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 구 ◦ 논 ◦ 문
한국사회 노동자계급
형성의 시련
- 기업별 노조체제와 그 재생산 -
김 동 춘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 연구원, 연구위원)
이 글은 김동춘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강한
ꡔ한국사회노동자연구ꡕ의 전체적 내용을 발제문의
형식으로 작성한 글로서, 지난 8월 26일(토) 연구소 ‘4차
이론연구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이다.
그리고 ꡔ대학신문ꡕ(9월4일)에 실린
ꡔ한국사회노동자연구ꡕ에 대한 강수돌의 서평을
함께 싣는다.
1. 연구의 초점
이하의 발표 내용은 필자의 책 ꡔ한국사회
노동자연구ꡕ(역사비평사,1995) 중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중요한 점들을 추린 것이다. 이 책은 필자의
학위논문(「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확대,
보완한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왜 1987년 이후 기업별
노조체제가 유지․재생산되고 있는가”, “노동자들의
기업협조의식의 정착인가, 정부의 노동탄압에 기인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 있다. 즉 필자는 한국 기업별 노조 조직체제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기업(협조)의식의 기반을 해명함으로써 왜
한국 노동자는 거시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하나의
계급(class)으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지를 설명하려 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위해 단위노조의 운영과정과 노조 내 노동자
의식을 주로 대상으로 삼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직의
차원에서 기업별 노조 조직체계가 의식의 차원에서
기업협조의식이 주요 분석 대상이 되고 부차적으로 노동자의
파업행동을 살펴보았다. 단위노조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한국에서 중앙집중적인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기존 노총이나 전노협의 활동을 통해서 한국
노동조합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 이론적 배경과 문제의식
우선 필자는 기존의 계급형성론에 대해 몇 가지 추상적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기존 계급형성론은 크게 경제주의적
사고와 국가중심적 사고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자본주의적 공업화와 경제성장, 근대적 노동시장의 형성이 그에
부응하는 노동자의 계급조직화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가정을
갖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억압적 국가통제, 시장기제적 억압이
노동자의 계급조직화를 차단하거나 급진적 노동운동을 발생시킬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지난 30년간의
공업화와 공업노동자층의 성장이 매우 현저해졌지만, 노동자의
수평적 조직화는 그와 비례하여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주의적인 접근은 한국의 노동계급형성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다. 국가중심적 접근은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더 높은 적실성을 갖고 있으나,
1987년 이후 국가의 직접적인 노동통제가 크게 약화되는
가운데서도 왜 노동자들이 중앙집중적인 조직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별로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론적 접근법을 선택해
보았다. 제도론적 접근은 구조론적 접근과 행위론적 접근의
한계를 넘어서서 행위자의 실천이 어떻게 제도가 되어 또
행위자에게 역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과학 진영에서 기존의 계급형성론에 대한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추진되고 있다.
1) 생산중심적 고찰 : 노동과정 중심적 고찰 (Burawoy)
2) 문화중심적 고찰 : 계급형성 이전의 문화적 기반과
계급형성을 연결 (Thompson, Willis )
3) 집합행동중심적 고찰 : 연대의 형성과 좌절과정
(Tilly, Birnbaum)
이들 각각의 접근은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에서 집합행동중심적인 접근을 선택해 보았다.
3. 계급형성의 개념 정의
노동계급의 형성과 그 성격을 유형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익숙한
방법은 개량성/혁명성으로 구분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특정 국가의 노동자들을 혁명성/개량성의 짝으로
구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내의 노동자계급은 체제내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말한 바 최고의 이상적인 계급형성(계급이분화와
노동자의 혁명성)과 그렇지 않은 상태로 이분화 하는 것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의식과 행동을 유형화하는 데 별로
적절치 않다. 현대의 조직화된 자본주의 질서 내 계급형성은
조직적 차원과 의식적 차원으로 구분해서 계급형성의 정도와 그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조직이란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정당으로, 의식은 연대의식의 심도와
성격으로 각각 개념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노조가입률,
전국적인 노동자조직의 존재여부, 노동자의 연대의식의 심도와
범위 정도가 노동계급 형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 의식이라는 것은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조직이 노동계급형성을 분석하는 데 가장
뚜렷한 현상적인 지표가 될 것이다.
4. 주요 분석 내용
1) 1987년 ‘노동자대투쟁’ 분석
우선 6월 항쟁 및 7,8,9월 대투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필자가
분석하였는 데, 기존의 분석·정리작업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당시 5공 정권의 붕괴과정에서 노동자의 조직적인 역할이
부재했다는 점, 그리고 ‘대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단위노조의 조직화에 모든 운동의 에너지가 집중되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결국 ‘대투쟁’을 노동자들이 정치사회의 현장에
나타나는 최초의 유형설정적인 실천의 계기였다고 할 때, 당시의
이러한 실천이 이후 노동자의 조직과 행동에 지속적인 구속을
가하게 된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87년 대선과 88년의 총선 역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활동의
경험을 거친 이후 제도정치의 현실과 마주치게 된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두 선거는 이후 노동운동의
정치화 가능성을 판가름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대선의 경우는 노동자들의 선택능력밖에 있었고, 총선의
경우는 일부 지역에서의 실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울산에서의 노동자 후보와 자본가 후보의 대결을 분석해 볼
때, 노동자 후보가 승리하지 못한 것은 기존의 정치지형과
정당구조와 대안부재, 노동자들의 패배주의적 자기인식과 단기적
이해 관심, 노동조합의 조직적인 뒷받침의 결여 등의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88년 총선 당시 노동자 후보가
출마하였던 다른 지역구에서의 선거나 이후 1992년의 총선은
모두 88년의 경험 등을 통해 잘 설명될 수 있다.
2) 노동자 의식 분석
필자는 노동자의 지향과 의식의 분석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이 분석에는 기존의 각종 조사자료와 필자 자신의 조사를 모두
활용하였다. 필자는 한국 노동자들이 사용자와 높은 대립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편으로 기업협조의 필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즉 한국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갈등의식과 협조의식이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장 단위의 의식과 정치적 계급대표의식을
대조해보면 노동자들은 동료들과 높은 수평적 연대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등 정치현실 속에서는 극히 낮은
계급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의 높은 전투성은
이들의 연대의식과 사용자에 대한 대립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노동자들이 높은 전투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 계급적 연대와 정치적 조직화에 대해 소극성을 보이는 것은
이들이 여전히 기업단위의 이익대표체제에 안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기업협조의식은 대체로 기업협조의 불가피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고 자발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매우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기업협조의식의 제한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1990년 이후 기업복지의 확충과 노동조합의 교섭력 확대,
노동자들의 개인주의화로 말미암아 대규모 사업장에서 보다
적극적인 기업협조의식이 등장하고 있는 현실도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아직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징후는
발견하기 어렵다.
3) 단위노조활동의 재생산 과정 분석
노동자의식과 더불어 단위노조의 운영과 노동조합 간부들의
행동도 필자의 중요한 분석 대상이다. 필자는 만약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판도를 좌우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몇몇
노동조합의 행동을 살펴볼 수 있다면, 왜 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연대와 조직화에 별로 성공하지 못했는 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우선 기업별 노조의 불안정한 위상, 즉 교섭의 상대가
사용자이므로 회사와 협조적 관계에 설 수밖에 없고, 노조간부의
행동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기업별
노조는 노조간부와 조합원이 보다 밀착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조의 관료화를 방지할 수는 있으나 노조가
쉽사리 무력화되거나 어용화될 소지가 높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높은 요구는 노조를 과부하 상태에 빠트리기 쉽고, 이것은
지도부의 책임성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노조지도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시야는 기업에
국한되고, 노조의 활동은 기업단위의 임금교섭에 집중하기
때문에, 노조활동은 대단히 소모적으로 진행된다. 노조지도부가
이후의 활동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지도력의
재생산이 어렵고, 지도부의 전문성 축적이 어렵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조는 장기적 발전대안을 갖기가 어렵게 되고, 매년
연례적으로 반복되는 교섭을 다람쥐챗바퀴 도는 식으로 반복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간 연대활동이나 정치활동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우선 자체의 노조운영이 대단히 불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조가 어용화되지 않는 조건에서도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1987년 이후
기업별노조체제의 재생산은 법적, 정치적 제약 이전에 이러한
조직 내적인 제약에 크게 좌우되고 있다.
5. 분석의 결과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필자는 기업별 노조활동이
재생산되는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시장전제주의 --> 시장순응적 행동
낮은 사회복지 및 사회임금의 수준(직접임금 중심의 보상),
기업별 노조 조직체계, 연공중심적 임금,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법적 보호장치의 취약성 등의 제도적 조건은 국가주도의
공업화와 권위주의 정권의 유산이지만 일단 형성된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행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이와 같은 조건은 역으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시장순응적인 행동에 따르도록
만든다. 이러한 시장전제주의적인 사회체제는 저항의 비용을
매우 높여 놓았고, 따라서 노동자들은 별다른 대안을 갖지 못한
채 사용자에게 의존하거나 기업별 노조활동에 만족하게 된다.
2) 억압적․중앙집중적 국가구조와
상대적으로 이른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
억압적 국가 - 수평적 조직화와 연대의 무력화
한국의 정치적 지형은 이념정당의 등장을 차단하고 이익집단의
정치화를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있다. 분단체제 하에서
계급정당의 진입이 금지된 보수일색의 하향식 정당만이
존재하였고, 이처럼 시민사회에 뿌리를 두지 못한 야당은
노동자의 독자적 조직화를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은
전통사회에서 중앙집중적 통치체제가 유지되어 왔으며, 근대화
이후에도 지금까지 고도로 중앙집중화되고 경직화된 국가체제가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사회적 균열이 억제되었으며, 설사
발생하더라도 정치적 균열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한편 한국은
분단으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발전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면적인 보통선거권이 빨리 도입되었으며, 이후 50여년 동안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선거는 노동자를 지역거주민, 혹은
개인으로 파편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
하에서 노동자들은 탈정치화되었으며, 이러한 탈정치성이 차례로
노동자의 파편화를 강화시켰다.
3) 대기업 주도의 공업화와 노동자의 분절
한국의 공업화는 재벌그룹 산하 대기업 주도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계열기업으로 점차
재편되어 왔다. 따라서 1987년 무렵 이미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크게 이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7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노동시장의 분단은 별로 심각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87년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양자의
교섭력이 크게 차별화되면서, 노동조합의 분단 현상이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물적 조건을 갖는 대기업은 기업차원의
복지나 임금인상을 통해 노동자들을 기업 내로 포섭하려 하였고,
이러한 양보조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차별화시켰다. 노동자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기업
노동자들이 더욱 연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연대의 과실은 오직
자기 회사의 조합원들만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자들 간의 연대의 기반을 더욱 축소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4) 제도로서 조직의 효과
노동조합은 일단 조직된 후에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고서
구성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동조합이 허용된다는
것은 곧 노동조합의 파괴적 행동이 자제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형식적 조직화는 기업단위를
넘어서는 노동자들 간의 연대의 가능성을 오히려 축소시킬
가능성도 있다. 반면 제도화된 조직의 운영자로서 노조간부들은
보다 현실안주적 태도를 지닐 가능성이 있고, 비록 전면적이지는
않더라도 관료화, 탈정치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지배세력과
민중 간의 일정한 타협이 현실화된 것이다.
6. 실천적 함의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몇 가지 실천적 함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항과 연대의 비용을 낮출 수 있는 사회정치 개혁의 필요성.
한국 노동자의 파편화는 억압적 권력의 행사 혹은 노동자의
개인주의화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시장전제주의적인 제도적
환경에서 주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제도적 기반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노동자의 조직화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 전투적 노선은 기업별 노조체제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임금인상 활동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한국의
‘전투적 경제주의’는 그것이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사기를
고양시키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한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제반 불리한 조건의 즉자적 반발로서 탈정치화,
탈계급화된 실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3. 사회운동체로서의 노동조합 위상의 재정립 필요성. 한국의
노동자나 노동조합은 아직 자신의 요구와 이익만을 제시하는
‘피해자 조직’으로서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들이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시야를 갖기는
어렵다. 그 이전에 우선 필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사회적 주체로
자신을 세우고, 사회의 민주화에 앞장을 서는 세력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단위사업장 중심의 활동내용 상당부분을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향한 것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