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라디오에서 까르푸가 우리나라에서 철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철수배경에 대한 질의응답에서 무슨 경제학 교수라던
사회자가 물었다. "노조의 잦은 파업도 철수에 영향을
미쳤나요?" 그랬더니 웬일로 "파업 때문에 철수한 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까르푸 노조는 강성도 아니었습니다.
파업은 노동조건이 나쁘니까 한 것입니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오래살고 볼 일이네, 라디오에서 이런 말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까르푸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임신한 몸으로 안팎의 복잡한
사정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나왔던 그녀. 그리고
도토리가 보고 싶어졌다. 새로 시작한 양계장은 잘 되는지
궁금하다. 아이들 노는 토요일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출근해서 진보넷에 접속. 대추리가 침탈위기라는 게 눈에 확
들어온다. 사이버 행동이라도 한다는 달군의 글을 보고, 오늘
새벽에 집결하라는 글을 보고, 마음이 어수선하다. 어제 이번
토요일에 아이들 데리고 나물 캐러 가자고 두꺼비 선생님한테
전화했더니, 대추리에 가려고 했는데 하여간 오겠다는 답변을
들은 게 생각났다. 전에 이번 나물 캐기 모임의 다른
사람들한테 대추리 집회에 가자고 해 본 적이 있는데 다들
난감해했다. 또 아이들도 한 번 가보더니 무서워서 안 간다고
하니. 쩝, 이런 게 이유가 되는 건가?
대추리에 카페가 생겼다 하여 이월에 쑥쑥이랑 다녀왔다.
침탈위기에 있는 대추리는 나 몰라라 하고 나물이나 캐러 다녀도
되는 건가…. 하지만 나물을 캐거나 춤을 배우거나 하는 일들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주어진
노동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큰 의미는 없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얼마 전 오랜만에 저녁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기로 했던
존경하는 신모선생님께서 마침 중요한 법률안을 다듬는 일
때문에 약속을 취소해버렸을 때 삐져서 답장을 안 보낸
적이 있다. 내가 그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 진지함과
치열함 때문이기도 한데…. 뭐랄까,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에구…… 이제라도 답장 써야겠다.
언젠가 공동육아 등 지역사회 활동에 열심이던 어떤
치과선생님이 밥 먹다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생활 속의 진보,
이런 거 다 답이 아니었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행동이
필요해.” 그 양반은 요즘 어떻게 지낼까?
이런 생각 하는데 수검자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
오늘도 자궁경부암 검진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보통 우리
과에서 원내 검진을 할 때는 노인들이 많은데 자궁경부가
위축되거나 살이 찌신 분들은 잘 안 보인다. 우리 과의
스펙큘럼은 작은 것 밖에 없어서 더 어렵다. 그런데 오늘은
복잡한 사람들이 왔다. 자궁절제술을 했거나 방사선 치료를
한 사람들에 대한 세포진 검사를 하게 될 줄이야. 산부인과
정선생한테 전화했더니 열심히 하면 된단다. 다행이 별
무리 없이 검사가 진행되었다.
그건 그렇고… 세포진 검사를 언제부터 하라는 것은 배웠지만
75세 이상 노인이나 20년 이상 성생활이 없었던 사람도 세포진
검사를 받아야 할까?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원내에 앉아
있노라면 노인의 건강에 대한 나의 무지를 절감한다. 알아야 할
것은 많은데 게으른 뻐꾸기는 괴롭다.
오늘 아침은 수검자 수는 많지 않은데 왜 이리 복잡하냐.
경도 고혈압이 있었던 50대 후반의 남자는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결국 눈물을 비치고 나갔다. 1년 반 전 부인을
사별하고 혼자서 살아가는 외로움의 냄새가 온 진료실에 진동을
한다. 식품업체 30년 경력, 부인이 사망하던 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가 생긴 각막 손상, 금연하고 나서 늘어난 체중…
다행히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끝까지 들어줄 수
있었다. 잠 못 자고 너무너무 힘들면 마음을 고치는 의사를
만나러 가라고 하면서도, 거기 가면 나을까, 내가 괜한 짓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든다. 아니지 이 연령대에서
자살이 사망원인 4위에서 2위로 올랐다쟎아.
오전에 검진 끝나고 나면 오후엔 진이 빠져서 일이 손에 안 잡힐
때가 많다. 특히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은 워밍업만 하다가
퇴근시간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내일은 검진이 없다. 산부인과 보수교육을 자체적으로 받으려고
한다. 오랜만에 정선생이랑 밥도 먹고.
오늘보다 마음 편하고 재미있게 살아야지. 그런데 그래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