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와 통일운동
1945년 ‘해방공간’의 현재적 의미
이 일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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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반도 정책
이 희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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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평가
김 용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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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와 노동운동
김 세 균
매년 8월이면 통일과 관련된 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다.
특히 올해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일찌감치 전개되면서 곧 통일이
될 것같은 분위기에서부터 준비없는 통일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없지 않다. 연구소에서는 그동안
통일문제를 체계적으로 접근해 보지 못했었다. 이번 특집도 아직
논의의 초보적인 문제제기를 던지는 수준이지만 통일논의를
둘러싼 현안을 지속적으로 접근한다는 취지하에 8월호 특집을
ꡔ남북관계와 통일운동ꡕ으로 잡았다.
특집 1 「1945년 ‘해방공간’의 현재적
의미」에서는 주체적인 힘으로 획득하지 못한 8․15
광복, 찬탁과 반탁으로 좌우대립의 골이 깊어지던 해방 후 3년의
과정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전개했던 자주관리운동과
자생적인 권력형태를 살펴봄으로써 통일논의가 남북간
노동자들의 동일한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추구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집 2 「중국의 한반도 정책」에서 필자는 한반도
문제가 국제화되면서 각국은 결코 한반도 통일을 자국의 이익에
우선하여 바라보지 않으며, 이 점은 강국화를 추구하고 있는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 특히 중국이 노동자 농민의
희생에 근거한 발전전략을 추구하는 한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 민중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특집 3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평가」에서
필자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이후 탈냉전의 분위기가 급속히
전개되고 있지만 한반도는 속도가 늦거나 오히려 역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 원인 중의 하나로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정세의 불철저한 이해와 민족문제에
대한 철학부재로 단기적인 흡수통일과 북한 붕괴론, 대북정책을
국내 정치상황에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인식이 중심이 되어 대북
강경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점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전면
수정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집 4 「통일문제와 노동운동」에서 필자는
통일문제를 파악하는 핵심은 계급적 내용의 문제이며,
노동자․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
노동자․민중의 정치가 활성화되어 그 힘에 기초한
민주적-민중적 통일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현재
남북한을 둘러싼 주․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남한의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힘이 강력하게 존재해야 자유주의적-시장주의적 흡수통일을
저지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945년 ‘해방공간’의 현재적 의미
이 일 재
익히 알다시피 이일재 선생님은 1923년 생으로 전평과
조선공산당, 빨치산 활동을 거쳐, 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출옥하신 뒤 대구에
사시면서 아직도 노동운동에 깊은 애정을 기울이고 계신
노동운동의 산 증인이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끊임없는 결합을
항상 강조하고 계시는 선생님의 글을 싣게 되어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재분할전쟁이었고 2차 세계대전도
식민지재분할전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참전함으로써
반파쇼인민전쟁의 성격과 식민지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른바 1차 세계대전 후의 「영원한
번영」의 꿈도 깨어지고 상대적인 안정기도 지났다.
1920년대 중반기의 금융공황에서 세계공황이 시작되어 1929년의
대공황이 내습했다. 은행은 내줄 돈이 없어서 망해버리고
자본주의 질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공장폐쇄, 조업단축에 따른
대량해고로 실업자가 넘쳤다. 산업합리화는 임금인하, 인원정리,
노동강도를 강화시켰다. 시카고, 런던, 베를린, 로마, 도쿄 등
세계의 대도시에서는 대량의 기아행진이 줄을 이었다. 경제의
위기는 사회, 정치의 위기를 동반했다. 그러나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제국주의의 총본산이 된 미국은 유효수요와
완전고용 창출이론인 케인즈 경제학에 의거한 뉴-딜정책에 의해
빈사상태의 자본주의에서 소생하게 되었다. 침체한 경제활동에
대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거액의 공공사업비 지출로
유효수요를 인위적으로 창출해 국내시장을 확대해서
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뉴-딜러들은 와그너법을
통과시켜 노동자들에게 한걸음 양보하였다. 노동자들은 숙원의
산별조직의 전국중앙조직인 CIO를 결성하여 미국자본주의의
동반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편
후진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부르주아국가들은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폐기하고 부르주아 의회의 문도
닫아버렸다. 그들은 집중적으로 노동자계급을 공격해 왔다.
이탈리아의 검은셔츠 로마군단은 연일 군화소리로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었고 독일의 나치당은 권력을 장악하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방화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지도자
디미트로프를 체포하고 탁월한 여성 노동운동가인 로자
룩셈브르그를 해머로 뒤통수를 때려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자행했다. 그리고 드디어는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일본독점자본
역시 좁은 국내시장에서 해외로의 진출을 중국침략으로,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의 영․미․불의 식민지를 점령하여
힘으로써 재분할을 감행했다. 파시즘은 백년 전부터 구라파를
배회하던 유령을 퇴치하고 1차 세계대전의 약한 고리를 틈타
광활한 지역에 유령의 거소를 만든 소련에 반공십자군을
거느리고 전격적으로 쳐들어갔다.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폴란드침략까지 유화정책을 쓰던 영국에서도 프랑스가
침략당하자 세계 보수자본주의의 원로이고 반공의 좌장격인
처칠이 등장하여 ‘파시즘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동맹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래서 붉은 악마 스탈린과 미국의
점잖은 뉴-딜의 주창자 루즈벨트는 파시즘을 타도하기 위해
동맹하고 연합국의 반파쇼민주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세계인민들과
강도 파시즘과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1941년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해체해서 국제공산주의가 각국의 체제전복과
내정간섭을 안한다는 약속을 했다. 늙은 여우들과 붉은 곰은
서로 포옹하면서 동상이몽의 미소를 지었다.
한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아세아,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전쟁이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중국은 국․공합작으로 지구전을 벌이고 있었고,
뭇솔리니의 파쇼도당의 침략을 받은 이디오피아의 게릴라들은
이탈리아의 정규군을 괴롭히고 있었고, 인도네시아는 스카르노의
탁월한 지도하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민족해방전쟁은 모두 민주주의 연합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인도의 잔드라 보스같이 일본군의 군사지원을 받아
영국군과 싸워서 인도독립전쟁을 전개하는 민족해방군도 있었다.
이렇게 2차 세계대전은 반파쇼인민전쟁이면서
민족해방전쟁이었던 것이다. 1944년 겨울, 뒤쫓던 소련군은
소-독전선에서 패주하기 시작한 독일군의 패주를 기념하여
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를 통해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과
방불한 대서사곡을 작곡하게 하여 B29에 악보를 실어 보내
뉴욕에서 연주케 하였다. 1945년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날,
메이데이의 축제불꽃과 함께 붉은기를 베를린 의사당에 꽂았다.
뒤이어 아이젠하워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연합군은 제2전선을
형성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행진곡’의 대연주가 열렸다. 한편 일본군은 중국,
태평양전선에서 패주에 패주를 거듭하다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카사키에 감행한 미국의 원폭투하와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끝났다.
미, 소 양군의 주둔과 38선
8․15 조선민족의 해방은 2차 세계대전의 민주주의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일본군의 패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민족해방을 가져온 데에는 1931년에서 1941년까지의 동북
3성에서의 무장항일투쟁과 연안을 중심으로 한 독립동맹과
항일연군의 항일전쟁에의 참가, 중경․운남성 일대에서
장개석 정부 휘하에 있었던 광복군의 항일전쟁 참여 등이
있었고, 1925년 결성된 후 일제의 살인적인 탄압과 분열에
시달리면서도 항일투쟁을 해 온 공산주의자들의 싸움도 있었다.
그러나 8․15의 민족해방은 한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전취한 것은 아니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인 패망이 가져 온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후 모든
한민족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한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미․소의 전후처리의 일환으로서
38선이 그어졌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이미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청천강 이북을, 일본이 이남을 관할한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또 1905년 러일전쟁 전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는 북위
40도 이북의 북한과 동북 3성 전역을 러시아가, 그 이남은
일본의 관할권으로 한다는 러일양국간 협상이 있었다고
한다(러시아로서는 아마 부동항을 갖겠다는 숙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 영남대의 전신 청구대학의 고 홍영의 교수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다). 8․15해방 전 한반도는 38선
이북은 관동군사령부가, 38선 이남은 조선군사령관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은 미국이
무장해제하기로 합의해서 38선이 그어졌다. 여기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역사적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미․소․영 3국은 1946년 12월에 모스크바의
외상회의에서 조선임시정부의 설치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결의하였다.
1) 일제잔재를 신속히 청산하고 조선을 민주독립국으로 창조할
민주임시정부수립과 동 정부가 산업 및 문화발전을 할 수 있도록
시책을 강구한다.
2) 미․소 양사령부 대표로서 임정을 대표할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이 위원회는 반드시 조선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한다.
3)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양국정부의 결정 이전에
미․영․중․소의 심의를 받는다. 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정부와 제 단체를 인입하여 민주주의적 독립국가를 원조
협력할 방책을 작성한다. 위원회 제안은 조선임정과 협의후
공동심의 아래 4개국 후견의 협정을 작성한다.
4) 남북의 긴급한 문제해결을 위하여 미․소 양사령부가
2주 이내에 회의를 소집한다.
이것이 전쟁에서 승리한 민주주의연합국이 조선에 대해 결정한
것이었고, 최소한 그들이 조선민족에게 선물로 제공한 안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왈칵 뒤집혀졌다. 좌․우는 합작하여
신탁통치반대에 궐기했다. 연일 반대시위가 전국 도처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좌익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 좌익의 결정은
조선민족이 당장 자치능력이 있든 없든 국민들의 감정과
정서와는 배치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좌익들의 항일투쟁에
호의를 가졌던 많은 중간층들이 좌익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고
좌익진영 내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좌익은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서 우익의 애국인사들을 배제하였다.
좌익이 결성한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은
대한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들 중 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외에는
포괄해내지 못하여 민족통일전선의 구실을 못하고 있었는데다가
찬탁, 반탁문제로 결정적인 민족분열이 일어났다. 당시는
민족사관을 가진 정치세력이냐, 계급사관을 가진 정치세력이냐를
불문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오래된 식민지지배하의 예속과 억압,
착취로부터 벗어나 해방정국에서 민족자주독립을 이루는 것이
지상의 과제였다. 더구나 찬탁, 반탁을 둘러싼 와중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협의단체의 대상 - 등록된 협의 정당 및
단체의 등록인원수는 한국의 전체 인구보다 더 많았다 - 정당 및
단체에서 소련측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단체는
배제하자는 안과 참가시키자는 안을 놓고 결렬되어 버렸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부일협력자들의 단독정부수립 의도가
구체화되자 대한임시정부측의 우익애국인사들이 남북협상회의
통일되게 참가한 것은 좌․우 통일단결의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여기서 우리들은 해방 후 좌우대립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흔히 우익을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무리들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으나 당시의 우익이란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애국항일운동에 참가한 인사를 가리킨다). 만약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좌․우익이 다 같이 반대해 항거했더라면
미소는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끝나고 전후처리가 완결되면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만일 좌․우익이 다같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찬성하였다면 그 결정에 따라 적어도 5년 이내에는 미소
양군이 철수하고 자주적인 통일정부가 수립되어 남북의 분단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두 가지의 갈림 길에서 상대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어느 한 쪽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오는
분열보다는, 상대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하더라도 통일단결을 이루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민중들의 권력형태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들에게 변혁의 의지를 가지고 항쟁했던
격동기에는 지배자들의 통치형태와 다른 권력형태를 찾게 되고
피지배계급을 위한 개혁을 실천한다. 아편전쟁 직후 1850년대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때 홍수전 등은 중국의 청말 부패관리의
약탈과 지주의 착취, 토비의 횡행에 항거하여 전전 수천리
동삼성, 감숙, 신강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태평천국의
농민권력기관을 설치하고 농민대회를 열어 모든 것을 의결하고,
토지를 농가의 인구에 따라 급여하는 토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조의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을 타파하고 직접민주주의적인
농민대회에서 수령과 집사를 선출하여 통치하였던 것이다.
1871년 세계 최초로 수립된 노동자정부 파리콤뮨의 선거에서
선출된 콤뮨대표들은 거의 노동자였다. 이 80명으로 된
콤뮨회의는 집행위원회를 선출하고 군사, 재정, 식량, 사법,
보안, 노동, 구제, 외교, 교육의 각 위원회를 조직하여 파리를
통치하였다. 중앙정부의 폐지, 자유도시의 수립, 개인의
절대자유, 배상에 의한 자본의 몰수, 토지와 자본을 노동단체에
분배하는 정강을 발표하고 초등학교 아동들에 대한 의복과
급식의 무료제공, 8시간 노동의 실시, 빵공장 야간작업의 금지,
노동자의 저당물 반환, 소유주가 없는 공장의 노동조합 인도
등을 실행했다. 그리고 중앙은행을 접수하지 않았다는 큰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특기할 일은 경찰을 완전히 폐지했지만
파리에는 강도, 살인사건은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72일
간의 짧은 통치후 베르사이유군의 침입으로 이른바 ‘피의
일주일’이라는 처절한 시가전 끝에 막을 닫았다.
한국에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은 관아를 접수하여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행정, 입법, 사법권을 집행하여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함부로 하던 탐관오리 및 토호의
탐학폭정에 희생된 민중의 재산을 탈획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정부군에게 강화 12조를 제시하였다. 그중 5조
노비문서를 소각할 것, 11조 외적과 간통하는 자를 엄징할 것,
토지는 경작자에게 평균으로 분배할 것 등이 있다. 동학농민군은
점령한 지방에서 그 곳의 관아, 향집강(향교로서 그 때의 가장
말단 권력기구였다)을 접수하여 동학 접주의 책임하에 정치를
베풀었는데 학정과 가렴주구를 하던 수령방백은 처단하고 선정을
베풀던 관리들과는 같이 정치를 했다. 곳에 따라서는
이중권력기구가 설치된 셈이다.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은
중앙정부의 초무사(招撫使)에게 제폭구민(除暴求民),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상기한 12개 조항을 수락시켜 전주성에서
집강소를 설치하여 그들과 함께 선정을 집행하였다. 미숙하나마
동학농민의 집강소는 구지배 권력기구를 대체한 농민들의
권력기관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권력은 민중들의 권력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소비에트란 원래 ‘평의회’, ‘위원회’라는
말이다. 1905년의 러시아혁명 당시 페테르스브르크의
「노동자대의원 소비에트」를 효시로 하여 1917년
2월 가정부시대에는 짜르와 이중권력하에 있었다. 혁명후에는
동네에서부터 연방의 최고기관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제도가 자본주의 국가권력과 다른 점은 첫째
무산자 독재 이른바 피착취계급의 조직이라는 것이고, 둘째 모든
국가권력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중앙, 밑으로부터 위로 향해 쌓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창기 소비에트의 모습이었고 이후 차차 중앙집권화되어
스탈린니즘 시대에는 완전히 중앙에서 지방으로 하향권력구조가
되었다. 셋째 삼권분립이 실시되지 않고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이 주요한 기관에 혼재, 잡거하고 있었다. 이
소비에트제도는 그후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형태에 영향을
미쳤으나 과도한 중앙집권으로 인한 관료화, ‘당의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일당독재, 모든 운영의 비민주성, 노멘클라트라,
테크노크라트라는 계층의 새로운 지배층의 출현 등으로 초창기의
순수성과 민주성은 상실되어 버렸다.
1945년 8․15 해방후 미군이 상륙하여 9월 11일 미군정이
실시된 후 얼마까지도 실질적으로 남한은 권력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이 때 나타난 각 공장, 산업시설의 자주관리운동과
중앙과 지역에서 나타난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으로 나타난
권력형태의 맹아라고 볼 수 있다. 8․15 해방전 모든
산업시설은 90% 이상이 일제와 일본인이 소유, 경영하고 있었다.
이 산업시설들이 주인을 잃고 생산기능이 중단되자 이
산업시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자주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설을 보존하고 물자를 지켜야 했다. 일본인이 철거,
해체해서 가지고 달아나는 것을 막아야 했고, 한국인들로부터의
도난도 막아야 했다. 그리고 공장을 돌려서 전시산업을
평화산업으로 바꾸고 신발, 의복, 식료품 등을 만들어내야 했다.
생산시설의 유지, 관리, 생산을 노동자들이 맡게 되었다. 그래서
무슨 무슨 공장위원회, 무슨 무슨 종업원회, 무슨 무슨 유지회
등의 기구를 만들어 위원장 또는 회장 등을 선출해서
산업시설물의 유지, 관리, 생산을 맡았던 것이다.
해방공간이라는 상황에서 애국적인 정서도 작용하였겠지만
노동자들로서는 생존과 생활의 터전인 자기의 직장을 사수해야만
하는 그야말로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운동이었다. 그 때만 해도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아닌 약간의 민족자본가도 자본과 능력을
보탰다.
이것은 1920~30년대 서구에서 나타난 ‘공장평의회’나 2차
세계대전후 유고슬라비아에서 나타난 ‘평의회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자주관리운동은 미군정이 본격화되자
해체되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로 흡수되어
버렸다. 주요 농어촌과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라는 자주적인
자치권력기관이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참전하자 일본제국주의는 공산주의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해방전 건국준비를 위한 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를 만들었다.
해외에서 아직 귀국하지 아니한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김구를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으로, 여운형을 수상으로 한
가장적(假裝的)인 정부였다. 미군정은 이 실체가 없는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임시정부」를 조선인들의 자주적인 권력으로
보지 않고 불법화해서 해체해 버렸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 22일에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인민위원회가 조선인들의 대표기관임을 선포하였다. 물론 이
중앙인민위원회는 국가권력의 조건을 구비하지도 않았거니와
이것이 한국인들의 궁극적인 정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군, 면, 리, 동 단위에서는 유사한 권력기관으로서
맹아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토지개혁 전의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의 3․7제 소작료 지불, 일본인 토지의 경작권 문제,
리(里) 등에서의 분쟁문제 해결, 도난 등 치안질서 유지 등에
관여했었다. 그야말로 잠깐동안의 해방공간이었지만
인민위원회는 인민들의 권력형태로서 존재하였다. 적어도 면단위
이하에서는 좌우익 애국적인 유지들이 모두 참여한
통일전선체이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결성되었다. 그래서 해방공간인
1946년 4월 17일에는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21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오랜 세월 미행, 고문, 투옥 등의 탄압으로 고통받다가
합법적인 기념식을 갖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했으리라. 그런데
지금 북한노동당 사람들은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의 남상을
1926년 10월 7일 소년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고 하니 남북은
운동사마저 크게 분열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도
조선공산당은 극심한 내부분열에 시달려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결성 이후 화요회, 북풍회, 경성콤그룹, M-L계 등
여러 종파들의 종파행동에 시달려 오다가 1928년 이른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해체되었다. 그후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모든 힘을
쏟았다. 해방이 되자 그들 중 최익환, 정백, 이영, 이우적 등은
8월 15일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의 간판을
게시하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는 여전히 지하에 남아
조선공산당 재건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제 때 출소 후 광주의
어느 벽돌공장에 잠적해 있던 박헌영은 ‘박헌영 선생
나타나시오’라는 벽보가 나붙어도 나타나지 않고 당재건운동에
치중하였다. 그후 장안파 공산당은 해체하여 재건파와 통합된
공산당을 결성하였으나 다시 분열되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으로 되었다. 1946년 11월경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이 합쳐 계급적인 전략당이라기보다는 계급연합적
전술 대중당으로서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장안파는 계속해서 조선공산당 대회를 열자고 주장하다가(그래서
그들은 한때 ‘대회파’라고도 불리었다) 남로당이 발족하자
조선인민당 중앙위원의 다수 48명(이른바 ‘48파’)이
남로당으로 합당하고 남은 31명(이른바 ‘31파’)을 규합하여
「사회노동당」을 만들었다. 그후 장안파는 당의
분열을 책임지고 「사회노동당」을 해체한 뒤
「근로인민당」을 결성하여
「남로당」이 불법화되어 지하로 들어간 후에도
한참동안 미군정하에서 합법정당 행세를 했다.
그렇다면 재건파와 장안파는 이론적으로 통합되지 못할 만큼
차이가 있었던가? 그 당시 영등포는 남한의 공업중심지였기
때문에 영등포의 공장노동자를 장악하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한다고들 했다. 그래서 아침에 공장입구에는 눈이 내리듯이
장안파가 재건파를 비난하는 삐라와 재건파가 장안파를 비난하는
삐라들이 뿌려져 있었다고 한다.
재건파의 지도자 박헌영은 그의 8월 테제에서 해방직후 당면의
한국혁명단계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 같은 부르주아들의 주도권하에 이루어진
혁명을 제1형태라고 하고, 러시아와 같이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 미숙하여 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영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주도권을 쥐고
수행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제2형태라고 규정하였다.
한국의 혁명 역시 제2형태에 속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장안파는 한국의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을
겪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갈 수 있으며 겪는다 하더라도
짧은 시일동안이고 곧 사회주주의 혁명의 단계로 진입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장안파의 이론은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건파는 그후
남로당에서 남북노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노동당이 되었다가
한국전쟁후 숙청되어 그 명맥이 끊어져 버렸고, 장안파는
사회노동당에서 근로인민당으로 변신했다가 그 주요간부들은
1948년 북한정부 수립 후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조선인민당 31파에 속했던 사람들은 남한에서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다소 정치세력으로서 영향력을
미치다가 역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 파란 많은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냉전체제하에서 단절되고 그 명맥이
끊어져 버렸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한국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움직임이 시작되어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중적 성격을 띄게 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죽산군의 금광에서 2,000명의 노동자가 광구
소유자인 일본인에 대해 총파업을 한 기록도 있고,
1898년~1902년에는 철도부설장의 일용노동자 파업도 있었다.
1900년에서 1903년에 이르는 동안 목포 하역부의 조선노동자
파업도 있었다.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1920년에 한국 최초의
노동자 조직인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었다.
그후 얼마간 노동자와 농민이 공조하는 노농연맹을 거쳐 비로소
임금노동자조직으로 분리되기까지는 노동자의 투쟁보다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주된 과제였다. 그래서 메이데이행사 때에는
농민들이 더 많이 참여해서 체포되기도 했다. 그후 1920년 말과
1930대 초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 당시 원산총파업,
평양고무공장노동자들의 파업 때 대동강 을밀대 옥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투쟁을 한 아줌마 노동자 강주영의
농성도 있었다. 강주영은 그뒤 유치장에서 절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열사는 바로 여성이었다.
또 방직공장노동자, 부두노동자의 파업 등도 있었다.
한국의 노동조합도 세계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조직형태는
업종과 지역조직으로 시작되었고, 1930년 중반 비합법노동운동도
경성트로이카 운동과 같이 산별지향성이 뚜렷했었다. 1980년대
군사깡패의 통치 때 기업별조직이 강제되었을 뿐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 시대는 모든 것이 그랬지만 노동운동도
암흑시대였다. 활동가들은 대다수가 감옥에 있었고 사바세계에
있었던 사람들은 일제의 철저한 보호감찰의 감시와
‘야마도쥬크’의 사상전향의 도가니 속에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이후 예비 구금된 활동가와 그전부터 감옥에
있었던 활동가들이 8월 15일에서 16일 사이 대거 출소하였고,
일본에서 ‘일본전국노동조합회’의 영향을 받은 활동가들이
해방된 감격과 포부를 안고 조국으로 모여들었다. 그 활동가들의
해방감은 민족해방이라는 막연한 정서가 아니었다. 감옥과
감시로부터 신체적 자유를 맞이한 해방이었다.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얼굴에 붉은 황칠로 잔뜩 분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활동가들이 숨돌릴 틈도 없이 연줄로 모여
노동조합의 조직화에 착수했다. 조선전기노조 위원장이었던
문은종의 집에 남북의 활동가들이 드나들고 모이는데 그의
부인은 8월 16일 출소시 감옥문 앞에서 한 번 남편을 언뜻
보았을 뿐 매일 수십명씩 북적거리는 숙소(일본인 경성전기회사
사장집을 접수해서 사용했다)에서 식사수발하느라 어느 사람이
자기 남편인지 분간을 못했다고 한다.
우선 서울지역의 노동운동가들이 모여서 간담회를 개최하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준비대표자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각 산별의 노동자 활동가 대표 511명이
9월 28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9월 30일 ‘제1회 전평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다. 10월
26일부터 준비위원회의 조직자들이 지역조직을 마치고
전국단일산별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여기에서 선출된 515명의
대표가 11월 5~6일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를
결성하였다. 흔히 전평은 하향조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중앙준비위에서 조직자가 지방에 내려가서
지방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지방준비위원회가 중앙에 모여
전국산별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방산별협의회가 지방에 있었으나
이 지방협의회가 전국평의회의 대의원을 선출한 것은 아니었고
각 산별에서 대의원을 보내 전국평의회를 결성했다. 여하튼
중앙과 지방의 두 쁘레에 벨트가 연결되어 움직였다.
8월 15일에서 11월 5일 두 달 20일 만에 이 방대한 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을까? 아마 세계노동운동상에 유례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180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1945년 8월
15일까지의 한국노동운동의 경험과 교훈, 이론과 실천,
인적자원이 총화되어 집결되었기 때문이며 또 해방공간이라는
특수한 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이 전국중앙조직(N.C)을 그것도 거의 완전한
산업별노동조합형태를 조직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조건은 전평의
조직을 막고 반대할 자본가들의 정치세력이 없었고, 규제할
제도나 법률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평은 해방공간, 미군정
하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백만 노동자들의 유일한
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
조직의 체계를 살펴보면 조선금속노동조합을 필두로 화학, 섬유,
출판, 운수, 식료, 토건, 전기, 목재, 어업, 광산, 체신, 철도,
일반, 해운, 조선의 16개 단일산업별노동조합이 전국평의회를
결성하고, 각 권역별로 11개 지역에 산별지부와 각
산별지방평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산별지부가 없는 중소
도시에서는 합동노동조합이라는 지역단위의 노동조합이 있었다.
병원, 의무관계 노동자는 전국일반봉급자노동조합에 참가하고
있었으나 각 지역에서는 산별단위의 의무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지역평의회에 참가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실업자동맹이
조직되어 파업시에 파업파괴분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연대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전평은 16개 산별과 실업자동맹, 11개
지방평의회와 135개의 지부, 현재의 단위노동조합에 해당하는
1,676개의 분회가 있었다. 전체 조합원 수는 574,475명(46년 2월
15일 현재)이었다.
조합원에게 조합원증을 교부하였고 조합원증 뒷면에는 월별로
조합비 징수란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또한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실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실시, 산전산후 2개월
유급휴가제 실시,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
� 보장 등 오늘날 노동조합과 거의 같은 18개의 행동강령을 갖고
있었다.
특기할 것은 노동조합에 쟁의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창립
당시에는 쟁의부가 있었으나 산업건설부로 바꿨다. 전평의
산업건설부는 해방공간에서 한국노동자의 위상과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일부
민족자본가와 동맹해서 산업을 건설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한
과업이라 보았고 둘째, 전체 산업시설의 거의가 일제와 일본인의
소유였고 약간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의 소유도 몰수대상이었기
때문에 투쟁대상이 없어져서 노동자가 산업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전평의 주된 강령이 투쟁에서 산업건설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것은 흔히 파시즘하의 관제 노동자기구가 취하는
노선과는 또다른 경우의 우경기회주의다. 산업건설부의 설치를
둘러싼 찬반 격론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산업건설부의 설치는
전평지도부 밖에서 총노선이 결정되어 시달된 것이었다.
전평의 산업건설노선이 큰 오류임은 미군정이 실시되자마자 곧
알게 되었다. 모든 일본인의 산업시설과 재산은 미군정이
접수하였고 부일협력자들에게 관리․불하되어
한국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과 수탈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산업시설에서 쫓겨나 산업건설은커녕 대량의
실업군으로 변했고, 공장과 작업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전혀
노동기본권의 보장이 되지 않은 채 가혹한 착취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의 조합운동의 이론은 1930년대 프로핀테른의 로조프스키의
ꡔ파업의 전략과 전술ꡕ, 피아로니키의
ꡔ조직론ꡕ 등에 의지한 빈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전평 결성과 활동의 약 3년 동안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공산당과의 관계였다. 결성준비를 위한 중심 조직자가 과거
일제하 소련의 볼세비키당을 추종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정치조직인 당과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의 관계설정이 잘못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은 당의
산하기관의 역할을 하였고 모든 것이 당의 결정에 따라
집행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다가 지지하라는
지시가 있으면 그 지시에 따랐다. 전평집행위원장과 간부, 각
전국산별간부, 지방평의회의 간부는 물론 각 지방지부, 심지어는
분회의 간부까지도 당원들이었다. 전평의 전기구를 당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각 공장에 산재해 있는 당원들이 3명~5명으로
된 당 세포(러시아식으로 이체이카라고 불렀다)에서 각
조직기구에 파견된 프락치(프락치라는 말은 원래 당이 다른
단체에 파견한 공작원을 일컫고, 정보기관에서 침투한 염탐꾼은
프라파라고 한다)가 프락숀을 구성하여 조합의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갔다. 당과 노동조합간에 상대적인 자주성이 없었다. 전평은
결성된후 자주관리운동이라는 노동자들의 창조적인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지 못하고 정치 일변도의 성향이 과도하게
조장되어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익과 권리는 행동강령에만 있었을
뿐 노동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노동시간, 임금, 노동환경과
조건의 개선, 고충처리와 일상활동이 부재했었다. 그래서
정치정세가 불리해지자 노동자들은 전평으로부터 멀어졌고
미군정의 탄압에 대중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궤멸된 것이다.
맺음말
1945년 8․15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15까지 3년간은 세계는 냉전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우리 한민족에게는 분단과 냉전체제로의
과도기였다. 그 후 50년, 지금은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전일적인 세계체제로 전환되는 새로운
세계사적인 변천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반도의 이북까지도 싫든
좋든 자본주의 체제하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되는 추세에 있다.
남북분단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청산될 것이다. 이런 변혁기를
맞이하여 우리들은 남북간 노동자들의 동일한 정체성과 관점에서
8․15 해방공간을 재해석하고 새로 전급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