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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어라, 그러면 투표할 수 있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19호
이산하

부자가 되어라, 그러면 투표할 수 있다.


革命과 流行의 도시

‘혁명의 도시’, ‘유행의 도시’ 파리. 파리의 이미지는 여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함께 간 친구는 다음과 같은 말로 파리를 표현했다. “런던이 어딘지 모르게 절제되어 있고 깔끔하다면, 파리는 도시 전체가 자유분방하고 활기차다.” 파리 사람들은 극도로 권력의 통제를 싫어한다. 심지어 음주 운전에 대한 단속이 최근에야 비로소 실시되기 시작했음은, 파리 사람들의 반권력적 성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그들 특유의 성질이 어디서 연유했는가는 프랑스 역사를 한 페이지만 훑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절대주의 왕정을 붕괴시키고 근대적 의미의 인권사상을 촉진시켰던 18세기 말의 프랑스대혁명, 부르조아가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의 반인간성을 폭로하고 노동자의 대안적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던 파리꼬뮨, 근대철학이 설명해낼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대중의 창조성과 혁명적 에네르기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던 68혁명 등. 프랑스 민중들의 투쟁은 인류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史實들은 파리 시민들이 왜 ‘음주운전 단속’조차도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력의 통제로 간주하는지 가늠케 해준다.

인간을 믿을 수 있는가?

극도로 국가 및 권력의 통제를 싫어하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다 중요시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근대철학이 ‘신(神)만이 진리’라는 것에서 ‘인간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옮겨왔다면, 프랑스의 구조주의적(構造主義的) 철학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거대한 사회 구조’에 의해 갖가지 방해와 제약을 받는 대단히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연히 역사에 대한 전망 또한 불투명하며,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와 구조주의를 결합시켜 맑스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던 알튀세르가 종국에서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데올로기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한 것은 구조주의적 철학 전통의 귀결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비관적 구조주의적 철학 흐름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욕망’에 의거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는 개개인의 생활 영역 전체에 걸쳐 ‘통제의 마수’를 뻗치고 있으며, 현재 그러한 권력의 통제망에 걸려들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인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미증유의 국가 통제의 확대는 자연 그러한 ‘통제에 저항하려는 강력한 힘’에 부딪힐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힘의 총체를 ‘욕망’이라는 범주로 표현하고 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로 대표되는 흐름이 그것이다. 이들 역시 구조주의적 철학 전통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자본주의적 국가 권력 통제의 선(線)에서 탈주(脫走)하려는 인간의 (창조적)욕망’만을 믿을 뿐이다.
프랑스 철학 전통은 크게 보아 위와 같은 두가지 흐름으로 대별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프랑스의 철학 전통을 독일의 철학과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대표되는 독일 철학의 전통은 ‘이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현대철학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하버마스’의 일성(一聲)은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믿자’이다. 그는 인간 이성의 유통을 교란하고 억제하는 구조들을 제거하고, 지속적인 이성들사이의 유통 관계를 회복(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론(論))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이성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들은 ‘No!’로, 독일 철학자들은 ‘Yes!’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의지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반면, 독일 국민들은 약간 딱딱하고 차갑다는 인상을 주는 사실은 이러한 철학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에 묻혀있는 역사의 비밀

매년 12월이 되면, 파리의 중심 ‘샹젤리제’에서는 화려한 ‘거리 점등식’이 거행된다. 한낱(?) 점등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해 축사를 한다. 관광객 유치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거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는 자부심 또한 작용했으리라. 개선문에서부터 쭉 뻗은 도로는 콩코드 광장에까지 나 있으며, 보기에도 시원하다. 인도가 차도의 너비만큼하며, 양 옆의 인도를 합하면 차도보다 넓다. 세계에서 모여든 수백명의 관광객들이 활보하고 다니지만, 군중의 흐름이 막히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서울 명동의 주말 거리와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더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거리가 약 백여년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고 넓은 거리가 만들어진 데에도 역사의 비밀이 묻혀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파리의 도로가 지금처럼 계획된 것은 1860년경이다. 당시의 황제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었는데, 그는 1848년 2월 혁명에 의해 등장한 왕이다. 1830년 7월 혁명에 의해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물러나게 되고, ‘평민의 왕’이라고 불리운 ‘루이 필립’이 새로운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루이 필립의 ‘7월 왕조’는 “법 앞의 평등과 재능에 따른 문호개방을 지지했지만, 민주주의를 두려워하였고 선거권의 과도한 제약을 고집하였다.” 시민들이 선거권의 확대를 요구하자 기조(F. Guizot, 재임 1847 ~ 48)는 “부자가 되어라. 그러면 투표할 수 있다” 라고까지 얘기하면서, 중간계급 및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했다. 한편 1846년의 극심한 흉작, 1847년의 재정위기로 인해 노동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으며, 결국 1848년 2월 22일! 정부의 태도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투입되자, 생계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노동자와 공화주의적 경험이 강렬하였던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거주지역 및 주요 간선도로에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시가전을 벌인 끝에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프랑스 민중들의 투쟁에 힘입어, 그해 12월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대통령 재임 1848~51, 재위 1852~71)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그는 몇 해 지나지 않은, 1852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나폴레옹 3세)라 칭하게 된다. 이 시대를 이른바 프랑스 제 2 제정시대라 일컫는다. 민중들의 투쟁에 힘입어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결국 민중들의 열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나간다. 의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언론 검열의 강화 등으로 사회주의 및 모든 진보주의적 사상과 세력들을 탄압한다. 또한 자신을 권력의 전면에 등장시켜 주었던 2월 혁명의 중요한 투쟁 형태였던 ‘바리케이트 투쟁’에 대해 비상한 주의를 기울인다. 프랑스 민중들이 정부군과 시가전을 벌이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길 양쪽의 건물들을 이용해 바리케이트를 침으로써 ‘투쟁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오쓰만’에게 파리의 도시 계획을 맡기며, 민중들의 ‘바리케이트 투쟁’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충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샹젤리제 거리를 비롯한 파리의 중요한 간선도로(幹線道路)는 ‘엄청나게 넓혀졌다’. ‘엄청나게 넓혀진 도로’[大路]가 근대에 들어와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멈포오드’라는 사회학자는 로마제국의 대로(大路)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도시의 쭉 곧은 대도(大道)는 수레가 왕래하던 로마의 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던 공통의 요소를 갖고 있다. 그것은 군대의 이동을 가속하고,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폭넓고 곧은 대로(大路)의 필요라는 것이다.”

쥴리어스 시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나폴레옹 등은 대로(大路)를 필요로 하며, 노동자를 비롯한 저항세력들에게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기 수월한 좁은 도로가 유리하다는 발상은 어찌보면 무리한 도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지나치기 쉬운 도로에서도 이처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투쟁과 갈등이라는 사실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데에서, 계급논리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시청 앞 광장에 단두대라도 설치해야 하나?

샹젤리제 대로(大路)를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넓은 광장에 우뚝이 솟은 큰 탑이 보인다. 약 23m 쯤 되는 ‘오벨리스크’가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콩코드 광장’이라 불리운다. 프랑스 대혁명 시절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등의 왕족 뿐만 아니라, 당통, 로베스피에로 등의 혁명 투사들이 숱한 군중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바로 그 장소이다. ‘근대적 의미의 인권 사상’을 촉발시켰던 프랑스 대혁명이었지만, 그만큼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경구의 근원이 될 만한 역사적 현장이리라. 적색(로베스피에로) 공포정치에 이은 백색(테르미도르 반동) 공포정치,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의 등장으로 귀결된 역사는 자칫 프랑스 대혁명의 의의를 혼란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가져다 준 ‘자유, 평등, 박애’의 문제의식은 역사 속에 길이 보존될 가치이다. 콩코드 광장에 서면 이렇게 프랑스 민중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 그리고 한보 사태 등으로 얼룩져 있는 그 잘난 대한민국의 정치 모리배들을 보면, 시청 앞 광장에 ‘단두대’라도 설치해야 할 것 같다. 옛날, “백성을 수탈한 탐관오리에게는 팽형(烹刑)이라는 공개 처형을 했다.”고 한다.
“복청교나 종로 네거리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백성을 불러모은 가운데 죄인을 그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시늉을 하고, 죄인은 비록 삶아져 죽지는 않지만 죽은 시늉을 해야 한다. 그리고 허장(虛葬)을 치러야 하며 평생 ‘살아 있는 송장’으로 여생을 지내야 한다. 또한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 모리배에게는 입시(立市)라고 하여 사람이 많이 오가는 시장거리에 죄목을 쓴 목판을 목에 걸고 며칠 동안 세워두는 공개형도 있었고, 탐관오리나 뇌물을 먹은 관리가 적발되면 감찰들이 야반에 그 집을 가시덤불로 에워싸 금족령을 내리고 죄목을 써붙임으로써 백성에게 널리 알리기도 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는 경구를 모르는 바도 아니고, 피의자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국민들을 위해 일한다는 작자들이 재벌들이 쥐어준 몇 억이나 되는 돈을 떡값이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어삼키고,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는 몰라도 재벌들을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새벽에 몰래 모여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니, 정말 이들에게는 민중들의 단두대가 필요할 것 같다. 한 두명의 사람들을 처형한다고, 이 거대한 부패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정치 모리배들에게 ‘경고’의 의미는 있을테니까.
그러나 사실, 이 나라에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진짜 죄인을 밝혀낼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청 앞 광장에 단두대를 설치하면 뭐하나, 그 위에 올라갈 사람은 색출하지도 못하는데.....


유행의 원조 - 파리

며칠 전 나는 신문을 보다,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현상을 접하게 되었다. ‘과소비 방지 캠페인’을 한답시고, 텔레비젼에서 유명한 고가(高價)의 여성 의류들을 지목해 카메라에 담아서 내보냈다. 그런데, 그 화면이 나가자 마자, 그 즉시 그 상품들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며, 그 다음날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유명한 여배우, 가수 등이 입은 옷차림새가 곧바로 대중 현상이 되고, 그들의 옷과 차림새가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파리’는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다. 특히, ‘여성 모드’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 세계 유행의 진원지(震原地)이다. 샹젤리제 거리 양 편으로,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는 숱한 쇼핑 가게들이 즐비하고,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파리가 여성 모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데에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공이 크다. 그녀는 거의 광적으로 패션에 집착하였다. 그녀의 전속 디자이너는 ‘로즈 베르탄’이었다. 로즈 베르탄은 프랑스 역사 이래 가장 사치스럽고 유명한 왕비의 모든 의상을 전담하여 만들어냈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로즈-앙트와네트’의 의상은 프랑스 궁정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유행으로 번졌다. 로즈는 매주 두 번씩 앙트와네트를 만나서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었으며, 프랑스 대부분의 귀족 부인들, 스웨덴이나 스페인의 왕비, 러시아 황후들의 의상까지 만들었다. 로즈 베르탄의 의상에는 엄청난 가격이 붙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도도한 물결도 그러한 가격을 내리거나, 의상의 수요를 줄이는 일 등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최초의 ‘본격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옷’의 지위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옷은 나체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인간이 중심이었으며, 육체가 주인이었다. 금욕적인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이 ‘인간의 육체’를 새롭게 발견하였던 것인 만큼, ‘옷’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절대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마땅히 주인이어야 할 인간은 무시되기에 이르렀다. 아름다움의 이상도 옷에 의해 만들어지고 옷에 의해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어떤 특정한 옷을 입어야 비로소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때 이래로 ‘옷’은 그 옷을 입은 인간의 지위를 표현하게 되었다. 만사를 몸차림에 의해 판단했던 시대였던 만큼, 복장은 신분제 속에서 자기의 뛰어난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도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람은 값비싼 복장이나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복을 고안하여 몸에 걸침으로써 개인적인 힘을 과시하고,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앙트와네트’는 이러한 절대주의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10대들은 학교에 없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조혜정 교수는 최근 펴낸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10대 문화와 교육의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신세대 문화를 어설프게 ‘일탈학생(문제아)의 것’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90년대의 사회환경을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로 판단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문화 혹은 패션 등의 각종 소비재산업이 이들 10대들을 1차적 소비계층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빨강, 파랑, 노랑 원색의 누비윗도리, 허리춤에 엉거주춤 걸려 있는 통넓은 힙합바지, 방울핀으로 분수처럼 묶은 단발머리. H.O.T.와 영턱스클럽이 유행시킨 이러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10대들을 누가 감히 ‘문제아’라고 단죄할 수 있을까?
‘패션의 유행’이라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옷 차림’에 의해 사람을 평가했던 절대주의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짓고자 하는 욕망이 왕족과 귀족들을 ‘끊임없는 유행복의 양산’이라는 굴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행’이라는 현상은 두가지 측면에서 더욱 절박해졌다. 하나는 신분적인 차별이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어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상류계층은 빈곤한 서민과는 확실하게 구별되기를 바라는 욕망/욕구가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더욱이 하녀나 소시민 계급의 여자는 이런저런 재료, 이런저런 장식을 이용해서는 안되며, 그런 것은 상류 여성들의 권리라고 규정하는 법률이나 단속규칙이 없어졌기 때문에,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복장의 끊임없는 변화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최신 유행 모드를 좇아 오기에 중산계층과 서민은 ‘경제적으로’ 너무 힘겨웠을 것에 틀림없다.
이러한 계급 구별의 욕구와 더불어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유행 현상’을 더욱 촉진시킨 요인은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의 특수한 요구임을 놓쳐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에 있다. 기계제 생산의 경우 대중취향의 상품만이 공장주에게 이익이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떤 것이 오늘 선택된 사람들의 유행이라면 그것은 내일이 되면 대중의 유행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끊임없는 공장의 가동과 이윤율의 상승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는 점점 새로운 주문을 요구하며, 그것은 복장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다. 결국 자본주의 시대는 ‘지금까지의 것을 빨리 버리고, 유행하는 최신의 것을 사는 것’을 대중의 임무로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밍크코트’를 사야만 분이 풀리는 어느 사모님의 욕구는 ‘분명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과 구별짓고 싶어하는 계급구별의 욕구’이겠지만, 10대들의 무분별한 ‘최신 유행 탐닉’은 현 자본주의가 강요하고 있는 현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서태지 패션’, ‘영턱스 패션’ 등에 쉽게 휩쓸리는 청소년들의 가치관의 부재를 탓할 게 아니라, 그러한 패션들을 10대들이 입도록 조장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논리를 탓해야 할 것이다. 결국 조혜정 교수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전적으로 옳다.
“이제 (10대들의) 교육의 문제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소비 상업주의라는 배경에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로 떠올랐다.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고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의 힘, 자유와 개성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 놓은 후 다시 보이지 않는 그물망 속으로 모두를 끌어들이고 있는 대중매체의 흡인력, 그 외 사람들의 ‘자발적 충성’을 얻어내는 고도의 정보 관리 사회의 세련된 기술과 정보력. 교육은 이제 이들과 맞서야 하는 것이다.”

초심자의 루브르 박물관 감상법

지난 93년 루브르 미술관이 리셜리외(Richelieu)館에 있던 정부기관 재무부를 내쫓고 1백 78개의 전시실을 갖춘 새 익관(翼館)을 개관했을 때 독일 [슈피겔]지는 비꼬듯, 감탄하듯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세계의 어떤 건물도 근 8백년이라는,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지어지지 앟았다. 필립 2세로부터 사회주의자 미테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파리 중심부의, 이제는 충분히 크고 아름다운 그 기념물(루브르)을 짓는데 종사해왔다.”
파리의 필수 관광 코스인 ‘루브르 미술관’은 1190년 필립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성채였다. 그러나 프랑수아1세에 의해 위압적인 분위기의 성채와 토굴감옥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고, 그 이후 숱한 프랑스의 역대 왕들이 그 건물에 손을 댔으며 방대한 양의 미술품을 수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루브르’가 파리 시민들에게 공개된 것은 프랑스대혁명 직후인 1793년이었다.
루브르는 센 강변과 접한 ‘튈르리 구역’에 있다. 미술관 왼쪽으로는 튈르리 공원, 프랑스대혁명 시절 단두대가 설치된 곳으로 유명한 콩코르드 광장,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는 샹젤리제 거리가 이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를 거쳐야 한다. 이 유리 피라미드는 미테랑 대통령 시절, 건축가 I M 페이에 의해 설계되어 1989년에 완공된 것이다. 유리 피라미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로비가 나오고 표를 사서 자기가 원하는 익관으로 입장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지하 로비에서 박물관으로 들어갈라치면 망설이게 마련이다. 소장 작품만 하더라도 약 40만점이 되며, 유럽 회화만도 30만점이 넘는다. 그러니 한 작품 앞에서 1분씩만 할애한다고 하더라도 약 4개월이 걸리는 셈이다. 또한 박물관의 구조가 슐리(Sully)관, 드농(Denon)관, 리슐리외(Richelieu)관 등 3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미로식 구조이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더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초심자들은 ‘루브르의 보물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헬레니즘 시대의 걸작 조각인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날개](The Winged Victory of Sarmothrace)나 로마시대의 조각인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The Joconde - Mono Lisa),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등이 그것들이다.

미소인 듯, 그리움인 듯, 당신의 마음을 알겠노라는 표정인 듯...

플라톤 ;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 ; 그 미소의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플라톤 ; 글쎄?
아리스토텔레스 : 비밀은 눈꼬리와 입가에 있죠. 거기를 살짝 그림자로 덮어 버리는 겁니다.
플라톤 ; 왜?
아리스토텔레스 ; 그럼 그림자에 묻힌 입가와 눈꼬리의 모습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상상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야말로 인간의 표정을 좌우하는 부분이니, 사람들은 거기서 저마다 다른 표정을 보게 되는 거죠.

루브르 박물관에 와서 첫 번째로 찾는 작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바로 ‘모나리자’이다. 미소인 듯, 그리움인 듯, 당신의 마음을 알겠노라는 표정인 듯, 냉철함을 잃지 않은 나무람인 듯 그 신비스러운 미소의 본질이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모나리자는 왜 그렇게 미묘한 웃음을 웃는가.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미학 오디세이」에서, 진중권씨는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스푸마토(안개)’ 기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평면에 깊이를 더해주는 원근법과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하여, 인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처리하여, 그 표정을 ‘보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겨 놓고 있기 때문에, 그 미소가 그리도 신비스럽다는 것이다. “다 빈치의 기법 가운데 ‘스푸마토(안개)’라는 게 있다. 인물들을 어스름한 안개로 감싸는 기법인데, 이를 이용하면 아스라한 안개 속에서 형체가 떠오르는 듯한 몽환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때 인물들의 형체는 반쯤 어둠에 묻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둠에 묻힌 그 부분의 모습을 저마다 다르게 추측하게 된다.” 그러나, 원근법과 스푸마토 기법이라는 예술적 기술만으로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파악하는 것은 조금 부족한 듯 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는 1452년 이탤리 쿠스카니 지방에 있는 빈치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화가 안드리아 델 베로치치오의 도재가 되어 재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 등의 유명한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고, 그 유명한 <모나리자>는 바로 1503년에 그려졌다. 1515년 프랑스의 프랑시스 1세는 그에게 끌루 성에 정착해서 연구를 계속해 나가라고 권했는데, 그는 1519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생전에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그의 글은 한동안 암호문처럼 여겨지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해독이 되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원래 그는 비밀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 당시 교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설(設)도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의 노트에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후자(後者)의 이유가 더욱 타당한 것 같다.

evom is non elos lI(다는않 지이직움 은양태)

‘거대한 욕망의 소용돌이’

[The Gay 100]이란 책에서 ‘폴 러셀(Paul Russel)’은 다 빈치에 대한 프로이드의 분석을 소개하고 있다. 프로이드는 ‘모나리자’를 다 빈치의 동성애적 욕망으로부터 분석하고 있다. 폴 러셀에 따르면 프로이드의 [다 빈치와 그의 유년시절의 기억](1910)에는, 다음과 같은 다 빈치의 노트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 중의 하나가 떠오른다. 요람에 누워있는 내게 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아 꼬리로 내 입을 벌리고 여러번 입술을 때렸다.’
펠라치오(구강성교)에 대한 환상을 표현하고 있는 기록이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펠라치오는 ‘젖먹이 때 엄마 젖꼭지를 입에 빨던 때의 안락한 상황을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소년은 엄마에 대한 사랑을 억누른다. 그는 엄마의 자리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과 엄마를 동일시한다. 그는 자신을 모델로 해서 자기와 닮은 사람을 새로운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렇게 해서 그는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실상 그는 무심결에 자기 사랑으로 빠져들어간 것일 뿐이다. 그가 성장하면서 사랑하게 되는 소년들은 결국 어릴 적의 자기 자신을 대체한 모습들이고 그의 복사판이다. 그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던 식으로 소년들을 사랑한다. 그는 이른바 ‘나르시시즘’의 길을 따라서 사랑의 대상을 찾게 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동성애자 역시 정상적인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다만 ‘어머니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다른 여성들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한다. 여자들에게 받은 흥분을 서둘러 남자에게 전이하는 과정이 거듭되어 가면서, 그는 동성애자가 되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모나리자의 알 듯 말 듯한 수수께끼 같은 미소의 비밀이 놓여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드가 보기에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동성애와 재능이 결합된 만능 천재였으며, 그의 모나리자는 그러한 천재성이 분출되어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와 통찰력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인 것이다.
한편, 어떤 이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다 빈치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안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의 ‘복잡한 심경’이 그 웃음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처럼 다양한 분석 자체가 ‘모나리자’의 미소를 더욱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

나폴레옹의 시대 이후 유럽 각국은 왕정복고기로 접어들게 되며, 프랑스 역시 루이 18세(재위 1814 ~ 1824)가 즉위하게 된다. 비록 왕권의 신성함은 인정했지만, 동시에 시민의 기본권(사상과 종교의 자유,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하고 양원제 의회를 수립하는 등 왕정복고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 도시노동자, 대부분의 부르주아지는 재산자격에 따라 선거권을 갖지 못하였다. 뒤이어 즉위한 샤를르 10세(재위 1824 ~ 30)는 의회와 입헌정부에 덜 관용적이었고, 하원은 극단적 보수귀족에 의해 지배되었다. 1825년 ‘신성모독법’이 제정되었고, 혁명기에 상실된 토지귀족의 재산에 대한 부분적 보상도 이루어졌다. 1830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자 국왕은 7월에 쿠테타를 일으켜 언론을 탄압하는 일련의 명령을 하달하고, 하원을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법을 제정하여 부유한 부르주아지의 선거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자유주의적 언론인과 의회주의자들 및 학생들이 1814년의 헌장으로의 복귀를 요구하자, 경제적 위기(식료품 가격 앙등과 실업의 확산)에 불만을 가진 파리의 노동자들과 군대의 이탈병력이 가세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것이 바로 1830년 7월 혁명이다.
바로 7월 혁명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작년 7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엽서에 이렇게 적었었다.

“이 그림을 보면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과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은 총을 치켜들고 있는 ‘소년’이다. 분노에 찬 표정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분노를 느끼게 할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년의 약동하는 생명력, 무한한 가능성과 젊음의 열정과 불꽃, 이것이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혁명의 진한 향기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화가 자신’이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을 실크 햇 모자를 쓴 중년 남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표정이 냉담해서 혁명 투쟁의 열정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쁘띠부르조아나 지식인의 소극성과 냉정함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그는 혁명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의 염려가 이처럼 화면에 그대로 표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현실은 들라크루아의 염려대로 보수적인 ‘루이 필립’을 왕으로 추대하는 선에서 7월 혁명은 마무리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였던 경제개혁 및 생계문제의 해결 등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혁명에의 열정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해줄 수는 없다. 보다 냉철한 현실 판단과 전략을 필요로 한다. 전세계를 들끓게 했던 97년 벽두의 ‘노동자 총파업 투쟁’ 또한 이제는 그 성과물을 어떻게 챙겨야 할 것인가를 냉철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소년의 열정 뿐만 아니라, 냉정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모나리자’에서 그 미소의 신비로움에 흠뻑 취해본 후, 우리는 인간의 가장 완전한 육체를 보러가야 한다.
‘밀로의 비너스’.
이 비너스 상은 루이 18세 시절인 1820년 4월 에게해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여러 섬들 중의 한 섬인 밀로 섬에서 발견됐다. 높이가 2미터에 이르는 그 조각상은 배꼽 아랫부분만을 주름진 옷으로 가린 반라의 여인상이었다. 발견 당시부터 왼팔은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고 없었으며 오른 팔은 겨드랑이 아래 젖가슴 높이에서 부러져 있었다. 농부(이오르고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예사롭지 않은 여인상을 내보였고 이 소식은 곧 현지의 프랑스 대리 영사 루이 브레스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일찍이 본국으로부터 “고대 미술품이 발견되었을 때는 지체없이 사 들이라”는 비밀 훈령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총영사에게 보고했다. 총영사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프랑스 공사 리비에르 후작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리비에르는 고대 예술품에 조예가 있는 어느 해군 소위를 직접 만나 자문을 구한 다음, 당장 자기 돈으로 조각상을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뜻밖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의 식민지였고, 그 중 키클라데스 제도는 전제주의적인 대관 니콜라이 모르네가 통치하고 있었다. 결국 조각상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 군과 터키 군은 일대 난투극을 벌였다. 싸움은 프랑스 군의 승리로 끝났고 조각상은 프랑스 군함에 실려 남프랑스의 툴롱 항으로 운반되었다. 이어 조각상은 리비에르 후작에게 건네졌고 후작은 다시 그것을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마침내 왕명에 의해 루브르 궁전에 소장된 이 여인상이 바로 저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 또는 멜로스의 아프로디테였다.
이 비너스 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개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이 조각상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없어진 팔이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를 나름대로 추측해보는 것이다.
오른 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져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한다. 또 왼팔은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으며, 손바닥을 제쳐 그 위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아프로디테에겐 비둘기, 백조, 장미 등 여러 상징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황금빛 사과-트로이전쟁을 불러일으킨-여서 다른 그림이나 조각에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왜 ‘밀로의 비너스’가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그리스인의 고대미술이 그토록 훌륭하게 묘사한 것과 같은, 이상적으로 아름답고 완전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과연 오늘날의 세계에 있을까?
현대 미술가들이 그린 그림과 조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밀로의 비너스’에서 표현된 완전한 육체의 묘사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밀로의 비너스’의 부러진 한 팔을 복구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도 증명된다. 과연 그런 인간은 없을까? 아니, 아름다운 인간이란 무엇을 뜻할까?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로댕은 ‘비너스와 아폴로는 전멸한 것이 아니며, 지금도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표현한 조각가의 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그 당시의 예술가는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볼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예술가는 눈 뜬 장님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댕의 이와 같은 견해는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이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인간의 아름다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간과하고 있다.
“옛날의 장인은 남성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오늘날의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추하고 주눅이 들었거나 혹은 대부분의 경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의 남자이다. 이러한 육체의 변질은 우리나라에 열병같이 번지고 있는 공업의 죄이다. 이 공업이 어린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모든 근대적인 인간에게 즐거움도 없고 획일적이며 무미건조한 노동을 끊임없이 부과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업노동자들은 시골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균형을 잃은 모습을 보인다.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아브루찌의 조그만 마을의 사람들까지도 머지않아 모두를 부패하게 하고 모두를 획일화할 공업을 배울 것이다. 그날이 되면 고전적인 그리스 풍의 옆 얼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과거의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공상이 아니라 사실에 의해 굳어진 진리이다. 부란토의 여자들은 예전에는 몹시 근사한 미인들이었지만 이 지방에 방적공장이 세워지고부터는 과격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이전의 아름다움을 점점 잃어 버렸다.”
이탈리아 사회학자 아킬레스 로리아는 ‘자본주의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 때문에 일어나는 일방적이고도 과도한 노동파괴작용에 의해서 사람들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말살되어 가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눈 뜬 장님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기계 문명이 문제시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문제도 ‘과도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그러고 보면, ‘모나리자’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도 ‘밀로의 비너스’상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만큼은 못하는 것 같다. 그녀는 적어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실현할 최후의 요소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사람은 아름답다’는 말이 결코 당위적 표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1997-03-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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