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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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추억(?)
 교육현장

현장에서 미래를  제121호
김산

배반의 추억(?)

김산




‘부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시저)하면 떠오르는 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이야기고, 또 하나는 카이사르가 부루투스에게 암살을 당하면서 ‘부루투스 너마저’라고 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가장 믿던 이에게 배신을 당할 때의 그 충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통해 늘 있어 왔던 일이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겠는가? 철권통치를 자랑하던 박정희도 그가 믿던 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죽임을 당한 걸 보면 세상에 믿을 이가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세상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거늘 그 믿음이 사라지는 듯하니 마음 한구석의 쓸쓸함은 감출 수 없다.

배반의 추억들

꼭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교육노동에 있어서도 ‘부루투스 너마저’의 사건이 생겼다.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을 지내고 청와대 교육 비서관을 지낸 김진경씨의 전교조 비판과 한겨레의 사설사건이다. 김진경과 한겨레 사설은 교육노동진영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심한 배신감을 갖게 하였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숱한 배반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만 하더라도 한때 민중당이라는 거창한 당 활동을 하던 김문수, 이재오를 비롯한 수많은 변절자들을 우리는 매일 매일 보고 있다. 대학시절에 학생 운동을 한 것은 뭘 모르고 한 철 없는 짓이었다고 깊은 자아비판을 하고는 당당하게 뉴 라이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활동하는 과거 운동권(?)이라는 자들. 학문적 반성에서 깊은 통찰로 그 방향을 과감히 돌린 안병직과 이영훈. 우리는 그야 말로 배반의 추억 속에 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 전교조 인사가 전교조를 비난했다고 무슨 특별한 일이 되겠는가? 사실 평범한 일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충격파는 만만치 않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하다. 적어도 교육운동에 있어서 아직까지 배반의 추억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권이야 배반과 변절이 비일비재한 일이니 별일 아니겠지만 교육노동운동에 있어서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어 충격이 큰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육 현실이 점점 참혹 해져 가는데 그것을 해결하자고 노력하는 전교조에 대해서 전교조 출신이 배반을 때릴 줄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초심’을 말한다.

난 김진경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을 뿐더러 알고도 싶지 않다. 또한 전교조 창립초기에 참여를 안했으니 그가 말하는 ‘초심’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대로 지금 전교조가 ‘초심’을 잃었는가? 그가 말하는 ‘초심’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교조가 민족·민주·인간교육을 그 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초심’을 잃었다고 비판하려면 지금의 전교조가 과거보다 투쟁이 약하다거나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투쟁에 소홀하다는 점 등을 들어야 정당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을 반대한다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지 않았는가?

[서울신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이 현재 전교조를 두고 “교육발전 걸림돌”,“대안없이 비판만 하는 집단”이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전교조 투쟁을 둘러싼 공방이 확산되고 있다.
논쟁의 가운데에 교원평가제와 교원성과급제 등 참여정부의 핵심적인 교육현안이 있어 대안마련 등 건설적인 토론으로 이어질 지 주목된다.
전교조 성향의 교육단체인 ‘학벌없는 사회’는 김 전 비서관의 전교조 비판을 정부의 시장주의 개혁과 연계해 비판했다. 이 단체는 “초중등 교육부문이 지옥으로 바뀌게 된 원인은 사회양극화와 대학서열체제에 있다.”면서 “그런데도 정부의 교육개혁은 대학서열체제와 사회양극화를 더 심화하는 내용 일색”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오직 전교조만이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입시전쟁’을 단호하게 거부해 ‘명예로운 고립’이라는 훈장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2001∼2002년 전교조 위원장, 2004∼2005년 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한 이수호(선린인터넷고 교사)씨는 “기본적으로 김진경씨를 전교조와 같이 보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면서 “마치 현재 한나라당 김문수, 이재오 의원을 ‘민중당’이라고 보는 것과 똑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은 교육 민주화를 추구했던 과거와 달리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 저지가 전교조의 가장 큰 목표”라면서 “과거의 잣대로 현재 전교조를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전교조 조합원인 서울 U고등학교 김모 교사는 “어느 조직이든 소수의 목소리는 있기 마련”이라면서 “김 전 비서관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현재 전교조에 있긴 하겠지만 다수의견은 분명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교조 초창기 핵심 멤버였던 이인규 서울 미술고교 교감은 김 전 비서관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 교감은 전교조 참교육실천위원회 2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교육혁신위 전문위원과 국가인권위 학교교육 전문위원, 민주평통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교감은 “김 전 비서관의 비판은 개인만의 생각이 아닌 전교조 초창기 멤버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전교조는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장혜옥 전교조 위원장은 (6월) 19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로 교육인적자원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토론을 제의했다. 장 위원장은 “김씨의 비판은 보수진영의 ‘노조 죽이기’행태와 다를 바 없으며, 전교조의 개혁성과 진보성을 매도하려는 시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최근 잇따라 과거 핵심멤버들로부터 약점을 공격당하고 있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마침내 반격에 나섰다. “근거 없는 매도로, 토론해 보자”는 제안이지만 그 이면에는 상당한 불쾌감과 당혹감이 섞여 있다. 상대는 전교조를 비판한 초대 정책실장 김진경(金津經)씨, 2대 참교육실천위원장 이인규(李仁圭)씨다.
노동운동에 대해서 수구보수세력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집단 이기주의라는 말이다. 노조가 파업을 할 경우 수구언론이 하는 말은 늘 똑 같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기업경영이 어려운데 노조 이기주의에 빠져 파업을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노조의 파업이나 투쟁 등은 계급이익에 의한 집단이기주의이고 지배계급들의 행위는 보편적 계급이익이라는 것인가? 그들이야 말로 계급적 이익,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압하고 착취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들이 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파업과 투쟁도 집단이기주의로 모는 것이 정당한가? 그들 스스로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를 지배하거늘 누구보고 집단이기주의라 하는가. 노동계급의 투쟁은 단순히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계급의 폐지를 통한 전 계급의 해방을 위한 전 계급적 투쟁이다. 따라서 노조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라는 말로 비난 한다는 것은 그 자체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진경과 한겨레는 왜 전교조가 ‘초심’을 잃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졌느니 하고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전교조가 ‘객관적 계급성’을 잃고 ‘주관적 계급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전교조는 교직원노동조합이다. 따라서 조합원은 교사이다. 그런데 교사의 계급적 위치는 어디인가? 교사는 객관적으로는 쁘띠부르주아에 속하며 신중간층을 구성한다. 쁘띠부르주아의 경우 대체로 부르주아를 위해서 일하며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에 봉사하며 생존한다. 그렇다면 쁘띠부르주아인 교사들은 부르주아와 이해를 같이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전교조는 부르주아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르주아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에 더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다.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집단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초심’을 잃었는지 모른다. 권위주의 시절에 쁘띠부르주아로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했으며 부르주아와 함께 지배계급의 역할을 하는 것이 ‘초심’이었다면 지금의 전교조는 ‘초심’을 잃은 것이 된다. 그것도 다만 지금의 집행부에만 해당되는. 얼마든지 ‘초심’을 간직한 집행부가 들어설 수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한겨레의 본색

한겨레를 한편인 것처럼 생각한 많은 교육동지들은 한겨레의 사설에서 또 한 번 배신감을 느꼈다. 이미 조·중·동에서 떠들고 있으니 한겨레마저 떠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협공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의 본색이 들어난 것이다. 이미 한겨레가 변했다는 것은 진보진영에서 늘 하던 말인데도 교육운동진영은 그래도 한겨레를 우군으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냉전반공수구세력의 무차별 폭격과 신자유주의 세력인 한겨레의 미사일 한 방은 교육운동 진영의 정신을 반짝 들게 해주었다. 우리가 포위되었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신자유주의가 진보인가? 신자유주의 정책이 개혁이며 혁신인가? 그들이 말하는 개혁과 혁신은 누구를 위하는 것인가? 노동유연성 정책이 개혁인가? 점수로 아이들을 한 줄 세우더니, 그것도 모자라 교사들도 한줄 세우기 해서 떨어뜨리겠다는 것이 개혁인가? 교사들을 점수 올리는 기능인으로 만들고 그 자신 점수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혁신인가? 모든 인간을 부르주아의 통제 하에 두고 그들의 지배를 마음껏 하고자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닌가? 인간이 아닌 돈의 지배를 만들고 돈의 노예, 자본의 노예를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 아닌가? 그런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집단이기주의 운운하고 ‘초심’운운한다는 자체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은 이미 드러났다고 본다. 더 이상 한겨레를 진보진영의 우군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겨레는 언론기업이며 시장의 논리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냉전반공수구세력이 지배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구세력과의 투쟁이 1차적 목표가 되다보니 신자유주의 세력을 우군으로 생각했다. 그런 결정적 우는 노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민중은 노정권이 배신했다고 하였으나 사실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우리가 그것을 못 본 것뿐이다. 한겨레신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우리는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하나하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발등을 찍는 일은 일어 날 것이다. 그러니 준비를 잘해야 한다. 발등이 찍히는 일이 없게 말이다.

자본과 인간

자본의 탐욕은 끝이 없다. 자본의 탐욕은 자본의 파멸에 의해서만 멈추어질 수 있다. 자본은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닮았다. 따라서 인간의 탐욕 또한 생을 마감하기 전에는 끝이 없다. 인간이 탐욕을 버릴 때 자본도 그 탐욕을 버릴 것이다. 인간이 탐욕하지 않게 하는 것.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탐욕을 부리지 않는 인간. 나만이 아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착취가 없는 세상. 사랑과 믿음이 넘치는 세상. 이런 세상을 만들고 교육하는 것이 전교조의 ‘초심’이다. 과연 우리가 어떤 ‘초심’을 잃었으며 그대들이 말하는 ‘초심’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할 것이며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초심’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대들이 원하는 세상은 우리의 세상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랑과 평화와 행복을 가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을 만난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집단이기주의적’으로 말이다.

2006-07-14 17: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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