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
변화(?)하는 영국노동당 그 배경과 의미
김대륜 (영국사/서울대 서양사학과 석사과정)
변화된 영국노동당의 차기 선거 공약
영국 노동당은 내년에 열리게 되는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어 보수당의 18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끝내고 집권
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여론 조
사에서 당지도자인 토니 블레어의 인기는 존 메이저
수상을 크게 앞서고 있으며, 또한 보수당이 유럽연합
정책문제를 둘러싸고 심한 내부분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노동당의 차기 집권은 거의 확실시된다.
지난 9월 30일, 블랙풀에서 열린 영국 노동당의 전당대회는
그같은 확신을 뚜렷하게 보여준 자리였다. 당내 좌파
들의 사회보장 정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채택된 차기총선 공약은 이전의 노동당의 선거공약에
비해서 매우 온건한 것이었다. 선거공약은 크게 다섯
가지 항목으로, 아동들의 학급인원을 30명 혹은 그 이
하로 축소하고, 젊은 상습범죄자들의 구속에서 선고까
지 걸리는 시간을 반으로 줄이며, 10만명의 환자들을
더 치료함으로써 국민보건서비스의 대기자수를 줄이
고, 25세 이하의, 6개월 이상 실업상태에 있는 25만명
의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줄 것이며, 정부의 지출과
차용에 대해서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인플레이션 수
준을 낮추며, 경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선거공약은 이전의 노동당의 선거공약들,
예를 들어 국유화, 과세와 정부지출의 확대와 같은 정책에
비해서 대
단히 온건한 것이다. 이 선거공약들이 특별하게 주목
할 것은 없으며, 실제로 선거공약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몇몇 공공부문의 사업체의 이
윤에 대하여 과세를 한다는 노동당의 공약은 소비자들
에게 상당한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선거공약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다섯
번째 항목, 즉 정부의 거시경제 정책들에 대한 엄격한
관리는 보수당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 공약
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이후 줄곧 주
장해왔던 것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오늘날 훨
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중간계급이다... 우리의
과업은 더욱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중간계급이 되도
록 하는 것이다...[노동당내의] 변화들의 모든 목적
은...계급에 기반을 둔 협소한 정당이 되는 것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이제 전국민의 48%가 중간계급에
속해 있다고 추산되는 사회에서 토니 블레어는 더 이
상 영국 사회에서 계급정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며, 따라서 노동당 역시 노동계급의 정당에서 탈
피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이다. 이같은 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동당이 지
난 6월 4일에 {새로운 노동당, 영국인을 위한 새로운
생활}(New Labour, New Life for Britain)이란 제목
의 선거강령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정책은 거시경제정
책 관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80년대 이전 노
동당의 재정정책 즉, 국제수지에 따라서 이자율높이
거나 낮추는 "스톱-고 정책stop-go policy"을 종식시
키고, 투자를 증가하여 산업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또한 유럽연합의 사회헌장을 받아들이되, 기업계의
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사회보장과 작업장 위원회
의 활동과 관계된 유럽연합법령에 대한 거부권을 포
기하지 않음으로써 부담을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
는 한편,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따르는 세
금부담을 중간계급에게 과도하게 부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노동조합과 거리두기 - 노동당의 딜레마
이 정책들이 보수당이 80년대에 추구해왔던 정책들
과 그렇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사회보장 부문에 대
한 효율적인 관리나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효율적 관
리와 투자의 확대는 대처의 보수당이 79년 집권한 이
래 계속해서 내세워왔던 정책들인 것이다. 그러나 현
재 보수당은 유럽연합의 사회헌장과 유럽단일통화의
문제를 두고 당내의 분열이 대단히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노동당의 집권은 낙관적이다. 하지만 노동당
의 이같은 변신은 노동당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인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얼마나 실
현가능한 것인가, 또한 앞으로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발전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
러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블레어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과연 노동조합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
가 하는 점이다. 블레어는 중간계급을 끌어들이기 위
해서 무엇보다 노동당의 집권이 곧 1979년의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와 같은 파업의 물결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노동당이 노동조합에 끌려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의 표현에 따르면 노동조합에 대해서 노동당이 취하
는 태도는 "특혜가 아니라 공평함"fairness not
favors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다. 한마디로,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밀월관계를 이제는 끝내겠다는 것이다.
(주) 실제로 이같은 블레어의 정책은 유권자들에게 상당
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1996년 여름의 갤
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23%만이 노동조합이
노동당 정부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것은 1992년 선거에서 40%의 유권자가
같은 대답을 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이다.
하지만 실제로 블레어가 내세우는 정책이나, 현재 영
국의 노동조합들이 처한 상황을 볼 때, 양자의 관계
가 그렇게 멀어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노동당으로
서는 노동당 전당 대회에서 50% 이상의 투표권을 가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의 재정을 상당 부분
뒷받침하고 있는 노동조합을 멀리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으로서는 80년대 이후 계속되
어온 보수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두려워할 뿐
만 아니라 실제로 최근에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24시
간. 48시간 파업을 불법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수당에
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 노동당을 선택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또한 노동당이 내세우고 있는
몇가지 정책들은, 그 실현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노동
조합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먼저 주목할만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최저임금제의
도입이다. 노동조합회의Trade Union Congress:TUC는
시간당 4.26 파운드의 최저임금을 도입할 것을 주장
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성소득의 중간값의 절반에 해
당되는 수준으로, 초과근무수당을 포함한 주당평균임
금을 초과근무시간을 제외한 주당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이것은 영국의 노동인구의 약25%에 해당되는
500여만명에게 적용되어 전체적으로 영국의 임금비용
을 4% 정도 증가시킬 것이라 추산된다. 노동당이 실
제로 어느 수준의 최저임금을 도입할 것인가가 결국
문제가 되겠지만 노동조합측으로서는 어느 수준이 되
건 노동당 집권기에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여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 자체가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
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데는 무엇보다 공
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최저임금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1995년 현재 전체 노동조합원의 50% 이상
을 차지하고 있는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제를 도입할 경우 블레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내
세웠던 정부 재정의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무상 케네스 클락은 1998-1999까지
공공부문 임금동결을 선언했고, 노동당의 재무성 담
당인 고든 브라운도 공공지출을 통제하는 데 주력해
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 주목할 것은 노자관계에 관한 개혁들이다. 블
레어는 유럽연합의 사회헌장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
으며, 따라서 유럽식의 작업장위원회를 도입하게 된
다. 또한 교섭단위에서 노조가 다수를 차지하는 경
우, 노조가 노동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또한 1993년에 금지되었던 "check-off"
(사용자들이 임금으로부터 노조회비를 공제하는 제
도)를 재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추진되었던 노동조합개혁에 관
한 일련의 법안들을 개정한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대처 정부 시기에 제정된 일련의 노사관계법들의 골
자를 살펴보면, 노조원의 행동에 대하여 노조가 책임
지게 하고, 특히 불법 파업으로 비롯된 피해를 노조
가 보상해야 하며, 2차적 피케팅, 즉 분쟁에 직접 개
입되지 않은 회사에 대한 피케팅이나 클로즈드 샵을
금지하며, 사용자가 노조에 대한 인정을 철회할 수
있게하며, 파업을 할 때는 반드시 노조원들의 비밀투
표를 거치게 하여 노조 보다는 노조원 개개인의 영향
력을 강화하는 것 등이다.
이 법들은 물론 자유시장경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대처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자유시장경제에
서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계약이어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
고 있으므로 특권적인 노동조합이 개인의 자유를 집
단의 힘으로 통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것
이 바로 클로즈드 샵에 대한 금지, 비밀투표의 도입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같은
이데올로기적 공격과 함께 효율성이 떨어진 국영기업
-대표적으로 광산-의 사유화, 사회보장비의 삭감 등
의 극단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부의 공격
으로 인하여 노동조합 세력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
고, 결국 1979년 1400만에 달했던 노동조합원의 수는
최근에는 약 800만으로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노동당
이 집권함으로써 이처럼 약화된 노동운동 세력이 어
느 정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가 문제로 남는다. 하
지만 그 전망은 그렇게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우선
최근 영국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인 것은 노
조 조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첨단기술분야와 서
비스업의 성장과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이 와해된 부문
에서의 생산성 증가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이 노동
당과 노동조합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노동조합이
다시 한번 노조의 조직세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노조
의 조직은 생산성의 하락이라는 여론을 무마시켜야만
할 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의 경우는 전일제 노동자보
다는 여성들이 대종을 이루는 비상근 노동자들로 이
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
가 성공을 거두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노동당과 노동조합 - 그 탄생과 발전의 역사
현재로서는 영국 노동조합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다고 예측할 수 있다. 일찌기 대처 정부가 집권한
직후 저명한 노동사가인 에릭 홉스바움은 2차 대전
이후의 영국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발전을 검토한 바
있다. 홉스바움은 노동당/노동운동의 위기를 노동운
동 의 분파주의의 확산과 공공부문 고용의 증가로 설
명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대로 영국의 노동조합
은 직능별조합craft union으로 조직되어 있으므로 한
산업에서 단체협상을 할 경우 사용자와 협상을 담당
하게 되는 노조조직은 여럿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또
한 그같은 조직들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협상을 타결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작업장별로 작업장 대표들과의
협상을 거쳐야만 협상이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전
국적 단위의 노조들과 작업장 단위의 평노조원들 사
이의 관계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으며, 또한 협상에
개입하는 노조조직이 다양한 직능별 조직들 가운데
어떤 노조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노조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각했다. 특히 이같은 갈등으로부터 발생
한 파업들은 국민들에게 노동조합이 이기심을 바탕으
로 전국민을 희생시킨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
다. 게다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증가되고, 이들이
전체 노동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는데, 공공
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은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라기
보다는 소비자로서의 대중과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라는 거으로 이해되어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가 힘들
어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분석은 1970년대 후반의 노동운동의 위기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문제
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문제
의 핵심은 영국에서 노동당과 노동운동이 발전을 해
왔던 틀 자체에서 찾아야한다. 잘 알려져있는 것처럼
영국의 노동당은 노동조합에 기반을 두고 출발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기존 정치체제 속에서 의
회를 장악함으로써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물
론 노동당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이룬다는 강령을 내세움으
로써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원칙을 내세웠으나, 근
본적으로 의회라는 정치적인 공간을 통해서 노동계급
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데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실질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1차 대전 직
후의 3차 선거법 개정 이래로, 노동계급의 약 1/3은
대개 보수당을 지지하거나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았
고, 더 나아가 선거라는 공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
해서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차
대전 직후에 노동당이 최초로 다수당이 되었던 것이
나 2차 대전 직후 애틀리 내각이 수립될 때도 중요했
던 것은 노동계급의 표 뿐만이 아니라 중간계급을 어
떻게 효과적으로 동원하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즉 한
마디로 대중정치를 할 것인가 계급정치를 할 것인가
에서 노동당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대
중정치였으며, 이 전통으로 볼 때 최근에 토니 블레
어가 중간계급을 끌어들이기에 주력하는 것도 노동당
의 발전과정에서 크게 벗어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노동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장악했던
1945-51년의 노동당 정부의 경험을 되돌이켜 보면 노
동당이 특정한 계급의 정당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노동당 정부가 정권을 장악하
고 나서 가장 먼저 시행했던 것은 주요 산업의 국유
화와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 우선 복지국가의 건설
은 가족수당, 국민보험, 국민보조, 국민보건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으로 평시 완전고용과 상당한 정도
의 부의 재분배를 이룬 것으로 높이 평가할만하다.
물론 이같은 복지국가 건설의 바탕은 잘 알려져있는
것처럼 케인즈와 비버리지의 경제학에 있었으며, 그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2차 대전
의 경험을 통해서 나타난 온건 토리로부터 중도좌파
에 이르는 사회적 합의였던 것이다. 또한 국유화 역
시 1946년에서 49년에 걸쳐 영국은행, 광산, 항공,
전기, 가스.철도.육상교통 그리고 제철업에 이르기까
지 전산업의 20% 가량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나, 노동
당에게는 국유화가 노동당의 전반적인 전략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 뿐
만 아니라 실제로 국유화된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역
할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한마디로 노동
당의 경제정책은 케인즈주의적인 재정정책에 기반하
여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그같은 과정을 통해서 분배
의 평등을 달성하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노동당 뿐
만 아니라 보수당도 기본적으로 받아들일만한 틀이었
다. 이 틀이 바로 2차 대전 후 1970년대말까지 영국
의 경제정책의 근본적인 틀이었고, 이것은 여타 서구
의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이같은 정책은 영국의 노동계급에게 충분히
수용할만한 것이었다. 영국의 노동계급은 19세기 후
반 이래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내에서 경제
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주력했으며, 그들의 계
급적인 문화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또한 2차 대전 직
후에 영국의 노동계급은 "인민의 전쟁"이라는 말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신
감을 바탕으로 강한 계급적 결속력을 보여주기는 했
지만,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다시는 2차 대전 이전의
실업과 가난의 시대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었
지, 결코 새로운 사회질서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 2차 대전 이후 1950년
대의 호황은 그들이 원하던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었다. 하지만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은 1970년대 이
후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물론 이것이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강화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흔히 "영국병"이라고 알려진 것처럼, 기존의 조직노
동의 지도부 역시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졌고,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협상 보다는 작업
장 단위로 작업장 대표자 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등 노동계급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같
은 전투성이 곧 노동당에 대한 지지나 정치적 급진성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노동당
은 이들에게 뚜렷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 주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노동의 빈번한 파업이 어
느 정도 물질적 이익을 얻게해 주었을 지는 모르나,
무엇보다도 영국 경제의 효율성 자체가 끊임없이 떨
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 이익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
이다. 더욱이 오늘날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조직노동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조직 노동에서 배제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에 노조가 큰 책임이 있다
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국의 노동조합은 2차 대전
이후 맑스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회변혁의 핵
심세력이 아니라 기존 사회의 틀 속에서 보다 많은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거대한 이익집단의 하나가 되
었다고 볼 수 있다.
노동당의 변화 (?) - 자본주의에서의 생존전략
이렇게 볼 때 최근에 노동당의 변신은 그다지 놀라
운 것만은 아니다. 노동당은 출발부터 노동계급의 정
당이 되기에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활
동하는 공간에서부터 한계를 가지고 출발한 것이었
다. 또한 영국의 노동계급 역시 기존의 틀을 부정하
기 보다는 그 틀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를 바
라는 집단이었으므로 그들에게서 어떤 사회주의적 의
식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사회주의권의 몰
락 이후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가부터 고
민해야 하고, 또한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팽창에 따라
경쟁이 날로 격해지는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영국의 노동당이나 노동운동에게는 중요한 변화가 요
구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당의 최근의 변화
는 자본주의에 대한 건강한 비판세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잘 살아남을 수 있
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듯하다. 물론 노동당이 끌
어안으려고 하는 중간계급이 어떤 의식의 변화를 보
인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재고가 이루
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상당한 시간 동안에
그같은 일을 기대하기란 힘들듯하다. 또한 노동조합
역시 노동당의 한 축으로서 노동당에 대하여 그 이익
을 확대할 수 있는 압력을 끊이없이 행사하기는 하겠
지만 과연 이것이 얼마만큼 비조직노동자들이나 대중
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실상
지금 영국의 노동조합에게는 이같은 설득력을 갖기에
는 뚜렷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고민에 쌓여있
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