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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진영의 통일운동

현장에서 미래를  제24호
장임원


권두언




노동운동진영의 통일운동




장 임 원 / 이사장





햇살이 뜨겁다.
바다 그리고 산으로 밀리는 차량의 행렬은 끝이 없다.
도시가 비어있다.
이것이 우리의 8월이다.
감격의 8월은 1945년의 8월로 종지부를 찍었다.
고통의 8월이 우리의 8월로 자리잡은 지 50여년, 그나마 쉰두해 째 8월의 대학캠퍼스에는 고통의 아픔마저 없이 텅빈 채 허허롭기만 하다.
이미 대선의 열기로 꽉찬 1997년 8월의 공간을 누군가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통일의 열기로 환기하여야 한다. 이제야말로 이 땅의 진보적 노동운동진영이 통일운동을 제 몫으로 확실하게 챙겨야할 시점이다.
민족모순이 먼저냐 자본모순이 우선이냐의 소모적 논쟁과 분파를 지양, 통합의 논리를 선택하고 단합의 한마당으로 나가야 한다.
노동운동을 잠재우는 통일운동의 빗나간 전술을 배제하되 통일운동의 불씨마저 소진되는 국면을 타개하여야 한다.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은 서로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보완의 관계에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낙관한다. 다시말해 북한의 자연붕괴를 기대하고 북한의 붕괴를 곧 통일로 바라본다.
나는 이같은 낙관적인 통일전망에서 통일의 위기를 발견한다. 북한의 자연붕괴를 유인하는 남북관계의 정책들에서 반통일성의 흔적들을 목격한다.
설령 현 북한정권이 스스로 무너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통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일은 한민족공동체의 건설을 의미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며, 그 공동체는 전민족구성원의 나눔의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거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굴복당하는 나눔의 공동체 건설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평화적 방법에 의한 지배와 굴복의 가능성은 전혀 있을 수 없다. 다시말해 지배와 굴복은 비평화적 방법 곧 전쟁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으로 이를 누구도 원하지 않음은 참으로 다행 중 다행이다.
8월 5일로 예정된 4자 예비회담에 참여하는 중국에게 동북아의 안정은 그들이 추구하는 산업화의 지렛대이고 미국 역시 중국과의 긴장관계를 원치 않는다. 4자 회담이 기대하는 목표는 한반도에 정전협정체제 대신 평화협정체제를 구축하여 동북아의 안정을 강화하는 데 있다.
이를 전제로 할 때 북한의 자연붕괴를 기반으로 하는 흡수통일정책의 비합리성은 자명하며, 약 1조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되는 흡수통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나눔의 삶’에 기반한 민족공동체 건설

그렇다면 통일의 접근방법과 접근경로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전민족구성원의 나눔의 삶을 의미하는 민족공동체의 건설이 바로 통일의 대명제임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눔의 삶에 기반을 둔 민족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제일의 조건으로 먼저 남북한 사이에 믿음을 복원하고 신뢰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가 세계 유일의 분단민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은즉, 한국전쟁은 쌍방의 신뢰를 철저하게 무너뜨렸고 더 거슬러 올라가 1946년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의 균열은 양자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렇게 볼 때, 통일의 가능성은 해방으로부터 신탁통치에 이르는 시기까지 열려 있었던 바, 비록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돌입이 통일의 외적 걸림돌이었다 하더라도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려는 주체적 노력이 있었다면 통일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든 우든 민족통일보다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권력쟁탈의 싸움은 신뢰가 아닌 불신, 화합이 아닌 불화, 통일이 아닌 분단의 길로 치닫게 하였고 남한에서는 군사독재가, 북한에서는 유일체제가 자리잡았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뼈아픈 두 교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첫째, 신뢰와 화합이 통일의 절대조건이라는 사실이다. 통일의 길로 나아가려면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여야 한다.
믿음을 복원하고 키우는 데는 쌍방의 공동노력이 물론 최선책이다. 그러나 최선책은 그만큼 어려운 일로 어느 일방에서 먼저 믿음을 주는 차선의 선택이 보다 현실적인 경우가 세상만사에 다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와 화합은 구호일뿐 오늘날 우리의 남북관계 정책은 믿음쌓기에 역행하고 있다.
북한의 인민이 천재지변에 의한 기아로 신음하고 있다. 앙상한 가슴팍과 퀭한 눈망울의 어린이는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한다. 그들을 살리는 정부차원의 정책이 절실하다. 북한의 절대권력 안에도 온건파는 있으며, 신뢰의 싹은 남북의 온건파 사이에서만 돋아 날 수 있는 바 온건파의 입지를 강화할 정책이 필요하다.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계기로 대북한정책의 전반에 온기를 불어넣어야 하고 그 기조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의 교훈은 통일의 중심주체가 남북한의 민중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통일의 중심주체가 정치권력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권력의 쟁취와 강화를 민족통일에 우선한 나머지 남북의 작은 갈등에도 냉기류의 통일정책으로 반전시키고, 이를 정권연장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정치권력 집단으로부터 수없이 경험하였다. 정치권력은 진정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민중의 통일운동까지도 남북간 적대관계를 전제로 한 국가보안법의 사슬로 봉쇄하였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북한의 기근문제와 관련한 정부정책에서도 그 기조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바 민간차원의 식량지원 및 의약품 보내기를 단순한 인도주의로 치부하면서 그것들이 정부의 대북한정책과 통일정책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민간운동이 인도주의와 동포애에서 발로함은 인정하나 반통일적이라는 단정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민간 지원운동은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운동이요, 나눔의 운동이야말로 신뢰회복을 위한 그리고 통일에 접근하는 최상의 현실적인 첩경이며, 한민족공동체 건설의 바탕인 남한의 민중과 북한의 인민 사이의 사회적 연대성과 민족동질성을 넓히고 깊게 하는 최선책이다.
나는 여기서 노동운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나눔의 삶에 있으며 노동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나눔의 삶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데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노동운동진영이 견지해야 할 통일운동의 요체는 나눔의 삶의 실천이다. 나는 그 실천운동이 대단히 미흡하였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본질이 통일운동과 중첩됨을 주장한다. 나눔의 삶을 북으로 넓히는 것이야말로 노동운동진영의 통일을 위한 접근방법이며 접근경로다.

신뢰회복 이외의 또다른 주요과제의 하나는 한민족공동체의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모색이다.
최근 우리의 실질적 통일접근 중 근간이 되는 것은 기업의 북한 진출에 의한 자본의 지역확장으로 이것이 야기할 수도 있는 북한의 돌발적 붕괴가 초래할 경제적 및 사회적 부담과 더불어 자본의 모순을 극대화할 천민자본주의의 심화가 크게 우려된다. 노동운동진영은 우리의 최고가치인 나눔의 삶을 한민족공동체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마땅히 천민자본주의 심화과정을 경계하여야 한다.
노동운동은 통일운동과 깊게 연계될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운동진영은 통일운동을 제 몫으로 껴안아야 한다. 남북한 민중 사이의 신뢰관계를 발전시켜 양자의 사회적 연대성과 민족동질성을 넓히고 깊게 하며, 궁극적으로 나눔의 삶을 구현하는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 한/노/정/연

1997-08-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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