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에 빠진 갈증
- 서유럽에서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정세초점 2
수렁에 빠진 갈증
채 만 수 / 부소장
군불에 다시 냄비가 끓고 있다
지난 5월 1일에는 영국에서 18년만에 노동당이, 그리고 6월
1일에는 프랑스에서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연합’이
집권하게 되자,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 배경과 내용, 본질,
한계 등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지적하는 대신에
성급하게 ‘신자유주의의 종언’(終焉)을 외치고 나서고 있다.
프랑스 총선에서의 ‘좌파연합’의 승리를 계기로 서유럽에서의
정치적 변화를 연거푸 주요하게 다룬
ꡔ한겨레21ꡕ에 의하면,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는 데에 “우리
학자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ꡔ한겨레21ꡕ 제163호, 97. 6. 26). 15개
유럽연합 가맹국 가운데 “독일과 스페인 정도만이 보수적인
우파정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서유럽이 말
그대로 ‘좌파세상’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제162호, 97. 6.
19).
우선,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총선 결과에 고무되어 있는 ‘우리
학자들’(이데올로그들)이 ‘좌파의 승리’에 대해서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를 ꡔ한겨레21ꡕ 제163호를
통해서 보기로 하자.
최장집 (고려대) 교수 : “유럽에서 좌파의 잇단 승리는
세계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21세기의 유럽정치는 이제
좌파가 이끌어 갈 수밖에 없을 것.” “유럽에서의 이런 흐름은
아직 우파가 집권하고 있는 독일의 내년 총선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될 것.”
황태연 (동국대) 교수 : “이제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좌파는 신자유주의정책의 실패로 단순히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복지국가 기획이
옳았음을 확인받았다.”
임영일 (경남대) 교수 : “거시경제지표로 볼 때 그나마
성장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났던 영국에서조차 신자유주의정책
아래서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커졌다. 각종 사회복지기금을
축소시켰지만 늘어난 실업자 때문에 국가가 지출한 금액은
예전보다 오히려 더 늘어났다.” “중산층은 신자유주의정책의
결과에 불만을 느꼈을 뿐 아니라 미래에 불안까지 느끼게
됐다.” “신자유주의의 최고의 문제점은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각종의 사회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국가의 제도적 기능을
해체시켜 버린 데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국가의 구실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유럽은 보여주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 : “국제화는 국민국가를 해체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럴수록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국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죽맛, 혹은 위 발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위의 발언들은 ꡔ한겨레21ꡕ의 기자(정남구)를
통해서 재정리된 것이기 때문에 본인들의 본래 발언과 일정한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쓰여져 있는
대로의 발언이라면 그것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자.
우선 첫번째 메시지는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는 판단이다. 이를 기자는 ‘다양한
견해 속에 있는’ “한가지 분명한 공통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모든 경제문제는 자유로운 시장 기능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치
아래,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없애고 국유화된 산업들을
민영화하여 모두 경쟁체제로 바꾸며, 각종 사회복지제도를
해체해 기업들의 세금부담을 덜어 주면 국가경쟁력이 커져
경제가 살아나고 그 결과로 실업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성장의 혜택 또한 국민 모두가 받게 되리라는
이데올로기는 이제 유럽인들에게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부도난
어음이 돼 버렸다......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정리된 내용의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이
‘부도난 어음’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정치변화의
내용을 볼 때 신자유주의가 ‘부도난 어음’이라는 사실과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이제 막을 내렸다’는 선언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 점은 뒤에서 재론하기로 하자.
저들의 발언이 전하고자 하는 두번째 주요한 메시지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것이다. 우선 저들에게 있어서
국가란 (독점)자본의 억압․지배기구가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각종 사회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임영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김호기)이다. 때문에 저들은 신자유주의에서의 “국가의
제도적 기능의 해체”(임영일)를 비판하면서 ‘좌파’의
“사회복지국가 기획”(황태연)을 상찬한다. 즉, 저들은 현대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란 본질적으로 독점자본의
지배․억압기구라는 것을 부인하고 그것이 마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기구인 것처럼 전제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탈규제화’나 국․공유기업의 민영화(사유화)를
그러한 국가(의 제도적) 기능의 해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좌파’가 그러한 국가 기능을 재건 혹은 부활시킬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본질․기능과 역할에 관한 저들의 그런 식의
이해는 전적으로 관념적인 것으로서 국가의 진정한 본질, 기능,
역할을 은폐하려고 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거나, 적어도 그에 침윤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서 국가 기능이 ‘해체’되어 있다는, 혹은
‘해체’되고 있다는 저들의 이해․주장도
신자유주의에서의 국가의 진정한 역할을 은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의 기능은 해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억압적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는 우선 대처 정권이나 레이건 정권,
기타 ‘우파 정권’의 ‘탈규제화 정책’, ‘민영화 정책’,
‘반노조 정책’ 등으로서 나타나고 추진되고 있음을 저들은
부정할 수 없다. 또 바로 그것이 그렇게 정권의 정책으로 나타나
추진되었기 때문에 저들은 ‘좌파’로의 정권의 교체에 각별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즉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우파 정권’의 정책으로서 나타나고 추진된다는 사실을 저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이 다른 한편에서
‘신자유주의에서의 국가의 제도적 기능의 해체’를 말하는 것은
당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정권의 ‘탈규제화’란 (독점)자본의 증식
활동에 대한 규제를 폐지하는 것이고, 자본의 증식활동에 대한
이러한 탈규제화는 자본의 지배와 착취의 강화에 저항하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규제강화․억압강화와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민영화란 주민의 세금을 담보로 축적해 온
사회적 혹은 국민적 부(富)의 소유권을 국가가 사적 독점자본에
할당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에서는 국가가
보다 노골적으로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 반노동자적
성격을 강화․극대화하는 것일 뿐인데, 저들은 이를 ‘국가
기능의 해체’로 설명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의 국가의 기능’을 그들은 기원(祈願)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저들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아직 축배를
들 단계는 아니나,” “곧 좌파가 전유럽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며, “우파 신자유주의의 폭풍이 기세를 잃은 상황에서
앞으로 약 20년 정도는 강력한 진보정치의 시대가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ꡔ한겨레21ꡕ 제162호). 이러한
전망을 더욱 증폭시켜서 최장집 교수는 “‘21세기의 유럽정치는
이제 좌파가 이끌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고,”
황태연 교수는 “좌파는 자신들의 사회복지국가 기획이 옳았음을
확인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김호기 교수는 이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국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 교수와 김 교수의
경우, ‘좌파’ 지배하의 ‘사회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본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이제 가장 인간의
본성에 맞는 자연적인 질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일견 달콤한 전망은, 그들을 자못
고무시키고 있는 ‘좌파’가 무엇인가를 다시 볼 때, 그 성격과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전망이란 사실은 그들의
소망일 뿐 객관적․논리적 근거에 기초한 진정한 전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얼굴을 바꾼 자본으로서의 서유럽의 ‘좌파’
오늘날 여러 논자들이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말하면서
“서유럽이 말 그대로 ‘좌파 세상’이 된 것”이라고 주장할
때의 ‘좌파’란, 말할 것도 없이, ‘승리’와 ‘지배’에
예외적․보조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프랑스 공산당이나
이태리 재건공산당 등의 소수의 예를 별도로 한다면,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을 갖는 사민주의적 정당이다. 따라서 저들이
요란스럽게 ‘좌파의 승리’를 확인하고 장기간의 혹은 종국적인
‘좌파 지배하의 진보정치’를 전망할 때 그것은 바로
사민주의의 승리를 확인하고 그 지배를 전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유럽에서 ‘좌파’ 승리의 주역으로 되어 있는
사민주의 정당들은 자본에 의한 지배,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폐지하려는 노동자 계급정당(공산당)과의 투쟁을 통해서
자신들을 세워 온 정치세력으로서, 그들의 목표와 또 실제의
정치적 기능은 자본의 지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독점자본의 지배를 연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모순 때문에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관념의 고안물에 불과하지만, 저들
사민주의자들이 이상으로 주장하는 ‘사회복지국가’라는 것도
결국은 ‘합리화된 자본주의 국가’에 다름 아니며, 그것이
‘사회복지’ 국가라는 상(像)으로 제시됨으로써 대중 속에
광범한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조건에서 여러 논자들이 주위
거리낌없이 ‘좌파’의 승리를 환호하고 그 장기적 혹은 종국적
지배를 전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서유럽의 ‘좌파’란 바로
그러한 목표와 기능을 가진 사민주의적 정치집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좌파’의 승리 혹은 지배란,
노동자 계급의 승리 혹은 지배가 아니라, 결국 얼굴을 바꾼
‘독점자본’의 승리요 지배이기 때문이다.
‘좌파’ 승리의 의의
지금 서유럽에서의 ‘좌파’의 승리는 우선, 20세기 중반 이래로
서유럽 국가들에서의 여러 차례에 걸친 ‘좌파’의 집권이
그랬던 것처럼, 서유럽에 정치․사회적 위기가 격화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황태연 교수가 “좌파는 신자유주의정책의
실패로 단순히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복지국가 기획이 옳았음을 확인받았다”고 말한 바를 상기해
보자. 또 ꡔ한겨레ꡕ 파리 통신원의 어느 프랑스
사회학자와의 다음과 같은 대담(ꡔ한겨레21ꡕ
제162호)도 눈여겨보자.
ꡔ한겨레ꡕ 통신원 : 일부에서는 이번 좌파의
승리에 대해 대중이 좌파를 대안으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파에 대한 반발의 결과일 뿐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프랑스 알랭 투렌 교수 : 일면 옳은 이야기다. 적어도 5월 25일
치러진 총선 1차투표는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2차
투표의 좌․우파 양자 격돌에서 그런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1차 투표가 집권 우파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해도
2차 투표에서는 두 가지 정책대안 중 좌파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프랑스인들은 좌파에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
이상의 발언들에서, ‘좌파의 사회복지국가 기획이 옳았음을
확인받았다’는 황 교수의 주관적 판단 내지 소망의 표현과, 1차
투표에서의 프랑스 유권자들의 행동을 해석한 논리를 2차
투표에서의 그것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투렌 교수의
주관적이고 잘못된 논리를 별도로 한다면, 남는 것은 ‘우파에
대한 반발’과 ‘신자유주의의 실패에 따른 좌파의
반사이익’이다. 즉 서유럽에서의 최근의 ‘좌파의 승리’는
‘우파 집권기의 대중 피폐’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며, 그러한
‘대중 피폐’를 강요해 온 ‘극단의 자유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대중의 욕망’, ‘민심’(ꡔ한겨레21ꡕ 제162호)의
표현이며, 서유럽에 팽배한 위기의 표현인 것이다. “이번
좌파의 승리를 반자유주의적 반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럽 도처에서 울트라(극단의)
자유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분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알랭 투렌 교수의 발언도 그러한 사정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유럽에 팽배한 위기와 관련해서 참고로 말하자면,
주지하다시피, 누구라고 거명할 필요도 없이 신자유주의를
찬양하는 국내외의 많은 논자들이 ‘영국에서의 대처리즘의
성공’을 주장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예의 알랭 투렌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ꡔ한겨레21ꡕ 제162호)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자유주의체제는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영국은 경제의 호전을
이야기하지만 불황이라는 프랑스보다 훨씬 더 많은
절대빈곤층(국민의 25%)을 양산하고 있고, 임시고용직만 늘고
있다. 영국이 프랑스에 비해 경제적으로 호전되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시각이다.
말하자면, 영국에서의 대처리즘의 성공과 그에 따른 ‘영국
경제의 호전’은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한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전형으로서의 대처리즘이 초래한 ‘대중의
피폐’에 대해서 영국의 유권자들은 지난 5월 1일의 총선에서
보수당(Tory)의 참패로 답했던 것이다(영국의 총선에 대해서는,
오건호, 「97년 5월 영국총선: 누구의 승리인가?」,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22호, 1997년 6월호
참조).
참고로, ꡔ한겨레21ꡕ(제162호)에서 알랭 투렌
교수는 위 발언에 이어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미국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 시스템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이지도 사회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거대한 미국의
테크놀로지일 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힘이 아니다. 영국도
미국과 똑같은 극단적 자유주의를 시도했지만 어떠한 창조력도
창출해 내지 못했지 않은가. 따라서 미국의 발전은
자유주의체제의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투렌 교수의 이 발언은 지금 ‘좌파의 승리’를 얘기하는
사람들의 사고가 일반적으로 얼마나 물신주의적인가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신주의적인 사고는 다음과 같은
기사(한겨레21ꡕ 제163호)에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주의는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학자들은 “‘인간’을
도외시한 성장일신변도의 신자유주의정책은 오히려 성장
자체마저 가로막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러한 발언들에서는 문제의식의 중심이 ‘인간의 삶’에서
어느덧 ‘경제성장’으로 옮겨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신자유주의이든 아니면 테크놀로지이든, 무언가가 “미국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투렌 교수가 말할 때, 그는 대략 지난
92년 이후부터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미국의 호황만을 보고 있을
뿐, 그 안에서 “프랑스보다 훨씬 더 많은 절대빈곤층(국민의
25%)을 양산하고 있고, 임시고용직만 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짐짓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투렌 교수의 지적대로
지금 미국에서 테크놀로지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은
미국의 노동자 계급에게 대량실업과 불안정 고용,
장시간․저임금 노동 그리고 거대한 빈곤이라는 대재앙을
강요하면서이다.
‘좌파’가 이어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
서유럽에서의 ‘좌파’의 승리는 분명 서유럽 민중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염증의 표현이요, 변화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는 민중의 갈증은 뿌리 깊고
강고한 서유럽 사민주의의 늪에 빠져 방향을 잃고 있다.
사민주의인 ‘좌파’의 승리는 서유럽 민중의 바로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파’는,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을 자임하는 영국의 노동당은 말할 것도
없고, ‘낡은 스타일의 좌파’(old-style Left, Electronic
Telegraph, 97. 6. 15)로 지목받고 있는 프랑스 사회당조차도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바로 서유럽 대중이 사민주의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창 1991년에 타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Maastricht Treaty)에 입각하여 추진되고 있는 유럽통합,
단일통화의 창출 작업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 기초하여
진행중인데, 프랑스의 신임 총리인 사회당의 죠스팽(Lionel
Jospin)은 이에 대한 저항을 시도했지만 진심이 실리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정치쇼에 그쳤다. 조금 설명하자면,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단일통화를 위한 유럽통화동맹(European
Monetary Union)에의 참가조건의 하나로 각국의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수렴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국가가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가혹한
긴축재정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리고
시라크(Chirac) 정권이 의회에서의 절대다수적 지위를 상실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기총선을 실시했던 것도 바로,
절대다수는 상실하지만 과반수는 획득할 것으로 믿었던 새로운
국회와 내각을 통해서 그러한 긴축정책을 몰아붙이고자 하는
것이었다(채만수,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계급의
좌절과 도전」,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21호
97년 5월호 참조). 죠스팽은 이에 맞서 고용과 (고용을
창출하는) 성장이 강조되어야 한다며, 유럽연합
단일통화(Euro)의 가치안정을 위해서 독일의 주도하에 마련되어
지난 6월 16∼17일의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각국정상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는 통화안정화협약(stability pact)에 고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조치가 규정되지 않는 한 그에 서명할 수 없다고
공언했던 것인데, 막상 6월 16일의 정상회담에서는 사실상
고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선에서
안정화협약에 서명해 버리고 만 것이다.
나아가 6월 19일에 있었던, 수상 취임 이후의 첫번째
시정연설에서 죠스팽은 그가 선거기간 동안에 고용, 임금,
민영화 문제들과 관련하여 내세웠던 ‘사회주의적인’ 공약에
대해서 ‘실망스럽고 모호한’(disappointing and vague) 태도를
취함으로써(Electronic Telegraph, 97. 6. 20 참조) 대중의
분노를 사고, 앞으로 그가 더욱더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타협하고 그에 추종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공공부문에서의 35만 개를 포함하여 7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그의 공약과, 주당 노동시간을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단축하겠다는 공약은 ‘향후 5년간에 걸쳐서
서서히’ 이행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부도’라고까지야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지불유예’된 어음이 되었다고나 할까?
블레어(Tony Blair) 지도하의 영국 노동당의 경우는 더욱
노골적이다. 블레어는 선거 전부터 보수당 정권에 의해서
“80년대에 이루어진 노사관계나 기타 기업 관련 변화에 어떤
변화도 가하지 않을 것”(Electronic Telegraph, 97. 1. 22)을
다짐하고 있고, 나아가 노동당이 이제 아예 ‘기업가들의
투사’임(New Labour is now the ‘entrepreneur's
champion.’)을 선언하고 있다(Electronic Telegraph, 97. 4.
12). 최저임금과 관련하여도 “그것을 경쟁력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기업과 상의하여 결정하겠다”(같은 곳)고 말하고
있다. 물론 ‘좌파’ 정당으로서 영국 노동당은
고용․임금․노동시간 등과 관련한 노동자들의
최저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사회조항(Social Chapter)에 서명하고 있지만, 그 적용은 2년간
유예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고, 사회조항이 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와 관련한 다수결 결의의 확대를 반대하고
있다(Electronic Telegraph, 97. 6. 13). “영국이 사회조항과
관련한 조치를 위한 장래의 토의에 참가하기를 원하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경쟁력을 위협하는 어떤 조치도 그는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블레어가 명확히 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같은 곳).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승리’를 쟁취한 서유럽 ‘좌파’
정당들의 움직임이요 정책의지이다. 따라서 ‘노동당’,
‘사회당’, ‘사민당’ 등의 간판에 기대어 서유럽에서의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전혀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주관적 혹은 관념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민주의의 늪을 벗어나야 해방이......
물론 서유럽에 신자유주의에 거스르는 어떤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좌파의 승리’ 자체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염증의 표현이기 때문에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탈신자유주의적 변화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좌파’는 앞에서 본 것처럼 이미 자신들을 많건 적건
신자유주의에 적응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도
‘좌파’의 ‘사회복지국가적 기획’에 의해서 추진되기보다는
밑으로부터의 대중의 압력으로 추진될 것이고,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경쟁력, 그리고 국민적 이익’을 추구하는 ‘좌파
정권’에 의해서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으면서 그것에
의해서 신자유주의적으로 굴절되면서 추진될 것이다. 바로
서유럽 민중이, 그리고 넓게는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
대중들이, 해방에의 열렬한 갈증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21세기의 유럽정치는 이제 좌파가
이끌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거나 “앞으로 20년간은
진보정치의 시대” 운운하는 죽 끓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에서 ‘좌파’ 집권의 기간은 그리 길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제시된 ‘좌파’의 프로그램이나 그들의
일부가 모색하는 소위 ‘제3의 길’이 결코 현시대에 격화되고
있고 앞으로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는 서유럽, 그리고
나아가서는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모순의 타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좌파’ 정권들이 신자유주의적 원리들을
뿌리에서부터 부정하고 새로운 원리에 입각하여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ꠏ 그들에게는 물론 그러할 능력이 없다
ꠏ 대신에 ‘효율, 노동의 유연성, 경쟁력, 국가이익’
등등에 매달릴 때, ‘좌파’의 프로그램은 격화되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지양하기는커녕 그것들을 더욱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프로그램의 희생자인 대중의 분노에
의해서 조만간 권좌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대중에 곧바로 해방이 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대중이 사민주의의 덫을 벗어 던지기까지는 결코 해방이 오는
것이 아니고, 대중은 파시즘과 사민주의 사이를 힘겹게 헤맬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과학기술혁명의 성과가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됨으로써 격화되고 있는 대량실업, 불완전취업,
장시간․저임금 노동, 빈곤의 심화 등의 사회적 모순을
사민주의적으로 미봉하려 하는 대신에, 새로운 생산력에
조응하도록 사회적 생산을 새롭게 조직할 정치적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서유럽의 대중은 해방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