96년 들어 지배계급 내부에서 ‘경제위기론’을 둘러싼 논쟁이 터져나올 정도로 경기가 위축돼 있다. 그것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는 큰 폭의 국제수지 적자, 이른바 ‘경기 연착륙’을 무색케하는 성장율 둔화, 억제선을 훨씬 웃도는 물가불안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자본가들은 이 문제를 고비용․저효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배계급은 임금억제, 민영화 정책, 신경영전략 등으로 이를 돌파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신경영전략이 주로 민간대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임금억제나 민영화 정책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향하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그동안 민간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강요당했으며 특히 민영화 정책은 그들의 고용문제를 심각한 수준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활수준과 고용조건을 방어하기 위한 성격으로 볼 수 있으며, 다만 정세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지배계급의 취약함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96상반기 대중투쟁이 새로운 반격의 시작이라는 이 글 뒷부분의 내용과 투쟁의 방어적 성격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다. 물론 경제상황이 대중투쟁을 잉태하는 중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대중투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대중투쟁이 있기까지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과거 투쟁의 경험, 계급의 준비 정도, 요구의 절박성, 지배계급의 상태, 이데올로기 지형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지배계급의 상태가 특히 중요하다. 노동자가 투쟁의 자신감을 갖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87년은 지배계급이 급격히 밀리는 상황이었다. 올해의 경우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김영삼 정부의 취약함이 김 정부 출범이래 가장 많이 드러난 경우이다. 물론 그 취약함은 87년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에게는 87년 이후 10여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특히 최근 93~95년의 투쟁경험과 민주노총 결성이라는 주체적 요인이 있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낳은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노동자의 실질 임금 상승이다. 조직력과 투쟁력이 뒷받침된 민간 대기업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자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더 이상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본의 신경영전략과 기업문화전략으로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보고와 심지어 신세대 노동자들의 성향까지 문제삼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없지 않고 대책이 필요한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마치 이것들이 노동자의 투쟁을 멈추게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동력과 역동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96 상반기 투쟁은 이점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문제는 생산관계이다

노동자가 개인, 또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의 일원으로 투쟁에 나서는 것은 그 길만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시기에는 집단적 힘, 즉 계급투쟁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 부문, 국민으로 대응하는 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노동자는 개별화하기도 하며 부문주의에 빠지거나 국가의 동원체계 아래로 들어가기도 한다. 말하자면 체제가 강제하는 노동자간 경쟁을 극복하지 못한 속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든 생산관계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 위에서만 유지된다. 그런데 착취 자체가 곧바로 노동계급을 언제나 기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은 아니다. 착취 기제가 작동하는 속에서도 노동자의 실질 임금 상승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노동자의 불만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 수도 있다. 노자관계 또한 사회적 합의주의(소위 코포라티즘)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호황을 누렸던 전후 20~30년 동안의 선진 자본주의가 여기에 해당된다.
한편 자본축적 과정은 경기 순환을 피할 수 없다. 끝없이 호황과 불황을 되풀이 하게 된다. 불황의 시기에 착취 기제는 전면적으로 가동되며 노동자의 생활은 압박을 받게 된다. 노동자들은 기존의 성과물마저 도로 빼앗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 때부터 사회적 합의주의는 균열되기 시작한다. 80년대 이후 선진 자본주의, 특히 90년대 들어 서유럽이 이런 과정을 겪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노자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선진적인 제도, 의식, 관행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말에 불과하다.
반대로 자본축적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에서는 노동탄압, 배제정책이 적용된다. 여기서는 노동자의 주체형성이 더디게 진행되고 노동계급은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의 후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며 87년 이전 이 나라도 여기에 해당된다(물론 지금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무한정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후발 자본주의라 할지라도 전국민이 타국(제국주의)에 전면적으로 억압 당하는 조건을 벗어나 일국 내의 노자 관계가 그 나라의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조건으로 떠오르면 노동계급의 투쟁은 자기 나라 지배계급을 향하기 시작한다. 남미, 남아프리카, 남한, 중국(89년 천안문 시위), 최근의 동아시아에서 자기 나라의 지배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중적 저항은 이미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계급투쟁의 동력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생산관계 자체로부터 주어진다. 물론 이것은 장기적 추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이러한 추세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법, 제도, 포섭, 탄압으로 노동계급의 투쟁을 억제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불만과 분노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간의 경쟁이 노동자의 생활과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노동계급의 저항도 멈추게 될 것이라는 신화, 자본주의 자체가 내재적으로 노동계급의 투쟁을 포섭할 수 있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는 허구적 논리, 또한 국가와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해 노동계급의 투쟁으로는 자본주의를 변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은 90년대 들어와 세계적으로 불붙고 있는 노동계급의 대중투쟁에 의해 모두 깨지고 있다. 노동계급의 대중투쟁은 이 모든 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끝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87~89년 노동자 투쟁의 중심은 금속산업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와 그 중심은 민간 대기업으로 옮겨갔다. 한편으로는 산업구조의 재편이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제조업 중소사업장이 실질적으로 축소, 위축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 대기업으로 민주노조운동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사무전문직을 비롯한 교사, 언론노동자, 서비스직종, 일용직 노동자들로까지 퍼져 나갔다.
민간 대기업 노동조합은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과 자본의 신경영전략, 기업문화전략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민주노조운동이 아직 정치적 독립을 이루는 데까지는 나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민간 대기업의 조직력과 투쟁력은 위축됐다. 93년 현총련 투쟁을 끝으로 민간 대기업에서의 투쟁은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공공부문 노동자들한테까지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94년 철도 노동자 투쟁, 95년 한국통신 노동자 투쟁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96년 상반기 투쟁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의 힘이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자동차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도 전국 노동자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병원 노동자들의 투쟁, 금속연맹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도 다시 활기를 띠었다. 지난 10여년의 과정을 살펴보면 투쟁의 중심이 어떻게 확산, 이동, 재생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계급투쟁은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무르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계급투쟁의 파고를 보면 87~89년의 상승기, 90~95년의 공방기, 96년의 반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계급투쟁은 이토록 단선 위에 있지 않고 부침을 겪으면서 나아간다.
96 상반기 투쟁에서 아쉬운 점은 금속연맹 대공장의 투쟁력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보다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다음과 같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던진 문제, 즉 노동계급의 단결의 필요성은 사실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과 91∼92년의 현대자동차 투쟁에서 그 정점에 다달았다. 대중적 노동운동이 맞닥뜨릴 수 있는 최고수준의 투쟁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대중적 노동운동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옆으로 걷게 되었다. 94년 철도(전기협)․서울지하철․부산지하철 등의 전지협 공동투쟁, 95년 한국통신의 투쟁, 96년 자동차 사업장 및 지역에서의 투쟁활성화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 투쟁들은 아직 90, 91∼92년 현대계열 노동자들이 경험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96 상반기 투쟁이 새로운 자양분을 남겼는가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중적 노동운동 차원에서 90, 91∼92년의 투쟁이 곧바로 산별노조 건설을 눈앞의 목표로 할 수 있는 수준의 연대투쟁까지 보여줬던 것은 아니다. 96년 상반기 투쟁도 이 문제를 확연하게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90, 91~92년의 역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현재도 진행중에 있으며 96년 상반기 투쟁 역시 거기에 묶여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노동계급의 정치적 과제를 진전시키는 문제도 대중적 노동운동의 진전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90년대 초반까지의 투쟁 중심사업장들이 다시 투쟁력을 회복하는 데에는 정치적 진전과 함께 대중적 노동운동의 더 많은 성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상반기 투쟁의 힘이 아직은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 만큼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들 사업장이 안고 있는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공공부문이 파업투쟁을 통해 더 큰 승리를 안았거나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민주노총이 진행중인 투쟁을 정치적으로 묶어세워 보다 분명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물론 금속연맹 지도부도 부문주의에 갇히지 않고 계급투쟁의 흐름을 충분히 같이할 수 있는 능동성을 보여주었다면 역시 상황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이 가정은 현실의 구체성을 무시하고는 세울 수 없다. 그러나 투쟁이 언제나 현실적 조건 만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조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조건을 뛰어넘는 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현실은 투쟁을 제약하지만 반대로 투쟁은 현실을 바꿔놓기도 한다. 96 상반기 대중투쟁이 이를 잘보여주고 있다. 상반기 투쟁은 진행되면서 새로운 조건과 현실을 만들어 나갔다. 계급투쟁은 자판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게 바로 역동성이다. 문제는 투쟁을 유지, 지속, 상승시킬 수 있는 전술과 정치적 내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4. 96년 대중투쟁의 역사적 위상

이 글 앞에서 96 상반기 대중투쟁의 주요 특징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바로 그러한 내용이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여기서의 일이다. 96 상반기 투쟁은 87년 대투쟁의 파장이 이제 거의 마지막까지 왔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만약 상반기 투쟁이 거기에 그치고 만다면, 즉 새로운 출발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90년대 어느 해의 투쟁과 어떤 차별도 없을 것이다. 96년만 떼어 놓고 보면 더욱 그럴 수 있다. 96년 상반기 투쟁은 남한 대중적 노동운동이 여전히 활발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특히 패배로 기억되고 있는 93~95년 대중투쟁의 의미를 되살렸다. 이것만으로도 상반기 투쟁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나아가 상반기 투쟁은 자신의 독자적인 자양분을 남겼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새로운 자양분

96년 상반기 임단투는 87년 노동자대투쟁에 비하면 투쟁의 폭발적 힘에서 훨씬 못미친다. 뿐만 아니라 87년 대투쟁이 뿌려 놓은 자양분을 먹고 태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87~89년 대중투쟁 이후 가장 의미있는 대중투쟁으로서는 모자람이 없다. 특히 90년대의 대중적 노동운동이 점점 열기를 잃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의 상식처럼 굳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서울지하철과 한국통신의 투쟁이 파업투쟁 직전에서 멈추었고, 그동안 남한 대중적 노동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금속연맹의 투쟁이 주춤거리고 있어 87년 대투쟁 이후 또 하나의 획을 긋는 투쟁으로 보기에는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96년은 노동계급이 승리한 투쟁이다. 구체적으로 획득한 투쟁의 성과물은 보기에 따라서는 크지 않다. 최소한의 해고자복직, 어느 정도의 임금인상, 작업중지권의 일부 획득을 들어 승리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할 지도 모른다. 올해 노동계급이 요구조건으로 내걸은 내용에 비하면 손에 쥔 것은 한줌도 안될 수 있다. 그럼에도 노동계급이 투쟁한 승리라고 말하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손에 들어온 성과물도 의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 90년대 들어 그 정도의 성과물을 획득한 것은 처음이다. 이것만으로도 사실은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자양분이 이제 거의 임무를 다한 상황에서 새로운 자양분을 뿌렸다는 점이다. 87년의 자양분은 노동자의 인간적 각성과 단결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이 힘은 지난 10여년간 민주노조결성과 사수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민주노총 건설에 이르렀다. 96년 상반기 투쟁은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계급의 공동요구 쟁취를 위한 연대투쟁의 가능성을 새로운 자양분으로 남겼다. 96년 상반기 투쟁은 해고자복직, 작업중지권, 임금억제선 돌파, 노동시간 단축 등 기업별 노조로는 돌파하기 쉽지 않은 요구를 내걸었으며, 실제 투쟁 과정에서도 공동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산별노조 건설을 민주노총의 법적 합법화로 단순 대체하는 경향은 산별노조 또는 노자관계를 법적 요건의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법적 문제는 계기이며 매개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힘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은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공동요구에 기초한 투쟁과 위로부터의 노동계급의 정치적 진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되살리다

93년 현총련 노동자들의 투쟁은 김영삼 정부에 대한 노동계급의 공격이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투쟁으로 인해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이해는 명확히 분리될 수 있었으며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노동계급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 대중적으로 폭로될 수 있었다. 비록 현총련 노동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투쟁은 패배한 듯이 보였지만 패배를 통해 김영삼 정부의 계급적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수천 마디 말과 수천권의 책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커다란 성과였다.
94년 전지협 투쟁은 93년 현총련 투쟁의 뒤를 이어 대중투쟁의 맥을 이었으며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95년 한국통신 투쟁의 숨은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전지협 투쟁 역시 투쟁 자체는 패배하고 말았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아픈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민주노조운동이 후퇴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제 민주노조운동도 투쟁 위주의 사업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협 투쟁은 남한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동력을 공공부문으로까지 확산시키는 출발이 되었다. 제조업의 투쟁이 약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지협 투쟁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95년 한국통신 노조의 민주화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낳은 늦둥이 자식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침 민주노조운동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투쟁력을 지속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통신 노조의 등장은 9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대응은 거의 발악에 가까웠다. 일 개 노동조합의 움직임이 정권의 이성을 잃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통신은 생기 넘치는 활력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투쟁으로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힘으로 한국통신 노조를 이끌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은 일단 좌절을 먼저 맛봐야 했다.
이처럼 93~95년으로 힘겹게 이어진 일련의 대중투쟁은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승리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투쟁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96년 상반기는 그 모습을 달리 나타냈을 것이다. 96년 역시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길게는 87년의 자식이지만 가깝게는 93~95년의 경험 위에서 나온 것이다. 반대로 93~95년의 대중투쟁은 96년 상반기 투쟁속에서 되살아 났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두가지 이다. 하나는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그 위력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대중투쟁은 노동계급의 공동요구에 기초한 연대투쟁을 통해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 주었다. 다른 하나는 대중투쟁은 그 당시에는 패배하더라도 반드시 그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대중투쟁을 예비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것이다.

5. 남긴 문제

지금까지 96년 상반기 대중투쟁이 갖는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지난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전개 과정과 결합하여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 분석의 오류와 논리의 비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투쟁을 여러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는 관계로 글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 관점과 태도에 대해서는 물러설 의사가 없다.
남한 대중적 노동운동은 현재까지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낳은 자양분을 먹고 있다. 그 자양분을 먹고 성장한 자식이 바로 민주노조운동 진영이다. 민주노조운동이 갖는 결정적 의미는 다음의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하나는 정권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용노총의 반사물이기도 하며 정권과 자본의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이 가져다 준 효과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87년 대투쟁의 직접적 결과이며, 남한 자본의 압축적 발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87년은 대중투쟁의 한 전형이며 남한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대량의 노동자를 양산하는 것과 함께 했던 것이다.
96 상반기 투쟁이 이후 대중적 노동운동의 새로운 자양분으로 사용될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사실 불투명하다. 노동계급의 공동요구에 기초한 연대투쟁과 산별노조 건설은 현 단계 대중적 노동운동의 직접적 과제로 떠올라 있다. 96 상반기 투쟁은 이러한 목표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진행된 한계를 갖고 있다. 96 상반기 투쟁이 87년 대투쟁을 총괄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출발의 의미를 갖는 것 속에서만 그 한계는 극복될 것이다.
이제 민주노조운동은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노조운동이 지켜온 두 가지 원칙을 현재의 구체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어용노총에 대한 반사적 성격이나 탄압에 맞선 전투 자체만으로는 노동자의 정치적 독립을 강화하기 힘들다. 또한 정치적 독립에 기초하지 않은 대중투쟁은 노동계급의 주체형성으로 귀결되지 않고 그때 그때의 압력수단으로 사용되고 흩어질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독립에 기초한 대중투쟁, 대중투쟁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는 넘어야 할 안팎의 장애물이 도처에 널려 있다. 96 상반기 투쟁은 그 장애물을 어렴풋이나마 드러내 주었다. 자본과 정권은 민주노조운동을 체제내화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시적인 양보를 할 의사가 있음도 보여 주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 노동운동이 새로운 진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민주노조운동은 단기적으로는 제자리 걸음을, 멀지 않아서는 커다란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우려는 내부적인 조건을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현장 조합원들의 요구와 불만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논리를 표현만 바꾸어서 그것이 마치 노동계급의 것인양 둔갑시키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데에는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에 기반한 노동계급의 선진부분의 구축이 절대로 필요하다. 문제는 어떤 사상에 기초한 선진부분이며, 어떤 활동을 펼치는 선진부분인가이다.
96상반기 대중투쟁은 이를 고민하는 사람들한테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를 뿌려주었다. 한/노/정/연

1996-07-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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