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의사 일기
뻐꾸기 / 진보넷 블로거
특검 사후관리 판단의 고충
2006년 11월 15일.
오늘 특검하는데 어떤 이가 절삭유와 관련된 피부가려움과
재채기, 코막힘, 수돗물처럼 나오는 맑은 콧물 등을 호소했다.
그래서 절삭유 사용이 적은 부서로 가면 어떻겠냐 했더니
근골격계 산재 후에 부서이동을 한 결과라고 하면서 난처한
표정이다. 사무직 포함 90명밖에 안되는 회사에서 허리부담도
없고 절삭유도 취급하지 않는 부서를 찾을 수 없으니.
비염쯤은 감수하고 살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부서를 바꾸는 것은 작업자에게 큰 부담이 된다. 고로
작업전환은 정답이 아닐 때가 많다.
작업장 개선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으나 워낙 사람이 많이
밀려있어 그냥 보냈다.
이 회사는 외국계 회사로 민주노총 소속의 지역노조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고 산업공학과 출신에 경영학 석사를 했다는 담당
과장이 합리적으로 일을 풀어나가고 있어 다른 회사보다 먼저
근골격계 질환 관리를 해 왔다. 공정도 꾸준히 개선을 했고
생산물량도 본사에서 요구하는 것의 2/3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작업자들한테는 체력단련비를 지급하여 운동을 장려한
결과 상당수의 직원들이 헬스클럽을 이용하는 등 노력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번 검진은 노과장이 했는데 작업자들의 운동실천률이 매우
높고 근골격계 증상호소자가 거의 없다고 아주 모범적인
곳이라고 칭찬을 했었다. 오늘 보니 두세 명 증상이 심한 사람이
있었지만 사측에 이야기 할 생각은 없다, 자가치료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담당 간호사는 구조조정 가능성
때문에 현장이 술렁거린다고 했다.
이런 데서 특검 2차 검사를 내면 문제 있는 이로 낙인이
찍힐 가능성이 있어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검사를 안 할 수도
없어서 천식관련 증상 호소자 몇 명은 기도유발폐기능 검사를
냈다. 비염 호소자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심하지 않아서
노출감소, 금연 등을 권고했다.
특검을 하다보면 사후관리 란에 무엇을 쓸까 고민 할 때가 많다.
일반검진과는 달리 작업에 대한 조정을 권고해야
하는데, 효과적이고 (노사 양측에서) 수용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꽤 있다.
어제는 판정을 하는데 다른 회사의 유기화합물에 간헐적으로
순간 고농도 노출되는 도장부서에서 8년째 근무하고 있고 반장을
맡고 있는 30대 초반 남자에게서 기도유발검사 양성이
나왔다. 작업장에 알레르기 유발물질이 뚜렷하지 않아서
반응성 기도장애증후군(비면역성 직업성 천식)으로 유소견자
판정을 냈다. 사후관리 란에 마땅히 작업전환이라고 써야 하지만
일단 본인의 의견을 물어보아야 한다. 전화통화를 했더니 절대
작업전환은 원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기침하면서 일하는 게
낫다고 펄쩍 뛴다. 하긴 반장이 어딜 가겠는가.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일단 3개월간 유기화합물 노출을 최대한
회피하고 약물치료도 좀 하고 증상을 본 뒤에 사후관리에 대해
다시 결정하자고 썼다.
이럴 때 나의 원칙은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작업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고용상의 위협이
아니라 타 부서에 가서 새로 시작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염려와 장기적으로 영구적인 폐기능의 장애가능성이 있는 호흡기
질환이라는 고통 중에서 후자를 선택할 경우에 그 편을
들어주어야 할 지 고민스럽다.
점심시간에 이 포스팅을 시작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아, 또 판정하러 가야겠다.
인쇄업의 유기화합물 노출
2006년 07월 12일.
7월11일 오전에 8시부터 11시반까지 검진한 곳은 특수인쇄업체로
수검대상이 약 130명이다. 약 2년전 공장을 우리 지역으로
이사를 하면서 보건관리를 시작하고 검진을 하게 되었다.
고부가가치 사업이라 한다. 연말에 생산직이 지급받는 특별
보너스만 수백만원 이라 하고 직원들 복지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 회사이다. 그러니 장기근속자가 많다.
워낙 인쇄업이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데 시간이 걸리는
업종이기도 하지만 포장과 같은 공정에서도 십년이상 일하는
작업자들이 많고 수도권에서 이쪽으로 이사 온 공장을 따라서
함께 내려온 기혼 여성 노동자들도 십여 명 되는 것으로 보아
대우가 꽤 좋은 편인 회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넉넉한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건강상담을 하다가 증상이 조금만 있어도
수십만원짜리 임상검사들을 별 망설임 없이 하는 사람들도 꽤
만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회사 보건관리의 어려운 점은 경영진의 미묘한 태도이다.
보건교육을 하자 하면 일단 관리감독자 교육부터 하자고 하고
공장장과 주요 인사들 대여섯명이 나타난다. 의사 방문 때 마다
주요 현안에 대해 브리핑도 하고 토의도 하는데 노동자들에게
안전보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꺼린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지난 가을인데 그 때는 십년이상
서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하지정맥류에 대해서 관심을
촉구하고 예방적인 조치와 치료를 당부했었다. 맞교대라는
인쇄업의 특성상 이 회사 노동자들은 밥먹는 시간 빼고 12시간을
꼬박 일하는데 그 시간을 한 자리에 서서 일하니 다리가 안 아플
수 없고 하지 정맥류가 안 생길 수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 가보니 수도권에서 같이 내려왔던 십년이상 일했던
여성노동자 중 반 이상이 그만두고 새로 더 많은 여성 노동자를
채용했다. 언젠가 담당했던 간호사로부터 아무리 돈을 많이
받더라도 집안 살림 놓아두고 내려와 주말부부하면서 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 보니
하지정맥류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작업자들에게
자주 다리를 움직이고 고탄력 스타킹을 신고...... 등등 간단한
예방적 조치들을 설명하고 교육자료를 나누어주면서 통과,
통과.......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다들 안 아프다.
그런데 한 중년 여성 노동자의 얼굴이 말이 아니어서
물어보았더니 원래 아토피 피부염이 심했는데 회사에 들어와서
더 심해졌다고 한다. 그 공정은 완성된 제품을 포장하는
작업으로 직접적인 화학물질 노출도 없고 인쇄공정과도 격리되어
있다. 하지만 제품에 약간 남아있는 화학물질이 휘발하면서
피부를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사에 알려진 알레르기
유발물질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원인인지 자극성
접촉피부염인지 확실치 않다. 그걸 규명하기 위해서 첩포시험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닌 것 같다. 첩포시험을 통해 알레르기
유발물질을 규명하는 것이 환자에게 유익한 경우는 산재보상목적
또는 작업전환의 근거가 필요할 때. 이 회사에는 지금 일하는
공정이 화학물질 노출이 가장 적은 곳이다. 이미 알고 있는
아토피 피부염에 회피불가능한 작업환경이다. 그녀의 선택은
본인도 말했듯 그만두거나 참거나....... 그래도 고민이 된다.
일단 저농도 화학물질에 대한 피부노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더 알아보고.
한편 상반기 작업환경측정에서 유기화합물 노출기준 초과가 3건,
소음 초과가 한두 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다행히
사업주측에서 큰 문제제기 없이 초과를 인정해서 그냥 보고서가
나갔다고 한다. 오늘 38명의 유기화합물 노출자에 대하여
신경행동검사를 하고 노출감소를 위해 걸레를 아무데나 두지
말고 유기용제 용기 뚜껑을 잘 닫고 압통 닦을 때는 반드시
방독마스크를 쓸 것. 정기적인 특수건강진단을 받고 몸의 변화를
감시할 것 등을 일일이 붙들고 설명했다.
물론 환기를 철저히 하는 게 우선이다. 맨 마지막에 나타난
관리부장과 공장장은 노출초과건에 대해서 새 공장 이전하면서
건물과 환기시설을 잘못 설계해서 그런 것 같다고 개선을 검토
중이라 했다. 제품의 특성상 날파리가 들어가면 안되기 때문에
지나친 밀폐를 추구한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환기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돈도 자존심도 있는 회사니까.
성수동 시절 소규모 인쇄업체에 다년간 다녀본 나의 경험으로
인쇄업의 유기화합물 관리는 국소배기시설이 가장 중요하지만
작업습관도 매우 중요하다. 기술을 배우는데 수년씩 걸리는
인쇄업 종사자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일이 몸에 크게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강도 높은 12시간 맞교대 작업을 하다보면 유기 화합물 노출로
인한 만성적인 건강영향이 나타나기도 전에 조기에, 40대
중반이전에 일터를 떠나게 되기 때문에 경각심도 별로 없다. 또
일의 특성상 수시로 열고 닫아야 하는 용제뚜껑을 제대로
닫는다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주어진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들도 한다.
불행히도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은 아직 없다. 내가
접한 인쇄작업자들은 성수동의 영세사업장에서 일했고
사업주들은 작업환경개선의 의지도 능력도 없었으니 공학적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 개인의
작업습관이라도 고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이고 당사자들에게는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또 소규모
사업장은 국고로 기술지원사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신뢰가 쌓일 만큼의 만남을 갖기도 어려웠다. 인쇄업종에 대한
경험은 전문의 따고 처음 했던 일이었기에 가졌던 애정만큼
아쉬움도 많았기에 이 회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잘해보아야지
했었는데.......
그런데 일한지 2년 이내의 작업자들 중에 천식이 의심되는
사람이 3명 있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자료를 다시 검토해보니
이소시아네이트 화합물을 극소량 쓰고 있었다. 성수동의 옵셋
인쇄업종에서는 그런 것을 쓰지 않아서 놓칠 뻔 했다. 메타콜린
유발 검사를 하기로 했고, 천식발작의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조사가 완료되어 결론이 명확해지기 전까지 반드시 방독마스크를
착용하고 일하라고 했다.
유기용제 공정 38명 중 갓 입사하고 아무 증상이 없는 사람
2명을 빼고 모두 신경행동검사를 냈다. 직업성 피부질환 의심도
두세 건 있어 추가검사를 냈다. 검진비용이 꽤 좀 나올 것이라고
관리부장, 공장장한테 말해두었다. 이번에 작업환경측정초과를
한데다 그동안 여러 번 직업성 질환예방에 대해서 브리핑도 하고
토론도 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특수검진은 사업주가 돈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업주의
부담능력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괜히
비용문제로 말이 나면 특수검진 결과의 사후관리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는 특검에서 관찰대상이나
직업병자가 나오면 검진수가가 비싸서 검진기관을 다른 데로
옮기겠다는 식으로 빠져나간다. 한편 작업환경측정 초과가
보고되면 지방노동사무소에서 점검을 나오는데 그 때 사업주가
직업병 예방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것도 중요한
고려대상이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검진하는 것이 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일이 있어 서둘렀더니 11시 반에 끝났다. 3시간 반에
130명이라....... 너무 빨리 끝났네. 이 회사 공정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별 문제 없는 신입사원이 2-30명쯤 되니 가능한
기록이다.
제일 어려운 일
- [인쇄업의 유기화합물 노출] 에 이어지는 글.
2006년 11월 01일.
인쇄업체중에 비교적 작업환경이 양호하고 임금도 많이 주는 그
회사의 특수검진이 마무리 되었다. 특검결과 소음성 난청을
제외하고 7명의 유기용제 요관찰자와 1명의 유기용제에 의한
피부질환 유소견자가 나왔다. 특검에서 천식과 피부질환이
확진되었으나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2명은 수시건강진단
건의서를 보냈다. 지난 월요일에 가서 직업병 요관찰자 및
유소견자 사후관리 상담을 하고 담당과장과 부장면담을 했다.
상담은 매우 잘 진행되었다.
유기용제 요관찰자로 판정된 이 7명중 현재 근무자 5명을
상담했는데 그들은 모두 수년 동안 이 작업을 해 왔고 2회
반복측정한 신경행동검사에서 이상소견이 있었다. 원래 이
검사는 10가지 중 2개 이상에서 비정상이면 유기용제 중독
2기라고 진단하게 되어 있다. 입사초기엔 괜찮았는데 점점
나빠졌다는 게 확인이 되어야 업무관련성을 입증할 수 있지만 이
검사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되는 고로 현재로선 확인불가.
이 회사의 인쇄공정은 지난 번 작업환경측정 때 톨루엔, MEK,
IPA, 에틸아세테이트 이 네 가지의 유기용제를 혼합유기용제
노출기준을 2배 초과했고 요관찰자들에게서 그날 측정한
유기용제 대사물(마뇨산)은 노출기준의 80%정도로 검출되었다.
상담결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작업환경측정당시 인쇄기 중 한
대의 환기설비가 고장이었다는 것, 작업자들은 평소 거의 맨손
또는 폴리글러브만 끼고 용제에 손을 담그다시피 한다는 것,
압통이나 동판 닦는 것처럼 순간 고농도 노출 때도 호흡용
보호구를 쓰지 않는다는 것.
---> 작업자들에게는 검사결과의 의미를 알려주고
피부노출의 중요성과 방독마스크의 올바른 착용에 대해 강조해서
설명했고, 사측에는 적합한 보호구를 선정하여
지급하고요관찰자에 대한 추적검사를 하도록 권했다. 환기설비는
이미 수리했다고 한다.
피부질환 유소견자는 작업전환을 시키기로 했다. 이 회사는
공정이 여러 개라 가능하다고 하는데 본인이 야근이라 직접 면담
못 한게 좀 마음에 걸린다. 일단 노출감소를 위한 대책을 해
보고 또 재발하면 그 때 작업전환 해도 된다는 게 내 생각인데
워낙 여러 가지 사안을 이야기 하다 보니 충분히 설득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HDI 사용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두드러기와
천식환자에 대한 수시건강진단 권고이다. 둘 다 작업 1년미만의
젊은 사람인데 사측에서는 알레르기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일한 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직업병 가능성이 있다는
데 반발했다. 또 하나는 그들이 직접 취급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회사에서 A동에서 TDI작업을 했는데 B동의 천식환자가
재발한 사례를 들어 설득했다. 그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검진이라는 점을 강조.
천식환자는 메타콜린 유발검사 양성으로 나왔는데 문진을 다시
해보니 반응성 기도장해 증후군일 수도 있겠다. 입사초기 고농도
유기용제 노출을 경험해서 심한 증상을 겪고 사측에 환기시설
설치를 건의해서 받아들여진 적이 있다 한다. 반응성
기도장해증후군은 천식과 비슷하지만 기도유발검사 양성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질병이다.
꽤 긴 시간을 논쟁섞인 대화를 나누니 매우 피곤해서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려는 데 담당부장이 혈압 좀 재 달란다. 대화 전에
재야지 실컷 열받은 다음에 재면 어떻게 하냐 하고 웃었는데
재보니 170/110 이다. 허걱. 지난 번 검진때까지 괜찮았는데.
들어보니 최근 한 달간 혈압변화가 심했고 신경쓰는 일이 좀
있다고 한다. 본인이 보다 정확한 검사를 원하기도 하고 연령,
흡연상태, 스트레스 상황을 고려해서 순환기 내과 교수 앞으로
진료의뢰서를 썼다.
지난번에 교대근무자에 일산화탄소노출이 기준을 초과한 사람을
순환기 내과로 보냈다가 왜 왔냐고 하고 검사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 매우 난처했던 경험이 있기에. 혹시 몰라 직업심장학회
권고사항을 참고로 적었다. 이런 경우 24시간 심전도, 심초음파,
스트레스 유발 검사를 하도록 권하고 있는데 앞의 2개는
검사가능하고 뒤의 것은 국내에서 검사가 세팅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산업의학 전문의로 일하면서 제일 어려운 일의 하나는 사업주를
설득하는 것이다. 직업병 문제는 사측이 한 두 번의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수십 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내왔는데 왜 올해는 이렇게 시끄럽냐는 질문부터 나온다. 내
답변은 법이 바뀌었고 이젠 노동자의 건강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로 발전해가기 때문이니 그렇게 이해 해달라. 꼭 누가
죽어야 직업병이라는 생각,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두 번째는 흔히 해당 노동자의 특수성(주로 불성실)을 들어
트집에 가까운 질문들을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하느라
하지만 쉽지 않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하던 노동자가 질병이
생기는 순간 평소 불성실한 사람으로 갑자기 낙인찍히고 본인
과실에 의한 것으로 몰아 부치는 일은 고전적인 문제이다.
이 가을에 상반기에 검진하고 마무리 된 곳을 몇 군데 더 가야
한다. 때로 사측과 논쟁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호흡조절하고 해야 하는
어려운 일...... 그래도 하나 끝내서 시원했다.
특수검진이 조심스럽다
2006년 09월 06일.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한 재생플라스틱 제조회사에서 분쇄작업을
하면서 수십종의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62세 남자가 작년에 비해
폐기능이 10%정도 감소했고, 작업 후 폐기능은 작업 전에 비해
또 10%정도 감소한 소견을 보였다. 작년 검진에서 흉부엑스레이
촬영상 이상이 있었는데 작업경력 2년째라 비직업성 질환으로
판단하고 호흡기 내과 진료를 보도록 했던
사람이다. 흉부 컴퓨터 단층촬영상 암도
진폐증도 아니었고 호흡세기관지 염증으로 추정되는데 확진을
위해서는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호흡기 내과의사의 의견을
참고하고, 작년 검진을 계기로 40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었는데도 폐기능이 저하된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재검을
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그가 부인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8월30일자로 해고되었다고 한다. 들어보니 사측에서 그가 중대한
병을 숨기고 치료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오해하여 그를 비난하면서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환자는 화가 나서 사측이 내미는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싸인을 했다. 아는 노무사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일단 싸인하면 상당히 불리하단다. 그러니 일단 가장
빠른 시일내에 사직의사가 없다는 것을 사측에 알려야 하고
법적인 효력을 가지려면 그 내용을 녹음을 해 두어야
한단다. 그러나 그 노부부는 녹음기도 없고 녹음기를
빌리더라도 사용할 자신이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허걱.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여러
과를 전전하다가 우리 과까지 와서 상담하게 된 사람인데
엠디아이에 의한 천식이 의심되었다. 이후 사측에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하고 작업전환 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엠디아이 공정에
재배치되자 화가 나서 그만두었다. 그만두고 나서 나를 찾아와서
산재신청하겠다고 했는데 노무사한테 물어보니 고용이 유지되지
않으면 산재신청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안타까웠던 사례이다.
그래서 심각한 직업성 질환이 의심되면 먼저 무슨 일이
있어도 결론이 날 때까지 고용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환자는 특검
문진 때 증상이 없어서 재검이 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재검이 나가고 나서 노과장과
간호사가 사업장을 방문해서 사측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여 별 걱정 안했다. 일단 그 회사 보건관리자인 노과장이
사측에 통화하여 설득하여 일단 보름동안 유보시켰다.
나는 환자 차트를 들고 호흡기 내과 교수를 찾아가서 의논을
했다. 환자에게 직업성 질환이 있느냐, 비직업성 질환인 경우
업무를 계속 할 수 없는 건강상태이냐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주치의뿐 아니라
직업성 호흡기 질환에 식견이 풍부한 다른 교수까지 와서 길게
토론을 했다. 일단 호흡기내과 쪽에서 일을 빠르게 진행하여
고해상도 컴퓨터 촬영과 메타콜린 유발 검사를 하고 나서 임상
상태를 먼저 파악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제
환자가 모든 검사를 마치고 다시 찾아 왔다.
호흡기 내과 교수의 의견은 “일단 간질성 폐질환은 아니고,
흉부 컴퓨터 단층 촬영상 작년과 비교하여 나빠진 소견은 없다,
폐기능 검사상 경도의 폐쇄성 폐질환 소견이 분명하고 의미있는
기관지 과민성이 있으나 천식이라고 진단하기에는
미흡하다. 금연 후에도 폐기능이 나빠진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으나 간혹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에게서
자극성 가스에 노출시 그런 소견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작업환경에 의해 폐기능이 나빠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천식을 진단할 만큼 나빠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특별한 증상이
없고 일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이 선생님은 직업성 천식환자를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노동자의 처지를 잘 알고 인정이 많은 분이라 말씀하시는 게
다른 임상과 교수들이랑 좀 다르시다. 환자에게 치료를 요하는
호흡기 질환이 없다는 소견서를 써주셨다.
예방적 견지에서 보자면 이 환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
작업을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는 일하고 싶어 하고
억울한 해고를 당했고 지금은 그가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나는 특수검진 결과서에 직업성
질환은 없으며 경도 폐기능 저하는 치료를 요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썼다. 이런 건강상태로 그 작업을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인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충분한 설명을 들은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노과장이 회사와 다시 통화를 했는데 계속 근무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 상황에서 잘못한 것이 되어야
하기에 노과장은 사측에 사과를 했다고 한다. 사실 재검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고 노동자를 해고하고 문제를 일으킨 것은
회사인데 사과는 우리가 한다.
하여간 이 건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예민한 문제는 확인 또
확인하고 처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호흡기 내과 교수들과의 토론에서 그들의
풍부한 임상경험으로 부터 배운 것이 많다. 지난 사흘간 우리
모두 힘들었다. 그래도 결과가 해피엔딩이니 낫다. 내 마음 깊은
속에선 환자가 억울함을 풀었으니 이번 계약기간(12월말) 끝나면
그 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꿈틀거린다. 아니, 이럴
땐 그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건데 말이지.
하반기 출장 특검 첫 날
2006년 08월 24일.
하반기 검진 첫 날이다.
한 달 만에 일찍 출근하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검진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눈을 감고 부족한 잠 보충을 시도한다. 중간
중간에 눈을 떠보니 운전하시는 최선생님을 빼 놓곤 모두들 코
자고 있다.
비몽사몽간에 걸어서 검진장소에 들어서는데 못 보던 스크린들이
얌전하게 서 있다. 병원에서 쓰는 스크린이 무거워서 가볍고
작은 것으로 새로 여러 개 구입했다고 한다. 뭐 하나 사려면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쳐야 하는 지라 한참 걸리는 데 추진력
강한 행정계장이 신경을 써서 뚝딱 해결해주어 고맙다.
#1. 두 번째 수검자가 들어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작년에 근골격계 유해요인 조사사업을 할 때 뭔가가
불분명한 요통을 호소해서 엠알아이를 찍었는데 거기서
척수신경종양(양성)이 발견되어 수술한 사람이다. 그가
수술했다는 말을 들은 지 며칠 후에 내가 입원을 했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병실로 찾아온 적이 있다. 환자복을 입고 만나니
쑥스럽더라. 복직할 때 근무에 적합하다는 소견서를 받기 위해
연락을 해 와서 재활의학과 보내면서 전화통화를 했었고, 그
후에 작업장 순회점검 하다가 멀리서 눈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복직한 지 6개월째부터는 평상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안심이
좀 된다고 하면서 웃는 얼굴을 보니 다행스럽다.
#2. 재작년에 여기서 니켈 알레르기에 의한 직업성 피부질환
유소견자 판정을 냈었다. 2년 만에 만나보니 작업전환후
증상없이 잘 지내고 있다. 좀 아쉬운 것은 피부질환 원인이
유리섬유인지, 니켈인지, 크롬인지 진실을 밝히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유발검사를
해보아야 하는데 니켈 알레르기는 워낙 흔한 것이라 다른 물질에
대한 검사결과 없이 첩포시험 양성이라는 것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여간 언성을 높이고 어거지를 쓰는
안전관리자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이 건으로
회사에 근로감독관이 방문을 했고 몇 가지 작업장 개선 명령이
떨어졌고 조금 개선이 되었고 환자는 증상이 없다니
해피엔딩이다.
#3. 방청제 스프레이 작업 6개월째인 30대 초반 남자가 그것만
마시면 메스껍고 토할 것 같다고 한다. 드디어(!) 노출에 관한
평가의뢰서를 써먹을 때가 왔다. 특검을 하다보면 개인별
노출평가가 필요한 경우가 가끔 생기는 데, 해당 산업위생사와
정확한 의사소통이 안되고 비체계적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지난 번 회의 때 과내에서 개인별 노출평가 의뢰서 양식을
만들어서 사용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이 경우는 추가
임상검사보다 국소배기시설 설치가 중요한 대안이다.
국소배기시설 설치 대상 물질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설치를
촉구하는 조치를 취했는지 점검 가능한 체계를 만들어 놓으니
마음이 편하다.
#4. 보전부서, 간염보균자로 일차검사에서 간기능 수치가 200대,
아내가 건강식품회사 다녀 2년째 각종 보조제 섭취하면서 음주를
꾸준히(!)했다. 일차검사결과 통보 후 인근 병원에서
정밀검사하고 치료 중. 현장에서 노출되는 화학물질 중엔 잘
알려진 간독성 물질은 없으니 치료경과를 좀 지켜보기로 했다.
검진하다보면 가끔 일반질환 유소견자에 대한 업무 적합성을
평가하는 것을 빼먹기 쉽다. 조심하자.
#5. 지난 번 검진에서 혈압이 높은 사람들이 재검
받으러 왔다. 열 명쯤 되는데 혈압관리를 위해 생활습관개선을
한 사람이 반은 넘는 것 같다. 가장 모범적인 예를 들면 혈압이
150/84인 사람이 운동을 시작했고 보름 전부터 술을 끊고 흡연량
줄이고 있고, 체중을 3킬로그램 감량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노조간부들은 이제 막 파업 끝나서 못하고 있다고
했고 어떤 이는 더 늙어서 아플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고 했다.
#6. 20대 중반, 교대근무 2년째인 남자, 수개월 전부터 하루에도
수차례씩 가슴 두근두근하다 하여 심전도 검사했더니
부정맥이 나와 순환기 내과 진료의뢰서를
작성했다.
검진이 마무리가 되어 간다. 아이, 근데 왜 이렇게 몸이
무겁냐. 어제 누가 집에 놀러왔고 맛있는 머루주가 생겨서
몇 잔 마셨더니 잠을 잘 못 잤다. 앞으론 아무리 맛있는 것도
검진 전 날은 먹지 말아야지. 흑, 몸이 옛날 같지 않아......
(돌아오는 길 읽은 책에는 알콜이 유방암의 위험요인으로
확립된 식이요인 중 유일한 것이라고 쓰여있었다. 흑흑).
동네 의사로 산다는 것
2006년 07월 03일.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시시때때로
변한 것 같다. 교회에 다닐 때는 슈바이처와 같이
뭔가 훌륭한 일을 하면서 살게 될 운명이 아닌가 착각을
한 적이 있었고, 여자대학을 다녔던 언니들로부터
여성도 직업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안정적인 직업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것도 있다. 한편 서머셋 모옴을 보고 의사가 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기억도 있다.
의과대학에 들어와서 첫 몇 년은 내가 의사가 될 것이라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꾸준히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여기 저기
궁금한 게 많아서 돌아다니다 보니 성적이 바닥이어서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인가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
앞에 보이는 의사의 삶이 도대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저찌 해서 삼년만에 본과 1학년으로
복학하면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땐 좀 우울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새로운 경험이 쌓이고 그에
따라 더 넓은 세계가 보여 좀 나아졌다. 본과 4학년
때 중앙도서관 옥상에서 놀다가 만난 낙타한테서 산업의학
전문의제도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거
해야겠다.’는 생각하면서도 좀 망설여졌다. 나는 그 때
‘구체적으로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에
골몰했었는데 당시에는 산업의학이 예방의학의 한 분과였고
실제로 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산업의학 수련을 받으면서 만족스러웠던 것의 하나는 나무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숲만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점이었다.
집단을 대상으로 한 보건사업과 개인에 대한 예방적 중재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진료실에 앉아서만은 가질 수 없는
재미니까. 펠로우를 하면서 보건관리를 맡아서 했는데 오호,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지식과 경험이 좀
있었으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 때만 해도 젊어서 열정으로 돌파했었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라.
집에 돌아가면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
밖에서 힘 다 쓰고 집에 오면 안 된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나니 이게 내가 지속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도
들더라. 또 한 가지, 왠지 마음 한 구석에서 허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 때 읽은 소설이 ‘아름다운 의사
삭스’이다. 그걸 읽으면서 그래, 그래, 나는 이런 의사가 되고
싶었지, 그런데 지금 나는 얼마나 메마른 사람인가.....이런
생각을 했다.
천안에서 일한 지 4년 째, 요즘 검진을 하면서 사는 재미를 느낄
때가 많다. 며칠 전에는 어떤 수검자가 진찰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선생님,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하더라. 오늘은 검진하러 갔더니 “앗, 여기
숨어있으셨네. 난 또 연차 올라가서 이젠 출장 안 나오는 줄
알았네” 하면서 반가와 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보고 반갑다는
사람이 늘었다.....
위암투병중인 부인의 우울증 치료에 대해서, 안구암을 수술한
장인을 보살피는 문제에 대해서, 아픈 아기의 진료를 어디서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약국에서 일하는 동생의 천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의 문제까지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좋다. 이럴 땐 의사라는
직업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대장암 수술한 시모의 병간호를 떠맡은 중년 여성의 하소연을
듣거나, 만성피로를 호소하던, 육아휴직 후 복직한 여성
노동자의 어려움을 들어주면서 해결방법에 대해서 의논할 때 그
억울함에 맞장구치면서 너무 착하게만 살면 몸도 마음도
아프니까 자신을 돌보는 일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누군가의 하소연을 한 순간이라도 들어 줄 수 있다는 게
기쁘다. 힘들 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검진에서 내 역할은 아프고 속상한 일을 들어주고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인지라 하다보면 목도 아프지만 더 이상
퍼줄 감정도 없을 때도 생긴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안부를 묻거나 반갑게
맞이해 주면, 누군가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는 것에 나
역시 위안을 받는다. 내 마음도 다시 조금씩
차오른다.
오늘 지난 몇 년 동안 꽤 자주 갔었던 회사의 검진하고
왔다. 하루 종일 154명을 만나면서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많이 피곤하지 않았다.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다는 게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졸리고 멍한 아침
2006년 11월 16일.
아침 7시에 검진시작. 어제 꽤 잤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꼼짝도 하기 싫고 입을 열기도 싫지만 그렇게 앉아만 있을 수
없는 게 나의 일이라 억지로 입에 힘을 주고 말을
하는데 점점 더 말하기 싫어졌다. 단협에 따라 연 2회
특검을 실시하는 곳인데 사람들이 검진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자체를 귀찮아한다. 그러니 나도 할 말이 없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하는 사람은 너무 많이 하고 못 하는
사람은 못하고..... 모든 게 다 그래. 아, 정말 싫어.
싫어......
더 의미 있고 보람 있고 즐거운 일들도 많은데 귀찮아하는
사람들 붙들고 검진하느라 이른 새벽부터 나와야 하다니,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나오면서 담당 간호사한테 보건교육일정을
잡으라고 했다. 괜히 사측에 검진 한 번만 하라 그러면 노조에서
오해하니 다 불러다 놓고 일 년에 한 번씩만 검진하고 그
돈 아껴서 좋은 데 쓰라고 꼬셔야겠다.
들어오는 길에 뭐 물어보려고 옆 방 손가락 선생님 방에
들어갔다. 지난번에 쓴 논문을 revision 했는데 40분
늦어서 등록을 못 시켰다고 속상하다고 투덜투덜.
뻐꾸기도 이 논문의 공저자여서 빨리 게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언제 어디에 게재될지 모르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니
흑흑. 그런데 이번엔 임팩트 팩터가 더 쎈 저널에
다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훌륭한 논문을 쓰는
과정에 대한 수다가 한 판 벌어졌다.
갑자기 나도 논문이 너무 너무 쓰고 싶어졌다. 쌓아 둔 데이터들
속에서 울고 있을 사실과 진실들이여! 흑흑 특검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그 덕분에 요즘엔 강의할 때도 옛날
보단 똑똑해진 것 같아서 좋긴 한데, 그래도 역시
논문을 쓸 때의 기분과는 다른 것.
하지만 밤잠 안 자가며 주말 가리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는
동료선후배 업계 종사자들을 보면서 그렇게는 못 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일단 너무 피곤해. 그날그날 검진하고
강의하고 이런 저런 실무적인 일 처리하다보면 어느새 집에 가야
할 시간. 저녁밥 먹고 애들하고 어쩌구저쩌구 하다보면 어느새
잘 시간. 옛날엔 애들 재우고 뭐 꼼지락 꼼지락 거리기도 했지만
이젠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웬만큼 급한 일
아니면 재부팅이 안 되거든.
그래, 세상은 공평해. 잠 못 자가며 열심히 하면 논문도 쓸 수
있는 것이고 나처럼 결단코 잠은 자고 살아야 한다 하면 논문 쓸
시간이 없는 것이고. 열심히 한 사람들이 좋은 논문 쓰는 걸
질투하지 말지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본과 2학년 학생들이 찾아왔다. 지난
번 예방의학회 예비연구자 상 수상자들이다. 쭈빗쭈빗 선물을
내미는데 묵직하다. 술이냐 물어보니 건강식품이란다. 화장품이
아닌 게 다행이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거 먹고 힘내서
앞으로 더 열심히 가르치마. 이런 인사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앗
그런 지키기 어려운 말을 하다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의녹화 및 평가대상으로 선정되었는데 왜
촬영안하냐는 전화를 교학과로 부터 받고
임상과 교수들은 병원진료에 바빠서 강의시수 자체가
적으며 대부분 팀 티칭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어쩌구저쩌구 사유서를 쓴 게 바로 어제인데 말이야.
어쨌든 올 겨울엔 논문을 좀 열심히 써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
올해는 12월 20일 경에 프로젝트 마감을 다 할 생각이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동안 특검에서 추가검사도 많이 하고
직업병 유소견자도 많고 그리고 우리 검진팀이
불친절하고 등등의 사유로 많은 회사가 떨어져
나가서 검진이 12월 초면 끝난단다.
에구에구. 진한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얼른 일해야겠다. 힘내라
힘, 뻐꾹.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2006년 11월 22일.
익힌다는 것은 몸으로도 아는 것이란 뜻이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을 [강의]에서 읽은 것 같다. 올해 특수검진을 새로
맡아서 하게 되면서 날마다 드는 생각중의 하나는 세상에
화학물질은 많고도 많고(순물질만 10만종이라나)
뻐꾸기의 지식은 어찌 그리도 적은지, 게다가 몇 년 전에
공부한 것만으로 버티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왜냐?
의학지식이 매년 2배씩 증가한다고 하는데, 화학물질의 독성에
대한 정보도 만만치 않은 속도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궁금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정보이지만 그걸 배우고
익히는 자의 입장에선 따라갈 수 없이 많은 양이다.
오늘은 가까운 곳에서 아침 8시 검진 시작이라 별 부담 없이
출발했다.
그 회사는 반도체 부품생산업체인데 이젠 납도 거의 안 쓰고
주석을 매우 약간 쓰며 면봉에 묻혀 불량 난 부분만 사알짝 닦는
정도로 세척액을 사용하고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검진장소에
도착했는데, 웬걸 책상위에 편지가 한 장 놓여있다.
며칠 전 그 회사에서 쓰는 세척액 성분을 다시 확인해달라고
담당 산업위생사에게 당부를 한 결과. 작업환경측정 때,
사측에서 IPA 라 해서 그런 줄 알고 분석했고 결과를 보고 MEK인
것 같아 사측에 다시 확인해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받았더니,
글쎄 1-브로로프로판이라는 것이다. 2년 전 그것이 TCE니
아니니 논란이 있었다가 덜 유해한 IPA로 바꾸었다하여 그런
줄만 알았는데 어제 밤에야 그게 아니라고 한다.
아침부터 담당 산업위생사한테 전화해서 재차 경위파악을
하고 나서 재측정을 지시했다. 담당산업위생사왈, 그게 국내
산안법상 규제물질이긴 하나 노출기준 미제정이고 어쩌고.....
“그거 ACGIH에서 10ppm으로 노출기준 정한 물질이요. 빠른
시일내 재측정하고 보고하세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썰렁하게 말하게 된다.
2-브로포 프로판은 27명의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난소부전을
유발하여 충격을 준 세척제이고, 1- 브로모프로판은
그보다는 약해도 생식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물질인데 이제 와서 그 물질이 그거래요 하고 넘어갈 수는
없지. 정말 그 물질인지, 정확한 노출농도는 어떤지
파악해야 하는데, 국내노출기준타령이니 좀 짜증이 났다.
130명을 5시간 동안 검진하는 기록을 세우면서 세척작업자에
대한 집요한 문진에 들어갔는데, 약 1년 전부터 월경기간이
줄거나 양이 줄어든 사람이 십여 명 쯤 된다. 세척제가 바뀐
시점도 그 즈음. 여성 호르몬 검사를 추가로 냈다.
난소기능저하의 결과가 아닌, 그저 우연이기를 빌면서.
사무직 남성 노동자가 6개월간 계속되는 기침을 호소하길래
들어보니, 하청업체에 업무상 갔다가 실수로 도금조 용액 냄새를
화악 맡게 된 뒤로 그렇다고 한다. 세상에, 정말 운 없는
사람이로세, 반응성 기도장해증후군에 부합하는 임상증상이네.
메타콜린 유발검사를 냈다.
오늘은 간호학생 4명이 실습 나왔길래 그동안 잘 신경써주지
못해 미안해서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가르쳐주었는데
아이들이 별 성의가 없어 보여 짧게 끝냈다. 말똥만
굴러가도 웃음이 나올 나이라 그런건지,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으나 까르르 까르르 하는 모습이 좀 그랬다.
쟤네들 또래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난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질은 쓰면서 2교대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내가
신경 써서 일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도 마냥 즐거운 모습이
이뻐보일 수는 없다.
마지막에 나타난 담당 과장의 얼굴이 좋지 않아 물어보니
둘째아기가 임신 6주인데 유산된 것 같다는 말을 바로 어제
들었다고 한다. 의사가 산모한테 직접 말한 뒤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런 건 보호자한테 말해야지 너무 배려가
없다고 속상해한다. 아기들은 이 세상이 맘에 안들어서
오다가 돌아가기도 하는데 다른 데 가서 태어나 잘
산다더라..... 뭐 이런 위로밖에 더 하겠는가.
검진마무리하면서 혹시나 해서 임상병리사한테 여성 호르몬
검사할 때 마지막 생리일 적었냐 물어보니 당당하게 그런 말씀
없으셔서 안 했노라 한다. “그건 임상병리사 기본인 줄
알았어” 쌀쌀맞게 말해놓고 후회한다. 좋게 말해도 될껄.
30분쯤 후에 한 달째 감기가 안 떨어져 고생이어서 낼은
휴가 낸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더 미안하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 검진하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하는 마음
반, 평소에 미심적은 거 하나라도 확인하고 공부하고 하는
자세가 아쉬운 마음 반이다.
새로 온 업무담당자는 600명 규모 회사에서 보건관리업무를
했었던 법학전공자로 또릿또릿 일 잘 하게
생겼더라. 열심히 해서 빛이 나는 일은 아니지만 애쓴 만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업무이니 신경 써달라 부탁하자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데 힘차서 좋다.
나오려는데 아니, 간호학과 교수가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그래,
바쁠 텐 일이 더 많아지는 법이지. 지난번에 실습 잘 안
도와준다고 좀 서운해 하는 전화를 받았는데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지기가 그래서 작업장 순회점검을 같이 했다. 하필 제품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생산본부장의 호의어린 설명 때문에
30분이면 충분할 것이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병원복귀해서 판정하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진찰실을
빠져나오는데 보건관리 간호사인 이쁜 곰이 따라 붙는다. 이
회사, 저 회사 특검관련 현안을 보고하고 결정해달라는 것.
이야기하면서 연구실까지 와서 차 한 잔 주었다. 얼굴이 좀
가라앉아 보인다 했더니 모친이 유방암 의심된다 하여 금요일에
검사받기로 했단다. 그니는 부모님 늦은 나이에 얻은
고명딸이다.
으잉, 환경과 보건 세미나 시간에 늦었다. 원래 사업장
보건교육일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사전에 연락했었는데 파업으로
취소되었다고 해서 불참하고 마감 급한 일 처리를 좀 할 까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래도 공부해야지 하고 꾸역꾸역
들어갔다. 어, 그런데 손가락 선생님의 발표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후반부만 들어 아까웠다. 세상에나, 암치료목적으로
방사선 조사를 한 뒤에 발생한 2차 원발암의 엄청난 위험도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쏟아져나왔더구나. 뒤이어 두 번째 발표인
카이로스의 환경과 어린이 건강도 재미있게 들었다.
누리가 전화를 했다. 오늘 영어수업 하나 안 하나 궁금해서 한
전화이다. 얼른 오라고 성화이다. 가자, 가자. 못 다한 일들은
내일 또 하지 뭐.
배우고 익히니 즐거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