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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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동강도 평가/대안 마련 프로젝트에 대한 긴 소회
 현장연구 소회

현장에서 미래를  제125호
공유정옥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마련을 위한 프로젝트에 대한 긴 소회

공유정옥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0. 들어가며

소회란 아마도 가슴에 품은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2005년 현자노강사업에 임하던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들을 기억나는 대로 모두 끄집어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눈물로 범벅된 쓰레기로만 남으리라,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랴는 생각으로.
일단 조각조각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그 다음에 앞뒤를 맞추어보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1. “차 좀 태워 주세요.”

이 연구프로젝트에서 우리는 프로젝트 전 과정을 현장과 함께 하기 위해 현장실천프로그램을 가동하였다. 현장실천프로그램의 하나인 현장참여방식의 대자보는 게시/수거/분석/결과재게시 라는 이중 피드백과정을 밟았다. 전체적으로는 대의원들을 통해 배포하고 수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지만, 실제로 현장에 가서 이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맡은 소재사업부에는 열 개의 공장이 있다. 열 개 공장의 물리적 거리 때문에 대자보 하나를 수거하려 해도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매번 조합 상근자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그러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마지못해 응낙하기도 하고, 오늘은 너무 바빠서 안된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와 나의 시간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자보를 부착하거나, 현장 참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중간 점검하거나, 대자보를 수거하거나, 칼라 소자보를 곳곳에 부착하거나, 잘 부착되어있는지를 확인하거나 하는 아주 간단한 작업들에 직접 임하기가 어려웠다.

‘하기로 한 일은 해야 하는’ 노동조합의 방식 속에서 때로는 조합 상근자가 혼자서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가 누구였건, 노강평가 연구팀의 일원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조차, 처음에는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작은 의미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나중에는 그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런 식으로라도 일을 쳐낼 수 있다는 점에 안도하려고 노력했다)

사업 중반 쯤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내게 운전면허가 있었다면 자기 차를 마음대로 몰고 돌아다니도록 했을 거라고. 그러나 그런 아이디어조차 당장 손에 잡을 수 없으니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길이 눈에 익었을 때는 조합 사무실에서 비교적 가까운 공장 세 곳은 그냥 걸어 다니곤 했다. 그럴 때면 대개 ‘오기’와 ‘분노’ 혹은 ‘스트레스’로 범벅된 감정을 느꼈다. ‘차 없다고 내가 못할 줄 아나’하는 식의 오기였고, ‘이런 정도도 하지 않으려 하다니’하는 분노였고, ‘이런 역할조차 조직하지 못했구나...’하는 스트레스였다.
와중에 궁리한 현실적 대안 중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자전거를 하나 들여와서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퇴근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전거가 거의 다니지 않는, 그래서 대형 트럭들이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공장 안에서 그건 너무 무모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사실 자전거를 살 생각을 끝내 버린 진짜 이유는 그 핀잔 때문이 아니라 ‘오기’가 덧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함께 할 단 한명을 찾지 못해서 열 개의 공장과 1천여 명의 소재사업부 조합원들 사이를 혼자 돌아다닐 궁리를 할 지경에 이르다니,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 기억들 속에서 ‘차 좀 태워 주세요’라는 말은 내가 ‘대공장’이 갖는 물리적 힘을 과소평가했다는, 아니, 아예 고려해본 적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남긴다. 그 빚은 사업기간 내내 현장에 있었지만 현장에 갈 수 없음을,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곳에 갈 수 없음을 수십 번씩 깨닫고 안타까워해야 했던 것으로 갚아야 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건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울산에서 우리는 ‘현장에 있었지만 현장에 갈 수 없는 1과제 <현장>팀’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그리고 여러 번 확인했다. 그래서 ‘현장순회를 강화하자’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강화할 방도가 없었다.
공장 안에 자동차는 상집과 대의원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데, 소재사업부 출신 상집이 단 한명 밖에 없었고, 마치 국경처럼 서로의 선거구를 ‘존중하는’ 대의원들을 시시때때로 불러낼 수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 상집 한명을 조직하거나, 그런 대의원 한명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연구진과 상집으로 구성된 ‘연구팀’이나, 대의원으로 구성된 ‘대책팀’을 만든다는 애초의 기획이 부실한 현장진단에 기초했거나,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방도가 우리에게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 와중에 승용1공장의 현장 순회는 소재나 소형엔진공장에 비해 훨씬 빈번하고 밀도 높게 이루어졌다. 담당자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나, 그것만으로는 소재나 소형엔진공장에서 왜 그만큼 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조합 사무실에서 가깝기도 했고, 해당 사업부를 맡은 상집도 의욕적이기도 했고, 그 상집과 연구소 담당자의 관계가 다른 사업부서 담당 상집과 연구소 담당자의 관계와 갖는 차이도 있었고, 사업부 대의원 대표가 민투위 의장이기도 했던 점 등 많은 차이들이 눈에 보였다. 가끔 연구소 상근자로서의 일상 업무와 책임을 위해 서울로 혼자 올라오거나 서울에 혼자 남았을 때, 울산에 좀 더 있을 수 없는 ‘조건’이 마음에 남기도 했다.

어쨌든 그 차이들 중에 우리가 좁혀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상집과 대의원의 의욕, 그리고 상집과 연구소 담당자의 관계였다. 그걸 좁혀내려면 현장 주체의 사전 조직화, 그리고 밀도 높은 사전 공유와 교감을 통한 통일성의 확보가 꼭 필요했다. 나를 중심으로 서술하자면, 그것만이 ‘난생 처음 만난 젊은 여성 연구원(혹은 의사)’ 따위의 꼬리표를 떼고 시작할 수 있는 계기였다. 한노보연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대부분의 현장 주체들에게 ‘한노보연’이 갖는 의미가 무언지를 생각해본다면(집단요양투쟁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소재사업부에서는 그것조차 모르는 이가 상당할테지만) 노강평가사업에서 한노보연은 그저 연구소일 뿐, 그저 연구용역을 맡은 ‘좀 투쟁적인’ 분위기의 연구소일 뿐 아니겠는가.

2. “나보다 더 많이 아시네요.”

한 번 더 말하지만 소재사업부에는 열 개의 공장이 있다. 그게 어디 있는지를 기억하기까지에도 몇 주일이 걸렸다. 아니, 처음에는 자주 돌아다니다보면 저절로 외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의도의 1.5배가 넘는다는 울산 공장 부지 안에 수십 개의 건물들 속에 흩어져 있는 열 개의 공장 위치를 기억하는 일은 그닥 녹록치 않았다.
조합 휴게실에 앉아 공장 전체 조감도를 몇 번씩 따라 그리면서 공장 위치를 외웠다. 차를 타고 현장 순회를 할 기회가 있으면 내 손으로 그린 조감도를 들고 도로와 공장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다녔다. 열 개 중 몇 개 공장들은 도면을 들고 공장 밖을 뱅뱅 돌면서 동서남북과 출입문, 주변 도로들과의 관계를 메모해가며 외웠다. 현장 순회가 여의치 않아 열 개 공장 내부를 모두 파악하려던 목표는 결국 달성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조합 상근자와 차를 타고 현장을 돌았다. 내가 공장과 출입문에 대해 몇 가지를 안내했을 때, 그는 매우 놀랐다. 소재사업부 출신인 그조차 그걸 알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약간 놀랐다. 하긴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십 수 년을 근무했다 해도 두어 개의 건물 안에서 일하고, 출입문에서부터 자기 작업 위치까지의 최단거리나 주변 식당 위치 말고 더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독자적인 병원과 소방서, 부두까지 갖추고, 3만 4천명이 복닥거리고 있는, 여의도 1.5배가 넘는다는 이 ‘지역’에서 말이다. 활동가라고 해도 선거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상집이라고 해도 대자보를 붙여야 할 스물여섯 군데 식당을 제외하고는 무슨 공장이 어디에 붙었는지 기억하기는커녕, 가볼 일조차 없는 이곳에서 말이다.

또한 나는 사람 이름 잘 못 외운다. 지금도 노상 마주쳤던 상집들 이름은 잘 모른다. 명찰을 곁눈질할 만큼 시력이 좋지도 못하고, 매번 이름을 새롭게 물어볼 만큼 넉살이 좋지도 못하다. 하지만 소재사업부 대의원과 실행위원들을 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같이 할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해야 하며, 하다못해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정도는 판단해야 했다. 사전 작업으로 그런 점까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아닌 다음에야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는 일이었다.
그 시작은 제일 먼저 얼굴과 소속 부서와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붙여놓고 확인할 사진이 있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별 수 없었다. 우연히 이름을 확인하면 수첩에 붙여둔 명단에서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 또 기억이 안나면 또 확인하면서 외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현장조직인지, 몇선 대의원인지,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주워듣는 이야기를 조그맣게 적어두고 짬짬이 들여다보면서 외웠다. 5월 초까지 개인 활동 일지를 썼는데, 그럴 때면 그런 내용들을 되짚어 기록하고, 그날 만난 사람의 인상까지 기록하려 했다. 수차례 있었던 실행위원들과의 미팅에서도 마지막까지 외워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려 애썼다.
어느 날 노동조합 조직실 내 소재 담당자와 함께 대의원들을 만났다. 아마 그 자리에서 내가 어느 대의원과 실행위원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조직실 동지가 내게 말했다. ‘저보다 소재 실행위원들을 더 잘 아시네요’라고.
예컨대 ‘소재 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는 말을 십여 번은 족히 들었을 것 같다. 공장의 위치, 공장 내부 구조, 공장 안의 사람들 모두를 아우르는 표현이었다. 노안실 사람이건 조직실 사람이건 대부분 아주 당연하게 말했다. 소재사업부 안에서도 주철 쪽 사람은 경합금을 모르고, 경합금 쪽 사람은 단조를 모르고, 단조 쪽 사람은 생관을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비웃을 일도 아니었고 개탄할 일도 아니었다. 그 넓은 지역과 그 많은 사람들을 주도면밀하게 관리하고 있는 자본의 위력을 더욱 절감케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총파업과 공장점거라는 경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기도 했다. 현장 전체가 들썩거리는 투쟁 속에서 자본이 관리해오던 일상의 경로를 벗어나 공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이사람저사람과 만나는 경험 말이다. 그것은 자본이 덮어둔 지붕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빗물과 햇살을 들이는 일일 거라고, 사업부와 선거구로 구획을 나누고 단절시키기 위해 그어두었던 경계선을 지우고 서로 흘러들어가고 흘러나와 섞이고 다시 새롭게 나뉘는 일일 거라는 생각을, 언젠가 했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공장과 사람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것은 어떤 힘을 뜻하기도 했다. 그 힘은 현장 사업을 실행하는 밑거름이 된다. 어떤 상황을 더 정확하고 옳게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그 힘은 뱅뱅 돌아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하루 종일 컴퓨터나 들여다보는 연구자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보다, 하는 식으로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되며, 니가 현장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깝죽대냐는 식으로 뭉개려드는 이를 제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안타깝게도 현장을 파악하는 일은 매우 굼뜨고 더뎠다. 크게는 앞에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현장에 양껏 밀착하기 어려운 조건들 때문이었을 테고, 작게는 피로 혹은 다른 무엇 때문에 시간이 가면서 이에 대한 긴장을 늦추거나 혹은 포기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작게는...’에 대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쓸 용기가 아직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여하튼, 지도를 보지 않고도 공장 위치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각 공장별로 알려진 선전 거점을 파악하고 새로운 선전 거점이 눈에 들어오고, 대의원과 실행위원들을 어느 정도 파악할 무렵이 되자, 사업은 종반에 이르렀다. 그 종반에 대한 기억은, 아마 뒤에서 따로 쓰거나, 혹은 아직 못쓸지도 모른다.

3.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 아니요?”

그렇다.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다. 감사에 걸릴 지도 모른다. 일정이 여기에서 틀어지면 조합의 저 일정에 걸리고, 일정이 저기에서 늘어지면 조합의 또 다른 일정 때문에 상집은 죽어난다.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라는 말은 주로 일정을 놓고 많이 쓰였다. 상집, 그 중에서도 노동안전보건실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하기로 해놓고 안했을 때 감사에 걸리면 깨지는 건 노안실이고, 하기로 해놓고 일정이 늘어졌을 때 다른 상집들이 배째라고 나오면 죽어나는 건 노안실일테니까.
또한 이 말이 오가는 상황에서는 늘 화자와 청자가 정확히 나뉘곤 했다. 하기로 했는데 안하는 건 연구소고, 그걸 질책하는 것은 상집이었다. 거기도 여기도 다 ‘연구팀’ 이라고, 애초에 내밀었던 기획안부터 수차례 했던 회의록까지 도처에 써있었지만, 유독 이 말이 오갈 때만큼은 화자와 청자로 딱 갈라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사전 작업의 부실함. 그리고 실제 집행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기획의 부실함. 훈구동지가 평가서에 썼던 문제는 일상에서 바로 이런 말과 이런 상황으로 드러나곤 했다. 조금 전까지도 있었던 ‘현장주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연구사업의 발주자’ 혹은 ‘진행과정의 점검자’ 혹은 ‘피같은 조합비가 헛되이 쓰이는지 살피는 감시자’가 남는 것이다. 그러고 난 뒤 연구소 성원들에게는 이 일이 왜 안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돌파할 수 있을지가 숙제로 떨어지고, 일부는 배를 째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였으나 대부분은 무리를 해서라도 해내기는 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는 했다.

4. 딱 이 이야기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혼자 되뇌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라고. 언제부터 갈피를 놓쳐버렸던가, 혹은 차라리 놓쳐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던가. 그냥 하기로 했으니까 하는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면 좋겠다고. 무엇을, 그리고 왜 그리 잘해보려 하길래 이러고 있느냐고.
그에 대해 나와 우리는 이미 답한 바 있다. 2003년 3월에 나와 당신, 우리가 만들었던 얇은 보고서에 적혀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 강화에 따른 근골격계 직업병 실태 연구’. 그 맨 마지막에 우리는 이렇게 단언했다.

* 근골격계 직업병 대응 방향의 제 1원칙은 노동강도를 강화하는 구조조정을 저지하고 현장 노동자의 작업량과 작업시간을 적정 수준으로 낮추는 것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 지금과 같이 운영되는 사내 관리 프로그램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한 투쟁력을 봉쇄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는 사측의 수단에 불과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자본의 현장통제를 강화하는 반노동자적 도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만적인 검진이나 측정 및 관리 프로그램은 결연히 거부하고 현장의 실질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 집단요양투쟁의 뒤를 이을 수 있는 현장의 일상적인 투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의 시간적 확장이 필요하다... 요양투쟁 이후에도 지속적인 노동강도 강화 저지 투쟁이 이어져야 한다.

그 이후 우리는 저 말들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러기 어려운 상황을 확인하거나, 몇 가지 시도를 통해 성과와 실패를 짚어가면서 3년을 보내왔다. 개별의 나 또한 저 ‘단호한 말’들을 현실에 살아 숨쉬는 실천으로 키워가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전이 얼마나 녹록치 않은지를 아프게 깨달아가는 것조차 통과의례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모자라는 힘을 쥐어짜면서라도 저 말들이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구라 혹은 뻥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저 말들에서 더 진전한 지점과 후퇴한 지점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진전과 후퇴에 대한 ‘암묵적인 평가’ 혹은 ‘개인적인 감’을 확 드러내고 싶었다.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목표를 보건대 지금은 얼마나 후퇴했으며 어떤 점에서 한발 나아갔는지. (그걸 쏙 빼놓고 묵묵히 전진하는 것만으로 노동해방, 아니 ‘3성’ 중 어느 하나라도 달성할 수 있다면, 다가갈 수라도 있다면, 그렇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굳이 필요 없는 노력이겠지만.)
그 과정에 직접 연루될 수 있도록 생활의 조건을 만들고자 했다. 그게 상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나 배경이라 하겠다. 물론 삶 비슷한 걸 여기에 걸어두었다고(걸어두는 척 하고 있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란 걸 뼈아프게, 지긋지긋하게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 놓아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처방을 찾지 못한 채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여기에 걸었던 이유는 그냥 이게 옳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나는, ‘하기로 했던 거니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요즘은 가끔 허공에 대고 묻는다. 당신도 그런가요? 당신은 안 그런가요?

* 바로 어제 회의에서 ‘술에 대한 경계경보’를 울렸는데, 어제 술 마셨구요. 오늘도 여기까지 쓰다 보니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군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술보다는 술에 곁들인 ‘이해와 공감의 한마디’나 ‘그리고 덧붙이는 촌철살인의 한마디’ 같은 안주가 절실히 탐나네요.

* 이 다음에 쓰고자하는 조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다보면 앞뒤 순서와 내용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언제 다쓸랑가 모르겠지만, 계속 끄집어내야겠지요. 다 잊어버리기 전에.(* 노안실에서 보고 들은 일들- 1) 수시검진, 잊고 있었던 우리의 단호함 2) 공단에서 할 일을 내가 대신 하는 거지요 3) 단조공장 살인사건과 멱살사건/ * ‘이게 무슨 노강평가 기사요?’- 스물 두 번의 노동강도 기획기사를 실으며 확인한 것들, 극복할 것들. - 상집 중에 두 명은 읽었다, 혹은 두 명만 읽었다/ * 우리의 글쓰기에 대하여 - 동지가 쓴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더이다/ * 경합금 2공장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휴게실에서 - 현장 곳곳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발견이 주는 생생함과 긴장 - 화장실에 장판을 깐 휴게실, 여기가 우리 아지트여./ * 식당여성노동자의 투쟁을 새로 배우다 - 보고서 작업이 준 의외의 성과. - 우리가 그동안 만들어낸 보고서들을 다시 읽어야 한다/ * 소위원을 견제하는 대의원 - 연구팀, 대책팀, 실천단의 조직 기획에 대한 평가/ * 더 밀착하자 - 조건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더 나아가자면 충분한 조건과 상황을 움켜쥘 수 있는 현장연구조사 모형의 필요성. 참여행동연구를 채워갈 숙제. 연구소 간판을 내리기 전까지는./ * 호성장과 농성장에서의 고독 - 이건, 정말, 과연, 정리해서 쓸 수 있을까 모르겠다... 쩝/ * 2004년 예비평가를 다시 떠올리며)

2006-12-03 11: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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