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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의 또 다른 얼굴

현장에서 미래를  제13호
손호철

권 두 언




지구화의 또 다른 얼굴


손 호 철 (부소장, 서강대 교수, 정치외교학)


80년대 중반에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는 주민투표에 의해 ‘지구평균세(Global Equalization Tax)’라는 세금을 신설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름부터가 특이하고 학자들조차도 고개를 갸우뚱할 이 세금의 이면에는 60년대 중반 이후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안고 있던 구조적 모순이 숨겨져 있다.
60년대 중반 이후 선진국의 대기업들은 비싼 임금과 까다로운 노동조건 등을 피해 값싸고 노동환경이 엄청나게 유리한 제3세계에 공장 등 생산시설을 이전시켜 명실상부한 ‘다국적 기업’ 내지 ‘초국적 기업’으로 전환하고 ‘새로운 국제분업’을 주도했다. 우리나라의 마산 자유무역단지에 입주했던 외국 기업들이 바로 그 결과이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많은 일자리를 잃는 ‘산업공동화’ 현상을 겪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 초국적 기업들이 세금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국과 같이 세율이 높은 본국의 본사와 홍콩, 버뮤다와 같이 세금이 거의 없는 나라의 지사 사이의 내부거래에서 가격을 조작하여 본사는 적자를 내고 이윤은 세금이 적은 지사에만 나도록 머리를 쓴 것이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한 미국에 본사를 둔 이들 대기업들이 세금을 안 내게 된 것이다.

문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같은 초국적 기업화는 모국에 실업 등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킬 뿐 아니라, 이에 따라 실업수당 지급 등 국가의 재정부담을 확대시키면서도 동시에 내부거래 ‘이전가격(transfer price)’에 의한 탈세를 통해 정부의 세입을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따른 캘리포니아주의 고육지책은 캘리포니아주에 본사를 둔 기업에 대해서는 이 본사의 손익여부와 상관없이 기업의 전지구적 영업의 평균이윤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지구평균세’였다. 즉 초국적 기업에 대한 주민들의 반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방은 허무하게 주민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법이 통과되자 캘리포니아주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 모두 다른 주로 이전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나마 ‘떡고물’ 마져 잃게 된 캘리포니아주는 주민투표를 재차 실시해 이 안을 실시도 하기 전에 폐지해 버리고 말았다.

최근 ‘지구화’와 관련하여 수입개방, 자본개방 등 무한경쟁에 따른 외국기업 등의 국내진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전사회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으며 노동운동계를 비롯한 민중운동세력 역시 미흡하나마 이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할 국제경쟁력 제고라는 김영삼정권과 자본의 공세, 나아가 이번 노동개혁과 관련하여 자본이 필사적으로 밀어 부치고 있는 정리해고제 등 개별노사관계법의 개악 등에 대한 민중운동의 저항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구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 즉 삼성, 현대, 대우, LG 등 국내유수의 기업들이 앞다투어 내놓고 있는 ‘세계화 경영전략’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해외 생산시설의 투자와 생산시설의 해외이전 계획이다. 한국 재벌기업들의 명실상부한 ‘초국적 기업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목전으로 다가온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과 함께 이는 우리나라도 이제 어엿한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된 징표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위에서 소개한 미국의 경험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이와 관련, ‘지구화’에 가장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이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발표한 ‘글로벌 사업 구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유럽에 전차종을 생산하는 자동차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하여 여기에서 생산된 “소형승용차 5만대와 중형 트럭 2만대 등 연간 7만대의 자동차를 국내로 역수입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제 우리 기업이 외국에서 외국 노동자들을 고용해 만든 ‘기이한 수입국산차’를 타고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아직도 별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운동과 민중운동 세력과는 달리 정부와 보수언론 등은 문제의 심각성을 실감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석과 처방은 엉뚱하기 이를 데가 없고 기본적으로 ‘반민중적’이다. 즉 한국의 문제는 고지대, 고물가, 고임금이라는 ‘3고’ 현상으로서 이같은 국내 기업의 해외 탈출을 방지하고 외국 기업을 국내로 유치하기 위해서는 공장부지를 싼 값에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물가 뿐만이 아니라 임금도 국제경쟁력이 있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기막힌 논리이다.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한국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각종 특혜를 제시하고 있으며 현지 노동자들도 얼마나 자본에 우호적인 조건을 기꺼이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느냐에 대한 특집들이 보수 언론에 대거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민중운동 진영은 먼 산 바라보듯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운동의 최대의 벽은 ‘공간적 격차’ 내지 ‘조직적 격차’라고들 이야기한다. 즉 자본의 힘에 대항해 노동자들이 어렵게 조직화를 하면 자본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 버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백여 년의 세월이 걸려 전국적 조직을 만들어 자본의 공간적인 조직수준을 따라가면 자본은 이제 지국화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이 경우 자본은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지만 노동은 국경에 묶여 있을 따름이다. 특히 오랜 전통과 탄탄한 자기 기반을 갖춘 서구와 달리 우리의 노동운동은 사실상 수십 년의 공백을 넘어 이제서야 어렵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시점에서 이같은 자본의 초국적화를 맞는다는 점에서 이같은 국내 기업의 생산시설 해외이전, 분산이 노동운동 나아가 국민 경제에 끼칠 악영향은 더욱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가 <자본>의 서문에서 영국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하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경고한 한 경구가 생각난다.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지구화의 또 다른 얼굴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한/노/정/연

1996-07-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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