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완성을 위한 자본의 공세
- 정부와 자본의 하반기 계획을 중심으로 -
이 종 탁 / 정세분석실 연구원
1. 국가적 재편을 도모하는 한국 자본주의
자본진영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노태우정권이 그 기초를 닦고 김영삼정권이 왕성하게 추진해온 ‘산업구조조정’이 이제 자본진영의 총체적인 전략으로써 완성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50년을 이어온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할 계획이 자본진영에서 마련되고 있다.
지난 7월 31일 재경원과 노동연구원이 공동주최한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토론회을 필두로 8월 18일과 20일, 23일에 걸친 한국개발연구원의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및 기업 지배구조의 선진화’, ‘경쟁적 시장구조로의 전환’, ‘정부의 역할과 기능 재정립’ 토론회는 이러한 자본진영의 움직임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공간이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시장에 대한 총자본의 구체적 전략이 발표되고 논의되었다.
재경원, 노동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의 토론회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모두가 ‘산업구조조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시장경제의 원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경쟁의 도입과 효율성의 확대라는 논리가 도입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국가의 목표’로 삼으려 하고 있다. 지난 9월 4일 강경식 재경원 장관은 이 내용들을 ‘21세기 국가 개혁과제’라는 이름으로 김영삼에게 보고하였다.
정기국회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하반기 정치일정 속에서 정부와 자본은 지금 자신들이 준비한 내용들을 정치권에서도 인정받는 계기로 삼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정기국회에서는 구조조정을 위한 각 사안들을 입법화하는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상법, 세법, 공정거래법, 그리고 근로기준법, 근로자파견법과 ‘구조조정 특별법’까지.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모든 부르조아 정당들은 스스로가 구조조정의 적임자임을 강변하고 있다. 김대중도 조순도 자신의 경륜과 지식이 구조조정을 위해 쓰일 수 있음을 자랑하고 다니는 지경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국가적 재편을 추진하는 자본의 공세가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상황에서 노동진영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국가의 이익’으로 덧씌워질 자본의 공세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최소한으로 허용된 노동의 자리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 공세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재편에 대한 노동의 개입을 감행할 것인가.
이에 본 글에서는 네 개의 토론회에서 논의된 자본의 전략과 계획이 어떤 내용을 가지며, 노동계급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반기 정부와 자본의 공세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 총자본의 하반기 주요 계획과 정책
1) 정부의 기능과 역할의 제고
지난 8월 23일에 있었던 『정부의 역할과 기능 재정립』토론회는 “21세기에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현시점에서 정부의 경제적 역할과 기능을 시급히 재정립하고 새로운 경제정책 운영방식을 모색”1)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자본진영이 지금 추진하려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의 제고가 결국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정부부문에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하여 자본의 이윤을 증대시켜보려는 의도인 것이다.
자본진영이 무엇보다 ‘집행기능의 과감한 이양’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본진영은 지금 집행기능 중 정부가 직접 수행해야 할 일부를 제외하고는 지방자치단체에게 이양하거나 민영화, 민간위탁 또는 공기업화나 사업부서화를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가의 공공성을 크게 줄이는 대신 정부운영에 자본의 경쟁논리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경쟁논리의 도입은 “미시경제정책에서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의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 집행”하여 “시장기구에 대한 직접적 개입과 간섭을 대폭 축소”하고 “재량주의에서 규칙주의로 전환”하며 “생산자 중심의 보호지원 육성시책을 철폐”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진입 및 퇴출 장벽을 낮추고 시장규율을 확립”하는 것, “사유재산권(지적재산권)을 확립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투명한 경제여건을 제공”2)해야 한다. 정부의 기능은 오직 ‘시징경제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을 만드는 것일 뿐이다.
정부의 덩치를 줄이기는 곧 효율성 있는 자본에게 정부부문의 일부 기능을 맡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업무의 구체화 가능성이 높을수록, 또 시장이 경쟁적일수록 사업부서화 → 민간위탁(또는 공공/민간경쟁입찰) → 민영화가 적합하다”3)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부의 기능을 제고하자는 주장은 궁극적으로 ‘민영화’를 의미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 5월 20일, ‘공기업의 경영구조개선 및 민영화에 대한 법률’안을 마련해 놓았다.
정부의 기능축소는 자본에게 이윤의 공간을 더욱 확대시켜주는 것임과 동시에 노동자들에는 고용불안과 노동자간 경쟁의 격화를 선물한다. 바로 ‘인사 및 보수제도의 개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개편 내용은 ‘개방형 인사제도의 도입과 실적급 비중의 확대’인데, 이것은 공무원에 대한 신분보장을 포기하고 공무원 조직에 경쟁의 요소를 도입하여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성과가 부진한 공무원은 방출하고 우수한 능력을 가진 민간인은 언제나 정부부문에 영입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 “자율 및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성과측정체계를 구축하여, 결과 중심, 실적 중심의 업무분위기를 확산”4)시킨다면 공무원들은 고용의 불안정성과 노동강도와 강화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2) 기업구조의 변화 - M&A의 활성화
산업구조조정을 위한 자본의 노력은 ‘경쟁적 시장구조로의 전환’으로 집약된다. 경쟁적 시장구조로의 전환은 규제완화와 민영화의 노력이 구조조정으로 이어지고, 기업 스스로 구조조정에 나서게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경쟁이 경쟁력을 제고하는 동태적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의 진입과 퇴출이 효율성과 경쟁력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5)질 수 있어야 한다. 부실한 기업이 재벌 모기업의 자금지원이나 정치권과의 유착에 기대어 살아남는 구조가 유지․확대된다면, 산업구조조정은 절대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진로, 대농, 기아로 이어진 부도에 대응하여 의식적으로 ‘경영권 포기’와 ‘부실 계열사 정리’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실 그동안 총자본은 자본의 진입과 퇴출장벽의 제거를 놓고 많은 고심을 했다. 퇴출 장벽의 제거는 재벌의 독과점 영역에 대한 과거의 보장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경쟁에서 탈락하는 재벌의 경우 더 이상 재벌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경쟁의 도입은 자본에 의한 자본의 수탈도 가능하게 만드는 적자생존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기업의 인수․합병(M&A)은 시장의 자유로운 진입과 퇴출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심지어 “다가간 투자협정이 발효되기 이전이라도 국내 M&A 시장에 외국자본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6) 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진입규제 및 퇴출장벽의 제거는 앞에서 언급한 일부 요소만 제외하면, 독점자본에게 절대적으로 이익이다. 대규모 투자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없어지고, 업종별 사업의 인허가제도도 없어진다. 또 유통업에 대한 진입이 쉬워질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의 고유업종제도도 사라진다. 단체수의계약제도와 지정계열화 업종 및 품목도 축소될 전망이다. 그리고 수입선 다변화 품목도 해제된다. 게다가 부실기업을 인수할 경우 출자총액 제한의 예외마저 허용하려는 계획이다. 파산법원 설립과 계열사간 채무보증을 단계적 해소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기업분할의 경우 특별부가세와 취득세 등을 면제하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구조조정에 따른 신축적인 고용조정을 위해 인수․합병시 고용조정을 허용하려고 한다.7) 자본에 의한 자본의 수탈은 끝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수탈로 귀결되고 만다.
그런데 경쟁적 시장구조를 통한 자본의 배불리기에 나선 총자본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부는 기업대주주의 일방적 독선을 막기 위해서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상법에 포괄적으로 규정하여 이사가 이를 위반하는 경우 제재” “소수주주권 행사요건을 추가적으로 완화하거나 1주 이상 보유한 모든 주주에게 대표소송(단독주주권)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 “소수주주, 기관투자가 등 외부주주의 대표가 사외이사와 사외감사로 참여하여 내부통제장치를 개선할 필요” “기업의 합병과 분할, 주식의 내부자거래 등을 통한 지배대주주의 남용행위에 대한 증권당국의 감독기능 강화”8) 라는 과제를 스스럼없이 제출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방안은 더욱 놀랄만하다. “기업경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대주주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 지배대주주와 그의 통제하에 있는 자를 ‘사실상 이사로 간주’하는 방안이 필요”하고 “상장법인의 경우 이사의 수를 축소하고 최소한 2~3인의 사외이사의 도입을 의무화”9)하자고 하고 있다. 심지어 “재벌총수 및 가족에 의한 변칙적인 지배권 세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속, 증여에 대한 엄정한 과제, 기업합병과 분할, 내부자 거래를 통한 부의 축적, 공익법인을 통한 지배권의 강화 등을 지속적으로 감시, 견제할 수 있는 세제, 세정상의 노력이 필요”10)하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재벌의 개혁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지배대주주의 책임을 명확히 하거나 그룹 총수와 기조실의 법적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기업의 인수․합병을 활성화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일 뿐이다. 무리한 차입경영과 무분별한 사업확장의 결과로 부실 계열사를 양산하고서도 지배대주주라는 법적 근거로 인해 경영실패를 책임지지 않는 풍토를 일신하려는 의지의 연장선인 것이다.
또한 사외이사나 사외감사제도의 도입은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발생하게 될 저항을 대비하는 측면도 있다. 소액주주의 대표소송제나 사외감사 및 이사제도 등은 소액주주들에게 경영감시의 권리를 주는 것임과 동시에 일정한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한 소액주주들은 저항 대신에 체념할 것이며, 또 스스로의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 구조조정을 더욱 촉진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업의 투명성 제고가 ‘소액주주의 권리보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의 투명성 제고는 기업과 금융이 시장원리에 따르는 관계를 맺도록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사업이 잘 되는 기업에게는 금융기관이 돈을 더 많이 대출하고, 사업이 안되거나 사업성이 없는 기업에 대해서는 조기에 자금을 회수함으로써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라고 할 때, 금융기관은 개별 기업의 경영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기업의 투명성 제고가 자본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3) 노동법 체계의 완성 - 노동의 유연화
다양한 고용형태의 창출
총자본이 제기하는 다양한 고용형태의 창출이란 우선적으로 개악 노동법에 새로 규정된 변형근로시간제, 재량근로시간제, 간주근로시간제, 단시간 근로제 둥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로형태들은 상반기 단체협상 과정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통계청이 지난 8월 13일에 발표한 97년도 3/4분기 고용동향을 보면, 97년 2/4분기 기간중 취업자가 전년동기 1.8% 증가한 것에 비해 연령층으로는 55세 이상 고령층이 6.9%, 직업별로는 서비스․판매직이 4.2%, 종사상 지위별로는 임시노동자가 7.3%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취업시간대별로 보면 1주간 36시간 미만 취업자가 전년과 비교하여 무려 37.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시직과 단시간 노동이 날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또 3월의 노동법 개악 이후 6월말까지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을 위해 취업규칙을 변경했다고 신고한 업체가 1백 47개에 이른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재량근로시간제를 도입키로 한 업체도 각각 1백 34개와 84개이며, 이미 재량근로제를 채택하고 있는 업체도 42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11)
이러한 성과를 올린 정부와 자본은 90년대 초 이후 줄기차게 도입하려 했고, 지난 노동법 개악 당시 노개위에서 2차개혁 과제로 이월되었던 파견근로제의 합법화를 드디어 공식화하고 있다.12) 이에 덧붙여 계약직 근로제의 도입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는 근로기준법 제23조의 근로계약 조항에 1년 이상의 근로계약이 가능한 경우를 덧붙이자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다.13)
총자본의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노동자에게 고용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97년 1/4분기 현재 실업자는 646천명으로, 전년동기에 비해서 42.0%라는 경이적인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실업자수는 10년, 실업률은 4년만에 최고의 수준이다.14) 하지만 총자본은 오히려 단순생산직 및 전문기술직의 인력은 부족하고 사무관리직은 인력이 남아도는 인력수급 불균형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면서 안정적 일자리를 보장하기보다 ‘다양한 고용형태’만을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노동력과 고령자, 장애인의 취업확대를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이들을 비정규직 노동력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당연히 노동자의 단결을 약화시키고, 노동조합을 무력화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자의 고용형태가 파견근로, 계약근로, 시간제 근로, 재택 근로 등으로 다양화된다면 각각의 처지가 상당정도 달라지게 되므로 노동자의 연대를 조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노동자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고 생산현장에서 노동의 권리를 지켜내는 일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임금체계의 변화
다양한 노동형태를 통해 비용을 줄이고 노동자를 분할하려는 총자본의 전략은 임금체계를 변화시키려는 계획으로 이어진다.
임금체계에 대한 자본의 공세는 크게 3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첫 번째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능력과 성과에 부합되는 임금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성과급 체계로의 전환은 올 상반기 내내 은행과 증권업계, 그리고 사무직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는데, 하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일반 직원들에게까지 성과급 체계를 강요하고 있다. 제조업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임금을 매출액과 연동하고자 하는 통일중공업 자본의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임금체계의 변화를 시도하는 총자본의 공세는 노동자의 퇴직금도 겨냥하고 있다. 퇴직금의 중간정산제와 퇴직금 연금제는 이미 지난 노동법 개악과정에서 법 조항으로 만들어진 상태이다. 하지만 총자본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퇴직금을 노동자가 정당하게 일한 노동의 대가로 인식하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베풀어지는 시혜적 조치로서 인식하고, 퇴직금을 임금제도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펼치고 있다. 지난 8월 21일 헌법재판소에 의한 ‘퇴직금 우선변제 조항 위헌 판결’은 이러한 총자본의 의도가 사법부에 의해 지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의 대가를 최소한으로 지불하려는 총자본의 공세는 연월차 휴가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모습으로도 확인된다. 노동자가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연월차 휴가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임금만으로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현실적 조건 때문이라는 것을 총자본은 완전히 무시한다. 노동부는 이러한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여 ‘연월차 휴가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정해석의 변경을 내놓았다가 이를 황급히 철회하는 촌극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퇴직금과 연월차 수당 등을 임금체계에서 빼버리게 된다면 노동자의 임금총액이 삭감될 것은 뻔한 일이다. 노동자로서는 당장의 임금삭감을 보전하기 위해 능력과 성과를 높히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옆의 동료 노동자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경쟁도 벌여야 한다. 다시말해 성과급체계는 노동강도를 강화시키고 노동자간의 경쟁을 유발한다. 노동현장이 이렇게 변해버린다면 자본은 노동자을 통제하기 매우 쉬워진다. 결국 임금체계의 변화를 도모하는 자본의 공세 속에는 노동자를 개별화하고 노동자간 경쟁을 촉발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임금이 개인의 성과와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면 노동조합과 자본간의 임금협상이 필요없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기준이 상이하고 성과 역시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다면 노동조합이 나서서 자본가와 임금협상을 벌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자는 한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자신의 임금을 협상해야 한다. 개인에 불과한 노동자가 자신의 목줄을 쥔 자본가에 대항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노동자는 지금보다 더한 ‘임금노예’가 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고용조정의 원활화
자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고용했고, 자신의 이윤확대에 기여했던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용도폐기할 수 있는 권능까지 갖기롤 원하고 있다. 총자본은 이를 고용조정의 원활화라 부르고 있다.
총자본은 일차적으로 ‘정리해고’를 도입하려고 한다. 자본의 대표체인 전경련은 상반기 노동법의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정리해고의 요건 완화를 주장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다 지난 8월 1일에는 마침내 ‘기업구조조정 특별법’을 정부에 제안하면서 정리해고의 조속한 도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정리해고를 도입하려는 자본의 의지는 ‘기업의 인수․합병’ 과정에서 자동적인 고용승계의 의무를 지지않으려는 데 있다. 장기근속 노동자의 고용승계로 인한 비용부담을 줄이는 한편 기업의 전략에 순응하지 않는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는데 자본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총자본이 고용조정의 원활화를 위한 방안으로써 ‘정리해고’만을 고집스럽게 밀고나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포항제철은 삼미특수강을 인수하면서 영업양도 방식 대신에 ‘자산인수’ 방식을 택하여 자동고용승계를 교묘하게 회피하였다. 또 기아에서처럼 채권금융단이 금융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노동조합의 인력감축 동의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자본은 ‘고용승계’를 회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고용조정의 원활화가 이처럼 노동자를 ‘자유롭게 자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는 건 아니다. 자본은 자연감원이나 생산설비의 도입 및 증설로 부족한 인력이 생겨나면 노동자를 새로 채용하지 않고 기존의 노동자를 배치하는 내부의 고용조정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환배치’를 노동현장의 고용조정 방식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연한 해고위협 앞에서 노동자는 그동안 얻어온 노동의 권리를 주장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자본이 휘두르는 ‘전환배치’에 묵묵히 순응해야만 한다.
전환배치와 더불어 노동현장 내에서 고용을 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직업훈련’이다. 노동자의 기능향상이라는 허울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본은 ‘수요자에게 필요한 직업훈련’을 통해 노동자의 기능습득을 자본의 이익에 복속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생산설비의 도입에 즉각 투입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직업훈련을 아예 민간에 이양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기국회를 겨냥하여 만들어진 ‘직업능력개발법’은 이러한 자본의 의도를 집약하고 있다.
이로써 자본이 목적하는 고용조정의 원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다. 자본은 지금 고용조정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할 수 있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자본의 필요에 따라 배치하고 전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고용주’인 자본에게 순응하던지, 아니면 해고를 담담히 받아들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3. 노동의 공세를 준비하자
자본진영은 구조조정을 위해 지금 거대하게 결집하고 있다. 9월 정기국회는 구조조정을 위한 각종 전략들이 입법화될 것이고, 부르조아 정치세력들은 자신이 구조조정을 완성할 수 있는 적임자임을 주장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자 경쟁할 것이다. 그 움직임들은 이미 시작되었고,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다.
노동진영은 우선 구조조정을 향한 전략과 계획들이 ‘국가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9월 4일에 강경식 재경원장관은 앞 장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마침내 ‘21세기 국가 개혁과제’라는 내용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시장경제원리의 확립’을 통한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 혁신을 목적15)하는 ‘21세기 국가개혁과제’가 ‘국가의 수준’에서 추진되다면, 그것은 곧 국가 수준에서 노동자에 대한 압박과 공세, 회유와 탄압이 진행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안일함과 머뭇거림은 곧 국가의 과제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하반기 정치일정과 결합된 공세 역시 거세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자본은 정기국회를 대비하여 자신의 전략들을 입법화하기 위한 준비를 상당정도 진척시키고 있다. 8월 26일에는 상법 개정안이 제출되었고, 금융개혁관련 13개 법안 역시 국회에 제출된 지 오래되었다. 전경련은 9월 4일 30대 그룹 기조실장회의를 통해서 상호출자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정거래법의 개정을 전면적으로 요구하였다.16) 재경원은 더 이상 파견근로법의 제정을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이다.17) 헌법재판소의 ‘퇴직금우선변제 헌법 불합치’ 결정과 노동부의 ‘연월차 수당 미지급’ 해석의 번복 과정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노동진영을 긴장하게 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번 ‘21세기 국가개혁과제’의 입안에는 “대선주자들의 공론화”라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18) 총자본이 세워놓은 국가개혁과제에 동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세력과 후보에게 차기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의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각론에서는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이미 보수야당의 대통령 후보들은 스스로 자신이 신보수주의 전략을 완성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신호를 자본측에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김대중은 지난 8월 25일 기자회견에서 이를 충분히 입증해냈다. 조순 역시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자신만이 자본이 원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회생을 이룰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이로써 부르조아 정치권의 후보들 중에서 누가 더 진보적일 수 있냐는 물음은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은 지금 당장 하반기 공세에 맞서기 위한 계획과 준비가 진행되어야 한다. 산별조직을 향한 발걸음이 아직 미약하고, 정치세력화 또한 어떤 성과를 남기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체조건의 미흡을 내세우며, 정부와 자본의 공세 앞에서 머뭇거릴 여유가 노동계급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노동계급이 ‘고용이냐 임금이냐’로 고민하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자본은 이미 두가지 중 어느 것도 노동계급에게 보장해주지 않았다. 97년 상반기 임금총액 상승률은 10.9%(전년동기 대비 -1.3%)였으며, 제조업의 임금상승률도 9.6%(전년동기대비 -3.4%)에 불과했다. 상용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체의 고용수준은 5,246천명으로 96년 같은 기간의 5.331천명에 비해 86천명(-1.6%)이나 감소했으며, 제조업은 작년에 비해 94천명(-3.7%)이나 감소되었다.19) 임시직과 단시간 근로의 급격한 확대와 변형근로시간제, 선택근로시간제의 본격적 도입은 이미 앞 장에서 지적한 바이다.
노동계급이 지난 수십년간 노동현장에서 자본과 맞서서 획득한 노동의 권리들이 ‘위기공세’ 앞에서, ‘구조조정’의 논리 앞에서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노동계급은 대항을 조직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글의 성격상 구체적인 하반기 투쟁방안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20) 하지만 노동계급이 하반기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21세기를 노동의 시대로 열어나가기 위한 노동의 전망, 노동의 논리가 세워져야 한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비록 아직은 사회와 체제의 대안까지 제출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시장경제원리를 통한 한국 자본주의의 개혁을 시도하는 자본의 길과는 달리 21세기를 ‘인간다운 삶과 평등’으로 열어젖히고자 하는 논리와 전망이 노동계급 속에 세워져야 하다. 이러한 전망과 논리가 있을 때, 노동계급은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총자본의 공세에 불굴의 의지로 맞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9월 5일 제7차 민주노총 임시대의원회의 ‘퇴직금 전액 변제 쟁취와 정리해고제 도입철회 및 경제민주화를 위한 전국 총파업 결의 조합원 총회 개최’ 결의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 세부적 내용에 대해 지적할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민주노총이 다시금 투쟁의 전의를 다지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 대의원들의 결의는 지지․엄호되어야 한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지난 총파업을 통해 그 위력적인 힘을 이미 확인시켜주었다. 정부와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에 대항해 오직 노동계급만이 맞서 싸울 수 있었고, 노동계급에게는 그것을 감당해낼 조직과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자본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투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지도’하는 일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점에서 분명히 결정적인 한계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하반기 정부와 자본에 맞서 노동계급을 곧추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은 민주노총이어야 한다. 그리고 9월 5일의 결의는 민주노총 스스로 그러한 과제를 피부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하반기 정부와 자본에 맞서서 노동계급을 지도하고 이끌 민주노총은 ‘국민의 여론’ 따위에 자신의 전술을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민주노총이 ‘국민적 정서’를 만들어 나가는 공세적 입장에 서고, 노동계급의 힘으로 국민정서와 여론을 뒤바꾸려 한다면 국민들은 자본의 공세에 맞서 싸우는 노동계급을 지지할 것이다. 이제 민주노총은 ‘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살아 숨쉬는’ 조직으로서 ‘국민과 함께하는’ 정도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대한 불만을 가슴에 안고 있지만 투쟁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국민들이, 가슴 후련해하며 노동계급을 향해 박수화 환호를 보내고, 나아가 노동계급의 투쟁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국민 앞에서, 국민을 이끌면서 투쟁하는 조직으로 우뚝 서야 한다. 국민들의 이익은 오직 노동계급만이, 민주노총으로 지켜줄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9월 5일 임시대의원 대회에서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의 대통령 후보 추천 또한 결의되었다. 권영길 위원장이 민중운동진영의 후보로 추천될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현실에서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민중의 이익을 옹호할 우리의 후보는 구조조정에 동참하는 부르조아 후보들에 맞서 과감하게 노동의 논리, 노동의 전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선거판에 신명나게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민중진영의 대통령 후보가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지하고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고, 여기에 민주노총이 결의한 하반기 총파업이 한데 어우러진다면, 노동계급은 21세기를 준비하는 대안세력으로서 의미있는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동진영에 속한 모든 세력들은 주저없이 하반기 노동자 투쟁의 대오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1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공장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노동의 전망을 이야기 하고, 노동의 투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보자. 21세기, 노동의 전망은 올 하반기 노동자 투쟁 속에서 피어날 것이다.
1) 고영선, ꡔ정부의 역할과 기능 재정립ꡕ, 한국개발연구원연구위원, 8. 23.
2) 고영선, 같은 글
3) 고영선, 같은 글
4) 고영선, 같은 글
5) 임영재,ꡔ경쟁적 시장구조로의 전환ꡕ, 한국개발연구원 8.20
6) 임영재, 같은 글
7) 임영재, 같은 글
8) 유승민, ꡔ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및 기업지배구조의 선진화ꡕ, 한국개발원연구위원, 8.18.
9) 유승민, 같은 글
10) 유승민, 같은 글
11) 노동부, 8월 13일
12) 재경원, 9월 3일
13) 재경원, ꡔ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ꡕ, 한국노동연구원, 7.31
14) 재경원, 같은 글
15) 한겨레 신문, 9월 5일자
16) 중앙일보, 9월 5일자
17) 한국경제신문, 9월 3일자
18) 조선일보, 9월 5일자
19) 노동부, ꡔ97년 상반기 임금, 근로시간 및 고용동향ꡕ, 1997.9
20)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곽탁성, “다시 요구되는 ‘계급현실’과의 결합”,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9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