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통신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현주소
또다시 일어서는 지하철 노동자
이번 호 현장 통신에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울산 지역 노동 운동의 현주소’는 96년 상반기 울산 지역에서
전개된 주요 사업장의 투쟁과 특징, 노동조합과 현장 조직을
중심으로 본 조직 지형 등을 다루고 있다. 노동 운동의
메카로까지 불렸던 울산 지역 노동 운동의 힘겨운 현실은 단지
안타까워할 사안이 아니다.
울산 지역의 현실은 대중 동력의 형성과 이를 가능케 할
지도력의 구축을 전체 노동 운동의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을 통해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돌파를
위한 이론적 실천적 접근이 구체적 수준에서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일어서는 지하철 노동자’는 열차 1인 승무제와 안전을
무시한 불법 용역 철폐를 그 내용으로 하는 부산지하철의 직제
개편 투쟁의 배경과 현황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사업장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신경영 전략의 대응 사례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호 현장 통신에 담아 보았다.
울산 지역 노동 운동의 현주소
-96년 울산 지역 임투 평가-
이종호(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대표)
1. 현총련, 민주노총 울산시협의회, 금속연맹 울산지부
96년 2월 8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조합원 총회에서 59.68%의
찬성으로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을 통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가입을 결정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이 이미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금속연맹) 가입을 결의한 상태이고,
현대정공 노동조합이 현총련이냐 금속연맹이냐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자동차업종 노동조합의 핵심 사업장이며
현대그룹 노동조합의 주력 사업장이자 전국 금속노동조합 가운데
최대 단일 노조인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현총련을 ‘선택’한
것은 여러모로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금속연맹 가입을 천명한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캐피코 노동조합의 ‘결단’ 앞에서 자신의 ‘운명’까지
고민해야 했던 현총련이 ‘생존’할 수 있었다. 현총련은 2월
10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금속 산업 세 조직 통합안을 특별
결의로 통과시킴으로써 금속산업 노동조합 내 3주체의 하나로
스스로를 재정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둘째, 업종 내 주력
사업장(완성, 판매, 정비) 노동조합들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고
있던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자동차연맹)이 현총련의
‘생존’으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당위에서
현실로 옮아가고 있던 ‘철의 노동자 총단결’은 현총련,
금속연맹, 자동차연맹이라는 금속 3주체의 분리․정립으로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때문에 울산 지역 민주노조들의
상급 단체가 세 갈래로 분화되고 중첩되는 게 불가피해졌다.
현장통신
울산 지역 노동 운동의 현주소
2월 9일 18개 민주노조가 참가하고 3개 노조가 참관하는
울산지역 6만 5천 노동자의 단일 대오,
민주노총울산시협의회(시협)가 닻을 올렸다. 시협은 89년
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준비위원회(울노협준비위), 94~95년
울산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울노대)의 적법한 계승자였다.
시협의 창립은 현총련과 효문․남구지역으로 나뉘어
발전해온 울산 지역 민주 노조 운동의 한 시대가 마감되고,
‘울산지역 민주노조 총단결’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시협은 현총련과 금속연맹으로
분리․중첩된 지역 내 조직 지형의 불안정과 복잡함,
여전히 남아 있는 현총련과 남구․효문 지역 사이의
‘차이’와 ‘대립’, 울산 지역 전체 조직 노동자의 압도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조직 현실 속에서 출발부터 힘겨운
씨름을 해야 했다. 2월 9일 시협 창립 대의원대회는 결국 임원을
선출하지 못하고 성화섭(한국프랜지 노동조합 위원장) 임시
의장과 천창수 임시 사무처장 체제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현총련 산하 금속 노조들이 더 이상의 ‘혼란’ 없이 어떻게
산업별 재편을 완료하게끔 할 것인가? 지역의 앞선 투쟁
동력들을 중심으로 96년 임투를 전진 배치하고 중후진 사업장을
후진 배치함으로써 현총련이라는 틀보다 넓은, 말 그대로의
‘울산 지역 연대 투쟁’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중간노조들의 참관을 넓히고 참가를 이끌어냄으로써 상당수
어용노조 사업장의 노조 민주화 투쟁을 촉진하고 이 힘을 근거로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 확대 사업을 벌여내야 할 텐데 이
일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시협 앞에 놓여진
과제들은 이렇듯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임시’ 집행
체계로 이 과제들을 풀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5월 15일 유서 깊은 만세대 오좌불 숙소 공터에서 500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금속연맹 울산지부(금속지부)
출범식과 96 임단투 전진대회’가 열렸다. 금속지부는 이
자리에서 준비위 딱지를 떼고 지부 의장에 김임식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함으로써 공식 출범을 알렸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효성금속, 동성 등 4개 민주 노조가
참가한 금속지부는 현총련 소속 금속 산업 노동조합의 다수를
포괄하지 못하면서 ‘왜소’하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현총련, 시협, 금속지부로 지역 민주 노조들의 상급 단체가
분리․중첩되고 시협이 의장조차 선출하지 못한 상황은
96년 울산 지역 공동 임투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지도 단위의
공백을 초래했다. 실제 임투가 진행되면서 시협은
대표자회의조차 소집하지 못했고 ‘현총련 따로 금속지부 따로’
상층 논의와 집행이 분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다고
현총련은 현총련대로, 금속지부는 또 금속지부대로 성과 있는
연대 투쟁을 벌여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별로 각개약진했던 게 올 임투의 본 모습이었다. 이렇게
된 건 무엇 때문일까? 속내를 들추면 엉켜 있는 여러 문제들이
보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발걸음을 함께 하지 못한 데 있다. 95년 두 사업장에
동시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섬으로써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현대자동차 4.28 연대 투쟁,
93년 현총련 공동 임투에서 ‘운명’을 같이 했던 이 ‘쌍두
마차’의 ‘96년판 벅찬 재회’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태광산업․대한화섬과 동양폴리에스터에 민주
노조가 들어서고 세종공업 노동조합이 기나긴 노조 정상화 투쟁
끝에 민주 집행부를 ‘회복’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지역
연대의 조건이 좋았던 터라 그만큼 더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96년
임투에서 그렇게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는 첫째,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끌어들이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을 배제시키는
자본과 정권의 철저한 분리․차별화 전술과 둘째, 금속
산업 노동조합의 조직 재편을 둘러싼 두 사업장 노동조합의 입장
차이, 그리고 셋째로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의 일정과 상황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상급 단체들의 ‘무능’때문이었다.
2.울산 지역 노동자 연합 조직 건설을 위한 현장조직
대표자회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 현대정공
부서동지회연합(동지회연합) 준비위원회, 울산남부지역
노동자연합(남노련) 등 4개 현장조직현장 조직은 노동조합과
구별되는 현장 활동가 조직이고 노동자 정치 조직과 구별되는
선진 노동자 대중 조직이다.
은 한국전력 노동조합 김시자 열사 분신 투쟁을 계기로 처음
만나 네 차례의 간담회를 갖고 매주 각 현장 조직 의장단과 집행
단위가 참가하는 현장조직대표자회의를 상설화하기로 합의했다.
3월 5일 제1차 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열렸고 첫 사업으로 3월
9일 ‘노동자연합조직 건설을 위한 현장조직 대표자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모인 현장 조직 대표자들은
“기업별 노조의 벽을 깨고 산별 노조를 건설하는 데 앞장설
것”, “노동자의 권익을 올바로 쟁취하기 위한 정치 세력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 “지역 노동 운동의 발전을 위해 실천
가능한 사업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연대를 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소속 현장 조직 실태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활동 보고를 체계화하는 등 회의 체계를 다지는
한편, MBC와 한국합섬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을 지원하고 한일이화
노동조합 권급섭 위원장과 이준균 수석부위원장 구속에 맞선
항의․연대 투쟁에 결합했으며 6월 9일 300여 명의 현장
활동가들이 모여 ‘96 임단투 승리를 위한 울산 지역 노동자
체육대회 및 결의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연대 투쟁을
벌였다. 이 밖에도 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현총련이 지역 연대
투쟁에 실제로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해 시협 대표자회의가 하루
빨리 정상화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촉구하는 등 임투 시기
노동조합 상급 단체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적절한 비판을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단위 사업장 현장 조직과
노동조합의 관계나 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지역 노동조합 상급
단체의 관계가 그만큼의 공식성과 규정력을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현장 조직(운동)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갖는
관계의 독자성과 규정성이 아직 완전하게 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와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지역 차원에서 더구나
대표자회의 수준으로 현장조직의 지도부가 지역 노동조합의
지도부와 공식 관계를 맺고 연대 투쟁을 실제 추동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노동조합에 대하여 현장
조직의 실체와 필요성을 인식시키기도 힘들었던 게
현실이었다.
95년 자본의 신경영 전략에 맞선 대중 투쟁의 한가운데서 재건된
현장 조직들은 96년 임투 과정에서 대표자회의라는 틀로
결합하여 앞선 연대 투쟁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노동조합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안팎으로
어려움들이 많았지만 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91년
울산민주노동자협의회(울민노), 95년
울산노동자연대투쟁실천위원회(울연투)의 적자(嫡子)로서 800여
명에 이르는 울산지역 현장 활동가들의 단일한 조직 구심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첫 ‘시동 걸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임투 과정에서 단 한 차례 공동 유인물을
배포하는 것에 그쳐 지역 임투에 대한 현장 조직 차원의 단일한
목소리를 모아 내는 데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7월 9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임금 협상에 잠정 합의했을 때 이를 강도
높게 비판한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유인물 초안이 현대자동차
민투위의 난색 표명으로 통과되지 못한 것은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과 현장 조직의 관계, 현장 조직 내부의 갈등과 이견,
현장 조직과 현장 조직 사이의 차이와 불균등성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현장 민주 세력 내부의 ‘분화와
결집’이라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3.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의 파업 투쟁
96년 울산 지역 임투는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의
파업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
5대 집행부(위원장 최상범)는 6월 8일 조합원총회에서 조합원
90.99%의 찬성으로 쟁의 행위를 결의하고 83.72%의 찬성으로
민주노총 가입을 결의했다. 6월 18일 부분 파업을 시작으로 투쟁
수위를 높여 가던 노동조합은 6월 26일 시한부 전면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오랜 침묵을 깨고 울산 지역 96년 임투의 선봉에
섰다.
자본의 태도는 완강했다. 임금 인상 0.3% 제시, 집행 간부 고소
고발, 직장 폐쇄와 공권력 침탈 협박 등이 파업 투쟁에 대한
자본의 대답이었다.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90% 넘는 조합원들이 파업 대오를 유지했다. “끝까지
가자”는 것이 조합원들의 일치된 의지였다.
그러나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의 파업 투쟁은 외로운
투쟁이었다. 이 투쟁을 받아줄 현총련은 7월 10일 이후에나 파업
투쟁이 가능했다.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힘만으로
파업 대오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갓 들어선 민주 집행부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본 또한 조합원들의 열기가 이렇게까지
높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7월 10일 밤샘 협상 끝에 잠정 합의가
이루어졌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잠정합의한 지 딱 하루만의
일이었다. 잠정 합의안은 7월 12일 조합원 81.56%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16일 조합원 61%가 다시 반대하여 또 한 번
부결되었다. 5대 집행부는 7월 19일 집행부 신임을 같이 걸어
마지막으로 조합원 찬반을 물었다. 55.9%의 조합원들이
반대했다. 5대 집행부는 결국 총사퇴했다.
“밀어붙이면더따낼수있다”는조합원들의열기는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8년을 기다리던 투쟁이었다. 1차 부결은 이 점에서
너무나 정당한 조합원들의 의사 표시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
현총련 산하 노동조합들의 쟁발 결의가 집중되고 있었다. 협정
노동자 400여 명에 의해 최소 생산이 보장되는 속에서 파업
투쟁이 공장 밖을 맴도는 작업 거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는 있었지만 2,000여 조합원들의 열기와 역동성은 새롭게
투쟁을 비약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2차
투표는 조급했다. 마지막 3차 투표는 커다란 오류였다. 잠정
합의를 둘러싼 집행부 내부의 갈등이 여과 없이 조합원들에게
그대로 드러나면서 집행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이 증폭됐다.
여기에 집행부 신임까지를 함께 걸어 잠정 합의안 그대로 다시
조합원총회에 부친 것은 무책임한 ‘자포자기’라고밖에 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조합원들이7월23일집행부에대한자포자기의심정으로 잠정
합의안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자포자기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또 받아들이지 않았다.
4.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96년 ‘임금협상’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6대 집행부(위원장 정갑득)는 민투위,
현대자동차 노동자신문(현노신), 노동조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랑) 등 3개 현장 조직의 연합 집행부로 출범했다.
이른바 ‘대등한 노사 관계(론)’은 6대 집행부가 표방한 집행
이념이었다. “대등한 노사 관계란 거대한 총자본의 힘에 맞서
총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유의미한 대립항으로 세력화되었을 때만
쟁취될 수 있는 것이고 그조차도 노사 관계의 불평등이 전제되는
것이며 완전한 의미에서의 대등한 노사 관계는 역사상 노동과
자본의 힘이 팽팽히 맞부딪히는 이중 권력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었을 뿐”「주간 울교협통신」 제20호,
96.5.30.
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국 6대 집행부의 대등한 노사
관계(론)이 내포하고 있던 ‘투쟁참여협조’라는
스팩트럼에서 투쟁참여를 강조한 경향은 소수파로,
참여협조를 강조한 경향은 다수파로 귀결되었다. 올해 임투를
거치면서 6대 집행부의 대등한 노사 관계(론)이 ‘협조적 노사
관계’의 틀 안에서 부분 참여를 넓혀 가는 ‘민주 노조 운동의
이념 수정’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게 됐다. 실제 3기
민투위(의장 이재인)는 임투 평가를 통해 연합 집행부 안에서
노사 협조주의 경향과의 투쟁에 패배했음을 자인하면서 노사
협조주의 경향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고, 투쟁참여를
주장한 경향의 상집 간부 일부가 임투 종결 이후 집행부에서
사퇴하여 현장에 복귀함으로써 대등한 노사 관계(론)으로
표방되는 6대 집행부의 집행 기조에 대한 비판은 행동으로까지
표출되었다.
“요구안 작성 과정에서부터 해고자 복직 문제가 제외된
것”현대자동차 민투위, 「96 임투 평가」. 이
평가서는 3기 민투위가 구성되면서 사업부별 평가를 거쳐
중앙집행위에서 모아 정리한 것으로 8월 20일 10대
대의원선거대책본부 발대식을 갖는 자리에서 제출되어 민투위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되었다. 이하 인용은 다른 각주가 없는 한 이
평가서에 따른 것임을 밝혀 둔다.
, “컨베이어 수당 요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
“5․1절 연대 집회의 불참과 전공장 임투 출정식을 앞두고
준비되었던 승용 1, 2, 3공장의 임투 출정식이 집행부의 만류로
취소”된 사태들은 임투 초기부터 안팎의 많은 우려를
자아냈다.
6월 19일 ‘96 임단투 전진대회 및 양봉수 열사 추모집회’는
“예상을 깨고 대규모의 조합원들이 참여함으로써 96 임투가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집행부는 조합원의 임투에 대한 살아오르는 관심을
받아안지 못한 채 임투를 ‘임금 협상’의 좁은 틀에 가두어
버렸고 다시 현장은 오로지 ‘협상 결과’에만 관심을 갖도록
방치되었다. 27일 12차 협상에 뒤이은 임금 협상 결렬 선언과
대의원대회에서의 쟁의 발생 결의는 집행부가 7월2일 곧바로
다시 협상에 들어감으로써” 그 의미가 퇴색되고 “집행부의
투쟁 의지는 많은 조합원들로부터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지지부진한 협상 끝에 마치 파국을 눈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이루어진 7월 8, 9일의 밤샘 마라톤 협상과 잇따른
잠정 합의는 결정적으로 집행부가 쟁의를 해가면서까지 요구를
관철시킬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7월 8일 현총련
중앙위에서 산하 노조별로 10일부터 일제히 쟁의 행위 찬반
투표를 실시하고 20일 시한부 연대 파업을 벌이기로 결의한 지
딱 하루만의 잠정 합의였다.
7월 9일 잠정 합의 소식이 알려지자 의장 1, 2, 3부 조합원들은
잔업을 거부하고 대의원들은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10일 승용 1,
2, 3공장 대의원들과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연),
의장부총연합(의총련), 도장부연대준비모임 등에서 잠정 합의에
반대하는 부결 선동을 전개했다. 11일 잠정 합의안은 조합원
찬반 투표에서 58.6%로 부결되었다.
부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집행부는 “그야말로 이제까지의
민주 집행부로서의 최소한의 모습조차 깡그리 무너뜨리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총회의 결정을, 조합원의 의사를 숙고하려는 태도는
실종된 채 ‘더 이상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 ‘더 이상의
협상은 구걸이다’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심지어 ‘조합원과의
투쟁’, ‘직권 조인’이라는 막말까지 오르내리기에 이르렀다.
‘부결’의 원인을 냉철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부결투쟁’을 한 대의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실제 노동조합은 “15일 열린 운영위원회에서 재협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표결”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 분노를
자아냈다. “집행부의 표현대로 ‘난국’에 해당하는 부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6일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임시대의원대회는 한 대의원의 표현대로 ‘대의원을 볼모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중앙쟁대위가 비대위로
전환되었지만 그 누구도 쟁의 행위가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은
없었다. 23일 2차 투표에서 잠정 합의안은 70.33%로 가결되었다.
의지 없는 집행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자포자기의
표현이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96년 ‘임금 협상’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임투만으로는 안 된다”는 6대
집행부의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조합 운동(론)’은
‘임투’와 사회 개혁 투쟁의 결합이 아니라 임투를 ‘임금
협상’으로, 사회 개혁 투쟁을 대주민 캠페인으로
변질․분리시켰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현총련을
통해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시협을 강화하여 울산지역 금속
노조들의 통합성을 높여냄으로써 자동차연맹과 금속연맹의
통합을 앞당기겠다던 6대 집행부의 연대 ‘의지’는 현총련
의장과 시협 의장을 정갑득 위원장이 ‘고사’하고, 5월 1일
영남권 노동절 집회에 불참하면서까지 노동절 기념 행사를 단위
사업장 조합원들만의 ‘축제’로 치르면서, 그리고 현총련
차원의 ‘시기 집중’ 일정마저 지키지 못함으로써 ‘말만의
의지’로 그쳐 버렸다.
5.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96년 단임투
1월 4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10대 집행부(위원장 김임식)가
출범했다. 95년 무쟁의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본의 신경영
전략으로 피폐화된 현장 조직력을 회복하는 것이 10대 집행부
앞에 놓여진 가장 절박한 과제였다.
자본은 처음부터 거칠게 노동조합을 몰아붙였다. 9대
집행부(위원장 윤재건)로부터 업무를 채 인수받기도 전에 산기
생산부 조합원들을 8, 9도크로 일방 전환 배치시키는
‘과감성’을 보이더니 전임자를 줄이라는 가당찮은 요구를
하는가 하면 임원진을 뺀 집행 간부들의 임금을 주지 않고
사무비품과 회의 장소까지 내주지 않는 등 “어디 한번 죽어
봐라”는 식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 95년 양봉수 동지 분신 투쟁
관련 해고자들이 복직되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10대
집행부는 현대그룹 차원에서 자행되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고립화 정책’을 시협을 중심으로 한 연대투쟁으로 돌파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현중 노조와 현자 노조의 현 모습은 금속
사업장의 분열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자, 87년 이후 울산 투쟁의
꿈인 현중, 현자의 공동 투쟁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있는”현대중공업 노동조합, 「현중 노조 96 임단투
방향에 대하여」.
현실이었다.
10대 집행부는 초기에 자본의 공격에 맞서 분과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이 점심 시간마다 현장 순회 집회를 계속
벌여나감으로써 조합원들의 관심을 노동조합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금속연맹의 4대 요구 가운데 하나인 작업 중지권
확보를 목표로 현장 안전 순찰을 실시하면서 유해 위험 작업에
대한 작업 중지 명령을 과감히 내림으로써 노동조합의 위력을
조합원들에게 피부로 확인시켜 나갔다. 이러한 초기 현장 투쟁의
결과는 5월 9일 ‘96 단임투 승리를 위한 조합원․가족
결의대회’ 때 10,0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성과로
나타났다.
자본은 5월 4일 김임식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16명을 고소
고발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4월 19일 특수선 가스 폭발로 조합원
한 명이 사망하자 노동조합에서 즉각 작업중지 명령을 내렸는데
이걸 트집잡고 나온 것이다. 자본은 이렇게 10대 집행부의
발목을 잡고 대의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5월 10일
대의원대회에서는 금속연맹 재정 사업을 위한 안건이 부결되었고
6월 4일 쟁의발생을 결의하기 위해 소집된 임시대의원대회가
아예 성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산됐다. 96년 상반기 전국 임투
전선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한 공공 부문 공동 투쟁이 숨가쁘게
자기 일정을 밟아가던 그 긴박한 순간에 참으로 어이없이
‘삐끗’한 것이다. 결국 10대 집행부가 조합 업무를 중단하고
쇠사슬 투쟁을 전개하고 나서야 6월 13일 다시 소집된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가까스로 쟁의발생을 결의할 수 있었다.
7월 10일 쟁의 행위 찬반 투표가 실시됐다. 조합원 77.3%의
찬성으로 쟁의 행위가 결의되었다. 7월 28일 여름 휴가를 앞뒤로
부분 파업이 계속됐다. 자본은 8월 7일부터 직책자들을 동원한
파업 불참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8월 9일 노동조합 창립 9돌
기념식은 회사 운동장조차 빌려 주지 않고 잔업을 강요하는
자본의 방해로 1,000여 명의 조합원밖에 참석하지 못한
‘썰렁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8월 15일 자본은 교섭 도중
일방 퇴장하고 17일 격주 휴무제를 일방 실시하여 노동조합과의
협상을 통한 타결에 별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8월 19일 전체
대의원 215명 가운데 154명의 대의원들이 총회를 전제로 한
대의원대회를 요구하는 서명을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이른바
이들 ‘서명파’ 대의원들은 9월 3일 총회 소집을 요구하는
16,856명의 조합원 서명을 노동조합에 제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전선은 이제 단임투에서 민주 노조 ‘생존’ 투쟁으로
옮겨졌다. 8월 28일 200여 명의 현장 활동가들은 비장한 각오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사수투쟁위원회’(사투위)를 띄워내고
그야말로 노동조합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투쟁에 들어갔다.
9월 2일부터 집행부, 대소위원 등 29명의 무기한 단식 농성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런 막바지 극한 투쟁조차 조합원들을 새롭게
다시 묶어 세우기에는 힘이 부쳤다. 9월 16일 집행부는 추석 전
마무리를 촉구하며 단식과 밤샘 농성, 대소위원과 각종
전문위원들의 전면 파업 등 모든 투쟁을 해제하고 정상 조업에
들어갔다. 이 날 서명파 대의원들은 총회소집권자 지명요청서를
울산시와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했다. 조합원총회에서
지금까지의 교섭 결과를 놓고 조합원 찬반 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마지막 압박이었다. 9월 19일 벼랑 끝으로 몰리고 몰리다 시청에
중재를 요청하여 겨우 성사된 교섭에서 드디어 잠정 합의가
이루어졌다. 9월 20일 조합원들은 60.5%의 찬성으로 잠정
합의안을 받아들였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96년 단임투는 ‘구멍난 현장’의
절망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조합원의 손으로 뽑아올린 대의원들이 집행부를 상대로
‘반란’을 조직한다. 조합원들은 어느 순간 ‘냉정한
구경꾼’으로 돌변해 버리고 “눈물로 호소해도, 경품 왕창
내걸어 돈으로 유혹(?)해도” 꿈적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생존’을 위해 29명의 동료가 목숨 건 단식에 들어가도, 올해
들어서만 벌써 15명이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어도, 하도 많이
‘닦여서’ 그런가 별 반응이 없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지 못할 때 조합원들은 자본의 ‘힘’과
노동조합의 ‘힘’을 냉철하게 저울질한다. 96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단임투는 조합원들의 냉정함 뒤에 숨어 있는 현실의
고통과 요구를 희망으로 집약시켜 내지 못한 현대중공업 민주
노조 운동 진영 전체의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 이
반성으로부터만 대의원 절대 다수가 집행부를 ‘적’으로
조직화되는 이 기막힌 현실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6. 노동법개정투쟁
10월 2일 시협은 몇 달만에 대표자회의를 다시 열어 성화섭
임시의장(한국프랜지 노동조합 7대 위원장)이 사퇴하면서 공석이
되었던 의장 직무대행에 곽대천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했다. 10월 5일 시협, 현총련, 금속지부 소속 노조 간부
전체회의에서 민주노총 노동법개정투쟁 울산지역본부(투본)
구성에 합의하고 10월 14일 투쟁본부장(곽대천 위원장)과
집행위원장(배부철 현대강관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함으로써
3개 조직이 하나의 틀에서 노동법개정투쟁(노개투)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10월 23일 시협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곽대천
위원장을 시협 초대 의장으로 선출하고 시협 체계를 투본 체계로
공식 전환했다. 2월 9일 시협이 창립되고 나서 8개월이 넘어서야
시협이 제대로 자기 꼴을 갖춘 셈이다. 그 사이에 96년 임투가
놓여 있었다. 임투 과정에서 실패했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만남은 그룹과 업종으로 찢겨져 있는 금속산업
노동조합의 대통합 속에서 새롭게 예비되고 있으며 울산지역
민주노조의 총단결 또한 이 과제의 해결로부터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10월 9일 울산해고자협의회(울해협)와 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노동법 개악안 설명회 및 울산지역 노동법 개정 투쟁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고 ‘노동법 개악 저지 및 개정
투쟁 울산 지역 선봉대’(선봉대) 발대식을 가졌다. 선봉대는
10월 14일부터 11월 8일까지 울산 지역의 거의 모든 민주 노조
사업장 정문에서 출퇴근 투쟁을 벌였으며 민주당사, 신한국당사,
정몽준 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항의 방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울산 지역 현장 조직 전체가 이 투쟁으로 총력 집중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앞선 연대 투쟁의 모범은 지역 민주 노조 운동
진영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96년 임투가 남긴 과제는 이렇듯
현장 활동가들의 앞선 투쟁 속에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고
그만큼 극복의 길도 명확해지고 있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