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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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진보운동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 13

현장에서 미래를  제124호
너부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진보운동

너부리 / 진보넷 블로거


특별기획: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1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진보운동

우선은 자신이 누구의 (살림)노동에 기생해서 운동을 해 온 것인지, 그 숙주부터 먼저 살피고 볼일이다. 가장 가차운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을 당연시 하면서 혹은 자신이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다른 이들의 비가시화된 노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진보’인가.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각은 정확하게 우리 사회 좌우, 보수 진보할 것 없이 매우 지배적인 남성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매우 감동적으로 어떤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노동운동, 더 크게 보아 20세기 후반부 한국 사회의 반체제 운동들을 전태일을 통해 기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문제적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부터 소위 근대화의 핵심동력이었으며, 90퍼센트 이상이 여성노동자로 구성되었던 피복/의복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으로부터 점화되었다. 이 여성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려고 했을 때, 회사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깡패들을 고용하였으며 여성 노동자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심한 경우 죽은 경우도 많았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눈에도 매우 극적이었던 노동운동을 형성하는데 여성노동자들의 핵심역할은 여전히 온전한 인식의 영역 외부에 있다. 오히려 이들은 주변으로 제쳐지고 무시되었다. 소위 민중 민족주의라는 것은 오로지 남성만이 (보수든 진보든) 역사의 진정한 주체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는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곤경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분신했던 한 남성노동자를 초점으로 하여 1970년대 평화시장 피복공장들을 재방문한다. 전태일은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섬약하고 예쁘고 순진하고 착하지만, 아무런 협상교섭능력(agency)이 없(다고 착각되)는 이 여성노동자들은 전태일의 전략, 도움, 마침내는 그의 분신이라는 융숭한 대접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현실을 거꾸로 재현한 것 아닐까? 전태일의 존재는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과 저항 위에서 가능했다. (수령사관적 해석 사절) 
 
이 영화는 매우 감동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뻔하게 역사가 기록되는 방식, 사건이 역사로 기억되는 지배적인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은 '남성영웅'을 선별적으로 기억, 기록하여 전진배치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익명의 수고들을 다시 지워버린다.
 
한국의 운동들은 동료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딸로서, 여성들의 노동에 기반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소위 ‘대의’를 앞세우는 공/사구분 이데올로기, 성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 젠더 권력 관계와 더불어서 철저하게 삭제되어 의식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반복컨대, 한국의 노동운동, 반체제운동, 사회운동들 역시 남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 남성 중심성의 궁극적 중요성에 대한 신념에 기초해서 형성되었으며 그에 바탕에서 활동해 왔다.
 
이것은 그네들의 운동 역시 수많은 비가시화된 여성들의 살림노동, 지원노동, 동료로서의 활동을 하부기층으로 해서 가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체 사회적인 층위에서뿐만 아니라 (활동가, 운동가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도 고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료, 옆사람, 내 식구들의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면서 혹은 그런 강요가 매일매일 실천되고 있다는 점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가동되는 진보란 진보가 아니다. 세상변혁 고민한다고  밤새 술쳐먹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그로 인해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땀흘리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변혁’ 혹은 ‘진보’ 고민한답시고 밤새 술쳐먹느라, 아내를 어머니를 생계전선으로 내보내고 아이들을 방치하며, 그러면서도 식구들이 좀 더 참지 못하고 자기의 ‘고민’과 ‘진보에의 열정’을 몰라준다고 또 술쳐먹으면서 칭얼대는 남자들은 소위 ‘진보진영’에 널리고 널렸다. 대체 머가 ‘진보’란 말인가? (물론 가족주의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전체 사회를 촘촘하게 엮고 있는 조폭 패밀리즘(‘우리끼리’ 헤쳐먹자)은 가장 육중한, 그래서 가장 끈질기게 싸워야 할 것들 중 하나다.)
 
돕헤드의 블로그 구호마냥, 혁명은 부엌으로부터 인 것이다. 진보란 자기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대의를 내세워 가족과 넘들을 등쳐먹지 않는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일 터이다.
 
민주화 운동, 넓게 보아 소위 ‘진보’운동들 중에는 남녀 할 것 없이 여성혐오증이 여전히 팽배해 있다. 여성문제(즉 남성문제, 젠더문제)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대응하며 공/사 구분에 입각하여 이 문제를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완고한 가부장들과 이 가부장들을 ‘수령’처럼 모시는 작은 수령들은 소위 ‘진보진영’에 몸담고 있지만 여전히 남성의 궁극적 중심성을 의심치 못한다. 이런 무의심병에 걸린 여성들 또한 많다. 수구꼴통타도가 중요한데 남녀가 힘을 합쳐야지 "우리"끼리 무슨 내부갈등이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고한 좌파 원칙가일수록 사생활은 완고한 남성 보수주의다. 머리와 입만 ‘진보’이고, 몸담고 있는 분파(sector/ 사실 노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분명한 세계관도 노선도 없다)의 자칭 이름만 ‘진보’일 뿐 일상생활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대체 진보가 뭐냐? 를 자기 자신의 일상부터, 자기안의 타자성을 대면하는 것으로부터 물어볼 일이다.

2006-11-02 23: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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