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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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1)
 투쟁 돌아보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121호
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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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 (1)*

전주희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원




1. 왜 다시 98년 투쟁을 들추는가?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이 벌어진 공간과 시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사건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반복 재생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굴절되기도 하고 축소・확대되기도 한다. 규모가 큰 사건은 그 사건에 직접 연루된 사람들 뿐 아니라 목격자, 주변부, 혹은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후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97년 IMF 외환위기 국면을 기억한다. 갑자기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되었고, 잘 돌아가기만 하던 경제 시스템은 곧 붕괴될 위기에 처한 ‘문제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의 모든 삶들이 수술대 위에 올려졌고, 미국과 IMF는 이 사회의 경제 상태가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회생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정말 현실은 그런 것 같았다. 언론은 연일 금융 위기와 재벌 경영의 문제를 이구동성으로 쏟아냈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 지역 공단의 중소 사업장들, ‘가격파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해 쏟아지는 거리의 할인 물결들, 갑자기 생겨난 듯 역 대합실을 배회하는 노숙자들.*) 이 글은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마련을 위한 프로젝트’(현대자동차노조, 2005) 보고서의 일부이다.
‘심각한 문제는 구직을 할 수 없다는 참담함이다. 건설 일용공 노동자들의 61%가 자살을 고민해 보았다는 비극적 설문조사, 생활고로 인한 자살자의 속출과 가장의 실업으로 인한 이혼율 급증, 가장의 가출과 가정 파탄으로 인하여 버려지는 아이들, 아버지의 실업으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학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의 급증’ - 노동전선 36호, 1998. 6.

또한 우리는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을 기억한다. 96월 12월 24일 새벽 6시, 노동법 개악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며 ‘탕 탕 탕’ 울려 퍼진 의사봉 소리와 함께 우리들의 투쟁도 전국 각 거리에서 전개되었다. 아침에 모여 거리를 점거하고,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그 최루탄 파편을 맞으며, 수십 일을 그렇게 거리에서 보냈다.
그 연장선에 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있었다. 정권과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정리해고를 공식적으로 관철시킬 필요가 있었고, 노동의 입장에서는 정리해고의 도입을 실제 현실에서 막아내느냐 마느냐의 투쟁이었다. 합의와 양보의 여지를 가늠하기 이전에 피차 지느냐, 이기느냐 둘 중 하나인 싸움이었다.
2005년 현재, 현대자동차 현장에서는 98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위치, 98년 투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을 생각한다면, 서로 다른 기억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직까지 집단적으로 98년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다양한 기억들 한 구석에는 숨겨진, 혹은 이미 잊혀진 98년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36일간 진행된,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고 겪었던 투쟁의 기억이다.
그런데 활동가나 조합원 대부분에게 98년에 대한 가장 강한 기억은 그 치열한 ‘투쟁’이 아니라 ‘결과’이다. 당시 집행부의 마지막 협상 보고가 그들에게 남겨진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식으로 결과로만 기억되는 순간, 투쟁은 사라진다. 그 혹독했던 시기에 36일 간의 전면 파업으로 맞섰던 그 선도성과 전투성도 사라진다. 자기 손가락의 금반지도 모자라 갓난 애기의 돌 반지마저 앞다투어 내놓던 그 혼돈의 시기에 정확히 자본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던 그 선명함도 없어진다. 무엇보다 그 투쟁을 만들었던 노동자 대중이 잊혀진다.
잊혀진 또 하나의 기억은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은 36일 간의 파업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파업이 끝나고, 활동가들을 포함한 무급휴직자와 정리해고자들이 현장을 떠나고, 어제의 투사였던 이들이 오늘의 생산 일꾼으로 숨막히는 노동 통제와 노동강도를 감내하고 있었던 그때, 그들은 투쟁을 지속했고, 또 투쟁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켜냈다. 그러므로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36일 간의 파업이라는 1부 투쟁 뿐 아니라, 1부가 끝난 후에도 이어졌던 2부 투쟁, 바로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36일 간의 대중 투쟁이 말끔히 잊혀졌다는 것은 좀 과도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남아있는 기억에는 “98년 때도 그렇게 싸웠는데 졌다, 그런데 지금 뭘⋯.”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한 면접자의 말처럼 패배적인 정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도부의 직권조인으로 모든 투쟁의 의미를 패배로만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98년의 기억 중에서 직권조인이라는 결과 속에 잊혀진 대중 행동과 투쟁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물론 이 보고서 역시 98년 투쟁을 제대로 복원해 내기에는 충분치 않다. 현장 활동가 46명과 조합원 100여 명이 참여한 면접 조사 결과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주체들의 내밀한 기억, 감추고 싶은 기억, 아직 다 풀리지 못한 논쟁 지점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연구팀의 미흡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주 목적이 현대자동차의 ‘현실’에 대한 분석이므로, 그나마 수집한 면접 내용조차 충분하게 담지 못한 점도 있다. 가령 이 보고서에는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또 다른 주체였던 가족대책위원회의 기록은 담지 못하였다. 또한 98년 투쟁 이후 식당 여성 조합원들과 함께 <미완의 장기전>을 치룬 주체였던 징계・정리해고자들(생대위, 해복투)의 투쟁 역시 담지 못하였다. 이들은 상당 기간 식당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출근투쟁, 텐트농성 투쟁을 함께 벌여냈으며, 해고자들이 먼저 복직되었고, 이후 2000년 임단협 이후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복직되었다.


2.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경과 이종호,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진보평론 3호)을 바탕으로 구성함.


1) 첫 번째 양보 - 희망퇴직 합의

이른바 ‘IMF 국면’에 접어든 1997년 11월 이후 현대자동차 자본은 ‘1998년 인력관리 운영계획’을 통해 1998년 한 해에만 총 3천명의 여유 인원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본은 1997년 말부터 하청 노동자 1천 8백여 명을 쫓아내더니, 1998년 들어와 회사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에 대한 명예퇴직을 실시하여 8백 명 이상을 ‘정리’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1998년 1월 13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쟁의 행위를 결의하고 ‘단협 사수, 고용 안정,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월 15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83.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노총은 1998년 2월 6일 새벽, 2년간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를 조기에 받아들이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직권조인’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상근 임원 전체의 퇴진과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구성을 결의하였다. 다음날 비대위에서는 2월 13∼14일의 총파업 투쟁을 결정했다. 그런데 비대위는 2월 12일 8시간의 회의 끝에 다시 총파업을 철회해버렸다. 바로 이날 대우조선 최대림 조합원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에 전 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 투쟁전선이 무너지고 2월 14일 임시국회에서 유예 조항이 삭제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통과됨으로써 이제 자본의 정리해고 공세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전 공장에 걸쳐 잔업이 축소되고 일방적 배치전환과 집단 순환 휴가가 실시되었다. 노동조합은 2월 19일 ‘중앙비대위’를 ‘고용안정대책위’로 전환하고, 3월 23일 노사실무협의에서 집단 휴가시 통상임금 70% 지급과 '고용안정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로 노조 스스로 단체협약을 위반하게 되었다. 당시 캐피코 노조나 현대정공 노조에서는 집단 휴가 시 단협에 의거 통상임금 100%씩을 쟁취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이 합의는 이후 다른 사업장에서의 집단 휴가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4월 8일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조합 주최로 현장조직들이 참여한 2차 현장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현대자동차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실천하는노동자회(실노회),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현노신), 한빛노동자회(한빛) 등 현장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개선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부터 “현실적 양보교섭”에 이르는 다양한 견해를 제출했다. 현장조직 민투위는 5월 들어 ‘주 35시간 이하로 노동시간 단축, 1일 7시간 주간 연속 2교대로 근무형태 개선,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통상임금 100% 보전과 생계비 부족분에 대한 고정 OT 확보, UPH down을 통한 적정 노동강도 유지와 생산량 조절’이라는 정책 대안을 정리하여 소책자로 제작·배포하고 조합원 중식 홍보투쟁 등을 진행했다.
4월 17일 노동조합 중앙비대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 단축, 주간 연속 2교대제로 근무형태 변경, 배치 전환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조합의 제안을 무시하고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으로 1차 희망퇴직 모집에 들어갔다. 통상급 4∼6개월치가 위로금으로 주어졌고 2,000명 가깝게 퇴직했다. 자본은 4월 23일 23%의 임금 삭감과 15,000여명에 대한 인원 정리를 의제로 하는 임시노사협의회를 4월 30일 개최하자고 요구하면서 정리해고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제108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집회에서 이갑용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 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해체・노동3권 보장・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상’ 등 5대 요구를 중심으로 5월 말・6월 초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행진 과정에서 격렬한 거리투쟁이 벌어졌다.
한편 현대자동차 공장에서는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이 실시되었고 1,50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자본은 5월 20일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수정안’을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제시하면서 2천 2백억 원 가량의 임금 삭감과 8,189명에 대한 2년간의 무급휴직・정리해고를 기정사실화하여 노동조합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이 날 노동조합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본관 건물 로비에서 강제 희망퇴직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강제 희망퇴직 당한 52세의 한 여성 조합원은 “나 혼자서 4명 가족 먹여 살리는데 퇴직금 2천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죽고 말겠다!”라며 대성통곡하였다. 5월 25일 조합원 총회에서는 89.4%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5월 27・28일 민주노총이 1차 총파업에 들어갔고, 이틀 동안 49개 노조 7만 7천여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5월 29일 기아자동차의 송인도 조합원이 분신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6월 1일 ‘체불임금 지급과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6월 5일 민주노총이 6·10 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패배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2차 총파업 철회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또한 현대자동차만의 투쟁으로 고립되었다.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집행부는 3차 희망퇴직에 합의했다. 합의 내용은 “희망퇴직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되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고, 위로금은 (근속) 10년 이상 12개월, 5∼10년 11개월, 5년 미만 10개월치 지급” 등이었다.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천여 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조합원들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노사 합의사항을 “6월 30일 이후에는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집행부의 희망퇴직 합의에 대해서 민투위는 "노조에서는 희망퇴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동 등을 회사가 받아들일 때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희망퇴직을 합의한 것은 조합원들을 기만한 행동이다. 이는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희망퇴직은 위장된 정리해고이며, 임금 삭감 또한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민투위 대자보 ‘희망퇴직 합의는 잘못되었다’, 1998.6.25)


2) 두 번째 양보 - 임금 삭감안 제출

6월 30일 오전, 현대자동차 자본은 4,830명의 조합원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노동부에 신고하여 접수를 마쳤다. 신고서에는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842명을 추가로 잘라야 한다.”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은 7월 4일까지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6월 30일 26시간 1차 경고 파업에 들어갔고, 다시 7월 6일 48시간 2차 경고 파업을 벌였다. 7월 10・11・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4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7월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5・16일 총 68개 노조 1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파업이 벌어졌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비대위도 무기한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이틀 동안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7월 15일 밤 중앙 비대위는 전면 파업을 유보하고 16일 오전 10시부터 정상조업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또 만장일치로 고용조정 및 임금 관련 교섭 폭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위임하였다. 노조 위원장은 이 날 민투위를 탈퇴했다. “공인으로서 더욱더 조합원의 생존권 사수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져 조직을 탈퇴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삼만이천 조합원을 책임지려” 한다는 것이 당시 민투위 의장에게 제출한 탈퇴서의 내용이었다.
7월 16일,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대폭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 △97년 성과금 150% 미지급분, 휴가비, 선물비, 고정 O/T수당, 직책수당 등을 포함하여 1년간 약 2,500억원 규모 지급을 중단토록 하는 고통 분담 안 제출 △정리해고 규모인 4,380명 중 4차 희망퇴직자 500명을 제외한 4,300명 중에서 하도급 전환 대상으로 포함된(식당, 출고, 시설 등) 938명은 직영으로 고용을 유지하고 △1,800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일자리를 유지하고 △나머지 1,500명에 대해서는 순환휴가제를 도입하여 6개월의 휴가를 실시하며, 휴가시 임금은 회사 측이 통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노동조합은 기금을 조성하여 30%를 지원한다는 안이 ‘마지막 협상에 임하는 노조 입장’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조합의 양보에도 아랑곳없이 7월 17일부터 정리해고자 명단을 개별 통보하기 시작했다.
7월 20일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렬되고 노동조합은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1만 조합원이 참가한 결사항전 결의대회에서 위원장이 삭발과 무기한 철야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세 전직 위원장들이 45m 굴뚝농성에 들어갔다. 조합원 5천여 명은 노동조합과 공장 출입문을 중심으로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가족들도 가족대책위를 구성하여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23일부터 밤샘농성을 함께 벌였다.
자본은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갔고 7월 23일부터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4・5차 희망퇴직으로 3천 명 가까이 회사를 떠났다.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천 명이 훨씬 넘었다.
7월 22일에는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만 8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 23일 민주노총 산별 대표자 회의는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 공동투쟁 전선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7월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은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동조합 상급단체 상근자들과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 16명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몰아 구속시켰다. 25일 현장조직 의장단에 대한 체포영장도 발부되었다.

7월 31일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와 노사가 참여한 노사정 간담회가 열렸지만 자본은 오히려 1,538명에 대해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하였다. 정리해고 대상에는 노조 상무집행위원 15명과 현직 대의원 89명 등 총 115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민투위 120여 명, 실노회 70여 명 등 현장활동가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8월 1일부터 9일까지 휴가 기간 동안 3천여 조합원들은 휴가를 반납하고 농성투쟁을 계속 벌여나갔다. 노동조합은 휴가 기간 동안 어린이 여름학교, 노동영화제, 특별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가족들의 참여를 이끌었고, 매일 저녁 집회를 통해 투쟁 결의를 다져나갔다.
8월 5일 집행부는 8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의 울산 방문 소식에 맞춰 또다시 추가 양보안을 제시했다. △사회적 상식 수준의 추가적 임금 삭감, △노동조합 임원에 대한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 △노사 평화선언 및 2000년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하는 고용안정 협정서 체결 등 이었다. 민투위는 집행부의 추가 양보에 대해 “첫째,… 만약 양보안처럼 2000년까지 정리해고 유보라면 이는 투쟁의 목표와 20여일 동안 강고한 투쟁을 전개해온 모든 노력과 성과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며, 7월 31일 정리해고된 1,538명은 시한부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이며 2, 3차의 정리해고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상식이 통하는 임금 삭감이라 하는데 이미 월 평균 임금 삭감액이 45만원을 육박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임금 삭감을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조합원의 동의 없는 추가 임금 삭감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셋째, 무쟁의 선언은 줄 것을 다 주고 현장을 사측에게 넘겨준다는 항복인 것이다… 향후 진행될 전환 배치, 라인 통합, 라인 축소, 하청 이관, 그리고 모답스 도입에 따른 여유인원 발생 등 사측의 의도가 분명함에도 무쟁의 선언을 한다면 또 다시 현대자동차는 고용 불안에 직면하고 더 큰 희생과 양보만이 남을 뿐”이라고 비판했다.(1998.8.9. '민투위 통신')

3. 공장 점거 천막농성 파업과
김광식 집행부의 정리해고 수용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의 ‘감동’을 한 조합원은 이렇게 전했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폭우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을 땐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사측도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미쳤다’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이 때 가졌습니다. 이 날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들 대부분은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겁니다. (‘인터뷰, 현대자동차 윤실근’, 노동전선 1998.10)

휴가 이후 첫 출근인 8월 10일 자본은 협상을 제의해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60%는 3년간 무급휴직, △40%는 정리해고, △정리해고 대상자 중 식당 종사자 167명에 대해서는 고용 승계를 전제로 외주・하청화 하고 나머지 인원은 희망퇴직을 모집해서 정리해고 최소화, △희망퇴직 조건은 5차 때와 같고(10∼12개월분 위로금), 노조의 2천 5백억 원 임금 삭감안은 수용한다는 것이 자본의 최종 안이었다. 노동조합은 순환휴가와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8월 13일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에 지어놓은 10m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농성 대오는 휴가 이후 4∼5천명으로 불어났고 매일 저녁 집회에는 1만 명 이상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결합하면서 열기는 더욱 높아져갔다. 정문 앞 육교와 건물 등에는 지역 주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집회를 지켜보면서 호응을 보내왔다. 자본은 공장을 가동시킨다며 정몽구 회장을 앞세워 현장에 들어와 사수대와 대치하는 모습을 언론에 흘리면서 공권력 투입에 대한 명분을 쌓아가는 한편, 용역 깡패 수백 명을 사택과 경주 등지에 대기시켜놓는 등 공권력 투입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8월 14일 대검찰청의 공권력 투입 발표가 있었고 15일 범민족대회 때문에 빠져나갔던 병력이 돌아오면서 100여개 중대 1만 2천여 명의 경찰 병력이 현대자동차 주변에 배치되었다. 16일 안영수 노동부 차관이, 17일 이기호 노동부 장관이 내려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17일 자본은 관리자와 하청업체 직원들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정상 조업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으며, 농성에 참가하지 않는 조합원들에게 일당을 줘가면서 울산 인근으로 놀러 다니게 하는 등 투쟁 대오를 고립시키려 혈안이 되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감이 가장 높았던 이 날 저녁 집회에는 그동안 집회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인 2만여 명의 조합원이 가족들과 함께 참여하여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노동조합은 전 공장에 흩어져 있던 농성 천막들을 승용1공장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18일 새벽, 페퍼포그와 포크레인을 동원한 진압 병력이 정문 앞에 집결하자 순식간에 승용1공장 조합원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즉각 대치에 들어갔다. 이렇듯 강력한 저지로 경찰 병력은 금방 물러갔지만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 날 밤 노무현 부총재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이 급파되었다.
8월 20일 정부 중재안이 나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중 식당 여성 조합원을 포함하여 250∼300명으로 최소화, △1,200여명 무급휴직・순환휴가, △고용안정기금 설치・운영, △민・형사상 고소고발과 손해배상, 재산가압류 취하, 징계 철회, △노사평화선언 등이 골자였다.
8월 21일 저녁 협상보고대회에서 위원장은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식당 조합원 정리해고 위로금 2,000∼2,500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식당을 소비조합 형태로 노조에서 운영하겠다. 고소고발, 손해배상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만만하지 않다. 내일 17시까지 중재안을 받지 않으면 노조에서 제시한 모든 안을 철회하겠다.”라고 밝혔다. 집회 중간 중간 야유와 함성 소리 때문에 위원장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무대 뒷편에서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집회가 끝난 직후 식당 여성 대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그날 오전 “식당 조합원들이 정리해고를 수용하라.”는 위원장과의 간담회 내용을 폭로했다. 이어 민투위 의장은 “국민회의 중재단은 바로 이것을 노렸다. 우리들이 분열하는 것을 노린 것이다. 힘을 한 곳으로 모을 때다.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지 못한다면 현장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선대에서도 마이크를 잡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이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라고 선동했다.
집회 뒤 가족대책위를 중심으로 노동조합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사수대를 비롯하여 1천여 조합원이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들었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공권력이 무서웠으면 벌써 투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위원장이 투쟁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양보안과 중재안을 철회하라!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노동조합 위에 매달아 놓은 관을 불태워 버려라!”, “지금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회사가 시켜서 일당받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과 같은 투표권을 줘서 투표로 심판받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협상 때 회사는 당당한데 위원장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힘내라. 표정 관리 해라!” 조합원들이 위원장의 입장을 다시 요구하자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만 밝히고 끝까지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다. 중재안 합의에 대해 민투위는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기만적 중재안 반대,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받는다, △현장조직들간의 입장을 통일해 유인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노회가 조직원 총회에서 자기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 또한 현장조직들의 입장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정리되지 않아 윤성근 전 위원장 혼자만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작성하여 민투위 유인물에 실었을 뿐이었다.

8월 22일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 조합원, 사수대, 민투위 등은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던 본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가졌다. 항의집회 대오는 저녁이 되어 5백여 명으로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저녁 집회에는 농성투쟁 이후 가장 적은 3천여 명이 참여했고, 위원장은 “앞으로 협상에 목매달지 않겠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밝혔던 임금삭감안을 철회한다. 더 이상 비굴하게 머리 숙여 협상에 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힘있는 투쟁을 조직하자.”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8월 23일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서 민주노총 주최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렸고 집회 참가자 3천여 명은 현대자동차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 날 권영길 민주노총 전위원장은 “현대자동차 협상이 만약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 주자.”라고 얘기하여 집회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틀째 문선대가 문화선동 활동을 거부한 가운데 열린 이 날 저녁 집회에서 위원장은 “언론에 현혹되지 말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이 나오면 도장을 찍기 전에 조합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8월 24일 새벽 2시 30분 노사합의 소식이 TV 자막을 통해 발표되었고, 오전 6시 노사는 잠정합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277명 정리해고, 나머지 1,261여명 1년 6개월 무급휴직, 정상조업을 위한 노력이 있을 때 재산 가압류와 고소고발 등에 대한 부분 철회,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 등이 주요 합의 내용이었다.
아침 뉴스를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합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빠져나갔고, 몇몇 분노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노동조합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고, 사수대 옷을 벗어 불태우고, 관을 끌어내려 불태웠다. 오후 들어 농성 조합원들 거의 모두가 빠져 나갔고 바리케이트가 철거되었다.

4) 잠정합의안 부결

이른바 노사정이 합의한 8・24 잠정합의안은 9월 1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63.6%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된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합의 내용은 오히려 더욱 개악되어 관철되었다.
결국 98년 현대자동차에서는 하청 노동자 1천 8백여 명, 과장급 이상 관리자 8백여 명, 다섯 차례의 희망퇴직 8천여 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261명 등 모두 1만 2천여 명이 이른바 ‘고용조정’되었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수용으로 8월 17일부터 시작한 만도기계 노동조합의 전면 파업 투쟁은 전국 전선의 엄호를 받지 못한 채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로 격파당하고 말았다.
98년 12월 22일 7대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진행되었고, 62.2%가 불신임에 찬성함으로써 7대 집행부는 간신히 불신임을 모면했다. 99년 7대 집행부가 사퇴하고 난 뒤 노동조합 임원선거 2차 투표에서 정갑득 후보 진영이 8대 집행부로 당선되어 간신히 노동조합이 정상화되었다. 99년 12월 27일 부로 무급휴직자 전원이 복직되었다.

2006-07-14 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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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글을 이제 다시 왜 또 쓰는 건지 왜? / 200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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