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상반기 투쟁의 점검
민주노총의 ‘사회적 참여’ 문제에 대하여
강 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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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97년 대선방침
김 세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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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 양경규 민주노총정치위원장
박 성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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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임단투 더 이상의 표류를 경계한다
최 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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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세력관계 재편’을 위하여
이 종 회
6월호 특집 ?기로에 선 민주노조, 새로운 전진을 위해?에서 우리는 현시기 민주노조운동을 노선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상반기 투쟁이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고 있는 6월말 현재, 주요한 현안문제를 점검하려는 취지 하에 7월호 특집은 ?97년 상반기 투쟁의 점검?으로 잡았다.
특집 1 ?민주노총의 ‘사회적 참여’ 문제에 대하여?에서 필자는 사회적 참여의 목표와 물적 토대, 참여 수준에 대해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다. 노사관계의 지양이라는 목표를 잠시도 놓치지 말 것과 일터와 삶터, 사회 일반수준에서의 사회재구성 참여, 이를 위한 사회재구성 프로젝트는 필자가 제기하는 핵심적 문제의식이다.
특집 2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97년 대선방침?에서 필자는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전략적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전술적 목표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모든 측면과 수준에서 맞서 나가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사회 전영역에서 민주주의의 확대 심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하에 정치세력화와 대선방침에 대해 민주노총을 비롯한 여러 세력의 견해를 검토하면서 현시기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는 민주노조진영 내부의 선진역량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진보적 민주를 위한 연합을 추진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형성해 나가는 것’임을 확인하면서 대선전술과 후보전술도 이러한 맥락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함을 제기하고 있다.
특집 3 ?특별인터뷰 양경규 민주노총정치위원장?은 양경규 위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정치세력화, 대선전술, 후보전술 등에 대한 민주노총의 현주소와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
특집 4 ?97 임단투 더 이상의 표류를 경계한다?에서는 97년 임단투를 둘러싼 조건과 경과를 정리하면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분명히 할 것과 현장의 쟁점을 중심으로 97년 임단투를 복구할 것을 제기하고 있다.
특집 5 ?‘사회적 세력관계 재편’을 위하여?은 사회개혁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향과 내용은 신보수주 헤게모니하에 자본의 축적구조가 변하면서 초래하고 있는 사회전반의 물질적 해체,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극복방안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
민주노총의 ‘사회적 참여’ 문제에 대하여
강 수 돌 / 고려대 교수․노기연 부소장
1. 들어가는 말
1970년 11월, 젊은 청년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사른지 어언 25년이 넘게 흘렀다. 그리고 1987년의 뜨거운 여름, 비인간적인 노동과 미래의 암담한 전망 앞에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분노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대우’ 및 ‘어용노조 타도’와 ‘민주노조 건설’을 목표로 파업의 물결을 이루었던지도 벌써 10년이 지나갔다. 25여년 전 당시 상황에서 전태일 열사가 과연 한국 사회에 ‘민주노총’이 설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엄청난 일이 일어난 셈이다. 이제 1995년 11월에 정식으로 출범한 민주노총은 청년 전태일의 정신을 이어 받아 한국 노동운동의 명실상부한 대변자 역할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1996년 5월에는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개혁 카드라고도 할 수 있는 노사관계 개혁을 담당할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위하여 반 년 이상의 기간 동안 엄청난 시간과 돈, 에너지를 투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비공식적으로나마 토론의 당사자로서 참여하였고, 그로써 이미 그 사회적 실체를 인정받은 셈이라 할 수 있다. 남은 것은 단지 법적으로 공식 인정을 받는 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집권 여당이 노동법을 단독으로 ‘날치기’ 개악시킴으로써, 그리고 이에 대하여 조직된 노동자들의 저항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어 버림으로써 민주노총의 ‘합법적 인정’ 및 ‘제도적 참여’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뻔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공식적인 합법성 인정을 쟁취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비공인 투쟁을, 다른 편으로는 제도적 참여를 병행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과연 민주노총이 청년 전태일의 살아있는 정신을 창조적으로 이어받으면서, 또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물론이요, 1996년 말~97년 초의 대파업 물결의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올바르게 ‘사회적 참여’를 해나갈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이에 관한 가장 최근의 심층적 논의로는 김금수 1997, 김종각 1997, 박영삼 1997 참조). 이 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내용은 사회적 참여의 기본 관점(목표와 원칙), 그리고 사회적 참여의 물적 토대 문제 및 참여의 수준이다.
2. 사회적 참여를 어떠한 관점에서 해야 할까
: 목표와 원칙의 설정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주어진’ 조건들을 그냥 주어진 것으로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더군다나 이 ‘주어진’ 조건에 우리 삶의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적응’시켜나가야 하는 것에는 온 몸으로 저항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삶의 과정, 그리고 사회 자체의 발전과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 삶의 사회적 과정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일이다(강수돌 1997b 참조).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많은 경우에 ‘참여’ 그 자체에만 현혹이 되어,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떠한’ 원칙으로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조차 우리가 현실 사회의 성격이나 구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또한 참여를 요구하는 상황적 맥락이 어떠한가에 따라 방향이 많이 다를 것이다.
현실은 분명코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한국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 속으로 우리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냉철히 살피건대 과연 현재의 시스템이 추구하는 생산력이나 경쟁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 주고 있는가? 생산력과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또 그 결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다소 고통스럽긴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냉정히 진단컨대, 현재의 사회경제 시스템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살아 있는 생명력을 경향적으로 압살시키고 있다(하이데 1997b 참조).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주체적인 생각, 느낌, 감정, 자율적이고 의식 있는 행동 같은 것들이 ‘노동력’의 형태 속에서 체계적으로 억제되어야지만, 기업의 계획대로 생산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생산성과 이윤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유달리 강조하는 기업문화도 있긴 하지만, 이것도 매출액 및 경쟁력 제고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기업의 관리 과정 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자연스런 사회적 욕구는 상품과 광고의 홍수 속에서도 체계적으로 조작되고 왜곡되고 또 여차하면 자본의 의도에 맞게 만들어진다. 나아가 이 사회경제 시스템은 인간보다 훨씬 크고 또 인간 생명의 토대라고도 할 수 있는 대 자연을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경향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은 물론이요, 인간적인 정이 흘러넘치는 마을공동체들까지도 저 흉칙한 아파트 단지들과 시커먼 공장 연기, 빽빽한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급속도로 훼손되고 있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총체적 파괴과정은 세계화, 지구화 시대에 이르러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요컨대, 이러한 파괴과정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파괴적 경향성에 대해 의식적이고 조직적으로 맞서면서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오히려 다 함께 살려내는 진정한 대안을 건설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는 데에 참여할 것인가? 결론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살려내기 위하여 ‘어떠한 원칙’으로 임할 것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지구촌 이웃끼리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고, 대자연과도 조화롭게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비인간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내적인 ‘암세포’를 정확히 찾아, 이를 슬기롭게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사회적 분열과 지배, 대결과 갈등을 진정으로 지양시켜야 하고,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시장, 화폐, 권력이나 자본의 독재와 같은 외적 강제에 종속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사관계가 참으로 올바르게 개혁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흔히 이야기하듯 ‘노사관계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노사관계 자체의 지양(止揚)’이다.
‘노사관계의 지양’은 더 이상 ‘노’(勞)와 ‘사’(使)가 별개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노’는 ‘노’이면서 동시에 ‘사’이어야 하고, ‘사’는 ‘사’이면서 동시에 ‘노’이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노’는 ‘노’가 아니어야 하며, ‘사’는 ‘사’가 아니어야 한다. 즉 노사가 구분이 없어야 하고, 따라서 지배와 ‘종업원’ 관계 자체가 신뢰와 협동관계로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 전환을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의 기본적 원칙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강수돌 1995 참조). 우리는 이 합의의 과정 자체도 피와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달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첫째는 공유공생의 원칙이다. 노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땅이나 기계, 건물, 원료 등 여러 생산수단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 할 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특정 집단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의 결과물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적인 대상만 공유할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이나 다종다양한 의견, 생각과 지혜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어 가짐으로써 주체적인 상호작용을 더욱 활발히 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자율자치의 원칙이다. 우리의 사회경제적 삶의 형식과 내용, 과정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사회의 주인을 생산자로 본다면 이 생산자들이 생산, 분배, 소비의 내용과 형식, 생산‧소비과정의 여러 의사결정을 스스로 주관해야 한다(파커 & 슬로터 1996 참조). 현재와 같이 기업가나 기계, 법과 제도, 시장경쟁력이나 이윤동기, 돈으로 표현되는 물질적 부, 정치권력 등과 같은 외적인 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외적인 힘에 빼앗긴 우리의 ‘내적 자율성’을 되찾고 스스로 단련시켜 나가야 한다. 나아가 이 자율의 원칙은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도 동시에 떠맡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 원칙은 엘리트 중심주의적 대중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뜻하기도 한다. 소수 뛰어난 지도자들이 대중을 지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우리는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외치며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디 가더라도 대중이 주체로 서도록 뒷바라지를 해 가면서 함께 생각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여태껏 빼앗긴 자율성을 되찾고 진정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길이다.
셋째는 인간존중의 원칙이다. 노동자는 더 이상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 분배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 바뀜으로써, 사용자는 더 이상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산자가 됨으로써 모두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강수돌 1997 참조). 인간이 합리화의 대상인 ‘생산요소’로 둔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의 능력이나 재주, 소질과 취향, 욕구나 소망, 의견과 신념은 정말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 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가진 인간의 주체성을 조작적인 정의를 통해 수치로 계량화하거나 여러 단계로 계층화시킴으로써 각종의 차별, 차등, 불평등을 조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컨대 성별, 나이별, 학력별, 기능별, 성적별, 출신지역별, 민족‧나라별로 일의 내용과 사회적 대우를 구조적으로 달리 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 속에서야말로 비로소 인간은 상호간에 진실한 유대가 가능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그 사람의 의견, 느낌과 감정상태에 젖어 드는 것(Empathy), 역지사지(易地思之),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실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이다.
넷째는 생태조화의 원칙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란 단순히 우리 인간 외부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Umwelt)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우주의 생태계(Okologie)를 구성하는 한 주체(Subjekt)이다. 여기서 우리는 ‘환경’이라는 개념과 ‘생태계’라는 개념을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환경’이란 독일어로 ‘Um-Welt’라고 하는데, 이는 나(인간)를 중심에 놓고 볼 때, ‘나(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은 나(우리)와 환경이 분리되는 것으로, 나는 주체이고 자연환경은 객체로 된다. 따라서 자연환경은 인간에 의한 지배와 이용, 개발과 돈벌이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에 ‘생태계’란 독일어로 ‘Okologie’인데 이는 어원적으로, 집을 뜻하는 ‘Oikos’와, 논리를 뜻하는 ‘Logos’의 합성어로, 전체적으로는 ‘집의 논리’이다. 이것은 마치 동양에서 우주(宇宙)라는 말이 ‘집(四方上下)과 집(古往今來)’을 뜻하니, 시공을 초월한 ‘큰 집’을 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연과 인간,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 등 우주만물 일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서의 집’을 이룬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는 우리 인간은 큰 자연의 일부가 되고, 또 거꾸로 우리 인간 내면에 들어있는 본성, 즉 내적 자율성, 삶의 활기, 생명력은 바로 작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큰 자연의 모습은 우리 인간 내부의 작은 자연의 외적 반영이며, 또한 이 작은 자연에 온갖 작용을 가하기도 한다. 즉 자연과 인간은 둘 다 ‘삶의 주체’인 것이다. 자연을 이런 눈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발에 걸리는 돌부리 하나에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우리가 다니는 길도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큰 집의 일부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시각이 이렇게 전환되면, 우리는 오늘날 큰 사회문제로 대두한 이른바 ‘환경오염’은 근본적으로 ‘환경’의 오염이 문제가 아니라, 따라서 환경‘보호’가 대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근본문제는 ‘인간오염’이며,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관계 및 인간의 대자연관계를 근원적으로 혁신시키는 것이 유일한 대안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보호’할 환경 자체도 없어지고, 보호의 ‘주체’도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이 큰 자연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면서, 인간은 또 노동과정, 생활과정을 통해서 이 큰 자연을 가꾸기도 하고 변형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에 의한 큰 자연의 변형은 바로 인간의 내적인 본성, 인간 속에 들어있는 작은 자연의 외적 반영이다. 앞에서 말한 인간의 내면적 자율성이 온전히 발전되면 이 작은 자연도 온전해질 것이고 또한 그 외적 반영으로서의 큰 자연도 온전히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생산력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가장 주된 흐름을 형성한 원리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이 큰 자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원료나 기계(불변자본) 또는 상품(상품자본) 등으로 전환시켜 내느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내부의 내적인 자율성과 고유의 생명력, 즉 작은 자연을 변형하여 얼마나 쉽사리 훌륭한 노동력(가변자본)으로 전환시켜 내느냐가 문제의 핵심을 이루었다(황기돈 1996 참조).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인간에 의한 큰 자연과 작은 자연의 파괴과정이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생산력의 발전으로 효율성이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이 두 측면의 생태계를 그만큼 빨리 파괴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생태조화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란, 기존의 생산력 원리나 그에 기초한 온갖 제도와 법 등 구조적 장치들을 타파하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우리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있는 ‘맹목적’인 생산력 발전에 대한 믿음 및 그에 기초한 생활방식 전체를 타파하는,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싸움, 자신과의 싸움을 내포하고 있다(강수돌 1997a 참조).
3. ‘사회적 참여’의 물적 토대는 무엇일까 : 존재 기반의 문제
노사정(勞使政) 사이의 사회적 합의와 이를 통한 산업평화의 유지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가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하나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사회적 합의를 ‘희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적 관계 자체를 철폐하기 위한 계급투쟁을 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서는 절대 안되고, 그대신 그러한 적대적 과정 속에 생산된 커다란 떡고물의 분배를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해내느냐 하는, 분배싸움 정도에만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모습을 보여야지만 노사정 사이의 사회적 합의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분배싸움이란 임금, 노동시간, 복리후생, 경영참가, 공동결정, 사회복지 등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의 개선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자신의 행동반경을 이러한 분배싸움으로 국한시키고 실제로 이것이 현실화되는 것은, 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그 자체가 노동계급 자신의 독자적인 대안(자율과 해방)을 포기한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박장현 1997, 하이데 1997a 참조).
둘째는 노사정이 나눠먹을 수 있는 ‘떡고물’ 자체가 커야 한다. 이것이 대개 주장되는 ‘조그만 파이를 서로 많이 가지려고 싸우지 말고, 차라리 파이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의 역사적 경험을 찬찬히 살펴 보면 우리는 ‘파이의 원천’에 대해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선진’ 복지사회에서 노사가 크게 만들어 잘 나눠 먹었던 파이의 원천은 다음 세 가지 수준에서 조달되었다(Heide 1996 참조). 첫째는 자국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둘째는 이른바 후진국 내지 제 3세계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세째는 모든 노동자들의 협조로 전지구적 범위에서 진행된 자연생태계(물, 공기, 숲, 나무, 산, 바다, 강, 개울 등) 파괴의 대가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이후로 이러한 ‘파이 키우기’ 논리는 더 이상 관철되기가 어렵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포디즘(Fordism)의 위기, 또는 선진 자본주의 축적 구조의 위기라고 하는 것의 핵심 내용이다. 즉 기존의 포디즘적 축적구조1)에서는 대량생산에 기초한 고생산성 및 대량소비, 그리고 노사정이 타협하는 사회적 합의 구조 등에 기초하여 자국의 노동자를 광범위하게 체제 속에 통합시킴과 동시에, 제 3세계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잉여를 다시 자국의 노동자들에게 분배하여 체제와 노동자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범세계적 축적은 만국의 노동자들이 ‘경제개발’, 또는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진행된 ‘자연 생태계’ 파괴 과정에 비교적 협력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포드주의의 위기란 크게 포드주의를 뒷받침하였던 바로 그 세 가지 축이 흔들리면서부터 비롯된다. 첫째는 선진 자본주의 자국의 노동자들이 예전만큼 뼈빠지게(생산성있게)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둘째는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인하여 제 3세계로부터의 부의 이전이 예전만큼 쉽지 않게 되었다. 셋째는 자연생태계 파괴의 결과 이제 이른바 ‘환경위기’(사실은 생태계위기)가 범세계적 문제로 등장하여, 각종 ‘환경운동’이 강화되고 있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우리나라는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 이래로, 특히 1980년대 이후로 선진국이 걸어간 길을 별다른 내면적 성찰 없이 거의 맹목적으로 뒤쫓아 가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다.
만일 우리가 현재의 존재 기반을 이렇게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즉 우리도 과연 노사가 합심하여 이러한 선진국의 전철을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노사 신분을 모두 지양해서 우리가 가진 천연자원(3면이 바다요, 70%가 산이며, 마을마다 개울이 흐르는 이 기름진 땅, “금수강산”)을 우리의 조건에 맞게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게 가꾸면서도, 아름다운 우리의 미풍양속(이웃간에 서로 돕고 사는 연대의 정신, 인간적인 정이 흘러 넘치는 마을, 인간적 예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정신, 친구나 형제간에 느끼는 우애 등)을 오늘에 ‘되살려’ 더욱 발전시켜 내는 ‘독자적’인 사회경제 발전 모델을 모색할 것인가? 물론 조금은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는 바로 이 ‘역사적 선택’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모든 일하는 사람들은 더 늦기 전에 올바른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한다!
4. 사회적 참여는 어떤 수준에서 해야 하나 : 구체적 과정의 문제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민주노총을 비롯한 모든 민주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사회적 참여를 어떻게 진행시키는 것이 좋을까? 우선 그 구체적인 진행 과정에서 깊이 유의할 점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위로부터’ 구상되고 제시된 정책을 단순히 실행만 하기 위한 참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실행을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구상을 세우는 문제에 있어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상이 배제된 실행참가’가 아니라 ‘구상참가를 전제로 한 실행참가’여야 한다.
둘째,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품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자신의 품을 경쟁적으로 값싸게, 함부로 팔지(경매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연대의 틀이다. 자신의 품을 함부로 팔지 않는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만일 인간으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품삯만 많이 받으면 이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그리고 같은 조건에서 일자리만 보장되면 최선일까?(강수돌 1997b 참조)
우리는 노동조건의 틀을 대강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짧은 휴가, 미비한 직업교육, 높은 산재, 직업병 빈발, 노동 3권의 부재, 권위주의적 경영스타일, 고용불안정, 노동배제적 합리화, 사회복지의 미비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후진국형이고, 다른 하나는 고임금, 짧은 노동시간, 긴 휴가, 충실한 직업교육, 산업안전 완비, 낮은 직업병, 노동 3권의 보장, 참여주의적 경영스타일, 고용안정, 노동자의 참여에 의한 경영혁신, 사회복지의 완비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선진국형이다. 우리는 당연히 전자보다는 후자를 선호한다. 그런데 문제는 후자의 보다 개선된 노동조건조차도 파괴적인 자본합리성을 그대로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도 보았듯이 그 물적 토대가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따라서 만일 노조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면, 사실상 위의 선진국형 노동조건 추구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진정한 대안의 구상). 그것은 경기가 좋을 때 더 많은 요구를 하고, 경기가 나쁠 때 요구를 자제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다시 말해 경기 변동에 자신의 목소리를 맞추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경기변동과는 무관하게 노조는 자신의 내포와 외연을 부단히 확장해야 한다(강수돌 1997a 참조).
노조활동의 내포를 확장한다는 말은 노조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대가(고임금, 많은 여가)를 찾는다는 ‘보상’의 논리나, 건강보호, 고용안정과 같은 ‘보호’의 논리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생태적으로 새롭게 ‘형성’하는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앞의 두 논리(보상과 보호)는 사후적(ex post)인데 반해, 형성의 논리는 사전적(ex ante)이라는 데에 차이가 있다.
반면에 노조활동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말은 노조나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개선에만 목숨을 걸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동조건을 포함한 총체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뜻이다(김금수 1997에서도 ‘생활옹호 투쟁’이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노인, 여성,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미숙련공, 일용공, 파트타이머, 외국인, 임시직, 촉탁사원 등이 직면한 문제들, 교육문제, 통일문제, 제 3세계 문제, 선후진국 격차문제, 생태계문제, 교통문제, 농촌문제, 도시문제, 쓰레기문제, 유해식품문제, 원자핵문제, 전쟁문제, 부실공사문제…… 등 엄청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것은 모든 상품의 생산과 관련, 입지 선정에서부터 그 원료채취, 조립, 가공, 분배, 소비, 재생 또는 폐기하는 모든 과정 속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그 학력이나 성별, 국적을 떠나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건강하게’ 개입해 들어갈 때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노조와 노동자들이 사회혁신의 주체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추진하고 참여해야 할 ‘사회재구성(society reconstruction)’ 프로젝트들이다. 만일 이러한 사회재구성 프로젝트들을 소홀히 한다면 노동자와 노조는 그 사회적 ‘존재이유’와 자신의 건강한 ‘생명력’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재구성 프로젝트들을 크게 세 가지 수준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 각각 사회 일반 수준, 주거지 수준, 그리고 일터 수준에서의 ‘사회재구성(society reconstruction) 참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 사회 일반 수준 : 국민총생산(GNP), 경제성장, 생산성, 국제경쟁력 같은 지표에 갇힌 사고가 아닌, 풀뿌리 민주주의와 삶의 질을 중심으로 삼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한다. 나라(세계) 전체의 건강한 발전 방향은 물론이요, 편협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신토불이적 생활방식(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실험의 형태로 하나씩 실천(“성찰적 비판”과 함께)해 나가야 한다(하이데 1997b 참조).
(2) 주거지 수준 : 생활스타일, 주거방식의 건강한 재편,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창의적인 구상들, 육아 문제는 물론, 교육(지식암기식 교육이 아닌 사회와 생태계를 올바로 인지하고 느끼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살아있는 교육) 문제를 공동체 속에서 올바로 해결하는 방안, 세대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교류 형태의 다양화 및 이웃간 교류의 활성화를 위한 창조적인 구상들을 조직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3) 일터 수준 : 누가, 무엇을, 언제, 얼마나, 어떻게 만들고(원료 채취, 생산, 분배, 소비, 재생폐기 등 경제의 총체적 과정), 분배하고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를 일터 수준에서는 물론 삶터 운동과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도록 한다(박종완 1997 참조).
끝으로 주의할 것은 일터 수준의 사회재구성 참여와 주거지 수준의 사회재구성 참여가 사회 일반 수준에서의 참여과정과 조화 혹은 통일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각자 따로 놀게 된다면 그 결과는 별로 훌륭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는 데에 우리는 민주노총이 사전에 별도로 합법화를 통한 공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차라리 이러한 ‘사회재구성 참여’를 착실히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모든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그 존재에 대한 의미있는 사회적 인정을 받아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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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디즘적 축적구조는 크게 세 요소로 이뤄진다. 첫째는 포드자동차사의 일관생산라인인 콘베이어 생산체제로 상징되는 대량생산 작업조직이다. 이것은 구상과 실행의 분리, 시간과 동작연구를 통한 작업의 파편화, 노동자의 탈숙련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노동통제 방식인 테일러주의(테일러리즘)를 일관생산기술의 도입으로 더욱 고도화시켰다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자본은 이를 통해 지극히 높은 노동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는 기술적 기초를 획득하게 된다. 둘째는 노사간의 갈등과 대립을 적나라한 물리적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형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인정된 제도화된 틀 속에서 순화해 낼 수 있는 새로운 갈등해결 방식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대개 노조 자체를 공식 인정한 위에서 이 조직과 자본의 대표가 단체교섭과 단체협상을 통해 단체협약을 맺는 형식으로 갈등을 해결해 내는, 보다 세련화되고 신사화된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자본측의 양보는 물론 노동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대량생산에 기초한 고생산성이 그 물적 기초를 이룬다. 셋째는 대량생산방식과 고생산성에 기초하여 상대적 고임금을 확보한 결과 이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생산물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말한다. 즉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전사회적 결합과 관철을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세 요소가 잘 맞물려 돌아갈 때, 이를 포디즘적 축적구조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