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970년대 초,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공산당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레닌주의를 폐기하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이들 라틴 공산당들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전 세계 공산당들의 이론과 실천 모델이었던
레닌주의와 소비에트주의 대신, 평화적 방식의 사회주의 건설,
다시 말하자면,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사회주의 사회질서의 건설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공산당은 1975년
이른바 리브로Livro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유로코뮤니즘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이들 선진 자본주의국가 공산당들의 공세적
전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른바 "역사적 타협"compromesso storica,
프랑스 공산당의 "좌파연합"union de la gauche, 그리고 스페인
공산당의 정권도전이라는 1차적 목표가 실패로 끝나면서,
유로코뮤니즘 자체도 폐기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10년도 채
되지 않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붕괴했다. 그에 따라 이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유로공산당들도 다른 대부분의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유로코뮤니즘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붕괴의 서막이었는가?
유로코뮤니즘이 20세기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결과였던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는데 일조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비에트체제의 정당성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힌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결과적으로 평가하건데, 유로코뮤니즘 자체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쇄신이 아니라, 그 중요한 붕괴 과정이라는
데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1970년대 유로코뮤니스트들의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도전은
처음부터 대내외적으로 크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라틴 공산당들의 민주적 공세와 탈소비에트적 수사는
노동계급의 적들의 눈에는 당연히 공산주의자들의 기만적
전술로만 비쳐졌을 것이다. 동구권의 공산당들을 포함한
국제공산주의 진영과 해당 국가의 공산당들 내부에서도
유로코뮤니즘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스탈린주의자들은 유로코뮤니즘을 서유럽 공산주의 운동의
사민주의화, 즉 사회주의 혁명의 포기와 개량주의화로
바라보았다. 반면에 공산주의 혁신주의자에게 있어서
유로코뮤니즘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이념이자,
발전단계, 북유럽의 사민주의와 동구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제3의 길"이었다. 하지만 유로코뮤니즘의 운명과 관련하여,
이러한 상반된 평가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유로코뮤니스트들
스스로 조차 과연 다원적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에 대해
얼마만큼 확신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유로코뮤니즘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러시아 혁명과 제2인터내셔널 결성이후 혁명적
노동자 계급운동을 대표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들과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현실사회주의의 이론과 현실, 특히 고전적 마르크스-레닌주의,
코민테른에 의해 수립된 공산당이론, 스탈린주의, 서구의
계급투쟁의 역사를 포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유로코뮤니즘의
이론과 관련하여, 레닌주의와 현실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제기되었던 그람시주의, "진보적 민주주의론" 외에도,
"국가독점자본주의론", "계급균형론" 등이 주요한 비판적
검토대상이 될 것이다. 전자는 1970년 자본주의 일반위기와
관련하여, 특히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치경제학 이론이었고, 후자는 1920년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오토 바우어Otto Bauer의 파시즘 분석에서
기원한 것으로, 베를링구에르는 이를 "역사적 타협"의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유로코뮤니즘의 내용들에 대한 이론적인 검토와 더불어,
또한 실천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유로코뮤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로코뮤니즘의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이었고, 어떠한 조건들과 과정을 거치면서 실패의
길을 걸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불충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두 번째 방식, 즉 시론적인
차원에서 1970년대 유로코뮤니즘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한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을 선택한 것은 크게 세가지
이유에서이다. 우선 유로코뮤니즘에 대한 내용적이고 비판적인
검토는 이 자리에서 충분히 다룰 수 없는 광범위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전술한 유로코뮤니즘에 대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궁극적으로 철학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1970년대에 초점을 맞춰, 사실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유로코뮤니즘의 실패의 요인에 대한 해석과도 관련이 있다.
이 글에서는 1970년대 유로코뮤니즘의 실패는 유로코뮤니즘의
내용, 즉 새로운 사회주의 이행모델과 사회주의 모델과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결국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 질서의 일반위기와
그에 따른 계급투쟁의 심화, 그리고 특히 서구 좌파의 재편과
계급운동의 위기라는 보다 외부적인 환경들에 기인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제기해본다. 유로코뮤니즘의
문제는 그 자체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과정과
전계급적 좌파의 문제라는 것이다. 유로코뮤니즘을 먼저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유로코뮤니즘적인
도전의 직접적인 배경이었던 변혁운동의 구조적 조건들의 변화,
탈포드주의적 이행, 좌파운동의 재편,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다.
먼저 유로코뮤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유로코뮤니스트들이 공세적 전환의 가능성을 찾았던
1970년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그로부터 어떠한 실천적
전망을 찾았는지 검토해 본다. 이러한 일반적인 전망 속에서
이탈리아의 역사적 타협과 프랑스 좌파연합, 그리고 스페인의
민주화과정 속의 공산당의 역할을 통해서 당시 서유럽의 좌파의
재편과 변혁운동의 구조적 위기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유로코뮤니즘의 실패에 대한 원인으로서 1970년대
서유럽의 계급정치 지형의 결정적인 변화와 라틴공산당과 같은
혁명적 대중정당의 구조적 딜레마를 언급함으로써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들 라틴 공산당들의 딜레마와 한계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체제 속에서 변혁운동이 주체적으로 극복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2. 유로코뮤니즘이란 무엇인가
스페인 공산당 당수였던 산티아고 까리요Santiago Carrillo는
1976년 출간이후 유로코뮤니즘의 바이블로 간주되고 있는
'유로코뮤니즘과 국가'에서 유로코뮤니즘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유로코뮤니즘적 경향에 속하는 정당들은 민주주의, 다당제,
의회 및 대의제 장치, 보통선거를 통해 정기적으로 행사되는
인민주권, 국가나 당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조합, 저항의 자유,
인권, 종교적 자유, 문화적, 과학적 및 예술적 창조의 자유,
그리고 모든 차원과 영역의 사회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인민적
참여 형태의 발전 등을 통해 사회주의로 전진할 필요성에
동의한다. 이와 더불어 이 정당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있을 수
있는 그 어떠한 국제적 지도중심과의 관계에서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주장한다." 산티아고
까리요 (김유향 옮김), 유로코뮤니즘과 국가. 새길, 1992, 143
쪽.
까리요의 서술에서도 나타나듯이, 유로코뮤니즘은 크게 4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사회주의 이행론(평화적 방식의
사회주의 건설, 의회주의를 통한 정권창출, 다른 좌파정당과
진보적 부르주아지 정당들과의 연립정치), 둘째, 다원주의적
사회주의모델 (정치적, 문화적 다원주의, 반독점적 혼합경제,
참여민주주의), 셋째,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폭력 혁명론,
프롤레타리아 독재,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넷째, 새로운
공산주의 정당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이 자리에서는 새로운 당 모델에 관련된 문제점 몇
가지만을 언급한다.
새로운 이행전략과 사회주의 모델은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의
구조, 역할, 그리고 행동방식에 있어서 변화를 요구했다. 정치적
게토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의 가능한 연대 세력들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 되어야 했다. 실제 라틴 공산당들의 당원
수는 레닌의 전위정당 임을 포기한 후 급격히 늘어났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당원의 숫자는
410,000명에서 600,000명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당원 중들에는
특히 사무직과 기술직, 여성, 그리고 16-25세의 젊은층 등 1968
세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당의
정치문화도 변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가 된 민주적 집중제와
상명하달식의 스탈린주의적 관행들에 대해 프랑스의 대표적인
유로코뮤니트였던 쟝 엘렝슈타인Jean Elleinstei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당 세포에 내 생각을 개진할 권리는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소속 세포가 내 생각을 지지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 내 의견은
분회로 전달될 것입니다. 또 다시 행운이 주어진다면, 분회
역시 내 생각을 지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부에서 그것들이
논의가 되겠죠. 내 의견이 당 대회에 제출되기 위해서는 먼저
지부에서 채택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과정은 여전히 공산당들, 적어도 프랑스 공산당의
일상적인 관행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입니다." Elleinstein,
Jean. "Eurocommunism and the French Communist Party", In R.
Kindersley (ed.), In Search of Eurocommunism, London:
Macmillan Press, 1981, 77 쪽.
엘렝슈타인도 강조했듯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당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은 "공산당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유로코뮤니즘의 성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시험대"였다. 윗글.
그러나 엘렝슈타인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1976년 2월 개최된 제22차 전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함으로써 유로코뮤니즘식 전환을 단행했다. 소련의
인권침해에 대한 비판과 프랑스식 사회주의 노선이
강조되었으며, 프랑스의 핵무장 반대가 철회되었다. 그러나 채
일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 공산당 당수 조르쥬 마르세Georges
Marchais는 1977년 갑작스럽게 좌파연합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고 정통주의로 복귀했다. 이 모든 결정은 토론도 없이
위로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다룰 수 없는 문제이지만, 유로코뮤니즘적 시도는
갑작스러운 것도, 라틴 공산당들의 실천과는 무관한 완전히
새로운 모색도 아니다. 그 반대로 유로코뮤니즘의 역사는
유로코뮤니스트들도 강조했듯이,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로
이어지는 이른바 서구 마르크시즘과 혁명적 대중운동의 이론적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1930년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민주적 질서의
재건을 위한 국민연합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람시와
유로코뮤니즘에 대해서는 요나스 폰투손, 『그람시와
유로코뮤니즘. 계급지배와 사회주의로의 이행개념에 대한
비교연구』, 페리 앤더슨 외 (김현우 외 편역),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평의회 사상과 이행전략. 갈무리, 1995,
141-210 쪽을 참조.
그러나 라틴 공산당들이 현실사회주의 체제와 고전적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 결별을 선언한
것은 1960년대 말 이후 현저하게 가시화되기 시작한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질서와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위기와 새로운
계급투쟁의 전망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유로코뮤니즘의
출발점이 된 것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1960대말 이후 서구의
선진 산업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래 없는 장기호황이
끝남으로써 케인즈주의식 관리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
둘째, 1968년 혁명과 유럽 각국의 산업노동자들이 급진화하는 등
새로운 혁명적 운동세력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그런 가운데
탈산업화, 탈포드주의적 이행 등 선진자본주의 위기와 구조조정,
그리고 좌파의 재편과정 중에서 신좌파가 등장했다. 셋째,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의 독트린, 소련 내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의 강화, 1970년대 초 폴란드의
경제위기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급속하게 정당성을
상실해갔다.
여기서는 그 첫번째 출발점에 초점을 맞춰, 유로코뮤니트들이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급진적
전망을 찾았는지 살펴본다.
3. 1970년대 "일반위기"와 유로코뮤니즘적 전망
유로코뮤니스트들은 1970년대의 위기 분석으로부터 서유럽
국가들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형태로의 새로운 이행 가능성들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위기의 본질을 전후 30년간 지속되어온
정치적, 경제적 질서의 붕괴로 바라보았다. 서방세계 최대
공산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이끌었던 엔리코
베를링구에르Enrico Berlinguer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처한
새로운 유형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전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을 강타한 위기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 위기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일단 위기가 끝이 나면 모든
것이 다시 과거와 같게 되는 그런 막간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문제는 이것이 사회와 경제생활의 모든 측면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위기라는 데 있다. 지난
10여년간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들을 조직하고 발전시킨 그런
방식과 체계로는 더 이상 경제적 쇠퇴, 사회적 혼란, 무질서한
시민생활, 윤리의식의 저하, 문화와 지적인 삶의 정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손상 이외에는 다른
전망을 기대할 수 없다. …. 세계는 변화 중이고, 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제 3세계 국가들과 민중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 유럽 사회들이
지금까지 의존하고 있는 그런 낡은 체계와 모델을 고집한다면
유럽은 세계의 진보를 위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고, 모든
인류의 발전을 의미했던 오랜 성취의 역사에 의해 우리들에게
부여된 그러한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이다." Enrico
Berlinguer, La politica internationale. (Roma, 1976), 74 쪽.
V. Vacca, "The 'Eurocommunist' Perspective: the Contribution
of the Italian Communist Party - Democracy and Socialism in
the Italian Communist Tradition" In R. Kindersley (ed.), In
Search of Eurocommunism, London: Macmillan Press, 1981, 113
쪽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순환에 대한 케인즈주의식 통제에
기초한 경제확장 정책은 유럽의 성공적인 전후재건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상 유래 없는 자본주의 세계의 호황과
더불어 마침내 복지국가와 민주주의 정착을 가져왔다. 그러나
제1차 석유위기, 장기적인 불황, 브레톤우즈 체계가 사실상
붕괴하는 등, 급변하는 국제경제와 국제정치 관계에 있어서
케인즈주의적 메카니즘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
과정만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은 유로코뮤니스트만의 분석은
아니었다. 케인즈주의의 위기의 본질을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로 파악한 유로코뮤니스트들은 이를 계기로 다시 산업국가들
간의 실질적인 경제전쟁이 불붙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지난
30년 동안 국제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팽창기를 가능하게 했던
선진 산업국가들 간의 이해 절충의 기초가 위기에 처하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국제금융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선진
산업국가들은 요란스럽게 다시 케인즈주의적 정책들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고자 하고 있지만,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다른 사회계층들과의 저항과 충돌 때문에
케인즈주의 정책을 재출범시키는 것은 난관에 부딪힐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케인즈주의식 계급타협과 자본주의의 관리가
아니라,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다양한 정치세력과 사회계층 간의
광범위한 연대를 통한 구조적인 개혁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역설했다.
"현재적인 조건들 아래 일련의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파행과 실패들에 대한 비판이 심지어 비
프롤레타리아 계층들에서 조차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사회 질서 대한 바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보다
강력해지고 있고, 동시에 전면적이고 더욱 단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정당들이
좌경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몇몇 국가들에서는
공산당과의 합의에 걸림돌들이 제거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또한 기독교도 진영에서도 반자본주의적이며,
반제국주의적인 움직임들이 증가하고 있는 점 역시 커다란
관심을 끌만한 사안이다. 이러한 식으로 개별 국가에서 그리고
전 유럽적 차원에서 즉각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모색하고 시작하기 위해,
다양한 노동자층과 국민계층들 사이의 대화와 의견 일치를
진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Enrico
Berlinguer, La politica …. 113 쪽. V. Vacca, 위글, 114
쪽에서 재인용.
유로코뮤니스트들은 1968년 이후 급변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와
지배질서의 변화 속에서 서유럽 선진사회의 구조적 개혁의
전망을 찾았다. 엘렝슈타인이 표현했듯이, 이처럼 "서유럽의
공산당들, 미 국무부, 크레믈린, 그리고 몇몇 학자들의 머리
속에" 유로코뮤니즘이라는 "망령"이 찾아 들었다. J.
Elleinstein, " Eurocommunism", 66 쪽.
하지만 이 망령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듯이 다시 곧바로
소리없이 사라지고 만다.
4. 좌파의 재편과 계급투쟁, 그리고 유로코뮤니즘의 실패 4장의
내용은G. Eley, Geoff.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New York: Oxford Uni. Press,
2000, 408-417, 422-428 쪽과 D. Sasson, Donald.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The New Press, 1996, 534-644 쪽을 정리
요약한 것이다. 1970-80년대 서유럽의 좌파정치 전반에서
대해서는 위 글의 해당부분 이외에도 Anderson, Perry/
Camiller, P. (ed.). Mapping West European Left. London:
Verso, 1994을 참조.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적 타협"
1968년 전 유럽을 뒤흔든 학생소요와 1969년 이른바 "뜨거운
가을"의 대규모 노동자 파업사태로 이탈리아 정치질서는
갑작스럽게 요동쳤다. 베를링구에르의 이른바 "역사적 타협"은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 즉 한편으로는
새로운 정치적 급진화와 이에 대한 우익의 가중되는 위협에서
출발했다. 1969년 12월, 전 이탈리아를 뒤흔든 세 차례의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밀라노에서는 이로 인해 16명이 사망하고,
로마에서는 모두 두 차례에 걸쳐 18명이 부상당한 뒤,
무정부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에 대해 비밀정보기관과
연계된 신파시트주의자들이 잔인한 보복을 가했다. 시민권의
제한, 비상조치법, 심지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좌파에
대한 반격을 활용한다고 하는 이들의 "긴장조성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부 요인들과, 군부, 비밀정보조직, 경제계,
바티칸, 그리고 마피아와의 복잡한 연결들이 필요했는데, 그
중심에는 옛 파시스트 당원이었던 리치오 겔리Licio Gelli에
의해 결성된 제2선전대Propaganda Due (P-2)라고 하는
비밀결사조직이 있었다. 1974년 5월에는 브레스키아Brescia에서
열린 반파시즘 시위 중 폭탄이 터져 8명이 사망하였고, 8월에는
플로렌스-볼로냐행 기차에서 폭탄이 폭발하여 12명이 목숨을
잃는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는 신파시스트주의자들의
노상폭력이 급증했다. 1972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신 파시스트
사회운동당Neo-Fascist Movimento Sociale Italiano(MSI)이
8,7%를 획득함으로써 종래 가장 높은 득표율을 거두었다. 같은
시기, 붉은 여단 역시 제노아의 판사였던 마리오 소씨Mario
Sossi의 납치를 시작으로, 폭력적인 선전(사유재산에 대한 공격,
기업의 관리자들과 작업반장들에 대한 공격과 납치 등)에서
극적인 무장타격으로 전환했다. 소씨는 1974년 4월 35일 만에
석방되었다. 1974-1976년, 좌익 테러리즘은 경찰의 검거와
총격전으로 계속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우익의 위협으로 인한 긴장과 미묘한 균형 속에 그리스,
포르투갈,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군사독재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적인 체제 이행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극적으로
만든 것은 1973년 9월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이끌던 국민연합 정부와 수많은 좌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던 의회사회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어났던 군사
쿠데타였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 엔리코 베를링구에르Enrico
Berlinger는 이로부터 정치적 교훈을 이끌어냈다. 그는
톨리아티의 유산을 언급하면서 공화정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최대한 폭 넓은 민주적 합의를 주장했다. 칠레의 사태는 국가가
"둘로 갈라질 수 있다는 급박한 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왜냐하면 반민주세력은 국민적 운동이 주요한 성과를 거두게 될
때면 항상 폭력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제 3의 요소였던 가톨릭교도들을
결집시킴으로써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던 연립을
되살려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좌파에 대한 기민당의
개방은 우파로부터 공화국을 지켜주며, 사회가 양극화된
블록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고, 새로운 진보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베를링구에르가 주창한 "역사적 타협", 새로운 민주적
변화를 위한 이탈리아의 3대 대중적인 전통, 즉 공산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가톨릭주의의 결집이었다. 선거의 형세는
그에게 유리한 편이었다. 1972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27,2%를
획득했고, 사회당과 합한 지지율도 과반수에 훨씬 모자라는
36,8%에 불과했다. 1968년 총선에서 전체 좌파의 지지율은
반공주의적인 사민주의자들이 사회당에 합류했기 때문에 45,8%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 위에서 좌파를 총 결집할 때,
베를링구에르가 우려했던 사회적 양극화, 즉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사민주의자들로 구성된
안정적인 블록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민당이
신파시스트주의자들과 동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설사 그러한 블록이 짜여져 선거에서 과반수를
넘어선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핵심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던 기민당에 반대해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여전히
불가능할 수 있었다. 즉 신파시스트 정당의 성장, 우익
테러리즘, 우파의 "긴장조성 전략"이라는 당시의 현상을
고려한다면, 사회주의 블록은 칠레와 같은 규모의 사보타주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이 베를링구에르의 판단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결말을 방지하는 것이 "이탈리아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민당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자면, 1974년 이혼법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진보진영에 참패를 당함으로써 곤경에 처해 있던 기민당은 부패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으며, 드골주의식의 쿠데타를 위한
긴장조성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정치는 진퇴양난의 상태에 있었다. 좌파도 우파도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사회의 반대세력의 힘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강압적인 우익의 통치 역시 불가능했다. "공산당은
중간층을 배제한 채 통치하기에 힘이 모자라고, 기민당 역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는" 양측의 주요
정당들이 위태로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새롭게 주도권을 잡는 것이었다. 오토 바우어는 1920년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비엔나의 권력을 장악했으면서도
국가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을 때, 유사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상황은 좌파에게는 커다란
위험의 원천이자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그러한 균형은 1934년의 노동운동의 파멸과 가톨릭
파시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베를링구에르에게 있어서 올바른 전략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 대가는 그람시와 톨리아티 모두가 머리 속에 그렸던 이탈리아
사회의 근본적인 재조정이었다. 그리고 베를링구에르의 전략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1975년 6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공산당의 득표율은 1970년보다 7,6%가 많은 33,4%로 상승했고,
기민당의 득표율은 약간 하락한 35,3%를 기록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기존의 본거지였던 에밀리아 로마, 토스카나, 움브리아
지역 외에도 롬바르디아, 피에몽, 리구리아, 팔레르모,
바리지역의 주요도시들을 장악했다. 1년 후에 실시된 총선에서도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공산당을 겨냥한 미국의 1948년 개입을
떠올리게 했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공공연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득표율은 34,4%로 높아졌고, 전체 좌파를 모두
합친 득표율은 46,7%가 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파시즘의 유산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양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좌파들이
당한 패배는 이러한 최대강령주의적 범민주진영의 연합전략을
낳게 했기 때문이었다.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였던
베를링구에르와 카일료는 영웅적인 반파시즘투쟁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공산당을 다른 정치적 미래로 이끌고자 했다. 즉
영원한 야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탈피하고, 소련에 대한
충성으로 인한 불이익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그들의 전략은
이탈리아 우익의 긴장조성 전략이건 스페인 프랑코주의자들의
쿠데타이건 항상 반혁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반파시즘은
"국민적 단합의 상징"으로 재가동된 것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야당으로서 기민당 정부를 뒷받침하면서 공동
프로그램을 성사시키기 위한 협상을 통해 교착상태를 돌파했다.
공산당 좌파의 수장 격이었던 피에트로 잉그라오Pietro Ingrao는
최초의 공산당 출신 하원의장이 되었다. 이에 대해
베를링구에르는 경제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국가적
책임을 분담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구
정치엘리트들"이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으며,
그들은 "우리의 의사를 묻고" "노동자계급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단계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은 수권정당으로 자리잡을 것이며, "경제와 사회구조,
국가의 기능, 전 공공영역, 권력의 제 관계들, 생활방식과
국민의 습관들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망은 유로코뮤니즘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였다. 이를
통해 당이 단합되었고, 1976년 총선에서 당을 중심으로 진보적
역량이 결집되었다. 또한 유러코뮤니즘은 다른 나라 좌파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전략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역사적 타협은
구조적인 개혁이 아니라 단지 이탈리아 공산당의 도전을 무디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국민연대
정부가 구성되었을 당시, 베를링구에르가 가장 큰 희망을 걸었던
기민당 인사였던 알도 모로Aldo Moro가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됨으로써 공화국은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공산당은
강경노선을 취했다. 양보란 테러리즘을 고무할 뿐이고,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졌다는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모로는
살해당했지만 무장혁명주의도 실패로 끝이 났다. 그 후 폭력이
계속되었고경찰의 단속이 강화됨에 따라 테러리즘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짓밟힌 것은 정치였다. 공산당은 "법과
질서 수호 정당", 민주적 합법성의 보루, 헌법의 방패가 되었다.
그러나 톨리아티의 교훈과 유사하게 들렸던 이 모든 것들은
여전히 기민당의 기득권을 보장한 대가와 개인적 치부가 판치는
부패한 국가와 결부되었다. 테러리즘에 대한 반대는 공민권을
제한하고 공권력을 확대함으로써 시민적 자유의 수호자라는
공산당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또한 기민당과의 관계가
너무 확고해짐에 따라 공산당과 광범위한 좌파간의 관계가
손상을 입었다. 노동조합운동(CGIL)의 지도자였던 루치아노
라마Luciano Lama가 말했듯이 "테러리즘과의 전쟁에
전념함으로써 우리는 필요한 만큼 다른 것들을 명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역사적 타협을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과 붉은
비엔나 시절부터 익히 알고있던 사회주의자들의 오랜 딜레마를
또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NATO, 기민당, 가톨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전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이미
덤불에 뒤덮여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7-1978년 정치력의 강화와 사회개혁을 연계하고 투자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생산성 증대와 임금억제를 내용으로 하는
영국의 존 잭슨John Jackson식 사회협약을 지지했다.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른 임금연동제와 연계된 일괄적인 임금인상은 저임금
그룹에 유리한 것이었으며, 약속한 정치적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고임금 숙련직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것이었다.
긴축정책을 낭비와 불공정, 특권, 그리고 과도한 사적인 소비를
공격하기 위한 기회로서 도덕적으로 방어를 했던 베를링구에르는
이와 같은 정치적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경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보다 평등한
기초 위에서 사회개혁과 강력한 민주주의와 연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9년 경에는 이러한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통화가치의 하락율은 12.4%로 감소되었고, 노동조합은
임금연동제와, 수당 그리고 생산성과 관련하여 커다란 양보를
했다. 그러나 실업은 증가했고 노동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무기 없이 우리는 어떠한 전투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베를링구에르는 라마에서 말했다. 공산당의 정권참여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이를 위한 협상은 꼬여있었다. 기민당은
공산당의 시도들을 능숙하게 방해하면서 그들의 전통적인 반대를
무마시키고 동시에 책임은 떠넘겼다.
베를링구에르는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기민당 당수인 길리오 안드레오티Giulio Andreotti수상이 개혁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정권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안드레오티는 1979년 6월 회담을 재개하는 대신에 총선을
소집했다. 역사적 타협은 좌절되었다. 공산당은 150만표를
잃었고, 득표율은 30,4%로 추락했던 반면에 기민당의 득표율은
38.3%로 제자리를 유지했다. 공산당은 특히 전투적 노동자들과,
남부의 빈민계층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은 표를 잃었다.
베를링구에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긍정적인
재평가를 내렸던 역사적 타협은 이른바 "민주적 대안"으로
교체되었으며, 이는 사회당과의 협력을 재 모색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시계바늘은 다시 1972년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프랑스 공산당과 "좌파연합"
프랑스 공산당의 유로코뮤니즘적 경향은 1968년 이후 프랑스
정치지형의 좌경화 과정에서 등장했다. 프랑스의 좌파대표들, 즉
사회당의 프랑소아 미테랑Fransois Mtterrand , 공산당의
마르세, 좌파급진당의 로베르 파브르Robert Fabre는 1972년 7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코뮨 프로그램Programm Commun에 합의했다.
� '실질적인 임금 상승'에 의한 수요 확대와 이를 통한
경제성장.
� 사회적 보호의 확대, 특히, 의료보장의 확대와
대대적인 주택건설계획
� 공교육의 강화와 미취학 아동을 위한 보육시설 체계의
확충
� 여성에 대한 차별철폐
� 부당한 해고에 대한 법적인 보호의 강화와 정보
공개권의 확대와 산업민 주주의
� 전 금융부문, 광산, 군수산업, 항공우주산업,
의약품산업, 원자력 산업의 국유화
� 소득세와 법인세의 누진세율 확대
� 기존 대통령제의 전반적인 개혁 (대통령의
비상조치권의 폐지, 대통령 임 기의 제한), 의회의 권한 강화
프랑스 공산당은 이 "좌파연합의 헌장"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Sasson의 평가에 따르면, 코뮨 프로그램은 공산주의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전적인 사회주의 정당의
프로그램에 가까웠다. 고임금, 공공부문의 확대, 복지국가의
확장, 정치시스템의 민주화 등은 프랑스 쟈코뱅주의자들의
고전적인 공화주의 정책이었고, 공산당이 거론했던 국유화 대상
부문들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이미
국유화된 부문들이었다. 또한 이와 같은 국가주의적 코뮨
프로그램은 사회당의 창당과 더불어 당의 공식 이념이 된
자주관리와 불편한 공존관계를 유지했다. D. Sasson, One
Hundred Years �, 537 쪽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좌파가 절대 다수석을 획득하게 되는
좌파의 대도약의 시작이었던 좌파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공산당이 부상하는 것처럼 보였다(당원수의 증가와 당원의
구조가 변화함). 문서상으로는 공산당이 내건 정책들이 대부분
채택되었던 반면에 사회당은 정치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장래
미테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매체에 불과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사상이 없었다. 구
사회당(SFIO: 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지부)이 기회주의와 혁명적
수사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했다면, 새로운 사회당은 점점
더 지식인들과 노동조합 서클들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자주관리Autogestion를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했다. 그 모호함이 강점이었던 자주관리는 프랑스
비공산주의 좌파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19세기 반국가주의적
사회주의에 기원을 둔 자주관리는 1960년대 다시 등장하여,
유고슬라비아식의 산업민주주의와 분권적 경제를 지칭하게
되었다. 1968년 투쟁과정 중 소련의 중앙계획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비 공산주의 좌파의 프로그램으로 주목을 받았던
자주관리는 1970년 CFDT에 의해, 그리고 1975년에는 "자주관리에
관한 10대 테제"라는 명칭으로 프랑스 사회당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자주관리에 대해서는 D. Sasson, 위글, 539-40 쪽을
참조.
1974년 선거에서 지스까르 데스뎅은 가까스로 미테랑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같은 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좌파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1978년 총선에서 다시 좌파가 패배했지만,
사회당은 1930년대 이래, 처음으로 공산당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1970년대 인민전선은 1930년대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자들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1930년대와 달리 1970년대 인민전선은 공산당의
몰락의 시작을 의미했다.
1977년 6월 마르세는 참여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공동프로그램에서 탈퇴했다. 우파 사회주의자들이 결별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공산당 역시 주도권을 잃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었다. 공산당 내에서 유로코뮤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을 부추겼던 사회당은 여론조사에서
공산당을 앞지르고 있었다. 사회당 우파의 지지 속에
좌파급진당이 공산당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고, 마르세가
연합에서 탈퇴함으로써 공동협약은 파기되었다. 1978년 선거에서
공산당은 전통적인 지지층을 지키기 위해 분파주의로 복귀하면서
과거의 연합세력을 비난했다. 1차 투표에서 공산당은 20,6%를
획득했지만 사회당은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이보다 많은
22,6%를 획득했다. 2차 투표에서는 공산당을 지지했던 유권자 중
96%가 당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사회당에 표를 던졌다. 공산당을
찍은 사회당 투표자는 66%에 불과했다. 초반부터 좌파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참패한 것은 공산당이었다. 커다란 내부적 반란에
일어났지만, 비판자들은 전통적인 스탈린주의적 방식으로 침묵을
강요당했다. 1981년 치러진 다음 선거에서 공산당의 지지율은
25% 감소했고, 당원 중 1/3인이 다른 당에 투표했다.
유로코뮤니즘의 전주곡은 끝이 났고, 프랑스 공산주의는 결코
다시회복하지 못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공산당은
좌파연합을 통해 좌파 개혁정당으로서의 신뢰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회당과의 결별을 통해 사회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층을 증가시켜주었을 뿐이다. 미테랑과의 결별은 좌파의
승리를 기대했던 공산당원들 사이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몰락을 가져온 마르세의 결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쉽지 않다. 이에 대해 도날드 사순 Sasson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당시의 결정이 물론 유일한 선택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사실상 무기력해진 공산당은 변화하는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정말
진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산화를 선택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산당은 말과 달리 과거에 자주 노선을
변경했고, 항상 다른 세력들과의 연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내세울 수 있었다. 드골의 깃발아래 저항운동을 벌였던
것도 그렇고, 그 후에도 골수 반공주의자였던 구이 몰레를
지지했던 것도 그렇지 않은가?" D. Sasson, One Hundre Years
� , 541 쪽
스페인 공산당의 권력에 대한 도전
유로코뮤니즘은 수그러들었다. 1976년 절정기에 달했던
유로코뮤니즘은 그 이후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유로코뮤니즘을
통한 스페인 공산당의 집권전략도 실패로 끝났다. 프랑코 사후
일촉즉발의 상황을 조심스러운 행보로 무사히 통과한 스페인
공산당은 1977년 실시된 첫 번째 총선에서 9,3%를 획득했고,
1979년 선거에서는 겨우 10,7%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카리요의
유로코뮤니즘은 의회민주주의, 다당제도, 독립적인 노동조합,
완전한 시민적 문화적 자유, 소련으로부터의 완전한 독자성을
명백히 표방했다. 오랜 야당 기간 동안, 그는 1969년의
자유협정에서부터 시작해서, 1971년의 카탈로니아 독립의회운동,
1975-1977년의 민주적 이양에 관한 최종적인 회담들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폭 넓은 연합에 무게를 두었다. 공산당에
대한 민주적 신뢰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공산당은 의회주의를
고수하면서 대중적 압력을 동원했다. 힘든 프랑코 반대 투쟁을
감수하고, 야당의 지위를 받아들였던 공산당은 우익의 보복에
맞서서 연약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베를링구에르가 감지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는 스페인에서 더욱 절박했다. 실패로 끝난
1981년 2월의 반혁명을 통해 프랑코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도발하지 않기 위한 카일료의 조심스러운 행보들은 올바른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극도로 진중했던 카일료의 정책은 38년간 당의 반체제적
전투성을 지켜왔던 급진주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당이
합법화된 이후 그는 군주정을 인정하고, 입법의회의 선출을
보류했으며, 사법부와 공직의 연속성을 수용하고, 사회협약의
체결을 약속했다. 따라서 1977년 10월 몬클로아 협약Pacta de la
Moncloa과 복지제도의 개혁과 부유세의 도입에 대응한 임금억제
등을 내용으로 한 초당적 긴축프로그램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합의는 카일료의 전망과 맞아떨어지고 선거에서의 공산당의
패배를 상쇄시켜주었던 반면, 당의 지지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카일료의 온건정책으로 인해 "프랑코 독재에 대한
저항의 지주로서의 당의 정체성"이 흔들렸으며, 정권은
획득하지도 못하면서 당의 전투성이 포기되었다. 당원수는
1977년 일년 동안 201,757명에서 171,132명으로 감소했다. 독재
시절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부터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았던 사회당이 재 창당되었고, 공산당을
대신하게 되었다. 사회당이 부상하면서 공산당은 추락했다.
카일료가 내부적으로 엄격한 중앙주의를 견지하면서
비판자들에게 반복해서 스탈린식의 제재를 가함에 따라 공산당은
내부적 진통마저 겪게 되었다. 당의 사기도 추락했다.
민주주의의 조건하에서 유로코뮤니즘식의 스탈린 정당화 전략은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5. 맺는 말
유로코뮤니즘의 도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했던 유권자의 숫자는 1978-1988년 사이 300만 명이나
감소했고, 18-25세의 연령층에서 공산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는
단지 9%에 불과했다. 마지막까지 유로코뮤니즘 노선을 표방했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지층조차 골수 공산주의들로 축소되고
말았다. 1985년 30세 이하의 당원은 전체 당원 중 10%에
불과했고, 전체 당원 중 30% 이상이 60세 이상이었다.
유로코뮤니즘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이 안고 있던 근본적인 딜레마를 꼽을 수 있다. 개혁과
혁명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라틴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을
통해 수권정당을 추구했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정당,
이데올로기적 공동체임을 자임했다. 이와 같은 딜레마는
유로코뮤니즘의 패러독스와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로코뮤니스트들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새로운 혁명적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프로그램은
수정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이며, 온건한 정책들이었다.
유로코뮤니즘의 결과 역시 역설적이었다. 유로코뮤니즘의 실패는
결코 서유럽에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조직적으로 표방한 정당들을
주변화시켰다. 하지만 라틴 유럽에서 북서유럽과 같이 사회적
민주주의가 기지개를 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유로코뮤니즘
덕분이었다. 유로코뮤니즘의 지속적인 성과들에 대해서는 G.
Eley, Forging Democracy …, 415-6 쪽을 참조.
물론 전적으로 주관적인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유로코뮤니즘이
실패한 데는 라틴 공산당 지도부들의 오판과 혼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Sasson은 베를링구에르의 비관주의적
태도, 마르셰의 오락가락함, 까릴요의 과장된 행동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급정치 지형의 근본적인
변화일 것이다. 라틴 공산당들은 새로운 좌파연합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좌파의 파편화는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의 좌경화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여러
신좌파들의 분화는 계속되었다. 1970년대 자본주의 위기는
지배계급의 위기뿐만 아니라, 조직노동운동의 위기, 그리고
정치경제체제의 전반적인 조정으로 이어졌다. 탈산업화에 따른
노동자 계급구성의 구조적 변화, 탈포드주의적 이행, 유연한
축적체제의 등장 속에서 지배계급 중 가장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세력들은 결국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이어지는 전면적인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유로코뮤니즘은 마치 유령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났다가 소리없이
다시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1970년대 서유럽
공산당들의 도전에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에릭
홉스봄은 극단의 세기라는 책에서 20세기를 "단기의 세기"short
century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역사가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기 중의 하나로 기록될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하여, 1989/90년 동유럽의 혁명들과 소비에트의
붕괴로 끝을 맺었다. 러시아 혁명과 함께 탄생한 공산당들은
현실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 함께 사실상 사라졌다. 이렇게 한
시대를 마감하는 대 격변의 서막이었던 유로코뮤니즘에 대해
우리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사회주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 그 자체이다. 역사는 그렇게
쉽게 극복될 수 없는 것이 또 한번 입증되었다. 하지만,
유로뮤니즘은 이러한 자신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지 않았을까?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단지 20세기의 끝일 뿐이다. 19세기, 불과 반세기에
불과했던 자유주의 시대가 사회적 양극화, 혁명적 노동계급의
형성, 제국주의 전쟁, 세계혁명을 가져왔듯이,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미래 역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산티아고 까리요 (김유향 옮김), 유로코뮤니즘과 국가. 새길,
1992.
요나스 폰투손, 『그람시와 유로코뮤니즘』, 페리 앤더슨
외(김현우 외 편역),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평의회 사상과
이행전략. 갈무리, 1995.
Anderson, Perry/ Camiller, P. (ed.). Mapping West Europ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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