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현장에서 미래를 > 컬럼 > 목록보기 > 글읽기

 
글쓰기
 세상만사/

현장에서 미래를  제117호
고암


세상만사/


글쓰기


고암(古岩)




필명 사용하기

‘고암’이란 필명은 중학교 때 지었다. 내 이름 중간에 집안 돌림자인 석(錫)자가 있어 같은 반 친구들은 ‘돌’이라 놀렸다. 해서 같은 값이면 ‘푹’ 오래되고(古), 돌맹이 따위가 아니라 ‘바우’(岩)라는 심정으로 “[고암](古岩)이라 지어 이리 불러라”고 내질렀다.
대개 사람들이 친한 척하기 좋고 우습게 여겨하기를 좋아하니 내 이름에 돌 석(石)도 아닌 한글만 같은 단어인 석(錫)자에다 ‘돌’자를 붙이기를 좋아했었던 것이다. 나는 자주 멍청한 짓도 한다. 그래서 고암은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되었다. 그때부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스스로 부르기를 작정해 오늘날까지 왔다. 이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고암’이란 필명의 역사다.
[호]란 것이 대개 삶을 살면서 일가견을 이룬 옛사람들을 아호나 호로 이르는 경우를 보았겠지만 말했듯 그런 것관 거리가 멀다. 순전히 놀림에 대한 방어와 ‘겉멋’ 탓이다. 그러고서 제 삶의 밧줄을 철도에 걸고 살다가 지부에 몸담으며 소식지에다 (순전히 할 사람이 없어서 강제로) ‘빈 페이지를 메우게’ 되고, 또 해고 10년 동안 이래저래 시시껄렁한 글에 붙인 이름이 고암(古岩)’이었다. 고암, 어째 멋스럽지 않은가. 이래서 철도에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내 ‘필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쓰기에 ‘고암’이란 필명을 사용하는 것이 굳이 실명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 낮은 글쓰기에 있어 나의 전통(傳統)을 지키려 함이니 씨들께서는 곡해 없기를 삼가 바란다.

글 쓰기

글을 써달라고 부탁받았는데 어렵다. 쓰자니 쓸 게 없다. 글이 무게를 가지면 무게를 가진 만큼 제 몸에 근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고, 시시껍절한 이야기로 주절거린다면 이 책이 가진 진지함에 황칠을 하는 것 같아 어렵다. 그렇다고 현장 이야기를 하자니 실천한 게 없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니 내세울 게 없다. ‘행동이 말보다 큰 소리를 내는 법’인데 행동한 게 별 없고, 아직도 쉽게 좌충우돌하고 말이 앞서는 바탕이 가라앉지 않은 사람인데다, ‘글’이란 게 정좌(正坐)까지는 아니더라도 짐짓 차분하게 머리를 간추려야 하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자칫 요모조모 안걸리게 생각하고 쓰게 되면 사람이 ‘점잖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일까 그것도 두렵다. 내 주변엔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 성취 따위가 아니라 어떤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욕이나 안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망설이게 한다.
한 가지 붙잡는 생각은 이랬다. 낫살이나 먹고 이쯤 사니, 우리가 딛고 있는 삶이 우리를 충분히 질풍노도의 삶으로 몰고 가야 하고, 엄격함과 진지함 외에도 분노와 그에 걸맞는 철저함으로 세상을 직빵으로 바라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풍노도만이, 또 엄격함과 진지함과 분노만이 있는 건 뼈대만 있는 ‘앙상한 골격’일 것이라 알아보았다. 그러면 흔하디 흔한 ‘허접 쓰레기’같은 일상이 제 삶의 바탕이고, 이런저런 관계가 그 활동의 밑자락이듯이 사람처럼 골격을 채우는 것은 ‘살’이 아닐 것인가.
옳거니. 너무 허접하고 식상해서 글에는 보통 쓰여지지 않는 ‘밥’과 ‘반찬’은 삶의 영위에서 결정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진지한’ 글에는 나타나지 않는 ‘똥’이나 ‘오줌’도 사람이 일주일만 배설하지 못하면 얼굴에 누런끼부터 도는 것이 사람일진대, 허접한 글도 이 진지한 책에 살을 붙이는 데 쓸모가 있을 것도 같다는 것이다.
소를 삶아도 몇푼 안하는 ‘소금’으로다 간을 못 맞추면 ‘입맛을 버리는’ 법이라고 옛사람이 갯가에 발 담고 곰방대 빨면서 말했는데, 이런 글쓰기가 이 책의 진지함에 살과 소금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글의 허접함은 보는 이가 직접 간을 쳐서 보아주어야 한다.

세상 편하게 살기

세월!
유사 질풍노도의 해고 10년 동안 그 빡빡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마누라는 참 신통 또 방통하다. 물론 지금도 우리 집 살림은 빚으로 혈액순환시키득기 살고 있으나 ‘삼각함수-인수분해’가 필요한 우리집 가계부로 그래도 버티는 걸보니 10년 너머 지켜온 나의 ‘집안 살림 신경끄고 살기’ 노선(路線) 유지는 아직까지 문제없는 걸로 보인다.
가령 마누라가 무엇을 보고 혹해서 “돈 있으면 저것 사고 싶은데”하면 나는 언제나 “사면 되지!”한다. 이 말엔 무게도 없고 돈도 들지 않는다. “사지!” 하면 마누라는 그냥 옆에 무슨 잡새가 지지배배하나 그런다. 그러니 마누라는 제가 알아서 생각을 잘 정돈(整頓)한다. 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집 병권(兵權)을 쥔 나는 경제권(經濟權)을 쥔 마누라의 자주권 영역을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종종 지출에 있어서 마누라 권한을 침범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무한정 편하다. 서열? 서열은 동등하다. 그래도 까놓고 말하자면 병권(兵權)을 쥔 내가 아무래도 밑인 것 같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왕 아닌가. 부하? 부하는 달랑 아들 놈 하나다. 아직까지는.
이 마누라가 해고 10년 동안 소속에서 일자리를 마련해 준 매점에서 10년을 근무했다. 매점은 해고자 부인둘이 교대하며 본다. 이제는 남편들이 복직했지만 최근까지 근무해왔다. 급여 60여만 원 정도. 내가 10년 동안 철도노민추, 철민추 활동하면서 들쭉날쭉 가져온 생계비를 엎쳐도 얼마 되지 않는데 이걸로 찌지고 볶았던 마누라를 나는 ‘존경’까지 하는 심정이다.
거의 11년 만에 복직하고 보니 여태 승무하고 돈 번 동기들에 비해 그리 못하게 산 것 같지 않다. 물론 빚이야 좀 있지만. ‘엄앵란’이 하는 말이 “501호 사는 거나 1503호 사는 거나 거기서 거기”라더만. 맞는 말 같다. 봉급쟁이 어디가겠나.
하지만 요즘은 문제가 많이 있다. 해고생활 할 때는 자타가 가져가는 게 없다고 알아 얻어먹는데 버릇이 되었고 또 별 미안하지 않았는데, 복직하고 나서는 ‘알아도’ 그게 그렇지 않다. 넘들 내는 만큼 내어주어야 하니 지출이 많이 생긴다. 급여에서 연급불입 몫으로 목돈 제하고 거기다 술도 먹고 생각 외 잡일에 이래저래 섞이기도 하니 통박 굴릴 일이 더 많아진다.
허나 돈 걱정하고 사는 게 재미 쏠쏠하다.

마누라 세상 나서기

일이 이렇게 되었다.
내가 94년 6월에 해고되고 05년 10월에 복직되었으니 11년 만에 복직된 셈이다. 37세의 동안(童顔)이었던 영계에서 복직될 때 머리가 히끗해서 였다. 복직 1년 만에 정기 신체검사를 받는데 뭔가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고혈압 의심’, ‘고지혈 의심’, ‘신장질환 의심’이다. ‘의심’이니 아직 걱정할 일은 아니다. 늘어나는 뱃살 때문에 마누라 졸라 러닝머신도 사놓고, 인근 산에도 왔다갔다 하니 몸무게는 작년에 5킬로 정도 줄였지만 혈압 약은 먹는다.
해고도 인생계획서에 나와 있던 게 아니듯 세상일 모르는 일이고, 마누라 매점 일도 10년이라면 오래 있었다. 매점 일을 마누라가 ‘쭈그렁바가지’ 될 때까지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도 단순하다. 자기를 확인하고 기를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어떻게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마누라의 여린 심성(아는 사람은 다 짐작한다)을 좀 무디게 하는 것도 필요했다.
또 하나의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매점과 같이 운영되는 식당의 적자다. 철도가 공사되고 근무체계가 철야2교대제에서 3조2교대제로 바뀐 것이다. 사람이 3개조로 나눠지고 이 인원조차 식사시간과 연결되지 않아 식당의 식수인원이 대폭 줄고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식당운영위원들께서는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노심초사(勞心焦思)했었고, 이래서 절치부심(切齒腐心)의 ‘획기적인 방안’들을 생각해냈다. ‘식당. 매점 외주화!’ ‘식당 아줌마와 매점 관리인력중 1인 인력축소!’ 등이다. 획기적이지 않은가. 적자(赤子)면 팔아넘기는 게 장땡이고, 사람 짤라 내는 게 수다.
사실 식당매점은 출퇴근시간이 일정치 않은 철도근무여건상 늘 식사문제 때문에 애먹다 93년경 지부가 나서서 ‘조합원 출자금’을 모아 자력으로 마련한 것이다. 때문에 식당운영위원은 대개 차량지부와 승무지부 간부거나 열성조합원이 맡아왔었다. 사무소 관리측에서도 같은 운영의 책임단위로서 운영위원에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식당과 매점의 설립은 애초 이익창출이 목적이 아니었다. 조합원의 ‘불편해소’가 그 목적이었고 식당은 기초욕구 해소로, 매점은 사소한 것들의 구매 편리함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더러 이익이 많이 남으면 조합원에게 선물로, 또는 좋은 부식으로 해결해왔다. 그런데 적자가 되니 새로운 가치관이 나타났다. 획기적인 방향전환이었다. 철도공사 적자타령도 마찬가지다. 이윤관념으로 생각하면 적자타령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하여간 이 획기적인 방안 중 ‘외주화’는 조합원 출자금을 돌려주어야 하는 문제와 식당건물이 허가받지 않은 건물인지라 진작에 ‘가위표’되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부담은 계속 작용하고 있었고 적자는 눈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작용과 반작용. 서로를 도우고 북돋아서 결국 마누라가 매점 일을 그만두고 ‘바람찬’ 세상에 나선 것이다. 그것이 보험회사다.
요샌 마누라 바쁘다. 공부한다고, 거친 세상을 배운다고 ‘근거 없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공부는 암기하는 거고 배우는 건 경험하는 것이니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비록 ‘근거가 없긴 해도’ 삶이 펼쳐놓은 냉혹함과 차가움의 갈피갈피에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다는 걸 알아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때론 힘들어 한다. “첨엔 누구나 힘든 법”이라며 스스로 다그쳐서 나를 놀라게 해서 좋고, 자신의 일을 가져서 좋은 일이다. 게다가 돈까지 번다면 그것은 더 좋은 일이다.

마누라 다시 보기

시간을 뒤로 돌려서 또 보자.
위에 말했듯 이렇게 적자가 나자, 식당운영위 회의만 열면 운영위원들의 입에서는 늘 외주화, 인력감축 이야기만 머리 내민다는 소리를 듣고 마누라는 "나가라고 떠밀어도 쟤들 미워서라도 못나간다. 있을 때까진 있을 거다"고 입을 앙 다물었다.
이 말을 내가 해석하기로, “있을 때까진 있겠다”는 마누라의 이같은 입장은, 명퇴나 희망퇴직의 껍질을 쓴 구조조정의 압박 앞에 맞서는 ‘주체성 있는’ 노동자의 '일갈'이요. 생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당당한 의지표명으로 해석할 수 있겠고,
“쟤들 미워서라도 못나간다”라는 마누라의 일갈은, 철도사유화 저지, 외주화 반대,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부르짖으며 몇 번의 파업까지도 불사했던 노조의 간부들이 (사용자로 있는) 식당이 아닌가. 그런데 경영악화를 기화로 어찌 그리도 사측과 똑같은 행보를 취하는가 하는, ‘그 디딘 자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타이기도 한 셈이었다. 내 해석이 그렇다는 얘기다.
“머리띠 두르고 파업 나갈 땐 언제고, 지들이 완장 차니까 철도청하고 똑같이 하면서 무슨 근거로, 무슨 말로 구조조정 저지니 외주화 저지하면서 파업할 염치나 있나?”하며 일갈하기도 했다. 사실 어찌보면 ‘몽니’로도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흉흉하고 숭악한’ 분위기 속에서 한번은 마누라와 교대하는 매점 관리인(복직자 부인이다)인 제수씨가 ‘식당관리장’(이 녀석도 파업에도 빠지지 않는, 딴은 열성 조합원)에게 조퇴를 신청했다. 부인병 수술하고 출근했지만 통증 때문에 조퇴신청을 한 것이다. 조퇴하면 관리장이 대신 매점 일을 보거나 누군가 대신해야 한다. 관리장은 “그렇게 아프시면 아예 출근을 하지 말든지 해야 어떻게 해보지. 큰형수(우리 집사람)한테 봐달라고 다시 나오라고 하던지. 나는 모르겠어요” 하며 퉁겨져 나갔던 것이다.
마눌이 집에 있다가 전화받은 건 그 제수씨의 ‘울음섞인 목소리󰡑였다. 전화받고 난 마누라가 한 순서는 대강 이랬다. 1. 먼저 옷 입고 나온다. 2. 참, 나오기 전에 ’거울‘을 보겠지. 3. 사무소에 도착한다. 4. 누군가를 수배(手配)해 제수씨를 차에 태워 보낸다. 5. 머리 위 스팀을 정리한다. 6. 현 관리장과 전 관리장을 호출한다. 7. 모가지 쑥~ 빼고 이들이 깨금발로 왔겠다.
마누라는 이렇게 말했다한다.
“두 사람 들어바라. 관리장이 뭐냐? 관리장이 호령하고 관리하는 직장상사냐? 아니다. 식당. 매점의 바깥 일, 내부 일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당신들 신분도 뭐냐? ‘노동자’아니냐. 설사 백번 양보해 당신들이 사무소 인간들처럼 ‘사용자’라 하더라도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보내야 하는 게 상사든 뭐든 해야 할 인간적인 도리인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들은 조합원이고 간부 아니냐. 그것도 ‘완장’이라고 아픈 사람 병원 못가게 막는 당신들이, 집회나 파업 나갈 때 못 가라하고 참가자 이름 적고 징계먹일 궁리하는 000같은 못된 놈과 뭐가 다른가. 당신들이 그렇게 하고서 그 사람들 보고 악질 관리자니 뭐니 욕할 자격이 있나?”
여기서 마누라가 침을 찍 뱉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내친 김에 따따블로 이런 말까지 했었다 한다.
“조합원일 때 다르고, 관리장일 때 입장이 다르면 철도공사도 [적자]라는데 인력충원, 구조조정 저지 같은 것을 무슨 말로 일반 사람들에게 설득할거냐. 식당이 적자라면 먼저 매점이나 식당 아줌마들하고 낭비요소가 없는지 어떤 걸 조정할지 식수인원을 늘일 방법이 없는지 진지하게 의논하고 모색할 생각은 먼저 않고 지들끼리 모여서 불쌍하고 힘없는 식당 아줌마들, 매점 아줌마들 줄일 생각이나 하고 외주화니 ‘떠넘길’ 생각하는 당신들이 철도청과 머가 다른가. 그리고 식당적자를 왜 매점까지 싸잡아 책임져야 하는가.”
옳다. 옳다. 적자를 왜 노동자들이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말이 아닌가.
사건종결! 이래서 두 녀석은 사과하고 그 다음다음날 출근한 복직자 마누라에게도 사과했다한다. 이 사건을 겪고 마누라는 만정이 떨어졌다고 했다.

아들 놈 다시보기

아들놈이 이번에 수능을 쳤다.
학비가 절반수준인 ‘국립대학’에나 갔으면 했지만 실력이 안됐다. 사립대로 가기로 해 결국 학비는 두 배 들게 되었다. 아쉬움을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머리도 겁나게 좋은 급진(急進)보다 중도(中道)가 좋은 것이라 자위하는 중인데 녀석이 과(科) 장학금 받는단다. 생명이란 진보하는 것이니 확실히 지 애비보다 잘난 넘이다.
이번에 이 넘은 제 여자친구와 같은 학교로 간다. 애비가 덤벼들 새도 없이 지들끼리 결정했다. 이 녀석이 잘난 건 또 있다. 지 애비가 여태까지 도통 경지에 오르지 못한 여심흡수신공(女心吸水神功)을 터득한 것이다. 이 녀석 여자친구를 챙기는 것을 보면 그 정성과 노력이 눈물 없인 보지 못한다. 여자친구가 수능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하자 그 녀석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여자친구가 아르바이트 마치는 시각인 0:00보다 30분쯤 일찍 나가서 여자애가 마치면 긔 집까지 데려가 주고 온다. 자다가도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난다.
“오늘 비가 너무 오는데 전화하고 말지”하면 “긔는 혼자 집에 가기 더 힘들 텐데요”한다.
선물작풍묘법(膳物作風妙法)조차 터득했는지 선물 또한 직접 만들어 주고받고 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인터넷을 뒤지고 책상 앞에서 무엇무엇인가 똑딱똑딱 만드는 것을 보면 그 정성이 지켜보는 내가 땀날 지경이다. 그게 고3 공부하는 시간을 나눈 거다. 쯧쯔.
여자친구와 자주 집에 오는데 지 부모들과 같이 있는데도 여자친구의 입에 먹여주고 챙겨주고 하는 것이 애비로서는 보기 사납다. 덕분에 마누라한테 한 소리 듣는다. “넘씨가 저렇게 한번이라도 하면 소원이 없겠다. 확실히 우리 아들은 아버지 안닮았다” 한다.
암. 닮지마라. 닮지마라.
우리 집 식구들 별명이 있는데, 자주 몸살을 앓는 마누라를 [부실1호]. 자주 감기 앓는 아들놈이 우리 집안 [부실2호]라 별명지어 주었었다. 수능을 친 오늘에도 내 눈엔 아직도 아들놈이 부실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요근래 우리가 외출하기 직전에 막 축구하러 갔길래 지 엄마랑 같이 몰래 가서 보았다. 흐미-. 제 청장년들 선배들과 어울려 공을 차는데 녀석이 너무 의젓해 보였다. 당당하고 어른스러웠다. 이젠 놔먹여도 되겠다.
그때 난 우리 아들놈을 다시 보았다.

노동대가 상납받기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지난 1월, 마누라가 첫 월급을 탔다. 봉투를 주는데 보니 20만원이 들었다. 아들에게는 10만원 보너스를 준다. 겉봉에 ‘넘씨, 감사합니다. 결단하는데 용기를 얻게...’ 머라머라 운운(자세히 쓰기에는 내 나이가 있다). 입사동기생 중 그래도 잘한 편이란다. 아먼, 많은 분들이 도와주었겠지. 하여간 힘내고 애쓰는 게 마음 놓인다. 여린 마음이 다듬어지기 전에 마누라가 해야 하는 실망은 두려운 일이다.
받은 돈으로 ‘광동면’시켰다.
돈복이 터졌다. 또 며칠 있다가 아들놈이 생전처음 아르바이트하고 ‘노동대가’를 받아왔다. 꽤 힘든 곳이라 받은 돈이 제법 된다. 37만원! 하여간 제 여자친구가 먼저 아르바이트하고 거기다 취직시켜 주었단다. 역시 잘난 넘이다.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네게 준다. 그 봉투에는 ‘아버지 제 첫 급여입니다. 제발 이 돈으로는 유흥(술, 담배)으로는 지출하지 마세요. 담배 끊으시고요’ 라고 썼다. “알았다. 그 돈은 술, 담배 사는 데는 안쓰지.”하고 받아 챙긴다. 봉투를 버릴까하다가 나중에 제 놈 보여주려고 모셔 두었다.
이날도 제 여자친구와 같이 왔길래 어른으로써 한마디 없을 수 없어 헛기침 한 두어 번 하고 짐짓 다듬어 말한다. ‘세상 일이 이러저러하고 요리조리하니 늬들은 여차저차하여라.’ 험험...
그래놓고 혼자앉아 텔레비 보며 무게 잡는데, 제 엄마와 아들, 지 여자친구가 모여앉아 과자까지 까먹어가며 전공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는 척했다가 ‘뒷북친다’는 소리만 들었다. 해놓고 지들끼리 ‘깔깔. 헤헤’ 거린다. 헐, 밥 먹고 늙을 일밖에 없나보다.
받은 돈이 온전히 잘 있는지 한 번 더 본다.

‘유사’ 활동가 노래방 가기

나는 활동가가 아니다. 이론으로 무장(武裝)되지도 않았고, 실천으로 단련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조합원은 거의 그렇게 생각한다. 해고 11년째를 ‘선산의 못난 나무처럼’ 노동조합 활동을 해오다보니 그렇다. 그러면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다.
노민추활동이나 복직해서거나 사람만나는 일에 웬만하면 술이 빠지면 안되는 게 현실이다. 이것이 어렵다. 술 먹으면 으레 노래방이다. 노래방에 가면 ‘도우미’가 온다. 지들끼리 부르는데 도우미가 저절로 오나? 그건 아니다. 부르니 온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도우미를 부르는 게 옳은가 아닌가를 따지고 말고 하기 전에 나랑 같이 간 조합원들은 ‘왔으니 신나게 놀고 가겠다’는 거고, 그러려고 온 거다. 노래자랑하려고 노래방을 찾는 건 아니다.
갈등은 있었다. 내가 아니라 날 노래방으로 부른 이 친구들이다. 좋게 볼지 나쁘게 볼지 이해할지 기분나빠할지 머 그런 거다. 분위기를 여러 번 조졌다. 꽤 여러 번 분위기를 ‘눈물겹게’ 만든 뒤에 ‘뜻한 바가 있어’ 대오각성(大悟覺醒)했다. 재밌게 노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도 이로운 일이다. 그래서 잘 논다.
돈빨로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바람을 정돈(整頓)하고 구름을 수습(收拾)하러 공중부양(空中浮揚)할 수는 없는 이상 겪고 살아야 한다. 도우미가 필요악이든 순전히 악이든 도의적이든 아니든 구조를 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체제가 ‘돈빨’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 속에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노래방 도우미도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로 비롯되었지만 먹고 입고 사는 일이 그 속에 있듯. 말하자면, 마누라가 하는 보험도 사적 자본을 무한정 배불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이나 그 속에도 먹고 입고 살고 하는 일이 달려있으며 그렇다고 이 허술한 사회보장 제도 속에서 ‘밉다고’ 그것 없이 살아가기는 난감한 일이다. 아들놈이 찾는 ‘발렌타인데이’, ‘뻬빼로데이’니 화이트데이니 ‘기념일 만들기’ 풍조도 자본주의 ‘물질’ 사회에서 허영과 소비를 부추기는 아랫질 풍조지만 거기다 재미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제 또래와 같이 나서 배우고 겪는다. 앞으로도 ‘별일 없는 한’ 사회에서 살아내야 할 ‘아들의 사회’인 다음에야 제가 제 원칙을 가지고 살 도리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내공이 강한 사람은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고 약한 사람은 ‘겪어야’ 한다.
오늘도 도시 곳곳에 새까맣게 널린 노래방은 넘쳐나고 있고, 나도 나의 원칙을 가지고 노래방서 흥겹다.
‘바람소리처럼 멀리 사라져 간 인생길’ 쿵짝쿵짝!

2006-02-28 14:20:17

의견글쓰기 프린트하기 메일로 돌려보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