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지 마라. 조합원이 주체다
박선봉
현장을 빼앗겼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피로 되찾은
현장 권력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의 카운터 펀치 한 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현장 권력을 되찾아야 할 주체인 활동가들이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갈팡지팡 헤매고 있다. 심지어는
도대체 조합원들이 움직이질 않으려 한다고 불만을 터트리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조합원을 주체로
세우려고 노력을 해 본적이 있었던가? 조합의 중심이고,
밑바탕이며 버팀목인 조합원이 단순한 동원의 대상으로 떨어진
것이 어디 한두 해 전의 얘긴가? 집회에도, 교육에도, 파업에도,
문화에도, 선전에도, 교섭에도 더 이상 조합원은 없다.
먼저 집회를 보자.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구조에서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무대의 높은 턱을 넘지 못한다. 무대는 언제부턴가
소수의 권력화된 임원과 간부들의 전용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조합원들의 분노, 염원, 욕구, 불만, 희망,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냥 집회에 동원되어서
구호나 외치고, 임원들이 내리는 지침이나 맥없이 따라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대규모 집회 때는 무대를
등지고 앉아 자기들끼리 술판을 벌이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집회 장면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어떤가? 조합원들은 이
카메라에서도 소외된다. 카메라의 앵글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다.
조합원 개개인의 표정이나 결의, 분노는 취재 대상이 되지
못한다. 조합원들은 집단적으로 구호를 외치거나 투쟁가를 부를
때 하나의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카메라는
집회장을 떠나지 못한다. 현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조합원들의
모습, 그들의 애로사항, 그들의 고통, 그들의 기쁨과 희망은
카메라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가정에서 자녀의
교육문제로 고통받는 조합원들의 모습, 지역사회에서 소외되고
따돌림당하는, 그 속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조합원의 고민과 불안도 카메라는 애써 무시한다.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또 어떤가? 교육이라고 해
봐야 1년에 한두 번 임단투 때, 그것도 정세교육이 노동조합이
하는 교육의 전부다. 물론 중요한 투쟁을 앞두고 있는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당면 투쟁에 당장 써먹을 교육이 가장
급할 것이다. 그리고 조합원들도 당면 투쟁의 의미를 아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설문조사나 실태조사를 보면 조합원들의
교육에 대한 욕구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고 있다.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은, 활동가들은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가? 80년대 말에만 해도 한글을 못 읽는 노동자들이
있어서, 한글 강독을 해가면서도 그들을 교육의 주체로, 운동의
주체로, 자기 삶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 교육의 조건도 좋아지고, 여가시간도 늘어났는데,
1년 1회의 교육으로 모든 조합원의 교육의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합원들은 투쟁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노라면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자본가들이, 보수언론들이, 자본에 추파를 던지며
살아가는 관변 사회단체들이 해결해줄 리가 만무하다.
노동조합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1년 1회 통합교육으로 그 것을 다할 수가
없다. 여러 가지 방식을 고민하고 시도해봐야 한다. 작업경력,
연령뿐만 아니라 직위, 노동운동 경력, 성별차이, 주제별(파업,
일상, 현장, 산안, 노동법, 복지, 노래, 풍물, 영상 등),
시간별(오전, 오후, 야간, 주말), 기간별(일회성, 숙박교육,
학기별)로 다양한 내용의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조합원들이
관심과 필요에 따라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제공해야
한다.
파업 때도 조합원들은 소외된다. 그들은 동원된 쪽수로만 표현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조합원 전체로만 기능할 뿐 주체화된
조합원 개개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의 자발성과
창의성, 역동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기회는 소멸된다.
조합원들의 관심사는 다양하다. 주구장창 집회만 해대지 말고,
그들이 평소에 즐겨하는 것들을 파업 공간으로 가져오는 것은
어떤가? 파업 공간을 조합원들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중한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떤가? 파업 공간을 조합원들만의
외딴섬이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 주민이 같이 참가하는 공동의
공간, 소통과 교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가?
문예교육도 마찬가지다. 문예를 통한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노동조합에서
지원하는 몇 개 안 되는 문화패에 속해 있는 소수를 뺀 대다수의
조합원은 문예로부터 소외된다. 그 소수의 문화패도
노동조합에서 약간의 지원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집행부의
하수인으로 여기거나, 투쟁 시에 문선대로 써먹을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나마도 집행부가 바뀌면 자기들과 입장이 다르다고
그 문화패를 해체시켜버리는 일도 종종 생기곤 한다. 그런
실정이고 보면 조합원들의 문예적인 욕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리저리 사방팔방으로 대중문화에 둘러싸여
있는 조합원들에게 노동자문화의 직접적인 생산과 소비, 소통을
통하여 최소한 숨이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이윤율 저하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으로 IMF를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다. 건국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조장한 후, 개인적인 생존의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조정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끝내
한국자본주의에 신자유주의 이식을 전면화하는데 성공한다. 그
신자유주의는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통치방식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뿐만 아니라 교육문제,
가족문제, 지역 및 일상생활 등 전면적인 사회적 재편을 위한
헤게모니 장악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은 아직까지도 대중동원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활동이 계속 되는 한
활동가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현장
권력을 되찾는 것은 영영 뭔 나라의 얘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현장을 조합원들에게 돌려주자. 노동조합의 주인인
조합원들이 현장투쟁의 주체가 되게 하자. 그들을 동원의
대상에서 살아 숨쉬는, 사고하는 노동자, 토론하는 노동자,
선동하는 노동자, 분노하는 노동자, 글을 쓰는 노동자로, 원래
그대로 돌려주는 활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
운동의 미래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