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 제 ◦ 노 ◦ 동
통일 후 동독지역에 대한
독일 노동총연맹의 조직확대와 노동정책
이승엽(독일 Bielefeld대 박사과정, 해외연구원)
1. 들어가는 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열린 후 진행된 일련의 급격한 통일과정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많은 것을
대리경험하게 해주었다. 막연한 감성적 기대 속에서 진행되어
오던 수 많은 통일논의들이 독일통일의 경험을 통해 상당히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었다. 민족적 분단의 ‘고통’과 더불어
통일과정에서 벌어질 혼란 극복에 대한 논의로 쟁점이 상당부분
옮아갔고, 그 주제 또한 세분화되어 총체적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경제적, 사회적 통합, 또한 각 부문간 통일의
문제가 많이 다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독일통일과 노동조합 운동의 경험에 대한
고찰은 별로 많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통일의 일반적 경험이
중요하지만, 개별 사회집단의 조직적 통합의 문제 역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국가적 통합이 총체성의 획득이라면 각
부문별 통합은 구체성의 획득과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통일과정에서 독일산별노총의 역할 및 활동방향은 우리의
관심사가 되기에 충분하다.
통일과 관련하여 독일노동총연맹이 행한 역할은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구 동독지역으로의 조직확장. 2) 구
동독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구
서독노동자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3) 실업구제정책. 본
글에서는 통일 이후 독일노동총연맹의 활동과 역할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제1단계: 자유독일노총(FDGB)의 해체와
독일노동총연맹의 조직확장
1990년 3월 18일의 총선과 정부 출범 후 공식적인 화폐, 경제,
사회통합에 뒤이어 서독식 노동법 및 노사관계체계가 그대로
동독에 적용되었다. 원래 독일산별총연맹(DGB: 이하
독일노총)은 자유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하 자유노총)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통한 혁신이 이루어진 후에 단일산별로의
합병은 원했지만, 사회경제통합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자유노총의
쇄신이 지체됨에 따라 보다 신속한 통합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90년 12월 20일 자유노총은 자체해산을 결의하고,
노동자들은 개인자격으로 독일노총의 해당 산별노조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뒤이어 독일노총은 1991년 초 구
동독지역에 5개의 지부(멕클레부룩-포르폼메른,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엔, 베를린-브란덴부룩)를 건설했다.
동독노동자의 가입으로 독일노총은 조직노동자수가 상당하게
증가하였다. 91년 12월 당시 구서독지역 조직노동자수는
790만여명(67.3%), 구동독지역 조직노동자수는 386만여명(32.7%)
등 총 1,180만명이 독일노총에 가입하였다. 이 당시 대략 49%
정도의 노동자 조직률의 신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동독지역의 조직건설과 더불어 독일노총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동독노동자에 대한 노동상담과 법적 보호였다. 다른
문제에 앞서 노동상담과 동독노동자에 대한 법적 보호가
독일노총의 최우선 정책이 된 데에는 통일 직후 드러난 구
동독경제의 난맥상 때문이었다. 구 동독의 산업은 통독 전의
평가와는 달리 국제경쟁력면에서 제로였으며, 산업구조의 재건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동독 경제의
재건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구축을 위한 토대로서 사영화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독지역의 경제안정 및
산업생산재건의 토대로 작용하기보다는 노동시장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통독과정에서 대략 26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그중
140만 명만이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또한 고용 노동자중 약
200만 명이 단기고용노동자였다. 따라서 단기간에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자유노총의 해산 후 대량의 동독노동자들이 독일노총으로 그대로
옮아간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개별노동자들이 느끼는 불안감도
상당한 정도로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일노총이 내세운 원칙은 3가지였다.
1) 합리화에 대한 보호 및 노동자의 질적 향상을 위한 규정
마련.
2) 주당 노동시간의 단축.
3) 실질임금의 유지 및 서독 수준의 단체교섭 여건으로의
접근.
이 세 가지 중 1)과 2)는 직간접적으로 고용촉진과 관련이 있다.
사실 통독 후 동독지역의 최대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실업문제였다. 따라서 독일노총은 이러한 원칙하에서 고용촉진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1)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의한 광범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2) 직업훈련 및 고용 촉진을 위한 공공재정 보조
3) 산업 고용안정을 위한 재정 지원
4) 사적 투자의 촉진
다른 한편으로 실업해소방안과 함께 고용노동자를 위해 강력한
실질임금 보전정책을 제시했지만, 이러한 임금정책은 여건상
제대로 힘있게 밀고 나가기가 힘든 상태였다. 당시
동독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서독노동자의 1/3수준이었다. 특히
동독지역의 경제적 상태가 고려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동독노동자들의 임금을 서독노동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독일노총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고려하였다.
특히 금속산업에 대해서는 1991년 3월 “단계적 조정정책”을
수립했다. 그 핵심은 1994년까지 금속산업에 종사하는
동독노동자의 임금을 서독노동자 수준으로 현실화시킨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대해서 독일사용자연맹측은 별다른
불만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자본투자에 대한
기대효과와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가 생기자 사용자측은 기존의
협정을 뒤엎고 새협정을 맺을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3. 제2단계: 구조조정과 독일노총의 조직률 감소
노동시장의 혼란과 합리화의 지속적 진행은 독일노총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합리화에 이은 대량실업의 발생으로 인해
1992년에 들어서자 독일노총의 조직률은 급속하게 감소했다.
동독지역에서 약 76만 여명(약 18%)의 노동자가 실업 및
고용불안으로 독일노총에서 탈퇴했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기간
서독지역에서는 단지 2만 여명(0.2%)의 노동자수의 감소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1992년 12월 31일 현재)
이러한 조직노동자의 감소를 개별 산별로 나누어보면 이미
서독지역에서 사양산업으로 간주되어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피혁산별(-52.5%)과 섬유 및
의류산별(-43.5%)에서 두드러졌다. 금속산별 역시 이 기간동안
약 18만 명의 노조원이 감소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노조원 감소 속에서 육체노동자의 감소와
사무직노동자의 상대적 증가라는 변화양상 또한 나타났다.
동독지역에서의 합리화 및 재산업화 과정은 독일노총의
조직노동자 구성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동독지역에서
산업화는 합리화를 수반하면서 육체노동자의 급격한 감소를
가져오고 있는 반면 동독지역의 행정 및 경영조직은 이와
무관하게 계속 증가하였고, 따라서 생산노동자보다는
서비스업이나 관련 사무직 고용이 확대된 결과이다.
이러한 현실에 맞서 독일노총은 당연히 동독지역에서의
실업방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당면한
동독지역에서의 작업장폐쇄에 대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구조의 재건에 대한 나름의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독일노총의 이러한 노력과 또 다른 차원에서 개별 산별 역시
산업구조조정에 대한 정책적 대응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작센주에서는 구조조정에 대한 정책적
자문을 위한 기구가 마련되었고, 독일노총의 동독지역 지부들은
“동독 재건을 위한 공동사무소(Gemeinschaftswerk Aufschwung
Ost)”와 함께 “재건본부(Aufbaustab)”를 설치해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재건본부에는 독일노총, 사용자연합 및 상공회의소
지역대표들이 함께 활동했다.
또한 노동시장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기관으로서
고용촉진협회(ABS)가 독일노총과 개별 산별의 주도하에
실제적으로 모든 동독지역에 조직되었다. 이 협회는 현재까지도
동독지역에서 활발하게 노동자들의 고용촉진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환경 및 하부구조형성에까지 관계하고
있다.
임금정책과 관련하여 이 기간 중에 일어난 특징으로는
동독노동자의 급속한 임금상승에 대한 사용자측의 반발을 들 수
있다. 91년과 92년 사이에 동독노동자의 임금이 상당한 정도로
상승하게 되자, “단계적 조정정책”은 애초의 협정과 달리
사용자측의 거센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1992년 여름에
사용자측은 동독노동자들의 생산성 증가율이 임금인상율보다
낮다는 이유로 “단계적 조정정책”에 대한 변경을 요구해왔다.
국가 역시 신속하게 개입하여 노조에게 암묵적으로 사용자의
요구에 응할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압력에 대항해 노동조합은
1993년 5월 작센과 멕클렌부룩-포르폼메른에서의 2주간의
장기파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동서독 임금의 완전한
동등화를 1996년까지 달성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산업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타협의 결과 95년
현재 동독노동자의 임금은 전체적으로 서독노동자의 4/5수준에
육박해 있다. 94년 12월 현재 베를린 건물청소용역노조는 100%에
이미 도달했으며, 대부분의 노조가 80-90%의 수준에 올라와
있다. 단지 의류 및 일부 운송노조의 경우만 60-70%에 머물고
있다. 주당 노동시간 역시 동독노동자 평균 39.7시간으로
서독노동자보다 2시간 가량이 많은 상태이다. 하지만 실질임금을
따져볼 때 아직도 동독노동자들은 서독노동자들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에 있다. 우선 연간휴가기간이 서독보다 짧고, 각종
수당산정 및 보너스가 서독노동자의 70%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4. 맺는 말: 정책적 활동의 결과
일단 독일노총은 통독 후 다양한 조직적 정책적 활동을 통해
동독지역에 확고한 조직적 토대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연대라는 원칙에 기초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노총의 조직확대라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동독의 체제변환과정에서는 시공간 속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노동자측면에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의 급격한 체제이행과정에서 고립된
개별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집단화하는 동시에 노동시장정책과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다양한 개입을 통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했으며, 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변화과정에 적응 할 수
있도록 지역적 고용정책과 직업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구 동독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변화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독일노총은 노동조합이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의 한 주체로서 자신의 정책적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독 후 독일노총이 경험한 동독지역의 급격한
조직노동자 증가와 뒤이은 감소는 독일노총이 처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조직노동자수의 감소 추세 노동자구성의
변화는 단순히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계속되는 산업합리화로 인해
실업은 일반화되고 있다. 선진국에서 보여지는 구조적 실업은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독일 역시 이러한
합리화의 지속적인 과정에 있으며, 통일은 이러한 합리화를
가속시킨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통일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지나간 지금 이제 동/서독의
문제가 아니라 전 독일의 차원에서 향후 진로에 대한 모색이
독일노총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다. 16개 산별노조와 조직률 40%,
조직원 1100만의 거대 집단, 독일노총은 통일 전부터 비대화된
관료기구와 중앙집권적 결정과정에 대한 비판을 들어왔다. 향후
독일노총의 앞길은 독일노총이 지금까지의 행적과 자신에게
행해지는 비판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다.
96년으로 예정된 독일노총의 총회는 그래서 중요하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