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만나는 1997년
진방주(예장 총회 외국인근로자선교 후원회)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담고 맞이 해야할 1997년을 맞이
하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착잡하고 슬픈 현실에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아름 아닌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새해의 소망을
어떻게 적어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땅에는 멸시와 천대! 하늘에는 눈물의 흐느낌과 분노의
소리!” 라는 외침이 귓가에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1997년을 UN에서는 ‘이주 노동자의 해’로 정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1997년을 ‘뿌리 뽑힌 자들과 연대하는
해’ 로 선포하였다. 외국인 녿오자들과 함께 1997년은
무엇인가 소망을 가져 보아도 될는지? 자본 시장의 자유로운
질서를 위해 국경을 허물어 내듯이 노동시장의 자유로운 질서가
세워지기를 기대해도 될는지?
예수님이 태어난 직후에도 요셉과 마리아는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가야 했었다. 예수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오늘날로
말하면 난민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였을 것이다. 묘하게도
기독교에서 믿음의 아버지로 부르는 아브라함도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난 이주자였던 것이다. 출애굽 해방 사건의
주역들도 외국인 노동자로서 이집투제국의 바로왕의 학정에
신음하며 노역에 시달렸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명기
10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가랴 7장
10절에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예수님은 천대받고 보잘것 없는 자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셨고, 더 나아가서는 죄인으로서 오셨던
분이셨다. 세상에는 머리 둘 곳 조차 없었던 분이셨고 결국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범죄자로써 십자가에 못밖혀 죽임을
당했던 분이셨다.
오늘 우리 곁에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죄인 취급받으며 온갖
수모를 당하고서도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어디
한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눈물과 흐느낌으로 날을 지새고,
분노의 눈물을 삼키고 있는 18만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는 것이다. 함께 살고 있는 형제 자매임에도 얼굴 모양과
피부색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 체류기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더욱더 힘든 일을 죽도록 하고서도 죄인 취급을 받고,
아니 현대판 노예로 전락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외국인 노동자,
네팔 노동자,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미얀마,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인도, 이란, 태국, 러시아, 중국교포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오실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고 온갖
냉대와 멸시 속에서도 눈물을 머금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귀한
형제 자매들인 것이다. 우리들도 얼마전까지는 아니 지금도
인종과 민족 차별의 설움 속에 외국인 노동자로서 고향과 가족을
떠나 있는 불법체류자로서 멸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교포, 재일교포를 비롯 불법 체류자로 얼마나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수모를 당하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의 역사였고
현실임에도 우리는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들어 논갖 매스컴이 중국교포 노동자들의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낯 뜨거운 사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중국교포들은 “한 핏줄끼리 이럴 수는 없다”고 울부짖고
있다. 한국에서 온 사기꾼들에게 현지에서 사기 당하고,
가까스로 고국에 발을 디딘 동포들은 온갖 차별과 냉대와 모멸에
목놓아 울고 있다.
5백 만 해외 동포의 절반인 2백 20만 명이 사는 중국의 동포
사회가 ‘추한 한국인’ 때문에 상처가 깊어 가고 있다. 추한
한국인이 저지른 조선족 피해는 취업사기에서 위장결혼,
미성년자 농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피해자도 노동자,
농민에서 학자, 관리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이라 한다.
피해 대상자가 40~50만 명에 이르며, 피해 액수도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천억원(취업사기 피해 3백 3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 인해 조선족 사회는 가정이 파산 지경으로 몰린 데다
빚독촉에 시달려 자살하는 사람, 이혼 당하는 사람이
늘어나는가하면 정신질환을 격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반목과
불신이 횡행하는 가운데 “비탄과 한숨소리가 가득하다”고
한다. 조선족 동포 사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원망과 한국인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기운이 팽배해 있다고 한다.
지난 1990년이후 한국을 방문한 조선족 교포 수는 약 12만
명이며 현재 체류 중인 조선족 교포 수는 약 6만명이다. 이 중
불법체류자 수는 3만 2천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족
교포들의 취업형태는 건설 현장에서 목공, 벽돌공 등 잡일을
하는 사람이 41.3%로 가장 많고, 식당 종업원 및 요리사가
23.4%라고 한다. 조선족 교포의 월평균 수입은 83만원이다.
그러나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은 휴일임에도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여 기숙사에서 하루 종일 지내거나, 밖을 나간다해도 가슴
졸이기에 여념이 없다. 불법체류라는 신분은 성폭행을 당하고도
“신고해서 강제추방 시키겠다”는 위협에 주눅이 들고 만다.
중국교포 노동자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대부분 2~4평
짜리 벌집이나 셋방, 식당 주방에서 생활하고 한 달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다 보니 영양 및 위생 상태는 너무나 열악한
것이다. 혹 병이라도 나면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다보니
그야말로 큰 일이 나게 되는 것이다. 1994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한 서복재(37. 길림성 영길현) 씨는 00전선에서 전선을 감는
기계장치에 몸이 빨려 들어가 갈비뼈가 부러지고 뇌수술까지
받고 35일 만에 퇴원해 미처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일하다
이번에는 기계의 톱날에 왼손까지 다쳤지만 산재보험 처리도 못
받은 채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중국교포 노동자들은 일단 말이 자유롭게 통하다보니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보다 모든 대우나 생활에서 나은
것이다.
1995년 1월 명동성당에서 네팔 노동자 13명이 농성을 벌이면서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등을
목놓아 외치며 체불임금 지급, 폭행, 감금, 강제노동 금지,
휴일제공, 여권 본인 소지 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2년 여가 지나가지만 불법체류 노동자라는 점에서는 별반 나아진
게 없는 것이다. 합법적인 체류로 들어온 산업연수생은 더 큰
비참한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통해 들어 온 산업기술연수생은 5만 명에 이르고 현지
법인자격으로 들어온 노동자는 2만 6천명(96년 7월, 법무부)인데
이들에게는 네팔 노동자들의 농성 사건을 계기로 근로기준법상의
강제근로, 폭행금지, 임금지불, 금품청산, 근로시간 준수, 국내
최저임금제 적용, 여권의 본인 소지 등의 개선책조차
해당사항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지난 6월 천안에
있는 (주)전방에서 빠져나온 인도 노동자들에 의해 밝혀졌던
것이다. 이들은 한 달에 4만원을 월급으로 받고 있었다.
회사에서 별도로 용돈을 지급하고 있었지만 2만원은 회사에
예치금으로 적립해야 했고 나머지 3만원으로 한 달을 생활하여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미 한국에 올 때 브로커에게 90만원
상당을 지불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는
계약기간을 어기고 귀국할 경우 80만원의 위약금을 내야
하였는데 이는 4만원 월급을 그대로 모아도 1년 6개월이 걸리는
엄청난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국인과의 대화가 중단되어 있고
외출과 외박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회사 자체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힘근 곳에 위치해 있었고, 감히 외출은 꿈꾸지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다시피 한
것이었다. 물론 여권은 회사가 보관하고 있었으며 외부와의
전화도 엄격히 통제되었다. 20세기 말 한국의 철창 없는
감옥속에 노예처럼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은
연수생의 현장 이탈로 인한 불법체류자의 양산을 낳게 되고 만
것이다.
지난 12월 첫째 주에 안산공단에 갔었다. 방문한 한 공장의
기숙사는 지하실인데 외부의 공기가 통하는 것은 창문 두 세
개가 고작이었다. 눈발이 날리는 추위 속에 지하실은 썰렁하기만
하였다. 그나마 단속기간이라 외출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몇
일 전에도 안산역 부근 정류장에서 몇 사람이 붙잡혀 갔다고
한다. 일주일만에 만나는 노동자의 인사말은 “살아 있었어요?
안 붙잡히고 살아 있었군요?” 따뜻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의
마음과 몸은 차가운 얼음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제일 힘든
것이 작업을 할 때 손이 곱아서 힘들다고 한다. 주일 오후 2시
예배 때9는 10평도 되지 않는 작은 예배당에서 필리핀 노동자들
50 여명과 네팔, 이란, 중국교포, 우지베키스탄 노동자 등 70
여명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기가 넘실거림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눈썰매를 타고 신나게 날아오는 싼타 할아버지보다 이들에겐
손을 잡아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것이다.
1997년 새해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권익이
존중되고, 따뜻한 인간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큰 소망이
아닌 아주 작은 소망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추위와
냉대에 떨고 있는 작은 예수에게 따뜻한 보리차 한 모금을
나누는 해로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한다. 이런 생각이
절실한 가운데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팜 사건이
떠오른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내가 진심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장 37~4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