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현장에서 미래를 > 논쟁-쟁점 > 목록보기 > 글읽기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
 - 헤즈볼라 들춰보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
무자헤딘

정세와초점/

1.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한 의문점

표면적으로는 자국 병사 2명을 납치한 아랍무장단체 헤즈볼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규정했고 그 근거지를 폭격했다. 그리고 전투병력을 동원해 근거지 접수작전을 펼쳤다. 문제는 헤즈볼라의 근거지가 이스라엘이 아닌 레바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국경을 넘은 것은 명백한 전쟁이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는 분명히 자국의 영토가 침범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에 대해서 무력대응을 비롯한 실질적인 행동을 안하고 있다. 통상적인 외교적 항의 외에 이 문제를 UN이 해결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레바논의 미온적인 반응은 자국 내의 분쟁을 오히려 제3국의 전쟁처럼 방관하는 모습으로 비춰져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선 레바논정세의 특수성과 의외성이 제국주의의 중동침탈과 민중을 이반하는 아랍친미정권의 폭력성을 통해 나타났음을 이해해야 한다.

2. 제국주의 유산이 낳은 분쟁의 씨앗

우선, 중동을 포함한 아랍 지역은 약 600여 년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봉건적 이슬람 통치하에 있었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이슬람의 원리에 충실했으나 정치, 경제는 세속적이었던 투르크계(현재 터키인) 정권인 오스만제국에 대해 아랍인들이 큰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무하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중동을 포함한 아랍지역은 지배계층의 변동은 빈번했으나 이슬람원리에 따른 사회통제는 약 1500년 가까이 유지됐다. 중동지역을 거쳐간 이슬람왕조의 지배계층은 아랍족, 투르크족, 페르시아족, 위그르족, 몽골족 등이 있다.

그런데 18세기를 전후로 하여 서구제국주의의 팽창에 따른 열강의 침탈과 내부적인 정치변혁 운동에 맞물려 발칸반도, 중동, 북아프리카에 걸쳐있던 오스만제국은 차츰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 해체과정에서 각 서구열강들은 구 제국의 속령이었던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아랍인들의 민족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서구 근대 민족국가 개념이 도입되면서 바야흐로 아랍민족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대두하게 된다.
문제는 최소한 아랍인들은 중동이건 북아프리카이건 간에 같은 언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문화공동체라는 점이다. 애초에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지역이라 아랍민족주의는 초기에는 몇몇 혁명적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논의되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통치력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동안의 갈등관계였지만 제국통치아래서 잠잠했던 종파대립과 지역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19세기말 아랍권의 정세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서구제국주의는 아랍식민지 선점을 위해 부족갈등을 부추기게 된다. 영국은 이집트, 팔레스타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예맨, 오만 등의 지역을,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레바논, 시리아등의 지역내 유력부족들을 포섭해 이들을 반오스만제국세력으로 지원하면서도 서로의 경제이해에 따른 갈등관계를 조장하고 심화시켰다. 이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는 아랍권내의 부족 간의 충돌을 부추기면서 아랍권을 분열시켰다. 이는 1차 대전 후 아랍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과정에서 아랍의 단결을 꾀했던 운동들을 탄압하고 위임통치라는 명목으로 아랍에 국경선을 긋고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아랍식민지 나눠먹기식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슬람의 중심인 메카에서 샤리프 후사인이 전 아랍 민중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다마스쿠스(지금의 시리아 수도)에서 아랍왕국의 독립을 선포했던 것을 서구열강은 철저히 무시했다.
애초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의 배후를 교란할 전략으로 아랍의 반터키 대영국 협력의 군사활동을 지원했을 뿐, 아랍반란이 독립으로 가는 것에는 매우 기만적으로 배신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915년 10월 전후 오스만제국에서 아랍의 독립을 약속하는 ‘맥마흔선언’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 H. 맥마흔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한 선언. 그러나 이것도 영국, 프랑스는 위임통치령 안의 국경선을 정해 각각의 독립만을 승인했다.
을 발표한지 1년도 채 안된 1916년 5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 러시아는 흑해 남동지역을 각각 차지한다는 터키 분할의 밀약 ‘사이크스 피코협정’ 1916년 5월 영국 대표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조르주 피코가 터키령인 아라비아 민족 지역의 분할을 결정한 비밀협정. 그러나 영국은 아랍민족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 약속을 한 뒤였으므로, 이중외교·비밀외교라 하여 1917년 밸푸어선언과 함께 그후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을 체결했다. 또 1917년 11월에는 팔레스티나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밸푸어선언’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J.밸푸어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 선언. 밸푸어는 그것을 시오니즘운동의 재정적인 후원자인 로스차일드경(卿)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여기서 영국이 노린 것은,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 측으로 끌어들이고 아울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입식(入植)을 통하여 중동정책의 포석을 굳히려는 데 있었다. 이 선언은 1920년 산레모회의에서 영국의 정식 정책으로 채택되었으며, 1922년 국제연맹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결정하였을 때, 그 전문(前文)에 이 선언이 포함되었다.
을 발표함으로써 중동분쟁의 불씨를 뿌렸다.

3. 거대한 이데올로기 괴물,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영국이 이 같은 모순된 정책을 강행한 것은 아랍 세계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영국계 시온주의 식민지가 일종의 군사요새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 군사요새는 서쪽으로는 수에즈운하를 확실히 지배하고 동쪽으로는 영국령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서 생산되는 석유 공급을 확실히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전국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면서 전후 중동지역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다. 그 결과 아랍인의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하나의 아랍공동체 설립을 위한 아랍민중의 운동은 좌절을 겪게 되고 위임통치라는 또 하나의 식민지 통치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정치적 무장해제 속에서 제국주의의 사냥개가 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시오니즘이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시작된 유대인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사상 및 운동으로써, 시온은 성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언덕 이름이다. 로마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 이후, 유랑의 아픔과 종교적 박해를 당해 온 유럽의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약성서의 ‘시온의 땅’이란 종교적신성성과 함께,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를 중심으로 거세진 유대교도에 대한 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유대인국가건설이라는 현실적 영토의 개념이 결합되면서 해방의 희구로써 시오니즘이 탄생되었다.
유대민족의 국가수립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은 1897년 헝가리 출신 T. 헤르츨에 의해 준비된, 제1회 세계시오니스트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유대민족을 위해 공법으로 인정받는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한다>는 것을 결의한다.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7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의 향토 건설에 대한 보장(밸푸어선언)을 영국으로부터 받아낸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된 1920년 이후부터 유대인 전입을 추진했다. 1930년대 나치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이주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한편 팔레스타인에서는 시오니스트기관이 비유대교도인 아랍주민에 대해 토지 몰수와 노동 기회의 박탈을 추진함으로써 시오니즘 세력과 아랍이 대립되었는데, 이것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동요시킬 정도로 격화되었다. 1940년대로 들어서자 시오니스트들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유대인국가 승인을 위한 국제적 교섭에 힘쓴 결과, 1947년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 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쌍방에 주권을 부여한다>는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를 얻어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된 다음날 이스라엘국이 수립되어 시오니스트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유대인국가 건국에 앞장선 시오니즘무장조직은 아랍주민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자행하며 그들을 몰아내고, 무인화된 아랍인들의 촌락을 합병하여 유대인국가의 팽창을 기도하였다. 이것은 압도적 무력으로 아랍 적들을 쳐부순다는 시온주의 독트린이 유혈낭자하게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유대교도 이외는 용인하지 않는 종교적·배타적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시오니즘은 이스라엘 건국 후에도 국가 이데올로기의 기둥으로 존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영토회복이라는 종교적 열광에 사로잡혀있는 시오니스트 개정파들에게 영토확장을 위한 무력사용을 끝없이 충동시키는 전형적인 사상이 되었다. 1975년 아랍국가들은 동유럽과 제3세계국가들의 지지를 받은 유엔총회에서 ‘시오니즘은 인종주의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1991년 총회에서는 이 안이 폐기되었다.


4. 서방의 일방적 이스라엘 편들기의 궁극적인 원인

중동에서의 패권을 잃지 않으려는 제국주의 전략이다. 과거에는 영국, 프랑스였고 2차대전 전후로는 미국이 주도적인 이권을 이곳에 두고 있다. 이권의 핵심은 석유다. 대체적으로 중동지역 석유이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했던 국가들은 미국과 원만한 관계들을 유지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레이트, 카타르, 바레인 등등.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국가들은 미국과 팽팽한 긴장관계였다. 이라크, 이란, 리비아 등등. 최근 이라크는 미국의 직접적인 침공으로, 리비아는 카다피의 실용주의 외교노선으로 전환, 친미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OPEC의 입김을 약화시킴으로써 원유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1972년 시작된 오일쇼크를 통해 미국은 아랍의 단결이 자신들의 패권에 심대한 도전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친미적 중동국가들은 대체로 이스라엘과 협력적인 외교관계로 돌아섰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미국이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의 후원자라는 사실이 가장 큰 원인이다. 미국의 닉슨 정부는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재정 지원을 확대했다. 닉슨 정부 이후의 역대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을 '대리인' 또는 '전략적 자산'으로 여겼다. 이스라엘을 이용해, 아랍 세계가 항구적인 공포와 굴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20세기 말까지 미국이 이스라엘에 제공한 군사·재정지원은 최소 1천억 달러(한화 약100조원)이상이라 한다.

21세기에는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이데올로기에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추가됐다.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중동 정책의 핵심인 ‘신보수주의’(네오콘) 전략은 중동 전체를 미국의 이익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주의 정권들과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을 뿌리 뽑고 싶어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주적 선출과 위임을 받은 하마스정부를 미국·영국·이스라엘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미국은 이라크전의 경험을 통해 중동에서의 직접적인 전쟁이 얼마나 많은 비용과 자원을 필요로 하는지 자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확실한 동맹국을 이용하여 중동을 장악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팽창을 보장해주면서 자신들은 중동에서의 패권을 대리해줄 충실한 사냥개 역할을 이스라엘이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번 레바논 침공사태가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5. 미국과 이스라엘은 왜 헤즈볼라를 두려워 하는가?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에 맞서 1982년부터 시작된 저항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그리고 2000년 5월 마침내 저항운동이 이스라엘을 축출했다. 그리고 이런 헤즈볼라의 비타협적 투쟁노선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헤즈볼라는 비교적 협소한 이슬람주의 강령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레바논 남부에서 쫓아내고 1967년 이전(즉,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지방과 가자지구와 골란고원을 점령하기 전)의 국경선까지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정부 내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고 레바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류 정당으로 변모했다.

헤즈볼라의 지지 기반인 시아파 공동체는 레바논 내에서 가장 큰 집단이자 가장 소외된 집단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레바논의 정치·경제 영역에서 배제 당했다. 헤즈볼라의 정치는 시아파 이슬람주의(이란의 그것과 비슷한)와 반제국주의, 그리고 레바논 민족주의를 결합시킨 것으로, 여타의 제3세계 해방운동들과 유사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헤즈볼라의 도전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을 막지 못한 탓에 대중의 경멸을 사고 있는 아랍 정권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수많은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을 보며 자국 정부가 미국과 서방의 앞잡이라고 여기고 격분한다.
그리고 헤즈볼라의 근거지인 레바논 남부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강제 이주당한 레바논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이곳은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그 곳 또한 공공 서비스가 닿지 않는 가난한 지역들이다. 이러한 모습은 아랍 부르주아들이 초호화 레스토랑과 쇼핑을 즐기러 오는 서구화된 베이루트중심가의 모습과는 대조된다. 기독교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레바논정부는 자국내 이슬람인 들을 거의 방치하다 시피 했고, 그런 헤즈볼라는 아랍민심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정부와 대립하게 된다.

이 와중에 내전과 외국의 간섭침공 등으로 레바논은 중동갈등의 국제적인 대리 장소가 되었다. 이런 오랜 전쟁과정으로 이슬람 아랍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레바논 정부는 이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고, 이런 역할을 헤즈볼라가 맡아오면서 민중들은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헤즈볼라가 운영하는 전국의 병원·학교 등의 시설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뿐 아니라 헤즈볼라는 인기 있는 TV 채널과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군사·사회 조직들을 통해 헤즈볼라는 “국가 안의 국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레바논정부에게는 헤즈볼라는 자신들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작은 소국이다. 따라서 이는 기독교계 정부에겐 심각한 위협이다. 레바논 정권의 중심축이 기독교계 마론파가 장악했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자국 이슬람 아랍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해옴으로써 친미적인 정권의 성격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이스라엘 침공에 대해서 레바논정부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6. 우리는 헤즈볼라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헤즈볼라는 꺼져가는 중동내 반제국주의 운동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침공의 정당성으로 들먹이는 자국병사의 납치문제는 최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포위공격과 관련이 있다. 헤즈볼라는 아랍각국이 외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 끌고 나와 이를 비타협적 투쟁으로 전개해야 함을 행동으로 보여줬던 것이다.
과거 냉전시절에 각 아랍각국들은 이스라엘과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점차적으로 그 뒤의 배후세력인 미 제국주의의 존재를 체험하면서 점차 대이스라엘 정책의 수정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대 팔레스타인에 대한 범아랍적 차원의 연대의 끈은 지금 현재로서는 거의 끊어진 상태다. 또한 PLO도 이스라엘 축출에서 공동영토 내의 2개 국가, 그리고 이스라엘내의 자치정부수립으로 조직노선이 온건화 되면서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로 선회한다. 그러나 이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이탈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내부의 각가지 분파로 분열을 가져왔으며 중앙조직은 점차 서구제국에 대한 의존현상을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지역의 주민분리 정책과 가자지구 봉쇄에 PLO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수십만의 팔레스타인난민들이 발생했다. 그중의 상당수가 레바논으로 유입되었다. 그것은 바로 헤즈볼라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 아랍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헤즈볼라는 아랍형제로서 연대하고 있는 활동으로 난민들의 발길을 레바논으로 향하게 했다. 이는 필시 팔레스타인의 대표기구인 PLO의 타협주의 노선에 대한 무언의 비판 또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현재 헤즈볼라의 무장투쟁은 단순히 이스라엘 시오니즘에 대한 저항뿐 아니라 꺼져가는 범 아랍민중의 투쟁의 불씨로 복원해야 한다. 비록 헤즈볼라가 계급적 대립보다는 종교적 대립에 따른 저항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동정세에서 종교적 차이에 따른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면 헤즈볼라의 무장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할 수 있는 방안이 고민되어지는 시점이다. 왜냐하면 레바논 전쟁이 평택 미군기지와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 한반도를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평택기지로 인해 한국도 이스라엘과 같은 동북아에서의 미 제국주의 사냥개 역할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지금 중동에서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을 좌절시켜야 한다. 아울러 향후 한미FTA와 관련해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확장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군사적 표현으로써 한반도에 미치고 있음을 상기하며 헤즈볼라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이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님을 주목하자.

2006-09-03 14:01:10

의견글쓰기 프린트하기 메일로 돌려보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