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너부리의 다른 눈으로 보는 세상
정 반대로 읽어보는 버틀러의 두 면
너부리 / 진보넷 블로거
I. 보편성의 토대적 아포리아, 그리고 특수와 보편의
번역실천으로서 페미니즘: 다시 본 주디스 버틀러
주체-입장, 보편성, 이론의 정치적 기획
주체-입장과 관련하여 보편성은 최근 사회이론에서 논쟁적인
토픽들 중 하나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보편성”을
교조적으로 활용했음을 주목해 온 좌파 담론들에서 “보편성”
문제는 아마도 가장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 “보편적”인
것이라 명명된 것이 사실은 지배 문화의 편협한 속성이며,
“보편화가능성”이란 제국적 팽창과 분리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지만, 이론의 정치적 힘이란 그
스스로를 혹은 그것이 만들어낸 개념들, 어휘들, 이데올로기들,
지식-주장들(knowledge-claims)을 “진리”로 유통시키는 역능에
좌우된다. 달리 말해, 이론의 정치적 힘이란, 이론이 특정
집단의 특수한 이해(관계)들을 “보편화”할 수 있는 이론의
능력에 달려 있다. 루이 알튀세르가 지적한 바대로,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해내는 기능을 지닌 이데올로기가 그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성을 드러낼 때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이기를
멈춘다.
버틀러가 보기에, 페미니즘을 포함한 급진주의는 자신의 기획이
미리 전제하고 있는 가정들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이론의
경우 이러한 급진적 심문은 때로 이론이 취하는 초월적
형식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기본 전제들 중 하나인
“여성” 개념부터 심문하는 버틀러의 작업은 “보편적”
개념으로서 “여성”-주체가 구성되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
다시 물을 것을 당연히 요구한다. 그리고, 개념적 지반
자체서부터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그 지반을 추방하거나
검열하는 것은 아니다.
버틀러는 스스로를 “진리”로 유통시켜야만 하는 정치 기획들이
노정하는 보편주의적 입장들이 노정하는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아포리아에 천착하는 페미니스트
철학자이다. 그녀에게 보편성이란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정치 기획들이 주장하는 “보편성”들은
경합중이다. “보편성” 획득을 위해 경합중인 특수성들은
폐제[2] 메카니즘을 통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태어난다.”
여성 (주체), 보편성, (페미니즘) 이론의 정치적 기획들과
관련하여 버틀러의 입장은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이다.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논쟁 심장부에서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보편화된”
범주를 다시 본다(revision). 버틀러의 작업들은 여성이라는
용어/개념을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으로 사용했을 때
부딪히게 되는 아포리아에 대한 철학적 재검토로
응축된다.
서구 (주류) 페미니즘의 대표 논객 쥬디스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
여성들을 단일한 한 집단으로 본질화시키는 것은 진보든 보수든
남성들의 뻔한 수법이자, 페미니즘이 그 역사적 진화과정에서
빠졌던 이론적 덫이기도 했다. <젠더 트러블>(1990)에서 <젠더
해체하기>(2004)에 이르는 쥬디스 버틀러의 이론적 정치적
천착은 사회적 규범들과 가치체계들을 어떻게 해체하여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다. 물론, 본질화하는 토대없이, 그런
토대들에 기댐없이 말이다.
서구 (주류) 이론 논쟁의 중심인물이었던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을 거칠게나마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1] 성차가 강렬한
개념적 긴장 지점으로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1980년대 후반)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과 육체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젠더
트러블>의 핵심 논의 중 하나는 젠더 수행성이다. 젠더
수행성이란 개념은 1970년대와 80년대 페미니즘 이론 논쟁의
핵심지점들 중 하나이자 동시에 교착지점을 형성했던 구성(주의)
대 본질(주의)가 지닌 담론적 덫들에 유익하고 생산적인
해독제를 제공한 바 있다. 버틀러에게, 몸이란 수동적인 구성의
장소가 아니며, 성차는 “경계 개념”(border concept)이다.
경계 개념으로서 성차는 “육체적(somatic), 심리적 사회적
차원들을 지니며, 이 차원들은 결코 서로 겹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궁극적으로 변별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버틀러는 이론적 재검토의 시선을 몸 자체로
돌린다. 몸이란 사회적인, 개인적인 힘들이 투쟁하는 지점이자,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 반복을 통해서 그 규범들의 물질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중요한 물질인 몸>(1994)은 젠더
수행성에서 더 나아가, 이 책의 부제가 시사하는 바대로,
“섹스에 부과되는 담론적 한계들”을 강조하고자
“물질화”(materialization)를 자세하게 논의한다. 버틀러는
몸의 물질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발상으로
시작한다. 몸의 물질성이란 오히려 구성되는(constituted)
것이고 성취되는(achieved) 것이다. 그리고 섹스란 사회적
규범이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섹스는 규율적인 실천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섹스란 “하나의 규율적 이상”(ideal)이기도
한데, 섹스는 훈육적(disciplinary) 권력과 규율적(regulatory)
실천들을 통해서 그 규율적 이상이 특정 (종종 헤게모니적이고
이성애적인) 방향으로 물질화되도록 하는 규율적
이상(ideal)이다. 이상으로서 규범이란 규율적이다. 규율적인
규범들은(regulatory norms) “이러한 규범들의 강제적 반복”에
의해서 몸속에 물질화된다. 여기서, 반복(reiteration)이란
동일한 것을 복사(replication)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지닌
반복(repetition with difference)이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신체란 항상 잉여와 잔여를, 즉 훈육적 권력의 온전한 포착과
포섭을 벗어나거나 그에 걸리지 않고 남는 지점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섹슈얼리티에서 가장 극명하게 증명된다.
“섹슈얼리티는 규율적 권력의 이런 저런 작동의 효과들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잉여를 지닌다.”
물질성, 물질화를 이렇게 재개념화함으로써 버틀러는 주체를
언어의 산물로 환원하는 작태 (라캉 및 일부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스트 포함)에 반기를 들면서,
“구성성”(constructedness)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즉
“구성적인 제약”(constitutive constraint)과 “규범들의 반복
과정”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포함한 정치
기획들이 제출한 “보편성”들이 경합하는 과정과도
동외연적이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루스 이리가라이를 따라
여성적인 것이 서구 철학의 구성적인 외부(constitutive
outside) 즉 서구 철학의 “내부”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작위적 외부라고 논의했다면, 버틀러는 레즈비언/게이(즉 퀴어)
주체들을 이성애적 체제의 구성적 외부라고 덧붙인다. 구성적
외부란 체계의 외부라고 인식되지만 실은 그 체계의 통합적
일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구성적 외부”라는 개념은 (어떤
주체-입장의) “보편성”이 “태어나게” 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면서도 동시에 그 필요의 흔적을 기필코
지워야 하는 “보편성”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보편성”은 역사적 특수성에 기반해서 “태어나면”서도 그
특수성을 말소해야 존재가능해진다. “보편적인” 어떤
주체-입장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폐제되는 “구성적
외부”에 착목함으로써 버틀러는 “보편성”이 지워버린 역사(적
특수)성을 다시 상기시킨다.
특수와 보편의 번역실천으로서 페미니즘
<중요한 것은 물질인 몸>이 섹스(에 부과되는 담론적 한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젠더를 해체하기>(Undoing Gender,
2004)는 젠더를 포함한 사회 규범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는 “문화적 수행, 즉 남근이성중심주의
및 강제적 이성애와 같이 우리에게 정의를 부여하는(defining)
제도들에 기반한 경쟁하는 권력 관계들의 효과들”이다. 이러한
것으로서 젠더는 하기(a doing), 즉 “알거나, 하려고 함 없이도
수행되는 끊임없는 행위”이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젠더는
“남성적이니 여성적이니 하는 것들이 생산되고 물질화되도록
하는 장치”(apparatus)이자, “규범들을 설치하려 하고,
헤게모니적 심급을 자연화하면서그 헤게모니적 심급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가능성을 애초부터 폐제하는 권력의
규율적 작동을 수행하는” 강력한 장치이다. 그렇다면, 젠더를
해체하는 것은 변혁적이고, 대항헤게모니를 벼리어 낼 수 있는
전복적인 실천이 된다.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를 해체하기>에 이르는 버틀러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천착한다. 자격과 권리를 박탈당한 집단이
“보편성”을 주장할 때, 혹은 자기들도 (기존) “보편성”의
범위에 고유하게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예컨대, 여성들의 주장은 좀더 광범위하고 보다
근본적인 “보편적 여성”을 미리 전제하는가? 새로운
보편성(예컨대 페미니즘의 “여성,” 성차, 젠더)은 마치 그것이
어쨌거나 참된 것이었다는 것처럼 보이는가? “제2의
성”으로 단일하게 간주되었던 “여성”이 인종-문화,
섹슈얼리티, 계급, 종교 등을 따라 핵분열하면서 이론이자
실천으로서 페미니즘이 진화해 왔던 역사적 과정이 보여주듯,
“여성”을 새로운 “보편”으로 설정하는 것이 모든 여성들에게
“보편적” 효과를 생산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집단 권리를
확장하는데 적절한 한계들 및 국민 주권을 두고 벌어지는 현재의
투쟁들 중 많은 것들에 이러한 “보편화하려는” 주장들의
수행적 효과들이 획일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배제되고
주변화되어 온 이들의 “보편성” 주장은 종종 모종의 수행적
모순을 생산한다. 버틀러의 전체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페미니즘 내부에서 일어난 “보편성”의 이런 수행적 모순에
관한 분석이다.
지금-여기의 구체적인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중층결정된 어떤
주체-입장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립하려는 수사(rhetoric)와,
그러한 주장들에 대한 인식에 은근하지만 농밀하게 녹아있는
일군의 규범들은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씨름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게다가, 무엇이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어야 하고 어떤
것은 그런 주장이어서는 안 되는지, 누가 주장을 하는지, 그
주장은 무슨 형식을 취해야 하는지를 역사적으로 특수한
지금-여기의 맥락에서 다시 따져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 아무런 문화적 합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주장이 효과를 내고 합의를 강제하고, 특정
주체인 “우리”를 “보편주체”인양 수행적으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주장은 일군의 번역을 거치게 된다. 또한
“우리”의 주장은, 여러 “보편적” 주장들이 경합하며 그
의미와 힘이 만들어지는 다양한 수사적(rhetorical) 문화적 맥락
속에서 펼쳐지기 마련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것은 그 어떠한
“보편성” 주장도 문화적 규범 및 힘들의 관계와 동떨어진 채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사회적 장에서 규범들이 경합
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규범들을 통해서 설정되는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번역(translation)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주장도 가능하지 않다. 번역 없이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경계들과, 특수성들이 지닌 차이들을
가로질러 “보편적”이 되지 못한다. 역사가 일러주듯, 번역이
없이는, 보편성 주장이 경계들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식민적 확장주의적 논리를 통해서일 뿐이다.
“보편적인” 범주들로서 여성과 젠더를 해체시키는 버틀러에게
주체구성과 주체-입장(subject-position)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즉 열린 기획으로 남아있다. 문화적 번역과 경합의
견지에서 (페미니즘의) “보편성”과 페미니즘 정치 기획의
주체로서 여성들을 어떻게 더 심도있게 다시 무대에 올려놓을
것인가는, 특수성을 지닌 정황적(situated) 주체들인 우리
각자의 몫이다. 여러 사회 운동들 간에 어떤 공통적 기반이 있을
법한지를 살펴보되 이러한 기반을 초월적인 토대들에 의지하지
않은 채 발견하고, 공동의 정치 기획을 생산, 실천하는 것
말이다.
II. 주디스 버틀러: 행동교섭능력을 중심으로 보면*
- 담론적 주체와 종속욕망에 좌우되는 행동교섭능력
(이 부분은 필자의 동의를 얻어 수록한다. 원래는 중앙대
대학원 신문 (2006/9/20)일자에 실린 원고다.)
앞의 논의 <보편성의 토대적 아포리아: 다시 본 주디스 버틀러>
와는 사뭇 다르게, 버틀러의 행동교섭능력agency 개념
및 종속화욕망 분석을 초점에 두고 다시 다르게 본
버틀러.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을 변별적이며 때로 사안에 따라서는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주체-입장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대신,
“여성”과 같은 변별적인 집단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를 심문하면서, 예컨대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혹은
“여성들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본질주의적 정체성 관념을 철저히 반대하는 버틀러는 초기
작업의 주요 천착지점이기도 한, “제2의 성”으로서 단일체인
여성 개념의 해체가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주체[즉 여성]을 해체한다고
해서 그 단어의 사용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과
같은 용어들/개념들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자는 것이다.
‘행동교섭능력’(agency)과 같은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역설적으로, 여성들이라는 범주를 고정된 지시대상으로부터
풀어놓을 때이다.”
행동교섭능력, 종속욕망, 주체에 가해지는 담론적 한계들
Agency, Desire for Subjection, and Discursive Limits on
Subjectivity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을 변별적이며 때로 사안에 따라서는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주체-입장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대신,
“여성”과 같은 변별적인 집단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를 심문하면서, 예컨대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혹은
“여성들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본질주의적 정체성 관념을 철저히 반대하는 버틀러는 초기
작업의 주요 천착지점이기도 한, “제2의 성”으로서 단일체인
여성 개념의 해체가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주체[즉 여성]을 해체한다고
해서 그 단어의 사용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과
같은 용어들/개념들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자는 것이다. .
. . ‘행동교섭능력’(agency)과 같은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역설적으로, 여성들이라는 범주를 고정된
지시대상으로부터 풀어놓을 때이다.”
버틀러는 의미, 개념, 정체성, 주체성을 “다중적인 의미화에
열어”두면서 재의미화(resignification)하는 실천을
행동교섭능력으로 정의한다. 버틀러 식 재의미화 실천은 몸,
젠더, 섹스에 관한 재개념화이기도 한데, 버틀러는 이러저러한
정체성보다는, 사회적 규범들과 헤게모니가 몸에 아로새겨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버틀러에게 몸은 수동적인 구성의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인, 개인적인 힘들이 투쟁하는 지점이자,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 반복을 통해서 그 규범들의 물질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성차는 “경계 개념”(border concept)이다.
경계 개념으로서 성차는 “육체적(somatic), 심리적 사회적
차원들을 지니며, 이 차원들은 결코 서로 겹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궁극적으로 변별적인 것도
아니다.” 1980년대를 사로잡았던 구성주의 대 본질주의 논쟁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교착 상황에서 제출된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및 수행적 주체 개념은 “본질”이든 “구성”이든
고착화된 (여성) 정체성 문제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매우
해방적인 개념으로 다가왔다.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에서 보자면 <중요한 물질인 몸>(1994)은
담론중심적 전환을 매우 확실하게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의
부제가 시사하는 대로, 이 책에서 버틀러는 “섹스에 부과되는
담론적 한계들”을 강조한다. 형이상학의 토대인
실체(substance)를 거부하는 버틀러는 우리의 몸은 사회적
규범들이 강제적인 반복에 의해서 물질화되는 지점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몸의 물질성이란 오히려 구성되는(constituted)
것이고 성취되는(achieved) 것이다. 섹스란 사회적
규범이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섹스는 규율적인 실천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섹스란 “하나의 규율적 이상”(ideal)이기도
한데, 섹스는 훈육적(disciplinary) 권력과 규율적(regulatory)
실천들을 통해서 그 규율적 이상이 특정 (종종 헤게모니적이고
이성애적인) 방향으로 물질화되도록 하는 규율적
이상(ideal)이다. 이상으로서 규범이란 규율적이다.
버틀러의 젠더, 섹스, 몸 재개념화 작업이 지닌 (담론적 영향과
파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와 윤리적 함의에서 보자면,
버틀러의 주체관과 행동교섭능력 개념은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주체는 담론의 매개에 의해서만 구성되며, 젠더는
“수행적”인 것이지만 담론이 부과하는 한계들에 내에서
수행되는 그런 “하기”(a doing)이다. 사회적 규범들의
강제적인 반복에 의해서 성차화된 몸에 부과되는 한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론적이다. 즉, 몸이든 섹스든 젠더든
정체성이든 담론적으로 구성된 경계들에 의존하지 않는
지시대상은 없다. 모든 관계들이 담론적으로 매개되는 것이며,
주체(성)는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라는 것. 이로부터 버틀러는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을 “지속적인 개방성과 재의미화
가능성”으로 정의한다. 즉, 담론 안에서 담론을 통해서
생산되는 주체는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 속에서
발언함으로써 행동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은 재의미화 실천, 즉 언어적/담론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정치와 윤리에서 중요한
항목들인 자기결정, 선택, 책임성, 자율성은 진지한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때문에 버틀러의 주체관과 행동교섭능력 개념은 수많은
이들의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 윤리
철학자인 세일라 벤하비브는 버틀러가 주체를 언어의 단순한
효과로 환원하였으며, 적극적 의지, 윤리적 의도, 자기성찰성,
자율적 자아 등을 와해시켜버린다고 비판한다. 벤하비브가
보기에, 주체가 사회적 담론을 통해서 생산된다는 버틀러의
주체관은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여성들에게 힘과
권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목적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주체의 행동교섭능력 자체도 담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버틀러는 <중요한 것은 물질인 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행동교섭능력이란 “기표 안에서 기표에
의해서 구성되는 이중의 움직임이며, 여기서 ‘구성된다’는
것은 그 기표 자체를 ‘인용하거나 반복하거나 모방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버틀러에게 행동교섭능력이
가능해지는 조건은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담론적 실천들을 다시
실행하고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된다. 또한
행동교섭능력이란 “담론이 갱신되는 국면들에서 정확하게
발견된다.”
기존의 권력 관계 담론들의 제약과 법칙들 속에서 작업함으로써
이러한 담론들을 재의미화하고 새로운 전복지점들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전복이란 언제나 내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에게 내부는 현실의 권력관계들이라기 보다는
담론의 내부다. 또한, 담론 내부의 과정에서 발휘되는
행동교섭능력이란 그것을 발휘함으로써 차후에 따라 일어날
행위들의 원인도 아니고 주체의 역능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담론적 조건들의 효과인 셈이다. 그렇다면, 담론을 통해서
생산된 것인 주체로 하여금 권력 관계의 전복을 시도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주체는 재의미화를 시도하는가? 주체도
재의미화도 담론 안에서 생산되고 갱신되는 효과들이라는
버틀러의 개념 틀은 이런 질문을 묻게 만들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1997년 저작 <권력의 심리적 형식>은 주체가 왜, 어떻게
헤게모니 담론들에 저항하고 전복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한 버틀러 나름의
답이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푸코와 프로이트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사회적 권력과 심리적 현실의 이중적 작동을
설명하는 행동·교섭능력 이론을 제시한다. 즉 푸코의 생상적
권력이론에 정신분석학의 통찰을 들이대고, 정신분석학의
주체이론(의 기본가정은 "주체는 폐제에 기초하여 탄생한다"는
것인데)에 푸코의 통찰을 들이대면서, 왜 억압받는 자들도
스스로의 억압을 수긍하고 욕망하는가 하는
문제(subjection[3])를 탐구한다. <중요한 물질인 몸>에서
출발점이 ‘담론 없는 주체 없다’였다면, 이 책에서는
‘심리(psyche)없는 주체는 없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푸코의 주체이론은, 기계적으로 재생산된 행동이라는 행동주의식
발상이나 동일시 실천들에 착 들러붙어 있는 불안정성들을
이해하지 않는 사회학적 개념인 내면화(internalization)
운운하는 이론이 드러내는 부정합성 때문에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행동·교섭능력의 과녁들과 구역이 될 것들에 미리 한계를
가하는 권력의 작동을 통해서 주체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항상-이미 덫에 걸려 있으며 규율이나
규율이 취하는 종속화의 형태에 맞서는 저항지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서 심리적 생활에 대한 분석이 중요해진다. 주체에게
작동하면서 주체의 욕망을 생산하고 주체의 작동을 제한하는
사회적 규범들이란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들이란 단순히 부과되어 주어진 형식으로 내면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규범이란 그 어떠한 것도 환상(fantasy)의
활성화(activation)없이는 주체에게 작동할 수 없다. 사람이
사회적 규범들이 지닌 환영적 차원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곳,
바로 정확하게 이곳에서 푸코적 분석에 정신분석학이 들어온다:
“주체란 그/녀가 근본적으로 의존하는 것들에 대한 열정적 애착
없이는 출현하지 않는다.” 권력의 작동을 통해서 생산되는
것들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버틀러는 종속화에 대한 심리적
애착을 꼽는다. “권력의 작동은 그것의 심리적 효과에서
분명해진다.” 94년 저작에서 담론적 조건들의 효과이며
재의미화실천에서 드러난다고 여겨졌던 행동교섭능력은 이제
종속의 조건들에 대한 주체의 욕망에 좌우된다.
이렇게 재개념화된 주체의 행동교섭능력은 꽤 부정적이다.
버틀러는 종속화에 대한 주체의 욕망에 좌우되는 행동교섭능력에
내재한 부정성을 분명히 한다. 담론에 의한 주체성의 생산과
주체의 종속 경험은 (권력의 심리적 형식들을 통해서) 긴밀히
연관되며, 이는 모든 주체가 종속되거나 억압당하고 모든
주체들은 억압에 동참, 공모한다는 점에서 유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버틀러의 틀에서는 물질적 사회적
억압이, 모든 주체를 똑같이 종속적 주체로 탄생시키는 담론
구조들로 환원된다는 점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로, 책임성의 문제는 사라지며, 지배와 종속의 분명한
존재와 구분은 녹아버린다. 담론 구조들 안에서 모든 주체는
똑같이 종속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체 여성해방, 노동해방, 소수자 해방, 장애인 해방,
사안에 따라 여러 크고작은 해방들의 주체는 (잠정적이나마)
누구란 말인가? 종속과 안온한 삶이 주는 유혹을 떨치면서
해방을 욕망하는 주체들은 어디로 갔는가?(neobur
i @ jinbo.net)
[1] 버틀러의 이론적 작업 전체에 관한 보다 자세하며 초점이
분명한 논의는 임옥희 저,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주디스
버틀러 읽기>(도서출판 여이연 2006)을 보실 것.
[2] 폐제foreclosure란 말뜻 그대로는 ‘미리 차단해버린다’는
건데,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에 푸코의 권력이론을, 푸코에
정신분석학의 통찰을 들이대면서, 폐제 개념을 말한다. 즉,
폐제란, 어떤 것이 존재하거나 실증화, 심급화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요청되었다가, 그 어떤 것의 ‘주권’,
‘주체성’, ‘권위’, 혹은 ‘권력’을 온전히 그 어떤 것만의
것으로 설립하고 전유하기 위해서 애초에 필요되었던 것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이다. 예컨대, 스피박에 따르면, 서구 근대는
스스로를 지배와 권위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서 제3세계를 타자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고, 제3세계를 타자화하기 위해서(즉 자기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3세계 토착인들의
존재와 설명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이 정당화/권위 및 지배
확립이 마무리될 즈음, 자신들의 정당화 작업에 도움을 주었던
애초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버린다. 그래서, 서구의 근대
서사들에는 ‘지우고도 남은 흔적’palimpsest들이 가득하다.
스피박이 <포스트식민이성비판>에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지웠지만 보이는 이들에게는 보이는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 없이는 불가능했으면서도 (차후에) 그
흔적을 지우고 은폐하려는 무의식적 과정을 일컬어 "폐제"라
한다.
한편 버틀러는 ‘주체는 폐제에 기초해 탄생한다’는 정신분석학
이론의 통찰에 기반해 있다. 버틀러는 폐제로, 동성애금기를
통해서 이성애가 문화적 헤게모니로 설립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타자를 통해서 타자에 의해서 스스로를 규정하면서도, 그 자국을
지우면서 그 타자를 (마치 외부가 있기라도 한 것 마냥) 외부로
쫒아내는 것, 주변화하는 사회적 심리적 메카니즘을
"폐제"라고 한다. 그래서 이 개념과 더불어 나오는 쌍둥이
개념이 ‘구성적 외부’constitute outside이다. 소위
‘내부’의 통합적 일부이면서도, ‘내부’를 ‘내부’이게
만들기 위해서 ‘외부’로 설정하는 것 말이다.
[3] 정치적 행동교섭능력과 구성성의 의미를 띠는
subjectivity와 달리, subjection은 심리적인 함축의미를 띠면서
정체성/주체성을 ‘종속적’으로 구성하는 (권력의 심리적)
형식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