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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없는 한반도와 미국의 책임

현장에서 미래를  제23호
홍성태




자본이냐 노동이냐(13)

 

자본간 경쟁이 국경을 넘어 격화되면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총자본의 공세가 거세어지고 있다. 

자본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공세는 ‘시장에서의 무한경쟁’과 ‘자본 축적의 효율성’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노동자의 생활과 노동을 새롭게 재편하려고 한다. 자본의 이러한 공세 앞에서 노동자는 ‘자본 축적의 논리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미래 사회의 새로운 삶의 대안’을 찾아 전면적으로 투쟁하느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이 선택의 문제는 단지 생산현장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노동자를 둘러 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법적?제도적 측면만이 아니라 가치관?문화?습관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세계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이 양자택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자본이냐 노동이냐’ 

이 기획은 생산현장에서의 노?자간 대립을 둘러 싼 쟁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둘러 싼 모든 영역에서 자본관계에 의해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 보이고, 노동자의 눈으로 세계와 미래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 열세번 째 내용으로 ?지뢰없는 한반도와 미국의 책임?을 주제로 한 홍성태 씨의 글을 실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거대한 살상력과 생산력이 결합되어 이 세상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강력하게 무장하고 있는가를 지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반도의 경우 미국의 거부로 대인지뢰 사용금지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결과 여전히 위험지대로 남아있게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지뢰없는 한반도를 만드는 일은 곧 야만의 질서를 문명의 질서로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지뢰없는 한반도와 미국의 책임


홍 성 태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1. 빠스깔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단 한 방울의 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빠스깔의 잠언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비록 전 우주는 아닐지라도 우주의 일부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무장하고 있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ꡔ백년보다 긴 하루ꡕ라는 소설에서는 유목민의 장례행렬 위에서 전개되는 미사일 실험의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유목민과 미사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이지만, 그러나 바로 이 부조화의 장면 속에서 현대의 일상이 전개되는 것이다.

시선을 옮겨서 우리가 발을 버티고 살아가는 지상을 바라보자.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이 세상이 얼마나 강력하게 무장하고 있는가를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도처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군사기지와 군 관련 시설들. 시도 때도 없이 도처에서 치뤄지는 각종 군사훈련이며 무기 실험들. 거대한 살상력(殺傷力)과 생산력이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현대의 야누스적 면모. 세상은 이미 무장력의 위세를 통해서만 생존과 번영을 안도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미사일은 이러한 현대의 실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그러나 미사일만큼 강력하지는 않고 그만큼의 위세를 부릴 수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인간의 목숨을 노리고 숨어 있는 무기체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뢰이다.

2.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사진이 오래도록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손이나 발이 뭉텅 잘려나간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족이나 의수를 할 돈이 없어 그저 불운을 탄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아니 그나마 목숨을 건진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오랜 내전을 거치는 동안 무려 천만 개의 지뢰가 매설된 캄보디아의 피해 상황을 보여주는 보도사진이었다. 캄보디아에서 지뢰 폭발사고는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사에 속하는 일이라고 한다. 불행의 일상화. 때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밭을 갈다가, 혹은 동무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다가, 운이 좋으면 손발을 먹이로 내주게 되고, 좀더 운이 나쁘면 몸뚱이 전체를 제물로 바치게 된다.

한때 지뢰는 그래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무기였다. 재수가 없어서 지뢰를 밟게 되더라도 약간의 감각과 기술만 있다면, 손쉽게 제거하여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TV방송 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에 속하는 ‘전투’에서는 이런 장면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물론 다른 전쟁영화에서도 지뢰를 밟고 제거하는 장면은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장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지뢰를 조금은 우습게 여길는지도 모른다. 그까짓 것, 막대기만 있으면 다 피해갈 수 있어! 그러나 오늘날의 지뢰는 이같은 생각을 전혀 터무니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밟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터져버린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이제 지뢰를 밟고도 피해갈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3.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1996년 현재, 전세계 64개 국에 1억 1천만 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돼 있다고 한다. 전세계 인류에게 나눠준다면, 대략 인구 50명 당 한 개 꼴로 배당받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지뢰가 지구 전역에 매설되어 있는 셈이다.





전세계에 매설된 지뢰현황

(단위 : 만개)

유럽

아프리카

보스니아   300

그루지아     15

이집트   2,300

수단       100

크로아티아 200

아제르바이잔  5

앙골라   1,500

에디오피아  50

우크라이나 100

리투아니아    1.7

모잠비크  200

차드         7

유고        50

키프러스      1.6

에르트리아100

르완다       6

 

 

소말리아  100

나미비아     5


중동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이란   1,600

아프가니스탄 1,000

니카라과  10.9

이라크 1,000

캄보디아     1,000

에콰도르   6

요르단    20.6

중국         1,000

온두라스   3.5

예멘      10

베트남       미상

포클랜드   2.5

레바논     2

한반도       미상

엘살바도르 1

자료 : 국제적십자위원회

출처 : 한겨레신문, 1996. 5. 5


세계 곳곳에 매설된 이 지뢰 때문에 해마다 2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그 피해자는 대부분 민간인들이라고 한다. 수치로만 본다면 피해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만 해도 이보다는 많지 않은가. 이러한 현대 문명의 역설은 분명 ‘위험사회’로서 현대 사회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대 무기체계의 역설에 좀더 집중하도록 해 보자.

이 경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선 살상력이 큰 무기일수록 오히려 살상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지구를 수십 번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핵무기가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사용된 예는 아직까지 단 한번에 그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일종의 위세의 무기, 이른바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억지력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핵시대라는, 종말론적 수사로서 흔히 동원되곤 하는 이러한 시대규정은 현대적 일상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지만 일상을 실제로 규정하는 물리력으로는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이 끊임없는 전투의 연장에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체감하게 하는 것은, 또 다시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재래식 무기들이며, 그 중에서도 지뢰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앞의 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지만 지뢰가 제 3세계에 집중 매설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도 지뢰가 매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내전을 겪고 있는 동구에 국한되어 있다. 과연 이 지뢰들은 어디서 나타난 것들일까. 이 지뢰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선진국인 나라들에서 생산되어 판매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사회적 격차와 상호연관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남북문제는 이같은 재래식 무기의 횡행을 통해 관철되는 일상의 군사화 속에서 그 불평등한 면모를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가장 비참한 형태로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뢰의 사용은 전술적 고려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4. 지뢰의 사용에 따른 무차별적 살상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에 비해 지뢰가 지니는 전략적 가치는 사실 크지 않은 것이었기에 거대한 냉전의 장막이 걷힌 상황에서 지뢰의 사용을 재고하려는 전환의 움직임이 개시되었다.

그 결과 대인지뢰 사용금지를 위한 국제회의가 1996년 4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다. 국제분쟁에서 지뢰사용을 금지하기로 한 협정은 이미 지난 1980년에 체결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당시의 협정을 재검토해 내전에서도 지뢰사용을 금지하는 문제가 초점으로 부각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53개 국이 참여하여 열린 이 회의에서 지뢰사용의 전면금지에 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의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탐지하기가 쉬운 지뢰를 사용하도록 하고, 1997년부터는 일정 기간이 지난 뒤 화력이 자동소멸되는 장치를 지뢰에 갖추도록 하는 약속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인지뢰 사용금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유엔 군축․안보위원회는 1996년 11월 13일 대인지뢰 사용금지에 관한 국제협정의 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군축․안보위는 대인지뢰의 이용․비축․생산․양도 등을 금지하는 협정을 체결토록 모든 국가들에 요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반대없이 찬성 141표, 기권 10표로 승인했다. 땅 속에 숨어 무차별적인 살상을 자행하는 무기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은 극단으로 치달은 야만의 질서를 다시금 문명의 질서로 전환시키기 위한 귀중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정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아직 이러한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아니, 이같은 변화가 진행되는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5. 1996년 4월에 개최된 대인지뢰 사용금지에 관한 국제회의의 주요 의제 중의 하나는 일단 매설되면 자동폐기할 수 없는 이른바 ‘멍청이’ 지뢰의 사용에 대한 엄격한 규제였다. 지뢰는 하나씩 묻어 장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사용되는 더욱 강력한 매설방법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넓은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뿌려 놓는 것이다. 따라서 설치할 수는 있지만 찾아서 폐기할 수는 없는 경우가 흔하며, 이 때문에 누가 언제 어디서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는 것이다. ‘멍청이’ 지뢰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은 이 점에서 상당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매설된 지뢰의 탐지와 폐기에 많은 비용이 들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정 시한이 지나면 자동폐기되는 지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지뢰로 인한 피해는 상당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대인지뢰 사용금지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96년 4월 18일 윌리엄 페리 당시 미 국방장관은 조지타운 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군은 한국에서 지뢰를 계속 사용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1996년 5월 16일 ‘멍청이’ 지뢰의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단 한국의 비무장지대와 미군 훈련용 등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는 조건 하에. 한국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관해 미국의 ꡔ뉴욕 타임스ꡕ는 1996년 5월 8일자 기사에서 ‘나쁜 선례가 되어 다른 국가들에게도 지뢰 사용을 원하는 지역을 예외로 만들도록 고무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미연합 야전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홀링워스 장군의 ‘대인지뢰가 실제로 북한군 공격 때 오히려 군의 자유스러운 기동을 방해할 것’이라는 비평을 보도했다. 


6. 지뢰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한국에서도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대인지뢰 사용금지에 관한 국제사회의 논의가 한창이던, 그리고 미국이 한국에서는 지뢰정책의 불변을 결정하던 1996년 5월에도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6년 5월 21일 오전 9시경, 경기도 연천군에서 주민 성부현 씨가 산나물을 뜯다가 대인지뢰를 밟아 즉사했다. 5월 24일 오전 7시경, 또 다시 경기도 연천군에서 주민 전창국 씨가 산나물을 뜯다가 대인지뢰를 밟아 즉사했다. 바구니 가득 나물을 뜯으려다가 황천객이 된 사람들을 보고 괜한 욕심에 화를 자초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1996년 장마철에는 더욱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우리를 긴장시켰다. 집중호우로 말미암아 탄약고가 유실되어 많은 지뢰와 탄약이 사방으로 흩어졌는가 하면, 매설된 지뢰들이 넓은 범위로 쓸려나가 버렸던 것이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육군 1군사령부는 1996년 8월 6일 매설지뢰의 유실위험지역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매설지뢰의 유실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화천군 민통선 북방 등대리~북한강~평화의 댐 17㎞ 구간, △양구군 민통선 북방 하심포~문등리~수입천 사이 21㎞ 구간, △양구군 민통선 북방 하청송~사태리~파로호에 이르는 23㎞ 구간, △인제군 민통선 북방 직골~소양강~양지촌 사이 29㎞ 구간 등으로, 위험지역의 총면적은 106만 평에 달했다. 이들 지역은 졸지에 포탄과 지뢰가 곳곳에 흘러 넘치는 위험지대로 변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집중호우는 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7. 이처럼 지뢰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은 비록 지금은 전선지역이지만 장차는 바로 통일의 접경지역이 될 곳이다. 그 중에는 이미 벌써부터 투기과열이 우려되는 지역도 있다. 지금은 곳곳이 지뢰매설지역이라는 붉은 표딱지를 붙이고 철조망으로 통제된 지역이라도, 장차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거주하게 될 소중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얼마나 많은 지뢰를 비행기로 쏟아 부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될지,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야 이 지뢰들을 제거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넘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다. 미군의 주둔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비롯되어 한국전쟁으로 고착된 것이지만 통일이 된다고 해서 쉽사리 과거지사가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주한 미군의 역할도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한 미군은 이미 한국 사회의 주요한 구조적 요소이며 생활환경이다. 주한 미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주한 미군의 공과를 현실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난 50년 간 과연 주한 미군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아마도 주한 미군이 우리의 주권을 크게 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같은 성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군은 우리의 군권을 전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인지뢰의 사용과 같은 비인도적 전술이 미군의 의지에 따라 채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한 미군이 발휘하는 전략적 유용성의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상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전국 곳곳에 널려 있는 미군 기지들은 지역 주민들의 재산과 생명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국토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이용 자체를 제약하고 있기도 하다. 미군에 의한 강도, 강간, 살인, 상해, 그리고 환경파괴의 범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주한 미군에 대한 반대여론이 곳곳에서 비등하는 것은 이처럼 주한 미군으로 인한 피해가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지뢰사용의, 그것도 한번 매설하면 어렵게 찾아내서 폐기하거나 아니면 그 용도대로 폭발하게 될 때까지 먹이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멍청이’ 지뢰사용 지역으로 유보한 미국의 조치는 전략적으로 무용한 단견이며 불평등한 힘의 관계에 기반한 횡포에 해당한다. 지뢰 폭발사고나 매설지뢰 유실사고에서 보이듯이 지뢰는 전술적 효용보다 오히려 미군으로 인해 한국민이 입게 되는 중대한 생활상의 피해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냉전 시기 동안에 팽대해질대로 팽대해진 야만의 질서를 시급히 문명의 질서로 전환해야 할 곳이다. 미국은 이 과제의 달성에서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대응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지뢰사용의 전면적인 금지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노/정/연

1997-07-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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