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인 도 / 원진노동자․직업병위원회 부위원장
현장통신
산재투쟁의 산 역사, 원진 10년 투쟁의 결산
결행, 가자! 한국산업은행과 담판을 위해
지난 3월 14일은 오전 10시부터 굵은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 비를 맞으며 ‘원진노동자․직업병위원회(이하
원노위)’ 소속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환자들이 비장한 각오로
7대의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에 경기도 구리시
왕숙천 다리 위에서 출발한 버스는 빗길 속에서도 목적지인 서울
종로 2가 한국산업은행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경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7대의 버스 안은 내내 침묵으로
일관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으나 버스의 출입문은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집회신고를 거부한 종로 경찰서는 되돌아 갈
것을 종용하였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각 버스에 한
명씩 책임자가 있다는 구실로 한 사람씩 내리게 하여
한국산업은행에 교섭을 요청했다. 은행 이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산업은행의 교섭단은 ‘원노위’가 요구하는 원진
전문병원에 대해서는 “무리다, 책임이 없다”고, 현재 원진
직업병 관리재단의 기금부족 상태에 대해서는 “내부 검토 중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농성돌입에 앞서 경찰 따돌리기 작전
오후 2시 한국산업은행의 일방적 통보내용을 가지고 나온
‘원노위’ 대표단은 약간의 논의 끝에 명동성당 근거지투쟁
사수를 결의하였다. 곧이어 각자 타고 온 버스에 복귀하여 은행
측과 나눈 대화내용과 지도부의 결심을 설명하고 일곱 대의
버스가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경찰은 버스를 경기도 구리시로 내몰기 위해
교통순찰차를 앞세우고 전경버스 10여 대를 따라 붙였다. 그러나
경찰의 유도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원노위’
지도부는 처음부터 2대의 버스에 집중 탑승하고 위장된 지도부
버스를 앞세워 경찰을 따돌렸기 때문에 명동성당 진입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머지 5대의 버스가 동대문과
청량리 등을 거쳐 명성에 합류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었다.
재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비가 뿌리고 있는 가운데 명동성당 텐트농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도심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원진레이온의 요구와 상황을
광범위하게 홍보, 선전하고 대중적 투쟁의 기초를 마련하려던
‘원노위’의 투쟁방침은 출발에서부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요 행사들로 인해 농성텐트를 밤에만 치게
되자 ‘원노위’ 투쟁에 구심 역할을 해야 할 명성투쟁에 훼손이
초래되었다. 잠재적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원진투쟁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해 경찰은 명동성당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고
‘원노위’ 회원들과 사회 각계와의 연대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3월 14일부터 이틀간 내린 봄비는 분명 새생명을 잉태시키는
자연의 귀중함이었다. 그러나 자연의 힘조차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에게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악역 노릇을 하였다. 투쟁지도부로서의 상징성만 지닌
명성농성은 고립되었고 새로운 돌파구를 요구받고 있었다.
그렇게 밤을 맞이하며 이번 투쟁의 성격은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진레이온 10년 투쟁의 총화, 원진 전문병원 건립투쟁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은 88년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원진레이온의 1차 투쟁이었다. 그리고 97년까지 다섯 차례의
사회적․정치적 투쟁이 직업병 환자들의 이해에 기초해서
대중적으로 있었다.
1차 투쟁 : 88년 직업병 인정 투쟁
88년 원진레이온 최초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이 강제퇴사
당한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당시는 노동조합
사정상 투쟁지도력과 동력이 현장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현장과 분리된 투쟁이었지만 보건의료인과 산재환자단체,
지역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한 대책위는 사회적으로 원진레이온
직업병의 참상을 알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88년 여름
서울올림픽의 성화 봉송로를 틀어막겠다는 노동자의 의지는
마침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21명에 대해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인정을 노동부가 하게 된 것이다. 그 승리로 노동부의
산업안전 전반에 대한 불신의 소리와 자성 그리고 관계법령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의 승리는
양심적이고 현장의 아픔을 함께 하는 보건의료인에게도 자부심과
성과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타협을 기초로 한 투쟁의 성과는
부분적이었으며 또다른 투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현재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고대 안암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박수일 씨
2차 투쟁 : 91년 고 김봉환 동지 137일 간의 장례투쟁
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하여 83년 퇴사할 때까지 직업병 초기
증상인 두통, 손발 저림 등으로 고생하시던 김봉환 씨는 89년에
집에서 쓰러지면서 병원신세를 수시로 지게 됐다. 90년 당시
사당의원에서 1차 건강검진 결과 고혈압 등 이황화탄소 의증으로
판명되어 회사와 노동부에 산재요양 신청을 냈지만 거부당하고
말았다. 거부이유는 김봉환 동지가 근무했던 원액과는
원진가스가 발생되지 않는 ‘비유해 부서’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노동부와 회사에 계속적인
항의를 조직하였고 91년 1월 5일 노동부는 마지못해 산재요양
신청을 승인했다. 그러나 같은 날 김봉환 씨는 운명하고 말았다.
이후 137일 간의 피나는 장례투쟁으로 다음과 같은 성과물을
획득했다.
․김봉환씨는 직업병이 이환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7등급 선에서 합의 이후 법정공방을 통해 개연성을 인정받고
1등급으로 재조정됨.
․전 사원에 대한 역학조사 실시 및 작업환경 측정에
노조대표 참여보장, 노조측 강사가 분기별 3시간 이상 교육 등
21개 항의 합의를 이끌어냄.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가스에 노출되어 있는
지역주민에 대한 대책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지역주민에 대한
검진방안을 모색하고 조직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으나 실현시키지
못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피해실태 파악과 원진 전문병원 건립
이후의 관계설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취약하게 되었다.
3차 투쟁 : 92년 직업병 인정기준 개정투쟁
91년 137일 간의 장례투쟁으로 얻은 성과물로 92년 실시한 전
사원 역학조사는 직업병 인정기준 완화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92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중심으로 짜여진 역학조사단
조사 결과 당시 이황화탄소 중독 인정기준에 해당하는 32명과
인정기준 미달자 87명이 나타났다. 그 결과를 가지고 노동조합은
투쟁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먼저 32명에 대해 즉각적인
요양승인을 노동부에 요구했다. 당시 노동부는 역학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또한 인정기준 미달로 분류된 많은
노동자들은 기존 직업병 판정자의 판정기준과 중복되어 있거나,
기존 검진기관인 대학병원에서 직업병 판정을 받아 놓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인정기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기존
판정자와 같은 처지에 있거나 검진기관으로부터 판정받은 사람의
요양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공청회 개최, 30만 명
서명운동을 통해 국회 특별법 제정 요구, 대중집회 개최 등을
거쳐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92년 겨울의 대선 정국 속에서 목숨을 건 직업병 환자들은
“굶어 죽나, 아파서 죽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21일 간의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그 투쟁은 93년 3월 의정부 노동부
지방사무소 소장실에서 벌인 30일 간의 점거농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직업병 인정기준은 완화(?)되게 되었다.
4차 투쟁 : 93년 고용보장 쟁취투쟁
93년 4월 문민정부는 신경제 100일 계획을 발표하며
개혁차원에서 원진레이온 폐쇄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6월 8일
당․정협의회에서 원진레이온을 강제 폐쇄하기로
잠정합의하고, 7월 10일 산업정책심의회을 통해 폐업을
단행했다.
원진레이온의 노동자들은 이제 단일한 대오를 유지하게 되었다.
현장노동자를 중심으로 전체 관리직과 식당․경비 노동자
그리고 직업병 환자까지 포함된 ‘원진레이온
비상대책위원회’는 직업병 대책과 고용보장 쟁취를 목표로
93~94년 내내 김영삼정부와 대립, 갈등 속에 놓이게 됐다.
고용보장 투쟁의 성과로 서울시 2기 지하철에 54명이
재취업하였지만 아직 미완의 상태이다. 직업병 대책과
관련해서는 공장폐쇄와 관계없이 장기간 지속적인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합의했으며, 추가로 발생하는 환자에 대해서는 기존의
환자와 형평성에 맞춰 불이익이 없도록 조치했다. 150억 원의
출연금을 확보한 ‘원진레이온 직업병 관리재단’이 그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원진레이온 비상대책위원회’는 분화,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재취업자 따로, 직업병 환자 따로
행동하는 가운데 다양한 성향의 소모임들은 각자 하나씩 깃발을
꽂았다. 150억 원의 출연금으로 모든 것이 순조로울 줄 알았던
것이다. 오욕의 원진레이온 30년 역사는 그렇게 끝이 나는 줄
알았다.
5차 투쟁 : 97년 원진레이온 전문병원 설립기금과 재해 위로금
확보투쟁
93~94년의 투쟁성과물로 인해 일상활동은 단조로움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상활동의 단조로움은 자기 이해에 안주하는 것이자,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일이었음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3년 폐업시 317명의 직업병 환자는 95~96년을
거치면서 637명으로 늘어났고, 각자의 처지에서 오는 차이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이 나타났다. 직업병 환자 간에 이해 차이가
증폭되면서 외형적 팽창만 거듭되었고, 조직은 회원관리에 손도
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96년 7월은 원진레이온 노동자에게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원진레이온 전문병원의 필요성과 재원확보를 위한 대안 마련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재단의 기금 부족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공청회를 개최한 것이다. 공청회는 직업병 환자들이 단결의
필요성과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8월 30일
기존의 소모임 전체를 묶어 ‘원진레이온
노동자․직업병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제 ‘원노위’는
원진레이온 30년 역사의 결과물이자 18,000명의 대표체로서
투쟁의 구심으로 서야 했다. ‘원노위’는 조직개편을 통해
전문병원 건립을 목표로 설정하고 사회 각계에 여론화 작업과
대안 제시를 밝혀 나갔다.
원진레이온 법정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한국산업은행은 93년
원진레이온 폐업 당시 2,100억 원의 부채를 짊어지게 됐다고
하나, 96년 4월 공장부지 15만 4천 평을 매각 처분한 결과
3,700억 원을 얻게 되었다. 부채를 빼도 1,600억 원의 이득이
생긴 것이다. 30년 청춘을 바쳐 일한 노동자의 대가가 직업병의
고통 뿐인데 한국산업은행은 주체 못할 정도의 거금을 거머지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공장부지를 매입한 주식회사
‘부영’은 34평형, 평당가격 4백 5십만 원, 약 8,000세대의
아파트를 지어 떼부자가 되는 가운데 뼈빠지게 일만 한
노동자들은 병들어 죽어 가는 길 밖에는 없는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지방자치단체와 청와대를 등에 업은 인명진
목사는 제중병원을 구실로 한국산업은행에 각각 400억 원과
100억 원을 요구하고 있었다.
드디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아져 투쟁이
촉발되었다. 이번에는 결사항쟁의 각오가 필요했다. “도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체의 업무는 농성장에서 한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철수하지 않는다. 우리의 요구안은 명확하며
과학적이다”라는 수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3월 10~11일의
대성리 수련회를 통해 확인된 지도부의 결심과 회원의 각오는
이미 투쟁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원노위’는 100개 병상
규모의 원진레이온 전문병원과 이후 직업병 발견 예상인원을
700명으로 잡고 재해 위로금을 추산하여 요구안을 마련했다.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였다.
․입원환자는 발생하고 있으나 병실이 없다.
대학종합병원은 보험 수가가 싼 산재환자를 거부하고 있다.
․강원도에 진폐전문병원이 있듯이 경기도 구리,
남양주에도 원진레이온 전문병원이 있어야 한다. 97년 5월 현재
직업병 환자 수는 정확히 689명이며 이중 약 80%가 구리,
남양주시에 살고 있다.
․현재 대학병원 급에서 치료받고 있으나 근본적 치료가
아닌 대중요법 치료에 머물면서 직업병 환자의 고통은 증가하고
있다. 병원내 연구소 설치를 통해 근본적 치료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일반병원은 원진레이온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장비가 없어
하나뿐인 생명이 저승가는 길목에 방치되어 있다. 투쟁기간 중에
원진레이온 환자 조병수 씨는 혈액투석이 필요했지만
혈액투석기가 없는 병원에서 운명하셨다.
․일반병원은 산재환자 장기요양이 거부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전문병원이 요구된다.
․88년 21명에서 97년 한 해만도 52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을 보아 이후에도 환자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향후
몇 명이 더 추가될지 예측할 필요가 있다. 3,500명 중 689명이
발생된 것을 보았을 때 기존 환자의 근속연수와 성별, 근무부서,
개인별 검진회수 등을 감안하여 3,500명 중 700명은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원노위’가 요구하는 ‘안’에 대한 타당성을
조사하였고, 93년 합의 당시의 전반적 판단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동부와 재경원, 한국산업은행에 4자 회담을
제안하며 정치적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4월 24일 타결, 43일 간의 농성마무리
농성투쟁 전반부인 3월 17일 한국산업은행 앞에서 95명이
연행되어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에 분산 감금되어 2명이 불구속,
8명이 벌금형을 받고, 나머지 85명은 24시간 후에 풀려 나왔다.
이렇게 초반에 연행됨으로 인해 재투쟁을 조직하면서 하고자
했던 초기 여론화 작업과 대중투쟁의 기틀 마련에는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재투쟁은 투쟁의 수위를 높여 투쟁 대상을 노동부,
재경원, 청와대로 설정하고 정치적 공세를 가했다. 그 결과
한국산업은행은 모든 투쟁을 중지하고 농성을 철회하면 교섭에
임하겠다고 나왔다. ‘원노위’의 단호한 입장을 확인한
한국산업은행은 3월 29일 교섭에 나섰다.
3월 29일 1차 교섭은 이후 5차까지 계속되었다.농성과정에서
공동대책위 결성 등 투쟁의 사회적 파급력과 대중투쟁의 골간을
마련하고 주말을 중심으로 투쟁하는 모든 단위와 공동집회 등을
개최해 나갔다. 투쟁의 확산과 ‘원노위’의 집요한 공세는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교섭 타결지점을 놓고 고민에 빠지게
했다. 두세 차례 교섭에서 마무리 될 것으로 보았던 판단에
찬물을 끼얹은 ‘원노위’의 투쟁은, 그러나 농성 35일을
넘기면서 중대 결단을 요구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일반사람들이 아닌 환자의 건강상태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4월 23일 오후 11시 30분까지 벌였던 마라톤 교섭은
‘원진레이온 전문병원 건립 기금 110억 원, 추가 발생환자 재해
위로금 96억 원 총 206억 원’에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명동성당투쟁은 마무리되었다.
확보된 206억, 그러나 부족하다. 2차 투쟁을 조직하라! 이제는
병원부지 확보투쟁을 지역에서 조직할 차례였다. ‘원노위’
참여가 보장된 3자 회담을 구리, 남양주시에 요구하며 병원이
만들어질 때까지 제반의 지원과 협조를 같이 할 협의체 신설을
제안하게 되었다. 구리, 남양주 시장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노위’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자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이후 투쟁에서도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과제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였다.
투쟁을 뒤돌아보며
이번 투쟁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원진레이온은 자신의
이해에서부터 투쟁을 조직했다. 그리고 성과와 함께 안주하곤
했다. 원진레이온 투쟁을 통해 전체 산업안전 문제와 법개정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에 안주함으로써 매번
투쟁 시기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투쟁을 이끌어야 했다. 97년
명성투쟁은 원진레이온투쟁 10년을 결산하고 그 동안 축적된
역량을 총화하는 자리였다. 원진레이온은 이제 한 단계 높은
투쟁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으며 전체 노동자의
요구에 부응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러한 원진레이온의 자기고백과 함께 투쟁하는 단체와
동지들에게 몇 가지 제안해 본다. 물론 제안하는 내용이
산재해방운동의 전형이 만들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이 점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3자 주체, 산업안전국 또는 산업안전위원회 신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산재
직업병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안이 중대할
뿐만 아니라 주요한 해결과제인 산업안전 문제를 민주노총은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 문제로 삼고 있는지 우려된다.
민주노총은 산업안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시급히 산업안전국
또는 산업안전위원회를 신설해야 한다. 그리고 산업안전국,
산업안전위원회는 ‘3자’가 주체로 되어야 한다. ‘3자’란
산업안전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보건의료인과, 현장의 힘인 노조,
그리고 산재노동자단체이다. 보건의료인과 산재노동자단체의
참여는 살아 숨쉬는 정책을 만들어 낼 것이며 현장과의 튼튼한
연결 고리 속에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업을 보장할 것이다.
대산별을 지향하는 마당에 현재와 같은 조합주의적 사고와
사업방식으로는 안된다. ‘상근비가 없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조합주의 의식의 발로이며 민주노총을 조직이기주의와
패권적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전투성 포기주의자,
몰계급적주의자들의 합작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장성, 투쟁성 회복과 전문역량 강화
원진레이온 공대위를 통해 10년 가까이 같이 일을 하고 있는
곳은 보건의료인과 노동운동단체이다. 보건의료인과는 일상을
통해 항시적이었다면 노동단체들은 사안에 따른 한시적
결합이었다. 그러면서 결과물에 대한 공유가 형평성을 잃게
됐다. 이 점에서 노동운동단체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산안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강화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사업방침을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노동운동의 전선을 넓히는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산안문제가 보건의료인들의 탈계급적
이해관계에 놀아나고 있는데 손도 대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물론 보건의료인들의 산안문제에 대한 헌신성은 많은 성과를
일구어냈다. 자신의 처지가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세상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가운데 보건의료인들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음을
감안해 본다. 그러나 현장의 제반 문제점이 극복되려면
기본적으로 정치사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부분적인 사업이
극대화될 때 오는 제한적이고 타협적인 사고와 방법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보건의료인들의 투쟁성 회복을 바란다.
일상활동 강화와 산재노동자의 지역에서의 역할
노조의 모든 사업은 일상활동의 강화 속에서 빛을 본다.
동료들의 불의의 사고는 전체의 아픔이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따라 천차만별로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에 노조집행에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다. 임단투 사업조차 버거워서,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안문제가 작은 사안이라, 동력이 없어서, 대응을
못한다면 뒤따르는 대형사고에 대한 대응도 이미 한계에 직면한
맥빠진 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상적으로 산안활동이
강화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명분에 걸맞게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노조는 산안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조합원 이익과
직결된다는 점을 인식시켜 소수라도 당당하게 나서게 하고,
산재노동자의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에 관심을 쏟아 일상활동
조직화에 일익을 담당하게 해야 한다. 또 대공장 산재노동자와
노조는 규모가 작은 사업장 노동자의 산안 이해를 위해 지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향후 ‘원노위’ 투쟁 방향
전국적 전망 속에서는 97년 대선투쟁과 연계하여 전국
산재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든 산업안전보건법을 각 당과 대선
후보들의 정책에 반영하도록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나아가
산재단체의 전국화를 통해 제도권 정당에 직능대표권 인정과
의석 배분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운동과 결합, 접목할
것을 정책적 과제로 삼고 있다.
원진레이온 전문병원이 만들어지면 지역적 통합기능과 전체
산재운동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지역적 전망 하에 연대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고 활동가들을 배출시켜
지자체선거 참여 등 지역에서 위상을 공고히 해 선도성과 책임성
있는 단체가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끝으로 ‘원노위’는 산재단체, 보건의료단체, 노동운동단체,
노동조합 산안활동가들에게 상설 공투체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공투체는 조직발전 전망을 산재해방운동 연합체로
목적의식적으로 강제하는 조직이어야 할 것이다.
97년 5월18일 광주를 생각하며......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