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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

현장에서 미래를  제3호
임현주

회원/독자투고




강신준 교수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임 현 주 (노동조합·기업경영분석 연구상담소 연구원)


민주노총 건설을 두 달여 앞둔 요즘, 노동조합 조직발전에 대한 논의는 활동가들의 논쟁거리에서 멀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실천 활동에 바빠서이다. 지금까지 임금인상 기준이었던 최저생계비에 대해 이론적 문제제기와 생계비 모델을 과학화하는 논의도 학계에서 먼저 출발하고 있다. 이런 정황에서 지난 8월 19일 있었던 한국산업노동학회의 3차 학술 발표회는 당시 발표된 논문의 내용으로 노동계의 관심을 끌었고, 현재 노동조합 운동과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들이 제안되거나 주장됨으로써 다시금 활동가들의 토론 욕구를 자극했다고 보여진다.
사실 현재 자본의 공세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변화에 직면하여 전술적 진로를 심도있게 고민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정책능력이 어느 때보다 돋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인사제도, 월급제, 하청과 파트타임의 증가, 기업문화 전략, 민족 이데올로기의 기업 광고화, 개인문화의 확장과 세대간 의식 분단 등으로부터 선거, 지역운동, 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을 둘러싼 제반의 분석 대상은 아직도 노동조합의 담론에서조차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근황에 한국산업노동학회 제3차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강신준 교수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은 그 제목에서부터, 또한 그 내용의 혁신성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있다. 그만큼 임금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고충이 심각했음을, 자본의 신임금정책 공세가 치열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런 노동조합의 정황에 적합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논문을 여기서 거론하고자 함은 그 주장의 함의가 매우 위험스럽다는 데에 있다. 노동계의 현실적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노력은 노동계의 여러 활동가와 노동조합 간부에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연구 결과가 갖는 실천적 함의는 노동조합의 깊은 관심과 토론을 통해 평가되어야 하리라 본다.

강신준 교수의 ‘대안적 임금정책’론 요지

우선 강신준 교수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의 개요를 살펴보자. 그는 먼저 전술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을 제안하고, 이 개념하에 자본의 신임금제도의 전술적 본질을 밝히고,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강신준 교수는 먼저 ‘마르크스, 엥겔스는 전술에 대해 개량적 국면에는 개량적 전술, 혁명적 국면에는 위기적 전술을 주장하였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런 고전적 전술구도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전제한다. 자본은 현재 개량적 국면임에도 공세적 전술을 개량적 전술에 결합하여 전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전술체계도 개량적 전술에 위기적 전술이 결합되는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술 인식하에 신임금제도는 “개량적 국면에서 개량적 전술의 성격, 즉 상호의존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도입되지만 종국적으로 그 목표는 대립적 성격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 위기적 전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이하의 글에서 강신준씨의 논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할 때는 “ ”를 썼으며, 다만 논문의 문단 전체를 인용할 때만 주에 인용한 페이지를 달았다. 인용한 논문은 산업노동학회 3차 학술발표회 자료집 ꡔ신경영전략과 노동조합의 대응전략ꡕ(1995.8.19)에 실린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이다.
, 즉 “교섭자체를 부인하는 임금제도”이다. 이런 해석 하에 기존 노동계측의 논의는 “단순히 선언적이며 대립적인 견해의 확인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어, “대안부재로 인해 자본의 논의구조 속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임금정책은 “자본의 임금정책과 마찬가지로 이중적 전술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노동조합의 임금정책은 생계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임금체계와 노동지출에 따른 임금체계를 동시에 지향하는 이중적 전술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중적 전술은 임금을 「생활급과 노동급」이라는 두 가지 항목을 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생활급은 생계비를 기준으로 노동급은 노동지출을 기준으로 한다.
강신준 교수는 이와 같은 논리 전개를 통해 귀결한 「생활급 +노동급」이라는 정책에 대한 의미를 자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새로운 임금정책에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성격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양자의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투명성을 토대로 양자의 상호의존성을 수용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양자의 대립성을 호도하거나 은폐하려는 구조가 배제된다. 양자의 대립적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노사협조주의는 여기에서 구조적으로 차단된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우리는 강신준 교수의 임금정책을 도입하는 순간 노사협조주의의 망령으로부터 구조적으로 차단되는 행복을 맘껏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신준 교수의 논문 요지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술인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 설치 둘째, 자본․임노동관계의 이중적 구조와 이에 따른 임금에 대한 이해 점검(이와 관련하여 산별노조에 대한 이해를 덧붙여) 세째, 신임금제도의 본질과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 이 3가지는 논문이 주장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귀결되는지 분석하기 위해 반드시 정비해야할 주제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면서 ‘대안적 임금정책’의 요지 중 두번째와 세번째의 부분만을 분석하고자 한다.
전술 수립의 전제가 되는 국면을 경기의 호·불황으로만 진단하는 것은 도식적인 원전 이해가 아닌가? 전술 개념에 계급 주체 개념이 빠져 있기 때문에 경제결정론적 정세인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정세가 개량적 국면인가? 노동조합의 전술도 자본과 같이 위기적 전술을 가미한 개량적 전술을 써야한다고 보고 있는데 이를 자본의 개량적 전술의 ‘수용’이 아니라 계급대립성의 ‘확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포스트 포드주의적 축적체계가 현재의 개량국면을 낳았고 이에 따라 자본의 개량성에 공세적 성격이 가미되었다면, 문제의 핵심은 축적체계이다. 따라서 전술논의의 핵심은 축적체계, 예를 들면 노동력 주변화 등의 문제이지 않는가?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의 핵심이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의 조직형태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는데, 이 때의 업종별·산업별 조직형태의 개념을 일반적인 노동조합 개념과 왜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가?

논리 전개의 오류는 첫 단추에서

이 논문은 「자본․임노동관계의 이중적 구조-> 임금관리에 대한 이해 -> 신임금제도의 전술적 특수성 ->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체계’」의 순으로 논리를 전개하면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결론인 ‘대안적 임금체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첫 논리에서부터 분석해야 할 것이다.
첫째, 논문에서 서술되고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는 내용과 형식을 절차적으로 분리함으로써 노동력 매매와 노동력 지출 이 논문에서는 노동력 상품의 소비과정을 ‘노동지출’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노동력 지출’로 수정하여 쓰기로 하겠다.
을 독립적·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강신준씨의 논리를 도식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G ---------- W (A, Pm)········W' --------- G'
(G:화폐 W:상품 A:노동력 Pm:생산수단 ':가치증가분)
ꠐ ꠐ │ ꠐ
└────┘ └────┘
노동력 상품의 노동력 상품의 <==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
매매과정 소비과정
‥ ‥
임금결정과정 노동력지출과정 :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과정

“자본․임노동 관계는 사실상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거래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 구조는 두 가지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 첫번째 조건은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목적은 완전히 다르며”, “이런 각자의 목적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두 과정(임금결정과정과 노동지출과정)을 통해 달성된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노동자와 자본가 양자가 “각자의 이해 달성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상대편에게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 때문에 자본․임노동 관계가 대립성과 상호의존성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게 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임금관리의 전술적 목표도 “임금결정과정과 노동지출과정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중적 구조의 조건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자본의 임금관리도 “임금수준관리와 임금체계관리가 이 두 가지 형태에 조응하는 전술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와 성격, 이에 따른 임금수준관리와 임금체계 관리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전제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분명히 노동자는 임금을 ‘노동력의 가격’으로 보고 자본가와 교섭을 하며, 이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 교섭단위인 노동조합의 범주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자본가가 임금을 ‘노동의 가격’으로 보는 시각에 의해 제약되며, 노동조합의 조직·투쟁력에 의해 제한된다. 즉 자본가는 ‘노동력의 가격’을 ‘노동력 상품이 지출된 결과인 노동의 가격’으로 사실을 전도시켜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금이 노동력의 가격으로 인정하는 순간 기업의 이윤(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잉여가치 ; 위 도식에서 본 ' 부분)이 노동에 의해 창출되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임금을 ‘노동의 가격’으로 보는 것이다.
이 노동자의 임금론 - 강신준 논문의 표현을 빌자면 노동력 상품의 매매로 임금을 보는 입장 - 과 자본가의 임금론 - 노동력 상품의 소비과정의 결과로 임금을 보는 입장 - 은 ‘분리된 두 측면’ 또는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두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실에 대한 완전히 대립적 이해인 것이다.
만일 어떤 자본가가 생산에 필요한 원재료를 샀을 때,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과 이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별개의 것으로 보겠는가. 또는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다. 왜냐하면 전자(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의 가치와 후자(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의 가치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신준은 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서 전자와 후자를 구분하고 있을까?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상품을 구매할 때의 가치와 상품이 소비되어 창출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차별성을 보다 선명히 밝히고자 하는 의욕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을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과정”으로 분해해버린 것이다. 즉 동일한 과정에 대한 대립적인 계급의 입장을 현실에서 분리되는 과정으로 전도시켜 버린 것이다. 이 전도는 자본․임노동 관계의 대립성 즉 자본에 의한 노동력 착취를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둘째, 이와 같은 전도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한 다음의 서술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이런 상호 의존성 때문에 자본․임노동 양자의 이해는 사실 각자 자신들의 일차적인 이해를 이루는 ‘생계’와 ‘잉여가치 획득’이 별개의 단선적 구조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가 상대편의 이해와 맞물려 있는 이중적 구조를 갖게 된다. 즉 노동자의 이해는 임금결정과정에서 생계비의 충족을 통해서 달성되지만 이 과정이 노동지출과정을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이해는 노동지출과정과도 관련된다. 즉 노동자는 ‘생계’라는 본원적 이해 이외에도 ‘노동지출에 따른 임금’이라는 또 하나의 부차적인 이해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이다.” 논문 p68
여기서 말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은 ‘노동지출에 따른 동일임금’ 즉 ‘동일 노동력 지출 동일 임금’이다. 이 해석은 ‘동일 노동력 가치 동일 임금’원칙을 ‘동일 노동력 지출 동일 임금’으로 대체하는 것이며, 임금을 노동력 가치(가격)로 보지 않고 노동 가격으로 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임금결정과정에서 ‘주어진’ 노동지출의 사회적 기준은 개별 사업장에서 그대로 지켜지기 어렵다. 자본가들간에는 무정부적인 경쟁이 존재하며 개별 자본들간에는 각기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자들간의 개인적인 노동능력의 차이도 함께 존재한다. 결국 노동지출은 각 사업장마다, 노동자마다 상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런 노동지출의 차이에 따른 노동자들의 이해도 존재한다. 그것이 곧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이다.” 논문 p84
여기서는 강신준씨가 말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이 ‘동일 노동능력 지출 동일 임금’원칙임이 보다 분명해진다.
결국 이 논문에서 말하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은 ‘동일 노동력 지출 동일 임금’으로서 자본의 임금론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의 설정, 이에 따른 이중적 성격에 대한 전제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셋째, 임금수준관리와 임금체계관리를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라는 틀에 맞추게 됨으로써, 양자를 독립적인 임금관리 형태로 보게 되었으며, 이는 임금관리의 계급착취적 본질을 본의 아니게 은폐하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임금결정과정과 노동력 지출과정이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과정이며, 따라서 임금결정과정에 조응하는 임금수준관리와 노동력 지출과정에 조응하는 임금체계 관리 또한 분리된 임금관리 형태라는 것이다. “임금수준이 결정되는 임금결정과정은 노동력 상품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여기에서는 개별 자본가나 개별 노동자의 의사는 반영되기 어렵고 사회전체 수준에서 총노동과 총자본간의 교섭으로 이루어”지므로 임금수준관리는 “노동자들의 조직형태와 관련되며”, “구조적으로 자본의 이해보다는 노동의 이해가 더 관철되기 쉬운 성격을 띤다”. 그런데 임금체계관리는 임금결정과정과 완전히 분리된 노동지출과정과 연관된다. 이 노동지출과정은 “임금결정과정과는 달리 사회적 범위의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범위의 논의가 배제되며 개별 자본가와 개별 노동자간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노동자의 이해는 배제되며 자본의 이해만이 배타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체계 관리는 임금수준에 대한 관리만으로는 임금을 이용한 생산성 증대 및 노동통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임금관리 형태이다 노동조합과 임금체계 연구회, ꡔ임금체계의 새로운 논의ꡕ p21,
(나라사랑,1993)
. 즉 임금수준관리가 기업차원의 총액인건비 관리라 한다면 임금체계 관리는 개별 노동자에 대한 개별 인건비 관리이다. 이 임금체계의 모든 형태들은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의 강화를 유인하기 위한 것들이다.” 강신준, ꡔ「자본ꡕ의 이해ꡕ, 이론과 실천, 94.8, p217
이 노동강도의 강화는 임금결정 즉 노동력 가격 결정과 무관하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수준이 전제된 개별 노동자에 대한 착취 강화 방법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임금수준관리를 강신준씨가 보고 있듯이 “자본의 이해보다는 노동의 이해가 더 관철되기 쉬운 성격”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노동조합도 임금체계관리가 “노동자의 이해는 배제되며 자본의 이해만이 배타적으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임금결정과정에서 정책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일본의 개별임금요구방식이나 ‘일률 플러스 알파’정책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임금인상 요구시 일반적으로 쓰이는 ‘정액인상’이나 ‘정률인상’방식도 임금수준만이 아니라 기업 내 노동자간 임금분배 체계인 호봉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써 임금체계변화를 유도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임금수준의 결정은 임금체계의 변화와 결부되어 있으며, 양자 모두 노사간의 협상 대상이다.
.
이와 같이 임금수준과 임금체계를 분리된 것으로 사고하는 데는 자본의 임금정책의 역사적 변천을 고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40년대 이전만 해도 자본의 임금정책은 임금형태 즉 임금의 지불방식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노동력 상품의 품목별 임금(노동력의 시장가격)을 그 자체가 대량생산방식의 발달과 동시에 거대 기업 내에 형성되어온 노동력의 내부시장 또는 승진제도적 노동관계가 형성되면서” 泉 卓二 編著, ꡔ賃金 管理論ꡕ, 日本評論社, 1974
, 임금수준, 임금형태, 임금체계를 포괄하는 임금관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임금의 범주가 변화되어 왔으며, 이는 임금을 둘러싼 착취형태가 변화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체계도 임금수준을 통한 임금의 착취형태가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조응된 착취 방식의 고도화일 뿐이다. 여전히 임금관리의 본원은 임금수준에 있으며, 임금체계관리 또한 임금수준관리 범주의 확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 양자가 분리되거나 어느 한 편의 이해가 더 조응하기 쉬운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결국 무엇을 말해 버렸는가 ?

위와 같은 인식 하에 강신준씨는 자본의 임금관리 정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동자의 이해인 생계를 반영하는 임금과 자본의 이해인 노동지출에 따른 임금이 함께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 때문에 불가피하다. 그래서 자본은 결국 기본급을 “연공급, 직능급, 직무급의 세 요소가 혼재된 형태를 띠”게 하는데, 이는 “임금체계를 통해서 노동자는 자신의 이해가 자본의 이해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이라고 이해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자본은 자본과 임노동간의 이해를 “구별이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며, 이것이 “자본의 임금체계관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다. 신임금제도는 바로 이런 성격을 기본으로 “임금수준 관리에 임금체계 관리를 가능한 한 깊게 개입시키는 데 있다”고 그 성격을 진단한다.
따라서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전술적 대응도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에 기초하여” “자본의 임금정책과 마찬가지로 이중적 전술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금구성항목은 이제 기본급 하나가 아니라 노동의 이해를 반영하는 임금(이것을 ‘생활급’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 노동자의 이해는 ‘생계유지’에 있으므로)과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임금(이것을 ‘노동급’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 자본의 이해는 노동지출의 결과에 따른 ‘이윤’이므로)의 두 가지 항목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논문 p84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생활급은 생계비를 기준으로 노동급은 노동지출을 기준으로 하고 이 두 가지 항목으로 된 임금체계가 노동조합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강신준 교수는 이와 같은 논리 전개를 통해 귀결한 「생활급 +노동급」이라는 정책을 노동조합의 ‘신임금정책’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노동조합의 임금정책이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에 기초하여 이중적 전술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임노동 관계의 이중적 구조’라는 전제의 논리전도를 앞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첫 단추로부터 마지막 단추가 가는 길이 어디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생략한다.
둘째, 노동조합의 「생활급+노동급」이라는 “이중적 전술구조는 바로 자본의 이중적 전술구조에 대한 가장 유효한 대응체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신임금 정책’의 제안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이 전술이 어떻게 ‘가장 유효한 대응체계’일 수 있는가? 이 신임금정책 전술이 어떻게 “지금까지의 기만의 수단(자본의 「생활급(또는 연령급)+직능급」이라는 임금관리 정책)이었던 것이 해방의 도구(“노사협조주의를 구조적으로 차단하는”)”로 되게 하는가? 여기에 변수는 단 한가지이다. “임금수준관리와 임금체계 관리의 단위가 동일해야만 하며”,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노동조합의 조직형태의 기준은 노동자의 배타적인 이해를 기준으로 하는 것 여기서 우리는 강신준씨의 노동조합관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서술은 충분하지 않으므로 생략하며,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첨부한다. “노동조합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임금제도가 만들어낸 산물로써 재산이 없는 임금소득자가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로서 행동할 때에 느끼는 경제적인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명확한 방어전략의 일환이다.” 모리스 돕, ꡔ임금론ꡕ, 강신준 역, 거름, 1983, p171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개량도 노동조합의 투쟁에 의해 쟁취될 때만 노동조합의 이해를 확장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기업별 노동조합보다 바람직한 조직형태로 인식되고 있는 산별노조도 투쟁 없이는 정권의 관리 체제의 하나로 전락한다. 따라서 그 어떠한 전술도 자본의 논리에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거나 대응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신임금정책의 ‘노동급’이 생산성 임금론 또는 성과급(또는 직능급)과 본질상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생활급+노동급」의 임금체계가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 이에 대한 관념적 치장을 벗기고 나면 - 노동자가 노동력의 가격으로써의 생활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가격에 포함되지 않은 노동력 지출부분에 대해(즉 노동능력에 대해)서조차 임금을 지급받는다는 논리를 노골적으로 보다 눈에 띠는 형태로 선전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즉 노동자는 노동력의 제 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받는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
강신준씨는 여기에 ‘노동급’이 자본의 ‘직능급’과 다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신임금제도에서의 노동급은 노동지출의 결과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노동지출의 ‘결과’는 개별 자본이 평가하기 어려우며 정확한 직무분석과 생산성 분석에 의해야 하므로 이것은 개별 자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신임금제도의 직능급=노동 지출의 가능성=개별자본의 평가」, 「노동조합의 신임금정책의 노동급=노동지출의 결과= 개별자본의 통제 벗어남」이라는 도식은 어떤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이 도식이 옳다고 하더라도 신임금정책의 노동급은 “직무분석과 생산성 분석”에 따른 생산성 임금이 아닌가? 여기서도 앞에서 살펴본 잘못된 첫 단추처럼, 잘못된 전제하에 신임금정책의 ‘노동급’이 자본의 ‘직능급’과 다르다고 자족하고 있다.
이상의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신임금정책’이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적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소위 노사협조주의가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정책이 아니라 그 품안에 안겨버린 정책이었음을 밝혔다. 그래서 “직능급 제도를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개량적 전술의 대안을 모색했지만” 그것이 노동조합의 대안이 아니라 “건강한 자본․임노동 관계”를 꿈꾸는 의욕의 과다함으로부터 탄생했음을 아쉽게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할 일은 “직능급 제도를...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간 경쟁 격화, 개별화, 노동강도의 강화를 노리는 직능급 제도를 비롯한 경영합리화전략 전체에 대해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한/노/정/연

1995-09-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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