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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평가

현장에서 미래를  제24호
김용현


김영삼정부의 대북정책 평가


김 용 현 / 한성대 강사․정치학







들어가는 말


구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사회주의체제가 개혁개방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20세기를 규정지어 왔던 세계적 냉전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이 같은 탈냉전 현상은 동북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쳐, 동북아 냉전체제를 기반으로 지탱해 왔던 한반도 분단체제도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할 것은 탈냉전 속도가 세계적 수준과 한반도적 수준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빠른 변화에 비해 한반도에서의 탈냉전 속도는 너무 더디게, 때론 역전된 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에서는 북한핵 문제, ‘북한잠수함 침투사건’ 등을 계기로 역전 조짐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후 진행되고 있는 ‘4자 회담’ 협의과정에서 보여지듯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 역시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결국 이런 탈냉전의 속도 차이가 ‘통일로 가는 길’을 어렵게 하는 심각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적인 탈냉전 속에, 남북관계 경색이라는 긴장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반년 밖에 남지 않았다.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겠다. 김영삼 정부는 탈냉전 과정에서 어떤 대북정책을 펼쳤기에 남북관계의 경색을 풀지 못하고 있는가? 최근 최대의 현안으로 떠오른 ‘4자 회담’ 국면에서 김영삼 정부는 어떤 정책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이 글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래 현재까지의 대북정책을 간략하게 점검하고자 한다.



강경기조의 대북정책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기인 1990년대는 국제적으로 탈냉전이 무르익어 가는 시기이자, 민족 내부적으로 분단체제를 해소하려는 겨레의 열망이 고양되고 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이전 정권들에 비해 통일환경의 호조건 속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는 남북한 사이에 초보적인 신뢰조차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통일 철학의 부재, 미국의 정책을 간파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한미공조만을 내세운 비주체적인 태도, 조변석개와 같은 잦은 정책 변화, 국내정치에 대북정책을 종속시키는 근시안적인 사고 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

정부 대북정책의 혼란은 무엇보다도 탈냉전 시기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과 민족문제에 대한 철학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냉전질서에서 벗어나 신질서를 수립하는 세계적 변화 국면에서 남한 정부는 민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김영삼정부는 탈냉전 상황 속에서 민족이익의 실현이라는 관점이 매우 불철저하였다. 때문에 북한의 핵문제가 대두될 시점에서는 한미공조를 내세우며 미국의 대북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다가, 미국의 전략이 연착륙(soft landing)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골치거리는 북한이 아니라 한국정부’라는 외부세계의 지적을 받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2)

여기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각각 대결보다는 대화를 추구하면서 상호조응했을 때 한반도문제는 통일지향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확인해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남북관계를 살펴보면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남북한이 1991년 11월 역사적인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한 직후 미국이 북한의 핵능력에 의혹을 품으면서 북미관계는 전쟁전야를 연출하였다. 남북관계가 대결보다 대화를 추구한 반면, 북미관계가 대화보다 대결을 추구한 결과였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상호조응하지 못함으로써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이라는 획기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발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한과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능력에 대한 줄다리기를 계속하였다.3) 1992년 5월부터 93년 2월까지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6차례의 핵사찰을 받았으나 미국의 압력은 계속되었다. 북한은 1993년 3월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극약처방을 통하여 미국과 대화창구를 만들었지만 북한과 미국 사이에 힘겨루기는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1994년에 접어들면서 전쟁 가능성이 공공연하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은 중국과 일본이 동의하지 않는 문제이고, 전쟁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익과 합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미국은 1994년 6월 초 조성된 전쟁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카터 전 대통령을 북한에 파견하였고, 그와 김일성의 협상으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결국 남북한 간 정상회담과 북미 간 핵회담이 추진되면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모두 대결보다 대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상호조응하였던 것이다.

1994년 7월 말로 예정되었던 남북정상회담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한 연기되었지만 북한과 미국은 그해 10월 제네바 북미핵합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탈냉전의 지각변동과정에서 북한핵 문제로 제기될 수 있었던 한반도에서 군사대결의 가능성이 완화되었고, 북미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이후 남북관계는 악화되기만 하였다. 남한에서 일어난 조문 파동이 계기가 되어 북미관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이와 조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 북미 제네바 핵합의 이후 미국은 그 동안의 대북전략인 ‘봉쇄전략’을 ‘포용전략’으로 변화시켰다. 북한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북한 포용전략은 단기적으로 한반도의 탈냉전과 긴장 완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경제발전과 체제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북한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체제사수를 위해 사상무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북한과의 대립은 장기적으로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서 또 남북관계의 경색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은 김영삼 정부의 강경 대북전략이다. 남북 당국자 사이의 대화가 발전해야만 주변관계나 남북 사이의 평화와 신뢰문제, 통일방안 문제 등 통일을 위한 문제들이 논의될 수 있다. 조문 파동 이후 북한이 남한 당국을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통일전략은 미국과 북한의 전략을 파헤치면서 정교하게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1994년까지는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해 7월 남북정상회담 무산과 1995년 북경 쌀회담 무산, 그리고 지난해 ‘북한잠수함 침투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4)

특히 심각한 문제는 김영삼 정부가 남북대화를 북한과 미국의 장기적인 힘겨루기 상황에서 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돌파구로 삼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정치에 종속시킨 점이다. 정부가 미국의 대북핵정책에는 한미공조를 내세워 추종하고, 제네바 핵합의 이후 진행되는 북미대화에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도 국내정치에 대북정책을 종속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틀 전인 1995년 6월 25일,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한 사실을 들 수 있는데, 당시 쌀지원은 선거국면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정부의 ‘한건주의’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결국은 광범위한 보수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효과를 거두지도 못했다.5)


최근 남북관계의 쟁점 : 4자 회담, 대북식량지원 문제


올해 들어 4자 회담 개최문제는 북한이 식량문제 해결 방안으로 이 회담을 활용하고자 하여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 그동안 회담 개최에 부정적이었던 북한은 올해 1월 중간단계를 모두 생략한 채 식량 50만 톤을 제공하면 4자 회담에 응하겠다는 제안을 미국에 한 바 있다. 또 황장엽비서 망명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3월 초 뉴욕 3자 설명회에 참석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과 남한 역시 북한을 회담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여전히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한과 미국은 올해 6월 18일 뉴욕에서 실무회담을 갖고 8월 중 남북한,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예비회담을 갖기로 합의하는 중대한 진전을 이끌어냈다. 3자 준고위급 회담, 4자 회담 예비회담, 4자 회담이라는 일련의 단계적인 회담이 가시화된 것이다. 곧이어 지난 4월 3자 뉴욕설명회 후속회의가 결렬된 이래 2개월여 만인 6월 30일 3자 준고위급 회담에서 4자 회담 예비회담이 확정되었다.6)

이 합의과정에서 가장 쟁점이 된 것은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문제였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예비회담 개최 이전에 한미 양국이 대북 추가식량지원 규모를 확정해 줄 것을 거듭 요구했으나 한미 양국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정부가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은 북한의 4자 회담 수락 이전에 대규모의 대북 쌀지원을 할 수 없다는, 즉 4자 회담 문제와 대북 쌀지원 문제의 연계 입장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4자 회담 성사를 위해 대북 식량지원을 그 유인책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측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미국측은 인도적인 차원의 대북 식량지원문제를 정치적인 4자 회담 문제와 분리, 유엔기구나 민간기구를 통해 별도의 대북 식량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민간 차원이나 국제기구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고, 4자 회담과 사실상 연계되어 있는 정부 차원에서의 대규모 식량지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심각한 식량위기로 인해 대량의 식량지원이 필요한 북한에 대해 향후 어떤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식량지원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4자 회담 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자 회담에서 다룰 의제들은 현 정전체제를 새로운 평화체제로 대체하는 문제와 군사부문을 포함한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 문제, 남북경협 문제 등 남북한간의 모든 현안들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평화체제로의 대체 문제는 4자 회담 제안 배경과도 직접 연결돼 있는 핵심 사안이기도 하다. 현안인 북한의 식량문제 또한 의제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포괄적이고 다양한 의제들을 4자 회담이라는 하나의 틀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4자 회담 개최는 시작에 불과하고, 장기간의 시간과 우여곡절이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남북한간 돌발적 상황의 출현 가능성과 북한 식량문제 해결방안을 둘러싼 논란이다.

지난 7월 16일 휴전선에서 발생한 총격사건과 같은 돌발적 사건이 또 발생한다면, 남북한 어느 한쪽의 회담 중단 명분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식량난에 따른 통제이완 해소와 김정일 체제 구축이라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고, 남한은 오는 12월 대선을 치러야 한다. 정전체제의 조정기구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이런 유혹은 더욱 강렬해 질 수 있다.

벌써 북한 외교부는 총격사건 발생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사건의 책임이 북한에 있다고 발표한 미국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4자 회담과 관련한 미국의 진의를 의심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남한 역시 이 사건의 돌발성을 확대해석하여 안보심리를 자극한 바 있다. 반면 미국은 사건의 돌발성에 주목하며, 총격사건이 4자 회담의 진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4자 회담이 사건의 재발 방지 차원에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7)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 일행의 방북도 4자 회담의 중요성을 북한에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북 식량지원을 둘러싼 논란도 4자 회담 개최가 가시권에 들어옴으로써 보다 심화될 전망이다. 물론 회담 개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남한의 ‘선회담, 후지원’과 북한의 ‘선지원, 후회담’ 입장이 일부 정리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자 회담 진행과정에서 남북한이 또다른 전제조건을 단다면, 회담 전망은 밝지 않을 것이다. 벌써 한국정부는 4자 회담 본회담에서 정부 차원의 대규모 식량지원 문제를 북한이 휴전선 인근에 전진 배치한 방사포와 장거리포 및 전투기의 후방배치 문제와 북한의 화학무기금지협약(CWC) 가입문제 등과 연계시킬 방침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미국은 예비회담 개최 공식 발표 직후 대북 식량 추가원조를 준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남북한 간 돌발적 사건의 출현과 대북 식량지원을 둘러싼 논란 등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디딤돌이 될 4자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 특히 남북한의 최근 언급에서 보듯 돌발적 사건에 대한 침소봉대와 대북 식량지원 문제에 대한 전제조건들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4자 회담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맺음말


이상 살펴본 것처럼 탈냉전 등 외적인 통일환경이 급격히 개선되는 가운데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은 강경기조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김영삼 정부는 실망스런 대북 강경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을까? 먼저 단기적인 흡수통일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동북아 국제정치의 탈냉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한반도 분단구조 역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 정부는 장기적이고 일관성 있는 통일방안과 대북정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매 사건마다 정부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북한체제의 붕괴 가능성과 단기적인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광범위한 보수 강경론자들의 정책결정이었다.

다음으로 대북정책에 관한 국내 정치적․정략적인 이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발생한 대부분의 사건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북한의 ‘남한 배제, 북미관계 개선’ 전략에 따른 대남 강경자세 역시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 결정에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북미관계 개선이 진전되는 가운데 대북 강경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남한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와 아울러, 북한사회의 내적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과거 ‘남한’과 ‘미제’가 ‘주적’인 상태에서 북미관계 개선에 따라 남한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지금, 대남 강경정책을 통한 ‘인민의 단결’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대남 강경정책이 남한의 대북 강경정책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북한의 남한 배제전략에 대응하여, 대북 강경정책을 지속할 것인가를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탈냉전 상황의 현실을 볼 때 북한에 대한 강경정책이 비현실적․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대북 온건정책으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한반도 주변정세의 현실이다. 즉 미일의 북한 연착륙정책 기조가 클린턴 정부의 재집권에 따라 장기간 지속될 전망이며, 중국 역시 북한의 고립을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북 강경정책의 결과가 초래할 재앙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북 강경정책이 전략적으로 사용되어 설사 급속한 흡수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이 초래할 부작용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대북 강경정책은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한/노/정/연


1) 물론 통일은 남한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북한의 노력도 중요하다. 하지만 북한이 최악의 조치를 취하는 것까지 상정하고, 신뢰구축을 바탕으로 남북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분단시대 남한의 통일정책일 것이다.


2) <조선일보> 1996.11.18. ‘북한잠수함 침투사건’ 직후 미국언론들은 한결같이 남한의 대북 강경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미국의 대북 연착륙(soft landing)정책 지속을 주장했다.


3) 자세한 내용은 강정구,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대응의 실체」, ꡔ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ꡕ, 역사비평사, 1996, 313~353쪽과 이삼성, ꡔ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교ꡕ, 한길사, 1994 참조.


4) 김영삼 대통령의 좌충우돌식 대북관련 발언은 김창수, ꡔ통일만들기, 평화만들기ꡕ, 대동, 1996, 247~250쪽.


5) 정해구․김용현, 「대북 쌀지원 문제와 남북관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ꡔ계간 동향과 전망ꡕ, 1996년 여름호, 한울 참조.


6) 송영식 외무부 제1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교부 부부장, 찰스 카트먼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대리 등이 3자 준고위급회담에서 밝힌 공동 언론발표문의 예비회담 의제는 “가장 빠른 본회담 개최시기, 장소 및 의제를 포함한 4자 회담 본회담에 관한 절차문제들을 협의․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한겨레신문> 1997.7.1일자.


7) <한겨레신문> 1997.6.18.


1997-08-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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