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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 담화문

현장에서 미래를  제17호
권영길


위원장 담화문


존경하는 민주노총 조합원 여러분,

저는 결전을 30분 앞둔 12월 2일 밤 11시 30분경에 우리의 총파업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날의 최종 결정은 민주노총 임원진과 주요 연맹 위원장들이 모인자리에서 내려진 결정입니다만 이 결정은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저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동안 현장의 어려운 조건을 뚫고 정권과 자본의 노동법 개악 음모를 깨뜨리기 위한 총파업 투쟁의 의지와 열기로 무장하고 투쟁의 순간만 기다리고 계시던 조합원들께서는 이같은 결정에 대해 분노와 실망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허탈감도 있으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총파업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오랜 기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신 현장 집행 간부 여러분들 가운데는 깊은 배신감조차 느끼고 계시는 분이 있으시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같은 결정이 내려진 직후 민주노총 사무실에는 현장 조합원과 간부 동지들의 강력한 항의가 계속 전달되고 있습니다. 저는 동지들의 이같은 비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예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밤늦은 시간까지 민주노총의 방침에 따라 새벽부터 현장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대기하고 계셨던 수많은 동지들이야말로 오늘의 민주노총을 있게 한 힘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의 마음은 매우 착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그러나 이같은 착잡함이 거짓없는 저의 심정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의 결정이 긴호흡으로 보면 우리 민주노총의 최종적 승리을 위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또한 거짓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출범한 지난 5월 이후 노동악법의 철폐와개악 저지라는 일관된 기조를 유지해왔습니다. 또한 현단계 우리 사회의 세력관계를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96년의 노동법 개정 투쟁에서 우리들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가슴아픈 정세인식도 가지고 있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와 투쟁력을 바탕으로 이같은 총체적 정세 인식하에 참으로 슬기롭고 지혜롭게 노동법 개정 국면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무거운 역사적 책임감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김영삼 정부가 노사관계 개혁을 들고 나오면서 노개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노동법 개정 움직임을 보일 때 한가닥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같은 판단이 김영삼 정부가 '개혁적'이라서기보다는 지난 10년 동안 노동법 개정을 위해 투쟁해온 민주노조 진영이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적 성과로 나타났으며 이같은 조직적 힘을 바탕으로 우리가 힘차게 싸워나갈 경우 정권은 일정 부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인식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다 OECD 가입 등 국제적 변수도 우리에세 다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일말의 기대감은 참담하게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노동법 개악안이 이를 명백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본 중심으로 개악된 안에다가 정부도 가세해서 노동법을 '자본법'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개악안을 정기국회 폐회에 임박해서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미흡하기 그지없는 노개위의 공익안마저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지난 3일 발표된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과 이같은 개악안을 올해 정기국회에서 강행통과하겠다는 방침은 우리를 매우 긴장시켰습니다. 국면이 급박하게 그리고 우리에게 불리하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지난 6일 긴급하게 중앙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중앙위원들은 현재의 상황은 악법 개정과 개악안 저지라는 기조를 유지한다는 것을 전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과 자본의 개악안을 저지하는 데에 모든 투쟁력을 집중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악법 개정과 개악저지라는 기조 아래 '정부의 개악안 국회 강행 통과 저지'라는 당면의 과제를 설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날 중앙위에서는 정부의 강행 방침이 철회되지 않을 경우 13일의 4시간 총파업과 16일 이후의 전면 파업 방침을 결정한 바 있습니다. 또한 정부의 강행 방침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권이 저에게 위임된 바 있습니다.

중앙위의 이같은 결정은 '이번 국회에서 악법이 철폐되고 개악안이 저지돼야 한다'는 시점 제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수정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 정기국회에서 이같은 두가지 목표가 달성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투쟁의 호흡을 보다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총력투쟁의 조건과 배치 시점에 대해서 재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결론은 올해 정기국회에서 정부와 자본의 의도를 무산시킨 이후 다음 국면의 투쟁까지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위의 결정은 바로 이같은 정세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이를 전제로 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정부의 개악안 통과가 사실상 무산됐다는 '판단'을 하게됐으며 이를 무산시킨 것은 우리의 총파업 투쟁 배수진이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는 결코 아전인수 해석이 아닙니다. 조합원 동지들의 뜨거운 투쟁 열기가 없었다면 정부와 자본은 개악안을 기필코 통과시켰을 것입니다. 저는 결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이번 국회에서의 강행 통과를 저지시킨 것은 조합원 여러분들의 의지의 측면이라는 점을 동지들께서 인식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개악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비장하고 강고한 투쟁이 준비되지 않는 한 언젠가시도할 저들의 개악 의도는 저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습니다. 심지어 16일 이후 3일간 탈법적이고 변칙적으로 이를 통과시키려는 음모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만은 없는 실정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즉각적인 무기한 총파업을 결단코 결행할 것입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저의 이같은 판단과 결정에 여러 가지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비판적인 견해와 시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민주노총의 지도부에 대한 비판 또는 지지와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노총에대한 애정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이 어떤 개인이 아니라 1천2백만 노동자의 대의와 희망으로 굳건하게 서있을 때만이 권력과 자본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내린 파업 유보 결정을 '싸움을 완전히 접어 둔 것'이라고 바라
보는 시각에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투쟁의 시점이 재배치된 것일 뿐 입니다.

동지 여러분,

저는 이번 총파업의 시점을 뒤로 미룬 배경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어떤 종류의 해명이나 변명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부와 자본이 패퇴되지 않는 한 저들의 음모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단결과 신뢰로 굳게 뭉친 민주노총이 있는 한 그 음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싸울 수 있으면 앞으로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의 분노가 향할 지점과 대상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우리가 손잡고 같이 싸울 동지들이 누구인가를 다시한번 확인하면서 멈출 수 없는 투쟁을 지금부터 준비해 나갑시다.

1996. 12. 12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권 영 길

1997-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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