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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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의 지도력과 민주주의
 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3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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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부와 조합원 : 파업의 지도력과 민주주의

면접자들에게 파업기간 동안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싸움에 대한 확신이나 전망이 불투명함에서 오는 갈등인지, 가족들의 또 다른 회유가 갈등이었는지, 현장조직간 활동가간의 전술상의 이견에서 오는 갈등인지, 조합원들에 대한 못미더움에서 오는 갈등인지, 지도부의 의지에 대한 불확실함에서 오는 갈등인지를 물었다. 활동가들은 파업의 중요 국면에 대해 활동가로서의 판단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현장조직별, 공장별로 진행되는 토론 등을 통해 파업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또 그만큼 갈등의 요소들이 더 풍부하게 드러날 수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개인적인 고민이나 갈등보다는 당시 정세 속에서 나타난 집단적인 갈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면접자들의 대다수는 지도부와의 갈등을 가장 큰 갈등으로 꼽았으며, 당시 사수대나 대의원으로서 파업에 결합했던 활동가들은 특히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

지도부의 책임이다. 사수대를 총괄 지휘했던 사람이 부위원장, 지도부 지침이 비폭력. 사수대는 무급휴직자들 중심으로 격앙되어 있었죠. 지도부가 비폭력 지침을 내리고 회사가 야금야금… 결국 생산까지 가동해 보려고, 그런 회의도 하고. 이건 조합원들이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면서 지도부가 막았어요. 지도부가 투쟁이 확대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마지막 정리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업지도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는데, 소수라서… (면접자 ㅎ, 당시 사수대)
사실 7대 집행부에서 침탈에 대한 대책을 안 세워 놨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이 공장(꽃)도 가동하고, 사실 믿을 만한 동지들이 별로 없었어요. 낮에는 사수대로, 거의 하루에 20시간씩 돌아다녔던 적도 있고, 밤에 공장 타격투쟁도 하고, 생산시설 파괴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진짜 믿을 동지들만 해서. 사실 타격 투쟁할 때는 회사에 대한 망을 본 것이 아니라 조합에 대한 망을 보면서 했다. 어용은 아니더라도 만족할 만큼 못 싸웠었고, 그것에 대한 실망이 많았었지요. (면접자 ㄴ, 당시 사수대・대의원)
집행부에 대해서 그랬다. 이상한 기류로 흐르는 것들. 대중적으로는 결사항전 이런 쪽으로 이야기가 되고. 정확히 찍어내지는 못하겠는데요. 회사와 협상하면서부터 이면적으로 되고. 노무현 중재단 오기 전후 그 정도일 거예요. 흔들렸던 거지. 사실 그 전에 희망퇴직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면접자 ㄹ)
집행부에 대한 절망감이 자꾸 계속 들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공장 공구들을 싹 다 갔다 버렸거든요. 나중에 다 주웠더라. 기계에다가 소금물 다 붓고 그랬었거든요. 투쟁 중에도 절망감을 많이 느꼈어요. 지도부에 대한 절망감이 컸어요.(면접자 ㅁ)
문제는 투쟁이 지속되어 가면서 이 사람들의 요구는 무조건 정리해고 반대였고, 집행부에서는 시간이 가면서 현실적인 고민이 하나 둘 생겼던 것이다. 상시적으로 소통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면접자 g, 활동가)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는 투쟁 전술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목표를 둘러싼(합의안으로 표현되는) 지점이 주된 갈등의 양상이었다. 정리해고 명단 발표 이후 파업 기간 내내 대중들은 즉자적이고 즉각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도부는 ‘질서’와 ‘조직된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그러한 분노를 잠재우고자 했다. 또한 대중의 투쟁의지를 끊임없이 교섭이라는 제한된 틀 내로 가두고자 했다. 그 결과 투쟁동력과 교섭이 투쟁을 상승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제약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노동자의 힘, 결코 꺾이지 않은 미완의 투쟁, 1999.

이러한 지도부와 활동가, 현장조직을 포함한 지도력과 조합원 대중의 정서 사이의 갈등-오히려 갈등이 전면화 되지 못함으로 인해 내부의 골을 더 깊어졌지만-은 투쟁기간 내내 지속, 확장되었다.

연구원 :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활동가들 간 소통이 왜 막혀있었나요?
면접자 : 그때 이상하게 그렇게 막히더라고. 그것은 내가 느낀 것인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어떤 대의원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더라. 그러면서 믿지를 못하는 거야. 그러면서 보면 보이더라. 저거는 끝까지 갈 놈이다. 저놈은 못할 놈이다 그러다보니 함부로 이야기를 못하는 거야. 당시의 상황들은 굉장히 미묘하고 복잡했죠. (면접자 h, 활동가)
면접자 : 제가 알기론 위원장하고 뭐 독대도 하고 막 그랬는 거 같던데.
연구원 : 위원장이 사측하고?
면접자 : 네.
연구원 : 독대하는 거에 대해서 사람들이, 조합원이 안 좋아하나요?
면접자 : 네.
연구원 : 왜요?
면접자 : 불안해서. (면접자 j, 조합원)
파업지도부에서 대중과의 토론 이것이 핵심이다. 공권력에서 깨져야 하냐는 문제는 깨지면 성공이냐 아니냐의 이런 문제보다는 결국 마지막까지 투쟁을 하면서 대중과 함께 어떻게 했느냐가 관건이었다. (면접자 k, 활동가)
집행부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오픈시켜놓고 판단해도 사실은 약이 올라 있는 활동가들을 이해시키기도 힘들 텐데, 아마 정보자체를 다 오픈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공식적인 절차라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것은 합의 안하겠다는 이야기 이다. 그런 맥락에서 민주적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 과정까지 모든 게 잘못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면접자 l, 활동가)

98년 구조조정을 둘러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투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중의 투쟁의지(동력)에 지도부가 얹혀 있는 형국이었다. 이는 투쟁을 바라보는 상이한 시각차가 소통의 부재, 혹은 단절로 인식되게 만든다.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호.
대다수 면접자들의 평가에서도 파업과정에서 특히 마무리 교섭국면에서의 민주적 절차의 부재를 가장 크게 잘못한 지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미 정리해고가 법제화된 상황에서 벌어진 36일간의 정리해고를 전면 거부하는 그 자체가 이미 총자본과 총노동의 전선인 98년 현대자동차 파업에서조차 대중들의 투쟁은 철저히 교섭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조합원 동지들! 투쟁의 목적은 협상에 있다.” 1998년 8월 22일자 현자노조 중앙비대위속보 87호.

“집행부의 비폭력 평화노선을 적극 따르라. 조합원들이 위원장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면 투쟁을 포기하겠다.” 1998년 8월 12일 저녁 집회, 당시 현자노조 위원장 발언.


20세기 말 한국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개된 파업들은, 극단에 선 노동자들이 끝을 모르고 덤비는 투쟁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로만 분석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망을 가진다. 이제 파업은 핵심 컨셉과 치밀한 계획, 적절한 수위, 정세나 국면을 타고 잡는 일정이 필요한 하나의 기획이 되었다. 계획과 일정이 분명한 수단으로서 파업은 불시에 터져 나오는 돌출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한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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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하나의 공인된, 사회적 행위 중의 하나라면 늘 예측 불가능하고 즉자적인 ‘들고양이 파업’만이 그 전형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기획’이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는 점이다. 투쟁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기획보다는 노동자 대중의 운동 방식으로 파업의 기획이 마련되어야 한다. ‘통제’로 대체하려는 ‘지도’가 아니라 지도부의 지도력을 대중 스스로가 넘어서고 통제할 수 있도록 조합원들의 의지와 행동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면접자의 말대로 “민주적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전 과정까지 모든 게 잘못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오히려 파업의 전 과정에서 파업 지도부가 대중들을 통제와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파업기계’로 제한시킨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그 때문에 대중을 배제한 채 합의한 ‘종이’를 그야말로 한낱 ‘종이쪼가리’로 무력화시킬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자’로 대중이 진전해 나가지 못하였다. 이것이 평가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어수선했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 전에 짐작하고 있었죠. 막판에 오면서 노조 유인물도 이상하게 나오기 시작했고, 홍보물이나 TV를 보니까, 이미 그쪽에서는 타결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고, 집회에서도 김광식의 논조가 그런 식으로 가고 있고, 유인물도 그렇게 가고 있고, 그래서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음에 노무현이 내려와서 중재를 하면서 위원장의 의지가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당시에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마지막 그날, 이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는 믿음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집회도 집회처럼 안되고 아주 엉성했었다.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퍼져 있으면서 씨발 씨발…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위원장이 단상에 올라와서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최소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때는 머릿속에 별이 빤짝빤짝했다. 조합원들이 위원장 이야기 듣기 전에 삼삼오오 다 빠져나가고 있었던 상황이다. 가다가 돌아보면서 쳐다보는 조합원들. 내가 정문을 차단하고 막으면 저 사람들 투쟁대오로 이끌 수 있는가도 생각해보았는데, 자신이 없었다.(면접자 ㅅ)

합의의 3주체였던 정부와 현대자본과 노조 지도부는 역사적인 사진 한 컷을 남겼다. 그러나 조합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남지 못했다. 단지 정부와 자본에 의해 무력화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합의문과 마치 “군사 쿠데타이후의 상황을 방불케 하는 면접자 w, 조합원.
” 현장만이 놓여지게 되었다.


끝났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원직 복직 쟁취투쟁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정리해고 : 희생양 277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주요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점은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277명의 정리해고자 중 144명이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다. 식당 여성이 집단적으로 정리해고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의 차별적 정리해고에 대한 운동진영의 비판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 투쟁주체들 사이에서는 277명의 정리해고 수용과 지도부의 직권조인에 대한 분노가 ‘여성 노동자 집단 정리해고’ 그 자체의 문제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면접자들은 당시 잠정합의 이후 그 대상자의 대부분이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다는 점이 미안함, 안쓰러움과 동시에 불가피함, 일종의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정리해고 대상자에서 최종 제외되었음에 대한 안도와 함께 노동운동 진영 일부에서 제기된 정리해고 최소화론 정리해고의 ‘상징적’ 수용과 ‘상징적’ 관철이라는 노조 집행부 및 일부 활동가들과 사측 및 정부의 이해 일치는 이미 노동법 개정 검토시 노조측의 ‘유연화’ 수용 불가피론에 그 맹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물질적인 단기적 이득을 위해 ‘상징적’ 차원에서 양보하고 조직된 힘으로 막아내면서 조직적 동원력을 유지하고자 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민주노총 합법적 제도화를 통해 열릴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계산과 경험론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리해고의 ‘상징적’ 수용과 ‘경제적 실리’의 보장을 통한 ‘노조 조직 보존’이라는 결과는 대다수의 노조운동 활동가 및 노동운동계와 학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상층노조의 지원이 저조한 가운데 단위 대공장 노조만으로는 대정부 및 자본과의 전면적인 투쟁의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희생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얻어낸 성과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근거에서 그런 것 같다. (신병현, 여성 노동자의 집단적 정리해고와 ‘민주’노조 운동)
이 노조사수라는 명분과 더해져 현실적인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회고하고 있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경우 조합원 전체로부터 호응 받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죠. 그 이데올로기는 차 만드는 사람하고 밥 짓는 사람하고 임금이나 모든 조건이 똑같을 수 없는 것 아니냐가 회사 측의 논리였단 말입니다. (면접자 ㅍ, 활동가)
그때 어떤 집행부였어도 마찬가지 였을 거예요. 그렇게 안 했으면 다 죽었을 테니까. 어떤 집행부였어도 잘 한 거에요. 솔직히 내가 봤을 때는 그 정도면 잘 한 거예요. (면접자 v, 조합원)
그때 당시 솔직한 심정은 한마디로 말해서 해고를 피할 수 없으면 잘한 결정이다. 남자가 경제력을 짊어진 상황에서 여성들도 생계에서 역할부담을 하지만 그래도 남자가 경제력을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조합 쪽의 최선의 결정이지 않았나.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면접자 y, 조합원)
실제로 어떤 노동조합이던지 희생양은 있다고 본다. 저 아줌마들 저리 열심히 했는데 살릴 수 없었느냐? 나름대로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식당아줌마가 몇 천 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노동운동이 잘못되는 방향을 그때부터 배우지 않았나. (면접자 ㅎ, 활동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의 유연화를 증대시켰지만, 유연화는 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외환위기 이전부터 진행된 외주화, 사내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은 98년 투쟁당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는 데 기본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고, 주변부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자본의 유연화의 공세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겨누어지는 상황 하에서 더욱 확대・심화되어 진행된 것이다.

그 한 달을 넘게 천막농성하면서 이리저리 식당이 타겟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시간이 지나면 서울에 간 사람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식당아줌마가 그 안에 정리해고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공공연한 비밀로까지 되었었어요. 그래서 아줌마들이 여기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 전경이 들어오니 불을 지르니 오만(가지) 이야기 돌 때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이들도 많은데 아줌마들이 많은 생각을 했지요. 혹시 내 새끼 같은 저기 사람들 다치면 어떻게 하나. 파업도 끝나야 집에 가서 살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할 수도 있고요. 억울해 미치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노동조합이 식당 운영하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리석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싸움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노조에서 마지막 방법이다 하니까 우리도 그것을 또… (면접자 q, 당시 식당 여성 조합원)
98년 투쟁 이야기하면 너무 속상해서요. 98년 투쟁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는 거지만. 어쨌든 98년 당시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막 나라가 어렵고, 96년부터 그랬으니까 또 회사가 정말 어렵구나. 그래서 정리해고를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어쨌든 노동조합 지침만 믿고 끝까지 싸웠는데 결국은 해고가 되더라고요. (면접자 s, 당시 식당 여성 조합원)
당시 사실은 위원장이 내려와서 3가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했어요. ‘하청식당으로 승계해주고, 해고자 재활급여에서 급여보장 해주고, 임금보장, 정년퇴직이 없도록 한다.’ 그러면서 정리해고를 우리도 사실 수용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도…. (면접자 q)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둘러싼 공장 내부의 여론은 여성 조합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정리해고를 수용할 수밖에 없을 만큼의 집단적인 압력이었다. 그것은 은폐된 협박에 가까웠다. ‘밥 짓는 사람’과 ‘차 만드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간접 노동과 직접 노동을 위계화 한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밥 짓는 여성’과 ‘차 만드는 남성’의 성차별을 은폐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시키는 논리였던 ‘대중적 정서’는 면접자 스스로가 말했듯이 바로 현대 자본이 끊임없이 유포했던 논리였다. 그 속에서 활동가들은 이러한 정서를 노동자 운동이 극복해야 할,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 ‘전세계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성차별적 성격을 직시하지 않는 ‘민주’ 노조운동계의 정치적 성격 때문이다.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차원에서 자본운동의 ‘무성성’(gender blindness)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사회구성체의 구체적인 자본운동에 주목하게 되면 그것은 결코 무성적이지 않다. 신국제분업의 자본축적 전략이 전세계에 걸쳐서 주변적 인력으로서 여성 노동력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지배는 신국제분업의 구성적 요소이다.‘ -신병현, 앞의 글
이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노동 내부의 분절화로 이해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돌파해야 할 핵심지점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활동가들은 이런 자본의 논리를 조합원 대중의 여론으로 이해하고 편승하였다.
구조조정 저지, 정리해고 반대의 슬로건 하에서는 단일한 투쟁주체로 보여졌던 식당 여성 조합원들이 핵심과 주변부를 가르는 남성과 여성의 갈림길에서는 더 이상 동일한 노동자가 아니게 되었다.

연구원 : 왜 하필 여성 노동자가 집단적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면접자 : 가장 약한 고리였겠지요. 그리고 늘 그… 직접 부서 아닌 것 있잖아요. 식당은 간접 부서라고 생각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곳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도 직접 생산 부서가 아니라 간접 부서이니까 외주 하청화 한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했었거든요. 그래서 자기네들 경쟁력을 위해서다, 다른 식당 보다 임금이 너무 높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쪽으로 만들고 있었고, 시점이 되니까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여자여서 잘라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면접자 s)

당시 정부와 자본이 ‘정리해고 최소화=277명’이라는 숫자만 제시하고 ‘그 277명 대상자는 조합원들이 결정한다’라는 안에 노조가 합의했다고 상상해보자. 예측 가능한 결론은 두 가지로 모아질 수 있다. 하나는 애초에 그 합의안 자체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결정하지 못해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상자를 선정하는 기준을 정하고 그에 따라 277명의 명단을 선정하게 되는 경우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통해 별다른 논란 없이 ‘우리는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애초의 방침과 결의를 재확인하고 투쟁의 결의를 다시 확인하는 경우를 포함한 다양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투쟁주체들은 엄청난 혼란과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다. 자, 그 속에서 어떠한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겠는가? 밖에서는 공권력이 합의안 부결 이후 침탈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중재라는 명분으로 서울에서 급파된 ‘노무현・이기호 협박단’ 하수봉, ‘누가 밀실협상, 직권조인을 아름다운 투쟁이라 하는가?’ 1998.12.
이 지도부를 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에게 던져진 갑작스런 ‘제한된 선택권’은 아마도 유혹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이 과연 자본에 의해 구획된 ‘핵심과 주변’ 노동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노동자로 인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까? 모든 발언들과 입장들 사이에서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릴 수 있었을까? 조합원들은 그 자신이 277명의 대상자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상호 불신과 경쟁, 모종의 담합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을 만큼 성숙되어 있었나?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결과이지만, 거꾸로 결과란 지나온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아무도 최악의 결정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이나 장담하지 못한다.

당시 집행간부도 그런 이야기했고 회사 간부도 계속 삐삐로 연락이 오고, ‘나가야 한다’ 심지어 활동가들도 찾아와서 ‘어떻게 할 거냐, 몇 명이나 데리고 나갈래. 지금 안 나가면 나중에는 일자리조차 없다’고 했어요. 지금 (나가면) 고소고발 다 취하해 주겠다. 활동가도 그랬고요. 우리가 최종적으로 정리해고를 받아들이자고 했던 것은 위원장이 당시에 그랬거든요. 관을 짜놓고 탑까지 올라갔잖아요. 위원장이 어쩔 수 없다. 고용승계라는 조건이 붙은 거에요. 여성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한 것이 우리는 고용승계 되니까 남자들은 짜르지 마라. 노동조합이 정말 어쩔 수 없다면 133명 남자들은 짜르지 마라. 그렇게 말했는데 공허한 메아리였고, 아무 것도 되지 않았지요. 그리고 위원장이 이야기했던 합의 조건이 부수적으로 다 따라왔었어요. 그렇게 동의하도록 조건을 만들어 낸 거죠. 더 힘이 약화된 것이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는데 대부분 고등학교, 입시생 자녀가 많아서 이것 때문에 다 흔들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판단하기 보다는 주부라서 그렇게 하게 만든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이요. (애초 위원장이 우리에게 약속했던) 그 조건을 다 받아왔다면 우리 투쟁이 만들어지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그 조건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당시 지도부가 지켜주지 않았던 약속들이 전화위복이 됐다. (면접자 s)
한 두 사람 제외하고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젊은 사람들이 정리해고가 되지 않도록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위원장이 ‘안을 내놔라’라고 해서 우리가 요구안을 던졌는데 그것을 들고 들어가자마자 정리를 하고 나왔는데 우리의 요구안은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일부 한두 개, 조합원으로 인정해주는 것과 노조 식당 운영하는 것으로 바로 합의를 하고 나왔어요. 이미 다 정리된 상황에서 구색 맞추기 한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어요. 합의하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합의를 해줘도 된다는 식으로 상황이 묘하게 된 것도 같고, 그 부분에 들어가면 막막해져요. 그 상황을 같이 겪지 않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한 쪽 시각으로 정리해버릴 것 같아서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않아요. (면접자 q)

당시 식당 여성 조합원이었던 면접자는 마무리 교섭국면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난감해했다. 드러나는 현상을 놓고 보면 노조 위원장은 주체였던 식당 여성 조합원에게 분명 먼저 의견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요구안을 스스로 제출하라고 이야기했고, 그 주체들 역시 정리해고가 불가피 하다면 어떤 요구안을 제출할 것인지 토론했다. 그렇다면 왜 여성 조합원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데 난감해하고, 또 그 당시 결정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의도에 말려버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시 끊임없이 나돌고 있었던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정리해고설이 여성 노동자들을 포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수평적 지위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식당 여성 조합원에게만’ 던져진 선택과 결정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정리해고의 핵심 대상이 식당 여성 조합원임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여성 조합원 스스로에게 결정을 하게 한 셈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277명이었을까? 144명의 식당 여성 조합원들과 133명의 대다수가 활동가들로 채워진 남성 조합원들은 어떻게 선별되어진 것일까?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당시 식당 여성 조합원은 277명이라는 숫자에 묘한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격적인 투쟁 이전에 (식당 여성 조합원이) 한 500명 되었을 것인데, 이리저리 희망퇴직으로 나가고 남아있는 277명이 천막농성을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회사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지금 만약에 희망퇴직을 하면 외주업체에서라도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못한다’고 회유와 협박을 했었어요. 심한 경우에는 활동하는 여성 조합원에게는 사표를 쓰고 나와서 식당을 직접 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도 했었죠. 한명이라도 해고를 시키려고 노력을 했었지요.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나머지 144명은 노조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었지요. (면접자 q)
그때가 애들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는데 오늘, 내일이다는 이야기가 계속 있으면서 277명 정리해고 하겠다고 결정한 것 같고, 그 인원이 식당 아줌마가 천막농성하러 들어왔던 277명하고 맞아떨어진 것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정확하게 던지지는 않는데 “277명이다”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고 아줌마 남은 인원이 144명이니까. 차라리 144명이 해고되던지 할 수 있는데 277명이라는 것이 지금도 미지수이고 수수께끼예요. 지나고 나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안 풀리는 것은 왜 277명이었을까. 처음에 천막에 들어온 277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요. (면접자 s)


직영에서 하청으로: 더 차별적인 대우, 더 강화된 노동강도

98년 정리해고 되고나서 하청이 됐고, 그 속에 있어보니까 직영에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비참하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하청이 되고 나니까 비참한 거예요. ‘씨발년들아 빨리 밥줘’이래 쌓고. 그런 것이 너무 비참하더라고요. 직영으로 있다가 하청으로 되니까 조합원들에게 인격적으로 무시되고. 직영으로 있을 때도 식당이라고 하면 조합원들이 무시를 많이 해요. 아줌마들이 맨 놀면서 돈만 많이 받아간다고 했었으니까. 회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조합원들에게도 일상화 되었거든요. 그래도 98년 이전 하청으로 승계되기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거든요. 98년도 해고된 이후에 식권 수에 따라서 임금이 10% 마이너스 플러스 되니까 식권을 우선 받으려고 하면, ‘씨발년아 빨리 밥이나 줘’하는 이야기도 듣고요. (면접자 q)
당시에는 조식도 했어요. 하루에 네 번을 밥을 하는 거예요. 토, 일요일도 없고 명절도 없어요. 그런데 아줌마들 돈 많이 받아간다고 하거든요.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원래 현장에 있던 여성들하고도 임금차이가 많이 나더라고요. 그 만큼 식당이 어렵고 힘들어요. 옛날에는 김치, 고추장, 된장, 김장, 고춧가루도 직접 갈아서 했어요. 그만큼 힘들었는데 노동강도 하면 진짜로 끔찍해요. (면접자 s)
사실 지금 식당 노동자 산재승인 들어가면 다 떨어지거든요. 그만큼 일이 힘들어졌어요. 98년 이후 99년 2000년 투쟁하면서 현장으로 갔던 38명도 다 골병이 들었어요. 이 분들이요. 너무 노동강도가 높은 식당에서 일하다보니까요. 현장보다 배나 높은 게 식당이거든요. 거기서 이미 몸이 망가져서 현장에 들어간 거죠. (면접자 q)
98년 7월말부로 해고되고, 회사가 호황 오면서 야 이거 정말 잘못됐구나고 생각했다. 해고 이후 임금은 50%로 떨어졌는데, 우리는 기금을 가지고 월급을 만들어갔어요. 기업운영기금이라는 것으로 만들었어요. 노동강도는 200%나 높아졌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해고 이후에는 1식 3찬에 복수메뉴 들어가고, 후식 들어가고, 98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밖에 안되었거든요. 그런데 98년 이후 일주일에 한번 특식 들어가고. 그렇게 하다보면 식판이 많아지잖아요. 식판이 무겁고, 가지 수도 많아지고, 뚝배기도 무겁고 노동강도가 높아지면서, 말이 정년퇴직도 없다고 했는데 1년도 안가서 다 나갔을 거예요, 그 상태로 있었으면요. 그러면서 99년도 투쟁을 만들어가는 동기가 되요. (면접자 q)

‘놀면서 돈 받아 가는 것’과 ‘끔찍한 노동강도’ 사이의 골은 노동자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와 자본가들의 ‘생산력 향상’의 거리감만큼 멀어 보인다. 성별 분업 구조 속 성차별과 위계화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 내부의 분절화・위계화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더욱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관철된다. 이러한 전체 노동자들 내 연쇄차별은 불평등의 악순환을 확대・심화시킨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사이의 내부 차별은 노동자 스스로 불안정노동층을 재생산하도록 만들며, 불안정노동층이 확대되면서 노동시장 내부의 경쟁이 격화되어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직영에서 하청으로의 신분 변화는 극심한 노동강도의 강화와 인격적인 무시로 드러났다. 후식제공, 메뉴의 다양화는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엄청나게 강화시켰다. 그리고 각 공장별로 외주화된 식당들은 식권 수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식당 노동자들의 노동강도 강화로 귀결되었다. 파업 직후 생산현장의 노동강도 역시 극대화되었다. 사측의 현장통제 관리전략인 기초질서 지키기 차원에서 진행되는 출퇴근 시간 지키기, 점심시간 지키기는 노동자들을 더욱 몰아세웠다. 이 속에서 더 빨리 밥 먹고 더 많이 쉬기 위한 조합원들의 식사시간 확보 경쟁은 이전보다 더 격해졌을 것이다. ‘씨발년들아 빨이 밥이나 줘’라는 말 속에서 함께 투쟁했던 동지적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얇은 층으로 형성되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다시금 투쟁을 벌이기 위해 이번에는 그녀들 스스로가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이어진다.(계속)

2006-09-03 13: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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