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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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유엔 사무총장을 만났을 때
 세상만사

현장에서 미래를  제124호
최세진


노동자들이 유엔 사무총장을 만났을 때


최세진 / 연구원




요즘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될 것이라는 예상에 뉴스와 논쟁이 한참 진행 중인 것 같다. 그 뉴스들을 보다보니까 1997년 코피 아난 총장이 막 선출된 직후에 그를 만났던(?) 기억이 난다. 만났다고 이야기하자니 뭔가 거창한 거 같고, 그렇다고 그냥 봤다고 하기도 어정쩡한데..  여튼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1996년 12월말부터 약 두달간 ‘정리해고’, ‘안기부법 개악’에 맞서서 진행되었던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잠잠해질 무렵, 1997년 3월에 이탈리아 또리노(Torino, 영어로는  튜린Turin 이라고 함)에 있는 ILO의 교육센터로 민주노총 정보통신 담당자로서 약 한 달간 교육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정보통신 관련 교육이었는데, 약 12개국의 노총에서 참가했고, 한국 사람으로는 나 혼자 참가했었다. 사실 교육 프로그램 자체는 크게 배울 게 없었지만, 한 달간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먹고, 자고, 토론했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게 너무 좋았었다.
 
그 한 달간 온갖 일들이 많았었는데, 그 중 ‘방 교체 요구’ 사건과 ‘코피 아난 방문’ 건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먼저 ‘방 교체 요구’ 사건부터 이야기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당시 우리의 숙소는 ILO 교육 센터 내에 있었다. 1인 1실 기준으로 배정되었는데, 방 안에는 화장실, 샤워실, 책상,  TV, 옷장, 침대 등이 다 갖춰져 있어서 지내기가 아주 좋았다. 그러다가 교육 기간 중에 부활절 휴일이 끼어서 교육도 없이 며칠 탱자탱자 놀면서 밤 늦게 숙소 복도에 모여앉아서 술 한잔씩 돌리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가나’에서 온 동지가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 반응은 다들 “아니 왜? 지금 방도 좋은데 뭘 또 바꿔달라고 해?” 그러자 가나에서 온 동지는 “나도 방 자체에는 전혀 불만이 없어. 훌륭한 방이지. 그런데 내 이야기 좀 들어봐.” 그러더니 “ILO(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은 이름은 국제노동기구지만, 실은 노사정 기구다. 그리고 항상 노동자들을 우선 배려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정부기구나 자본가기구 참가자들에 비해 항상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우리 숙소도 훌륭하지만, 자본가들이나 정부관계자들의 숙소는 훨씬 더 좋다.” 그리고 자기가 확인을 해봤더니 “자본가팀들에 대한 교육이 어제 끝나서 오늘 다들 떠났고, 그 사람들 숙소가 비었는데, 우리 숙소보다 훨씬 좋다. 그래서 본부에 가서 우리 숙소를 더 좋은 그쪽으로 옮길 수 있냐고 물었더니 본부에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다들 “뭐시라!! 그러면 당장 바꿔달라고 해야지!!” 그래서 다음날 아침 모두 교육센터로 함께 몰려갔다. 우리는 당시 하루씩 돌아가면서 President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내가 President를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표로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하자, 센터측 사람은 “UN과 ILO에서는 일반적으로 행사와 방 배정을 약 2년 전에 끝내놓기 때문에 도저히 방을 변경할 수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가나에서 온 동지가 끼어들어서 “그 방이 비어있다는 걸 확인했고, 당분간 행사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못 바꿔주겠다는 거냐?” 그러자 “난 그럴 권한이 없다. 방을 바꾸고 싶다면 ILO 본부하고 이야기 해봐라.”
 
그래서 내가 뒤돌아서 같이 온 다른 나라 동지들을 바라봤더니 “그렇다면 알겠다. 당신이 노동자들을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만일 내일까지 방을 바꿔지지 못하겠다면, 우리는 각국의 노총으로 이 차별대우에 대해 알리고, 내일부터 바로 투쟁에 돌입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이야기 한 후 센터를 나왔다.
 
교육장으로 돌아가면서 다른 나라 동지들에게 어떻게 될 거 같냐고 했더니, “각국 노총에서 항의하기 시작하면 국제적인 스캔들이 되니까, 지금은 죽어도 안 된다고 하지만, 내일쯤이면 아마도 방을 바꿔줄 거다.” 그런다. 그래서 “만일 안 바꿔주면 어떡할 건데?” 했더니, 당연히 각국 노총으로 연락을 해서 이 차별대우에 대해 보고하고, 즉시 수업거부와 시위에 들어가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그러고 다음날 점심때가 되니까 가나에서 온 동지가 싱글벙글 하면서 열쇠 꾸러미를 들고 왔다. “자! 방 바꾸러 가자!”

그리고 그때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ILO 교육센터를 방문했다. 아마도 선출 직후 유엔 각 기관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던 것 같다. 높은 인간들이 뜨면 우리나라만 바빠지는 줄 알았더니, 유엔도 똑같더라. 사무총장이 오기 직전에 식당의 낡은 탁자덮개가 바뀌기도 하고, 청소부들이 유리창도 청소하고, 정원도 다듬고 하더라.
 
교육센터에서는 우리팀을 모두 불러서 유엔의 신임 사무총장이 우리 교육 일정 내에 교육 센터를 방문하게 된다는 일정을 알려주면서, 교육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을 총장이 참관하게 될 텐데, 우리팀의 교육을 참관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밤에 모여서 회의를 한 끝에 “노동자들이 유엔 사무총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이번 기회를 활용해서 신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 세계에서 모인 노동자의 생각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센터에 전했다.
 
그러자 센터가 발칵 뒤집어졌다. 센터 대표가 와서는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유엔 사무총장은 연설을 하는 사람이지, 연설을 듣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명씩 인사하는데 4초씩 밖에 배정되어 있지 않다. 그 이상의 시간을 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에 우리의 대답은? “그럼 우리가 왜 사무총장을 만나야 되는데? 일방적으로 사무총장의 연설을 듣는 거면 우리는 만나지 않겠다. 알아서 해라. 유엔 사무총장은 전 세계 민중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자 센터 대표의 표정은 거의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정말 우리들한테 “제발 나 좀 봐줘..”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다음날 센터 대표는 우리에게 노동자로서 유엔 사무총장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겠으며(대표 말로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연설하는 건 아마도 역사상 당신들이 처음 일거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시간은 20초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5분을 요구했고, 며칠간 협상을 거친 후 2분간을 주겠다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 후 우리는 연설문 작성에 들어갔고, 약 A4 용지의 2/3 정도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교육센터에서는 우리의 연설문을 사전에 함께 보고 조율하자고 요구했지만, 우리 연설문 걱정하지 말고, 당신네 일이나 잘 하라는 말을 전하고 우리끼리 연설문 작성을 마쳤다.
 
연설문 내용은 간단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 우리는 전세계의 노총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신임 총장에게 부탁하고 싶다. 부디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기간 동안, 전세계 노동자 민중들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특히 아동 노동과 여성 노동에 대한 착취를 막기 위해 애써달라.” 그런 내용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가나’ 출신이므로, ‘가나’에서 온 노동자가 연설문을 낭독하기로 했다.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이 왔다. 보아하니 다들 긴장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당시 나는 솔직히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서 나홀로 태평이었다. 속으로만 왜 다들 저렇게 긴장하고 난리여..), 가나의 농업노조에서 온 그 동지는 이론적인 수준도 높고, 유머가 풍부하고, 사람들을 휘어잡는 연설 솜씨로 정말로 어디다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활동가였는데, 사무총장이 오니까 얼어버렸다. 종이에 써진 연설문을 몇 번이나 더듬거리며 겨우 읽어 내려갔다. 심지어 몇 단어는 그냥 뛰어넘기까지 하더라. ㅎㅎ
 
여튼.. 그렇게 사무총장에게 연설을 마치자,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나서 연설은 많이 해봤지만, 나에게 하는 연설은 여기서 처음 들어봤다. 당신들의 연설을 들으니 확실히 당신들이 노동자들이라는 걸 잘 알겠다. 제3세계 노동자들과 아동 노동, 여성 노동의 문제에 대해 각별히 유념에 두도록 하겠다. 이런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고, 한명씩 돌아가면서 어디에서 왔는지, 어느 소속인지 밝히고 악수를 했다. (사실 그것도 전날 수업시간에 돌아가면서 두세번씩 연습한 거였다. 연설 때문에 1인당 주어진 시간은 2초로 줄어들었다.)
 
당시 가나에서 온 활동가는 코피 아난이 가나에서는 진보적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행보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그의 앞에서 한국인 노동자가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함께 그런 연설을 하게 된다면, 그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뭐라고 답할까도 무척 궁금하다.
 
만일 나에게 다른 나라 활동가들이 반기문 장관에 대해 물어본다면? 신자유주의 정책과 미국의 침략전쟁에 앞장서서 동참했던 인물이라는 이야기 말고는 별로 해줄 말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미국의 부시와 라이스의 지지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하니.. 더 말해 무엇하리요.
 
사람들이 높은 직책을 차지한 후 우경화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오른쪽으로만 달려가던 사람이 직책에 오른 후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노동자, 민중’의 편으로 좌회전하는 일은 본적이 없다. 반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후에 제3세계와 세계평화를 위해 안전보장이사회의 덩치들과 싸울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하긴 뭐 지금까지 유엔이라는 데가 지금까지 해온 역할을 보면 그다지 별로 기대할 건덕지도 없긴 하지만, 베네수엘라와 비동맹운동을 진행하는 측에서는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을 강화해서 세계 평화를 만들어가자고 주장하는 이때에 그런 인간이 유엔 사무총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참 쪽팔리기도 하고, 암담하기도 하고.. 그렇다.

2006-11-02 23: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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