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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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2

현장에서 미래를  제122호
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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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기억과 영향

1) ‘자발적 선택’이었던 희망퇴직이 남긴 공포

98년에는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앞서 이른바 ‘자발적 선택’이었던 희망퇴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인 1차 희망퇴직을 모집하였다. 통상급 4∼6개월치의 위로금을 받고 2천여 명이 퇴직했다.
⋅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 1천 5백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집행부가 3차 희망퇴직에 합의하였다.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천여 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 7월 10, 11, 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4차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 돌입 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하였다. 4차, 5차 희망퇴직으로 3천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천 명을 훨씬 넘었다.

이와 같이 현대자동차의 희망퇴직은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그랬듯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도 정리해고의 사전 예고판이었던 ‘희망’ 퇴직을 막아내지 못했다. 4개월간 진행된 희망퇴직 기간 동안 노동조합이 잃은 것은 8천여 조합원만도, 노동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만도 아니었다. 8천여 조합원을 잃어가는 동안 마땅히 해야 할 투쟁의 접점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흩어진 조합원들은 개별화되었고, 개별화된 조합원들과 집행부의 관계는 모호해졌다. 남은 조합원들은 생존을 위해 일대 일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일자리를 놓고 어제의 ‘형님’과 ‘동료’는 모두 경쟁 상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4개월 간의 ‘희망’ 퇴직 경험은 살아남은 자에게 생존에 대한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힘들었지요. 그때가 할 일이 없으니까… 앉아서 대기하고, 교육받고, 그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현장 노동자들은 단합이 잘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야 하는데, 옆에 있는 동료가 아니면 내가 나가야 하는데 허심탄회하게 말을 못한다. 동료애도 많이 없어지고 그렇더라. 회사 와서 힘들고 집에 가서 힘들고. 나는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옆에 동료가 노란 봉투 타고 나갈 때 ‘그 사람 뭐먹고 사나’ 걱정은 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생각을… 그런 시대는 정말 안왔으면… 오래된 사람은 시급이 많아서 먼저 짤리지 않겠는가 걱정하고, 신입사원은 입사 역순으로 짜른다고 걱정하고. 젊은 사람들은 속으로 ‘나이도 들고 벌어 놨으니까 나가지’라고 생각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속으로 ‘젊은 너희들은 나가면 일자리 있지 않냐’ 하고…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면접자 a, 조합원)

신입은 신입대로, 고참은 고참대로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고’ 서로 누가 먼저 짤릴 것인가에만 온통 관심이 쏠리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조업이 단축되는 그 순간부터 현장에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짜른다 하더라… 기준점이 어떻게 된다더라… 슬슬 흘리니까 스스로 참다 참다, 동료들도 생각해보더니만 스스로 사표 쓰고 튀어 나가고, 면담 한번 하고 오더니만 조용히 사표 쓰는 사람. 그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한 번씩 관리자들이 전화 와서 ‘니는 괜찮다’하면 집회 다 빠지고… 같이 근무하는 애도 간곡히 말려도 그만 뒀습니다. (면접자 b, 조합원)

집회는 집회대로 안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앞가림’ 하기에 바빠졌다. 조합원 사이의 불신도 깊어졌다. 회사의 편 가르기 수법이 먹혀 들어간 것도 그런 불안감들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 서로 간에 불신이 상당히 깊어 졌다는 거죠. 예를 들어 노란 봉투를 받았냐 안받았냐 차이. 회사가 편 가르기를 했잖아요. 이쪽은 집회하고 한쪽은 계곡으로 다니고, 심지어는 양쪽 다 다니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아파트에 찾아가서 스프레이로 욕도 써놓고, 회사 쪽에 따라다닌 사람들도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사회적 약자고 힘이 약하고, 보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쪽에 휘말려가면 나도 정리해고 대상이 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던 거고, 지도부가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갖도록 못하도록 한 책임이지 조합원 대중의 이탈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크고 힘들었다 이거죠. 까놓고 보면 끝까지 모인 사람들 해봤자 몇 명 안 된다 이거죠. 전체 조합원이 3만이라면 3~4천이었죠. 나머지는 집에서 문 잠가놓고 TV보고 있었겠죠. 이 사람은 노란 봉투를 주고 저 사람은 안주었잖아요. 안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아이고 다행이다, 안도가 있었겠죠. 어쨌든 찍히고 싶지 않았겠죠. 그런 것들이 ‘니는 빠져나갔다’고 ‘니만 살려고 하냐’고 하고 막 공격하고 할 때, 좀 그랬어요. (면접자 ㄱ, 활동가)

회사는 해고 통보를 받은 이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는 자본이 쓰는 편 가르기 수법의 전형이다.

그때 당시 나간 사람의 일하는 자세 등을 보면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주로 나간 사람은 노동조합에 많이 관여된 사람도 많이 나갔지만, 그 라인에서 일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일이란 그 일 맡은 데서 최선을 다하고 성의 있게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갔다. (면접자 c, 조합원)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봐 해고를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젊은 사람이 다녀야 한다고 울며 겨자먹기로 ‘배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란 봉투’라고 회사의 압력으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제 부친도 그렇게 나갔는데, 당사자 입장에서 보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른들 입장은 아닌가 봐요. 혹시나 자식한테 피해갈까 싶어서 주위에서 눈총은 안줬겠나. 오죽하면 그렇게 나왔을까 싶더라고요. 아버지가 지금 장애인 됐어요. 술을 많이 드셔서요… 회사 나오고 공공근로 하시다가 2~3년 후에 쓰러졌어요. 병원에 있다가 방법이 없더라고요. 솔직히 그런 생각까지 했거든요. 너무 억울해서요. 한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구나 싶어서요. 당시 그런 여건이 안됐는데 법적으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집에 이야기 하니까, 저도 다치니까 그냥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희망퇴직 말이 희망퇴직이지 희망퇴직이 아니지요. (면접자 ㄴ, 2000년 이후 입사자, 활동가)
제일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때 조장이었는데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 힘들어 하셨어요. 1,2차 넘어가고 결국에는 ‘인원이 없어서 내가 나가야 하겠다’고 식구들을 앉혀놓고 말씀하실 때 전부 울었죠. 투쟁이나 이런 부분은 잘은 모르지만, 제가 조합 활동 하면서 그때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보면 그때 절실했구나, 아버지 입장으로 봤을 때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면접자 ㄷ, 2000년 이후 입사자, 활동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반의 아줌마가 희망퇴직을 했는데 조합원들이 반 회식에 참여를 시키느냐 마냐를 놓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하도 열이 받아서 (아줌마) 모시고 회식하고, 무급 받은 사람들까지 다 불러라, 만약에 한번이라도 연락이 안 오면 가만 안 있겠다고 했죠. 그런데 아주머니가 오셔서 ‘젊은 사람들이 다녀야지, 내가 나가야지.’ 하시면서, 제일 서글픈 게 회사에 출근하려고 밥 먹고 세수하고 대문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고, 회사 앞까지 왔다가 출입하려고 보니 출입증이 없는걸 보면서, ‘아 내가 회사 그만두었지’ 하면서 돌아가고 그러시더라. (면접자 ㄹ, 활동가)

노동자들의 이러한 순박하고 소박한 생각들과 행동들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리해고를 자행한 자본의 ‘위기의식’ 또는 ‘경쟁력주의’는 노동자에게 곧바로 ‘삶의 위기’로 전가된다.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배려나 인간미조차 정리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본의 운동 법칙이다. 힘없이 ‘아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지’ 하고 되뇌며 돌아서는 노동자의 뒷모습을 서글퍼하는 것만으로는 자본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 시기가 바로 희망퇴직 기간, 나아가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기간이었다.
요컨대 98년은, 자본 운동의 위기가, 혹은 그런 위기를 빙자하여 더 많은 자본을 그러모으기 위한 자본의 탐욕을 위하여, 자본가들(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들(노동자계급)을 정리해고로 밀어내는 시기였고, 노동자는 실업이나 비정규직이 되어 ‘삶의 위기’에 내몰리는 시기였다. 즉 자본가(계급)에게 다가온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는 기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그 자체가 양 계급간의 전면적인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노동자들의 소박한 양보심이나 배려는,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약한 고리에 불과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될 때 비로소 노동할 권리를 얻는다. 이 때문에 노동자에게는 커다란 왜곡이 발생한다. 노동이 ‘고용노동’ 또는 ‘임금노동’이라는 형태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 운동의 위기’는 종종 고용을 매개로 하여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노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이러한 노자간의 계급적 투쟁 관계가 집중적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따라서 현대자동차 투쟁만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나 금속연맹 등 상급단체의 96~97년 총파업투쟁을 위시하여 노동조합운동 진영의 1998년 투쟁 전체 과정을 들추어 평가하는 것은, 이 장의 과제는 아니지만, 더없이 중요한 사업이라고 하겠다.



2) 정리해고 대상자, 활동가, 그리고 조합원들의 극단적 분노
-‘정신적 공황상태’

7월 16일 노조 위원장의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한 대폭적인 양보안에도 아랑곳없이 현대자동차 자본은 바로 다음날부터 개별적으로 정리해고를 통보하기 시작한다. 7월 20일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렬되고 사측은 2,678명의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한다. 개별 통보를 시작한 17일부터 20일 무기한 전면 파업 돌입 전까지, 대상자들의 분노는 개별적・즉자적・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대상자들은 20일부터 파업의 선두에 결합하지만, 사측은 7월 31일 1,539명 정리해고 대상자에게 인사 발령을 통보해버린다.

관리자한테 전화가 딱 왔더라구요. (통지서) 갖다 줄테니까 집이 어디냐 그래서 필요 없으니까 내가 받으러 갈 테니까 어디서 만나자 했거든요. 그 때 한 반에 저하고 나이가 같은 친구가 있었거든요. 친구하고 같이 받으러 갔었죠, 그날 저녁에 촛불 집회하고 그 담날 사수대 결성하고. 몇 일 동안 텐트 지키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참석하는 인원은 줄어들고… 어쨌든 내 자신도 약간은 자포자기 했는데, 자포자기가 ‘쓰고 나가겠다’는 건 아니고 ‘이왕 하는데 까지 해보자’고 해서 남아있었던 거고… (면접자 ㅁ, 활동가)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고 3일 정도 지나고 사수대 막사로 결합한 조합원들이 많은데요… 이 막사에 오기까지 사흘, 그 사흘 동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술로 밤을 지새고 결단을 내린 겁니다… 아직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사수대 활동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 고통은 잘 다스려지지 않고, 단지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 의해서 통제되고 조합에 의해서 통제되는 상태이지, 마음을 진정하거나 감정을 추스리거나 냉정한 이성을 되찾거나 그런 상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루 아침에 순식간에 자신이 폐품처리 당했는데, 회사가 이미 정리해고를 단행했는데, 협상을 통해서 철회시킬거라는 기대도 안가지고 있어요. (1998년 8월 11일 2지대 어느 사수대와의 인터뷰에서, 임인애, 세기말 현장보고서)

노란 봉투를 집으로 보내기 전에 대의원은 알았지요. 그 전에 식칼 들고 올라가 ‘00부 대의원이다, 나를 먼저 집어넣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나왔다. 분신 말리느라고 힘들었고요… 오히려 순했던 사람들이 더 그랬어요. 후배 놈 중의 하나가 그래서 모질게 팼지요. 그 때 참 가슴이 아팠지요.(면접자 ㄹ)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분노는 극단적이었다. 특히 활동가 그룹이 그랬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사측에 의해 선별당하고 개별적으로 통보받는 방식이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자존감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그 분노와 상실은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대상자에 들어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에 노동조합에서 지불했던 선물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시점에 노조에서 지급했던 선물이 주방세트였어요. 수저, 칼, 이런 것이 들어갔었는데, 이때 지급했던 주방기구를 무급휴직, 정리해고 대상자들이 집으로 안가지고 가고 몸에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그때 당시에 공권력이 들어오고 같이 맞부딪쳤다면 서로 엄청난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정리해고 대상자에 들어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것이지요. (면접자 ㅂ)

이러한 분노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회사가 되게 하려고’ 양보하고 ‘희망’퇴직을 받아들이던 모습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처하게 된 조합원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노란 봉투, 시퍼런 해고의 칼날뿐이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대상자들은 현장에서 막무가내였죠. 반장 책상에 칼 꽂고, 기물 파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만들어놓은 차에 테러를 가하고… 공구를 다 갔다 버리고. 어쨌든 시작하자마자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왜 하필 나냐 이런 것이지요. 누구든지 잘리게 되어 있다. 누구든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생각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그런 동지들은 사수대로, 공장 점거로 결합을 하는 거고, 회사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공격을 하는 거예요. 정리해고 대상자에게는 그 속에서 빠져나오면 무급휴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 빠져나오면 무급휴직자들 대상에서 빠지게 해 주겠다. 고리가 약한 조합원들은 ‘지금이라도 희망퇴직 안하면 그것마저 못 찾아가는 것 아니냐’ 여러 가지로 다 파악했기 때문에 대응방식이 다 틀렸죠. 희망퇴직을 조합에서 받아 들였다는 것.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나고요.(면접자 ㅅ)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참여했죠. 제가 처음에는 안 받고, 2차 때 해고 통지서를 받았는데… 사람들 중에서 무급 받은 사람도 있고 안 받은 사람도 있고… 동료들 간의 배신감 같은 게 좀 많았었죠. 어떤 사람은 자신은 살았으니까 이런 거 참여 할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도 혹시 앞으로 당할지 모르니까 열심히 참여하고 그런 거…. (면접자 d, 조합원)

또 한편에서는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정리해고) 대상자와 아닌 자로 분리되면서 함께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다. 대상자와 아닌 자 사이의 갈등과 골은 비록 표면적인 갈등은 희석되었을지 모르나, 파업이 끝나고 현장 복귀 후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다시 일으켜 세운다.


3)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재구성한다 - 단절된 관계, 새로운 동지 :‘계곡파 조합원’과 식당 여성 조합원

파업 기간 내내 농성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사측에 동원된 일명 ‘계곡파 조합원들’과 쫓고 쫓기는 과정을 지속했다. 그러나 과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 내부의 변별점이 ‘어용과 민주’의 구도였다면, 98년 이후 지금까지 조합원들은 정리해고 대상자였느냐 아니었느냐, 파업에 참여했느냐 사측에 동원되었느냐에 따라 나뉘어 왔다. 한쪽은 사측의 파업 무력화를 저지하기 위한 자발적인 행위였으며, 또 다른 한쪽은 정리해고를 비껴간 상황에서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 그러한 구분은 고용, 즉 자신의 생존권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파업이 끝난 뒤로도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원인으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현장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 예전과 같은 공동체적 질서를 복원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투쟁의 상흔이기도 하지만, 파업 이후 투쟁의 우위에서 현장 질서를 바로잡지 못한 노동조합의 책임이기도 하다.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막연한 화해와 용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억을 복원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재확인해야 한다.

여름에 비가 엄청 왔죠. 조합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가 오는데 산에 간다고 조합원을 집결시켜놨다고 하더라. 그 비를 맞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사측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산행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그 장대같은 비를 맞고 산에 올라갑디다. 타고 갔던 오토바이 헬멧을 집어던지고 욕을 했더니 가다가 돌아온 사람이 7명 이었어요. (면접자 ㄴ, 활동가)
조합원들 개 삶아먹고 그런 거 타격 갔었거든요. 갔는데 참 슬프더라고요. 참 불쌍하더라고요. 조합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까, 밉지는 않았어요. 우리가 절대적인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면접자 ㅇ, 당시 문화패)
그때 생각하면 선거구 조합원이 야속하다. 우리 선거구는 다 나갔다. 텐트 쳐놓고 대의원하고 저하고 둘이 있었다. 그동안 그 전까지 형・아우하고 지냈던 사람들하고 다 싸웠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대의원선거 나가면서 공개 사과하라는 이딴 소리 들으면서까지… 저는 그 때… 그것이 제일 가슴이 아프다. (면접자 ㅈ)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투쟁은 자본에 의해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동지적 관계로 재구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계급성의 회복이라고도 부른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은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투쟁을 통하여 ‘밥 주는 아줌마’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는 식당 아줌마 동지’로 거듭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인식은 ‘식당아줌마’였고 ‘여성 조합원’ 혹은 성별의 차이를 극복한 ‘조합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 한계는 결국 투쟁의 막바지에 이 ‘동지’들을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의 희생양’으로 몰아넣는 차별로 나타났다. 이에 36일 간의 파업이 끝난 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한때 동지였던 남성 조합원들이나 노동조합의 연대 없이 기나긴 해고 철회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98년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식당 아줌마들의 남자들 못지않은 투쟁,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의 타겟이 되었다. 아쉽지요. 그리고,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내 부인, 내 자식까지 하나 된 마음으로 그런 위기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했다는 것이 상당히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감동했어요. (면접자 ㅊ)
처음에 식당 아줌마들이 파업할 때 저는 조합원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 집회할 때 창문으로 내려 보며 실실 웃고 하던 사람들인가. 솔직히 안 좋아했지요. 한번 해봐라, 그런데 여성 조합원들이 그만큼 열성적으로 하고 98년 때도 식사도 다해주고 하는 것 보고. 남자 활동가들보다 더 열심히 하니까 나중에는 조합원들이 엄청 좋아했죠. (면접자 ㅋ)


4) 집행부와 조합원 : 주체들 간의 동질감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8월 5일, 파업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노조 집행부는 ‘임금 삭감과 무쟁의 선언’을 주요 내용으로 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파업 참여 조합원들은 지도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지도부는 투쟁하고 있는 대중이 아니라 정권과 현대자본과 공장 밖의 공권력들, 그리고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들과 관리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회유의 입들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합원들은 “더 이상 미련도 여한도 없다. 후회 없는 한판 싸움을 하고 싶다. 그리고 간다.” 1998년 8월 14일, 파업 농성장 평조합원 텐트.
고 말하고 있었지만, 파업 지도부는 “우리의 피와 땀을 여기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투쟁을 남기고 싶습니다. 영원히 지역 주민과 국민들에게 기억될 순결한 투쟁을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1998년 8월 18일 저녁집회, 김광식 위원장 발언.
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업을 둘러싼 내부 주체들 간의 긴장은 파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긴장은 투쟁 과정에서 온전하게 충돌하며 한 단계 상승하지 못한 채 그저 미묘한 기운으로 잠복해 있었다.
그토록 힘겨운 와중에도 파업은 파업 그 자체만으로 짜릿한 쾌감과 즐거움을 주었다.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러한 집단적인 체험은 파업의 커다란 동력이자 주체들에게 동질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학습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연구 과정에 참여한 대다수의 면접자들은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 여명이 참여한 집회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날의 집회는 공권력 침탈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오히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결집했다는 점, 집회 도중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된 문화판’이 ‘전체의 난장판’으로 상승되어 집회 참가자 모두가 동일한 흥분과 투쟁의 확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은 파업 지도부의 일관되고 확신에 찬 입장을 대중적으로 소통하고 공유하여 얻어지기도 하지만, 파업 공간에서 직접 느끼는 상호간의 소통과 상승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오는 날 했던 집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지요. 조합원들이 비 속에서 끝까지 남아있었다는 게 흥분되고 짜릿했죠. 그걸 계기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참 많이 가졌어요. 조합원들이 공권력이 침탈한다면, 전에 성과급 투쟁 때는 도망갔었는데 이번에는 담 넘어서 들어왔었거든요. 경찰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각 문을 봉쇄했는데 오히려 담 넘어서 들어왔었어요. 사람들이 없는데, 집회하면 모이는 거야. (면접자 ㅌ)
비가 갑자기 와서 무릎 밑까지 차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했던 것. 지금도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안에 있었을 때 정신병자 같았는데,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안에서 하고 했던 것들이, 동지적인 것들이 무언가, 결과야 어이됐던 이길 수 있다는, 동지들과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면서 안에 있으면서 상당히 편했었다. 그런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면접자 ㅍ, 활동가, 당시 조합원)
소나기 쏟아지는 데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투쟁 동력도 있었어요. 해가 지면 어디서 사람이 나오는지 저녁 7시 집회만 할 때 되면 사람들이 많았어요…. (면접자 e, 조합원)

그 다음 날부터 현대 자본의 제의에 따라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최종안을 내놓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다음날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 철탑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협상으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자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8월 중순이 지나면서 공장 정문을 둘러싸고 있는 공권력은 더욱더 불어났고, 정권에서는 연달아 중재단을 급파했다. 파업은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조여 오는 압박과 함께 조합원들의 열기와 집중도 상승해갔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이 최고조이던 순간에 가장 많은 집회 대오가 모였다.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인 듯 때마침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권의 대리자로 울산에 내려왔고, 8월 20일에는 노무현 중재단의 중재안이 발표된다. 당시의 상황과 판단에 대해 당시 노조 위원장은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래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노무현이 국민회의 중재단을 꾸려 울산으로 내려온다. 이에 대해 김광식 위원장은 “공권력 투입을 앞두고, 회사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 “당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별 단위 사업장이 정권과 총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개별 단위 사업장이 투쟁을 벌여 정리해고 규모를 줄이는 것은 하지만 기업별 노조보다는 구조와 시스템을 바꿔 산별노조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잠정합의(안)에 대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1,2차 투표를 통해 부결시키지만 문안이 약간 수정돼 통과된다. 사실상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김 위원장이 바라보는 당시 정세다. - 2002년 6월 월간 『말』

반면 투쟁에 결합했던 현장조직들과 활동가, 조합원들은 즉각 분노와 반발을 표출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끝까지 싸울 수 있다, 싸우겠다.”는 것이었고, 위원장의 판단은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파업에서 그러하듯 지도부의 현실적인 고민과 조합원의 투쟁 열기 사이의 간극은 이 투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으며, 특히 파업의 정점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은 파업의 주체들이 행동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답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들의 힘이다.(계속)

2006-07-31 17: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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