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열린마당은 지난 6월 아사단식투쟁까지 감행하며 지역,
전해투, 민주노총 중앙의 연대를 이끌어내 합의에 이른
한국타이어 투쟁의 경과, 평가, 및 전망을 실었다. 원래대로
하자면 현장통신란에 게재하는 것이 적합하겠으나, 그 투쟁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평가가 제출되고 있어서, 열린마당에
게재한다.
앞의 글 「97한국타이어 해고자투쟁 평가서」는
‘한국타이어 실천하는 노동자회’의 공식평가이고, 그 뒤의
「합의가 묵살되는 한국타이어의 현실」은 노민추
소속 해고자 박응용 씨의 글이다.
글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투쟁의 목표, 방향, 결과를
둘러싸고 상당한 이견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이견으로 인해
조직간의 분열도 존재하고 있다. 이 글이 한국타이어의 투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차이를 좁힐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차이를 넘어 한국타이어
동지들에 대한 지지와 지원일 것이다.
열 린 마 당
97년 한국타이어 해고자투쟁 평가서
한국타이어 실천하는 노동자회
1. 평가에 앞서
1997년 6월 11일부터 1997년 8월 23일까지 한국타이어 제조(주)
대전공장 정문앞에서 진행된 ‘한국타이어 해고자 원직복직 및
손해배상 철회를 위한 투쟁위원회’(이하 한해투)의 목숨건
단식, 철야 농성 투쟁의 전반에 대한 평가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 전체가 아닌 일부만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번 평가투쟁은 한국타이어
노동조합민주화투쟁의 중요한 분기점이며 향후 일어나게 되는
모든 사업에 있어서 우리가 나아갈 바를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의 사안별 투쟁 평가보다도 의미나 중요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특히 이번 평가이후
벌어질 논쟁은 현재 양분된 노민추 세력의 존립근거를 둘러싼
일대 전기가 될 것이고 이는 평가주체의 책임 있는 논거와 실천
속에서 투쟁은 격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한해투 투쟁의 조건
이번 한해투 투쟁은 1995년 4월에 있었던 현장조합원들의
휴일특근 거부와 주44시간제 쟁취투쟁에서 회사측의 악랄한
술수인 ‘업무방해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97년 5월 21일
확정판결이 난 것을 직접적인 계기로 준비되었다.
노동탄압과 인간지옥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철저히 유린되었던 한국타이어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지난 90년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왔고, 지난 95년 상반기 대의원선거투쟁을
조직적으로 준비한 ‘95년 대의원선거대책본부’(이하
선대본)지도하에 폭발한 한국타이어 투쟁은 이후 노민추 세력의
어용노조타도투쟁과 현장노동자들의 조직화라는 큰 줄기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조직적으로는 노민추 세력의
분열로 한국타이어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의장 김종범, 이하
노민추)와 ‘한국타이어 실천하는 노동자회’(이하 실노회)라는
조직이 상존하는 가운데 97년 2월부터 10여 차례의 정문집회와
실노회가 독자적으로 3월 7일에 있었던 위원장선거에 대전지부
농성투쟁으로 현장노동자 2명의 해고와 4명의 정직은
현장노동자들과 현장 밖에 있던 해고노동자들의 분노와 투쟁의
결의를 높여 냈지만 4월 대의원선거에서 한 명의 민주대의원도
당선시켜 내지 못함으로써 침체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노조 세력의 일회적인 투쟁과 사업의 침체 국면은
민노추조직의 분열과 각개약진, 한국타이어 독점자본의
노조민주화 세력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탄압, 지속적 감시와
징계, 해고, 부서이동, 전근, 조합원 교육 및 회식과 모임,
고소․고발 등에 의한 현장노동자 의식의 변화(패배주의)와
현장활동가의 고립 등 현장에서의 조직력 약화가 초래한
상황이었다. 또한 어용노조집행부는 어용의 아성을 자랑이나
하듯 97년 임단투를 일찍이 마무리하고 위원장 선거를 계획대로
치러 신동출 집행부로 자리 바꿈하고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는
외면하고 노동조합의 일상활동은 뒤로한 채 대의원 해외연수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번 한해투 투쟁의 계기와 원인을 전반적으로 규정한
조건을 정리해 보자.
1) 한국타이어 어용노조 민주화투쟁과정에서 95년 선대본투쟁에
대해 손배를 통한 활동가들의 활동축소와 활동 이탈을
획책하려는 회사측의 음모를 분쇄하고자 97년 2월 공투위를
결성하여 공동투쟁한 노민추와 실노회가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의
일환으로 기획된 투쟁이었다.
2) 조직적으로 그 동안 양분되었던 실노회, 노민추가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계기로 배치되었다.
① 실노회와 노민추의 분립은 95년 선대본 투쟁과 6월 투쟁을
둘러싼 투쟁노선과 조직노선상의 차이를 바탕으로 조직의 민주적
운영을 둘러싼 지도부의 분열이 양조직을 결정적으로 분리하도록
강제하였으며, 이는 95년 9월에 있었던 노민추 총회(성원도 되지
않았던, 결의도 3/2 찬성이어야 함에도 규약에 따르지 않은 총의
의)에 의해 제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② 조직노선의 차이는 노민추라는 조직에 대한 이해, 건설시기의
문제, 학습소모임 건설이 사조직이라는 관점의 문제, 6월 투쟁의
성과물인 ‘한국타이어노조민주화투쟁동지회’(한민투)에 대한
위상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 등 박응용 의장을 비롯한 다수파와
제명을 당한 그룹간의 대립으로 정리될 수 있다.
③ 투쟁노선은 한타독점자본하의 어용노조 민주화투쟁 경로와
투쟁전술의 배치 등을 둘러싼 논쟁으로, 다수파는 모험적이며
청산주의적인 투쟁을 비타협적인 투쟁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훈련되지 못한 노민추회원들을 무조건 투쟁(총회소집
서명투쟁, 노조사무실 농성투쟁, 단협갱신투쟁)투쟁으로 내모는
무모함과 투쟁과정에서는 투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투쟁에서의 모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관점은 12월 단협투쟁에서 조합원 대중의 이해와는
동떨어진 단협갱신투쟁을 한풀이식 투쟁(모험적이고
청산주의적)으로 전개하면서 노민추가 급격하게 현장과 유리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④ 어용노조민주화세력의 분열은 한타 민주노조 건설 사업의
최대의 걸림돌이자 이후 연대사업을 비롯한 제반사업을
전개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양조직의 현장활동가들이
현장조직사업에서 심한 갈등과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3) 폭력테러, 성폭행 의혹, 대량의 해고자 양산 등 징계와
철저한 현장감시를 통한 현장통제에 맞선 투쟁이었고 당시에도
근무평정을 가지고 해고를 당하는 등 현장에 노동탄압이 계속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저지, 분쇄하기 위해 투쟁이
조직되었다.
3. 투쟁의 목표와 전술
이번 투쟁의 목표는 회사측의 손배청구를 해고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완전히 박살을 내는 것과 해고자 원직복직, 조직적으로는
전체 민주노조세력의 단결(통합)을 기해 낼 뿐만 아니라
현장탄압을 저지시켜 환장활동의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악랄한 한타독점자본에 맞서 당면투쟁의 목표를
관철시켜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로 목숨을 건 단식투쟁과
제민주세력과의 강고한 연대투쟁을 주요한 전술기조로
잡아냈다.
1) 투쟁의 목표와 관련한 쟁점
이번 투쟁은 노민추와 실노회가 한해투라는 일시적(?)인
공동투쟁체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 결합초기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양 조직이 97년
대의원 선거이후 공투위 활동을 아무런 방침도 없이 중지한 이후
독자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상태에서 손배를 계기로 즉자적으로
결합, 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투쟁목표에 대한 내부 진통이
심하였다.
초기에는 해고자 원직복직과 손배철회, 노동탄압 중지를
요구화시켜 내고 단결하였지만 단식투쟁의 강고한 진행과
민주노총, 전해투를 중심으로 한 연대투쟁의 활발한 전개는 그
동안 각조직이 진행시켜온 사업을 이번 투쟁에 목표로 내세워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①
한국타이어에서 그 동안 일어났던 폭력테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 ② 한국타이어가 노민추 후원자인
여성동지를 성폭행했다는 사건에 개입했다는 점과 이를 철저히
규명하고 모든 책임자를 처벌하는 한편 이번 투쟁에 최대
이슈화하는 것, ③ 현장노동자의 징계해고가 계속된다는 점에서
노동탄압 재발방지에 대한 분명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
등이다.
투쟁 목표에 대한 논쟁 즉 손배 철회나 해고자 원직복직에 대한
입장 차이가 보다 극명하게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노민추는
손배나 원직복직에 대한 비타협적인 관철을 분명하게 투쟁목표로
제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성폭행, 폭력테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다. 결국
노민추는 변화하는 투쟁지형의 모습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번 투쟁으로 끝장을 보자는 것이었고,
실노회는 해고자들의 역량 즉 한해투의 역량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연대투쟁과 단식투쟁을 강고하게 전개하면서 처음
계획된 투쟁목표를 변화시키지 않고 보다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투쟁전반에 대해서도 손배나 한타의 다양한
노동탄압의 실상을 폭로하기보다는 주로 폭력테러나 성폭행이
한타자본의 약한 고리이기 때문에 이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야
하며, 이것이 확실하게 처리되지 않는 한 투쟁의 마무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분열된 조직의 통합 문제에 있어서도 노민추는 통합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투쟁의
모든 과정에서 이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실노회와의 차이만을
강조했다. 처음에 한해투는 각조직의 입장차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실노회나 노민추가 조직적으로 한해투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해고자 개인의 가입으로 각 조직의 입장이 크게 부각되기
보다는 전체의 민주적인 의견수렴과 일사불란한 집행을 위해
노력해 나간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투쟁목표와
전술배치를 둘러싼 이견이 나타남에 따라 어용노조민주화조직의
단결은 안중에도 없고 회의 때 욕설과 인신공격, 폭력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는 곧 한해투와 회사측의 교섭이나 마무리과정에서 여전히
서로의 분열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 근본적인
상황인식과 관점의 차이이다.
2) 전술방침에 대한 쟁점
한해투 투쟁전술은 투쟁 초기 실노회에서 잡은 전술기조였고
이를 전체 해고자총회에서 확정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즉 ①
13명의 해고역량의 단결된 힘을 최대한 결집하고 당면투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투쟁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② 그동안 한타독점자본의 반노동자적인 태도로
보아 정문앞 점거농성으로는 한계를 가지므로 정문앞 점거농성과
단식투쟁(손배 당사자)을 병행해 나간다는 것, ③ 연대투쟁의
경우는 투쟁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민주노총지역본부,
노동단체를 비롯한 제민주세력과 함께 해 나가되 집중적으로
정문투쟁을 어떻게 전개해 나가느냐에 따라 연대의 폭과 세력을
정해 나간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이러한 전술방침이 일관성있게 견지되었으나 차츰
투쟁이 격화되고 투쟁목표의 차이에 따라 전술기조가 변화해
나갔다. 이는 한타독점자본의 반인륜적, 반노동자적인 만행이
전면적, 전국적으로 폭로되면서 ― 조직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부분이 전개됨 ― 한국타이어 해고자의 투쟁에서 전국해고자의
공동의 투쟁으로, 비록 민주노총 소속사업장은 아니지만
민주노총 지역과 중앙에서 한타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국적인 투쟁으로 전개되면서 초기의 전술기조는 유지하되 보다
전면적인 투쟁으로 전개하자는 내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 제기된 주장을 정리하면 하나는 단식을 중지하고 장기전을
준비하자는 것과 또 하나는 해고자들만의 투쟁으로 국한하지
말고 현장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하자는 주장이다. 이는 이번
투쟁을 끝장 보는 싸움으로 보는 점과 현장의 상태는 고려하지
않고 현장투쟁을 기계적으로 해고자투쟁에 결합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장 노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즉 성폭행,
폭력테러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장기간이 필요하며, 해고자의
원직복직 또한 단기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니 해고자들의
투쟁으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현장에서 징계를 계속 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만큼 이들을 투쟁주체로 묶어 세워 같이 투쟁을
전개하자는 것과 민주노총이 움직이는 등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현장의 조직력은
현장장악력이 낮고 활동가들이 소수인 점, 투쟁을 하려는 주체의
결의가 낮고 당사자들의 결의 또한 확보되지 못한 점, 해고자
원직복직, 손배철회를 직접적인 목표로 하는 이번 투쟁주체의
대해 과도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특히
투쟁을 장기간 끌고 가려면 투쟁전술을 처음부터 단계적으로
배치해야 하는 데 중간에서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고 전체기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점도 지적되었다.
4. 투쟁의 경과
1) 투쟁의 준비기 (97년 5월21일 ~ 6월15일)
① 손해배상청구소송 결정문을 송부받고 손배당사자들의 투쟁
결의를 확인하고 투쟁방향에 대한 토론이 진행됨
② 실노회만이 아니라 노민추도 함께 투쟁을 전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공동투쟁을 제안하며 원칙적인 동의를 받음
③ 투쟁에 필요한 물품의 준비와 선전물 배포
④ 단식농성자의 배정과 단식준비
⑤ 정문 출근투쟁 전개(실노회 해고자 6인)
⑥ 요구안의 정리 및 회사측에 우리들의 요구 전달(손배철회 및
원직복직)
⑦ 화장실 확보투쟁 전개
2) 투쟁의 본격기(6월16일 ~ 7월23일)
① 천막단식철야농성 돌입(6월 16일)
㈀ 정문농성투쟁의 농성장 확보는 중요한 문제이다. 한타자본은
철저히 해고자들의 농성을 파괴하고자 출근투쟁의
장소문제(집회허가지역의 문제), 화장실 출입금지, 유인물 회수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였을 뿐 아니라 천막주위의 차량 배치,
비닐설치 방해 등으로 초기에는 농성장 사수투쟁이 주를
이루었다.
㈁ 1차로 단식결단식(6/16 오후2시)을 갖고 이서광,
김진종동지가 단식에 돌입
㈂ 노민추와의 전체회의를 통해 투쟁요구안 정리 및 한해투
결성(6/18, 위원장: 이서광, 상황실장: 서동호, 선전: 신영수,
전구환, 총무: 유준희, 교섭대표: 이서광, 김진종, 김종범,
서기: 박희태. 추후 집행위원장: 권영인, 선전, 총무에 노민추
실노회해고자 1인씩 2인이 활동전개)
㈃ 실노회지 판매를 비롯하여 노래테이프 등 모금사업
② 교섭의 시작과 단식농성의 장기화
㈀ 1차 단식자에 이어 2차(6/23 김종범, 장진호), 3차(7/1
신영수, 노주호)단식 결행
㈁ 농성대표의 요청으로 회사측이 첫 대화제의(6/26 회사측
공문)를 하여 6월 30일 대화하기로 하였으나 회사측이 여러
조건을 달고 대화를 기피하여 결국 7월 9일 1차 협상이
진행됨
㈂ 지역연대집회가 지역민주노총 주최로 2차례(6/28, 7/12)
한타정문앞에서 개최(민주노총대책위, 지역본부소속사업장,
전해투, 노동단체, 학생 등 300~500명 참가), 본사앞 집회 등
3차례의 대규모 집회투쟁 전개
㈃ 지역민주노총 소속사업장의 순환 지원투쟁 전개 및
민주노총의 한타대책위구성(위원장 배범식 민주노총부위원장,
진상조사 7/10)과 폭력테러 공청회 개최(7/5)등 다양한 지원과
연대투쟁 전개
㈄ 한타투쟁을 기점으로 지역 해고자조직 건설(충청해협 의장
김종범, 7/18)
㈅ 6차례의 속보발행(각 3,000부)과 1차례의 대시민 선전전 전개
및 지역본부 투쟁속보를 통한 한타투쟁 선전 및 홍보, 공청회
언론을 상대로 한 보도 등 다양한 선전전 전개. 실노회지의
확대재편을 통한 조합원 홍보
㈆ 5회 걸친 회사측과의 협상(회사측: 송영길, 강창순, 이승우,
문영학(서기), 농성대표: 이서광, 김종범, 김진종,
박희태(서기))을 진행하였으나 별다른 진전 없음
- 7가지의 의제(해고자 원직복직, 손배철회, 폭력테러
진상규명, 고소고발취하 및 농성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면제,
단식자 치료 등)를 채택하였으나 논의 순서를 놓고 서로 밀고
당기다 교섭이 결렬(7/16)
- 민주노총 대책위로 교섭위임(7/16 민주노총 조직차장)
- 민주노총과 본사 교섭으로 7개항 가합의(7/19 본사집회
형식적으로 치름)
- 회사측과 농성대표간에 1차 합의(7/23)
㈇ 단식농성자들의 목숨건 투쟁
- 이서광(7/10 탈진), 김진종(7/12 탈진) 등 극도의 탈진과
건강악화
- 1차 합의로 단식농성 해산(7/24), 1차 단식자 38일, 2차
단식자 31일, 3차 단식자 23일 단식
3) 단식농성해산과 교섭(7월24일 ~ 9월30일)
① 단식농성자 6명 병원 입원치료 및 복식
② 회사측과 1차 합의에 따른 구체적인 합의안 마련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으나 해고자 원직복직 계열사의
소재지(대전)문제, 수배해제, 폭력테러문제 등이 회사측과
현격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며, 한해투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교섭이 결렬된 상태로 유지되다 8월 23일 2차 합의안 도출
③ 노민추와 실노회 감정적 대립의 심화 - 합의안에 대한 입장의
차이
④ 계열사 복직자 회사측과 협상진행
㈀ 7인(김종범, 박희태, 노주호, 윤보현, 전구환, 김진종,
유준회)
㈁ 3인(전구환, 윤보현, 유준희)이 금산 휠공장에, 4인은 서울,
부산, 순천 등지 계열사로
5. 투쟁의 성과와 문제점
1) 투쟁의 성과
① 조직적인 측면
㈀ 한타노민추투쟁의 성패를 가름할 중대한 투쟁으로 일대
전환점이 된 이번 단식농성투쟁은 향후 노민추사업의 주체를
대중적으로 검증 받는 투쟁이었다. 다시 말해 실노회와 노민추는
독자적인 조직과 투쟁을 꾸려 왔고 양자가 같이 결합한 투쟁에서
과연 진정으로 누가 한타노민추 사업을 책임지고 어용노조
집행부 타도를 시킬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평가받게 되었다. 이것은 투쟁이후 실노회는 조직의
내적통일성을 높여내고 투쟁을 기점으로 현장조직화사업에 대한
전망과 결의를 높여낸 반면 노민추는 통일성이 낮아지고 회원
상호간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세포분열 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것은 대자본투쟁에서 노민추세력의 통일을
이뤄내지 못한 부정적인 면이라 지적되어야 한다.
㈁ 그간의 투쟁에서 열심히 싸우고도 성과물을 쟁취하지 못해
현장대중의 무모한 희생이나 패배의식이 깊어졌던 것을 이번
투쟁을 통해 극복함으로써 조직적으로 대중에게 신뢰를
획득하고, 활동가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 현장활동가들의 일상적인 활동은 계획적이고 일관되게
진행되었으나 투쟁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내적인
훈련프로그램이나 계획을 세워내지 못함으로써 투쟁주체와
현장활동가들간의 일체감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 한타투쟁을 통해 지역의 해고자들의 단결을 꾀해내 충해협
건설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 97임단투 과정에서 단일한 임단투전선을 형성하지 못해
돌파구를 열지 못했던 지역민주노조운동의 연대를 한타투쟁이
촉발되면서 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이는 대광, 만나,
조폐, 엑스피아 노동조합 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협상과정에서 노민추가 보여준 모습은 이후 민주노총과
연대사업을 확장시키는데 제한적인 측면도 존재하였으나
한타어용노조민주화세력이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조직적인
관계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즉
어용노조민주화조직이 민주노총 강화를 위한 조직확대, 강화에
주요한 동력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 95년 노민추와 민주노총 지역본부간의 갈등이 다시 공개(PC
통신문)되면서 노민추가 지역노동자들에게 고립되는 측면은
존재하였으나 전체 어용노조민주화세력과의 관계는 더욱 굳은
연대로 단결할 수 있었다.
㈇ 90년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후 해고자 원직복직을 전면에
걸고 본격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한타자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함으로써 민주노조건설세력이 노동조합활동의 영역을
확장시켜 내었다. 즉 어용노조집행부는 이번 농성투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어용노조
민주화세력이 현장노동자들의 대표자라는 것이 또다시
확인되었다.
② 투쟁적인 면
㈀ 한타자본을 상대로 한 13명의 해고자 단식농성투쟁과
연대투쟁으로 7명의 계열사 2년 근무후 원직복직, 손배철회 등을
쟁취한 것은 총파업이후 전국적인 투쟁전선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와 지역의 노동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단한 성과로 볼 수
있다.
㈁ 투쟁과정상에 다소 문제점은 나타났지만 자본과 정권의
탄압과 농성파괴 책동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투쟁대오를 유지하고
단결을 기함으로써 한해투가 투쟁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었다.
㈂ 이번 투쟁을 통해 현장탄압을 저지하고, 정직자들을 비롯한
현장활동가들을 보호해 내고 활동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앞으로
현장활동과 조직화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루어 내는데
기여하였다.
㈃ 전국적인 총파업이후 개별사업장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한
대전지역에서 지역민주노조진영이 연대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한타투쟁을 통해 역동적으로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전개함으로써 활성화시켜 냈다.
㈄ 단식농성투쟁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을 전술로 택하고
장기화되면서 폭력테러, 성폭행사건 의혹 등이 한타자본의 가장
약한 고리가 전면화되었고 한타자본 노조활동 탄압이 전국적인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즉 한타문제가 전국적,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어 연대의 폭과 내용이 더욱 확대 강화되었다.
㈅ 다양한 방식(대조합원 유인물, PC통신을 통한 매일 투쟁보고,
신문 및 언론홍보)의 선전사업의 전개는 한타투쟁을 개별적인
투쟁에서 지역적, 전국적인 투쟁으로 상승발전시켜 내는데
일조를 하였다.
㈆ 7명의 해고자 원직복직 뿐 아니라 6명의 미복직자문제가
여전히 투쟁의 쟁점으로 살아 있고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게 됨으로써 해고자 문제가
한타자본은 커다란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 민주노총이 한타노민추투쟁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연대투쟁의
모범을 만들어 냈다.
③ 의식적인 면
㈀ 그 동안 수차례에 걸친 노민추 세력의 투쟁이 한타자본의
탄압으로 인해 조직적인 성과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 투쟁은
일정한 성과를 쟁취함으로써 현장대중들이 패배적인 의식을 떨쳐
버리고 어떤 탄압상황이 생기더라도 투쟁하면 승리하고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획득하였다.
㈁ 해고는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자본가들의 가장 악랄한
탄압수단이다. 하지만 해고자들의 투쟁으로 해고를 무력화시켜
내고 원직복직을 쟁취하였기에 앞으로 한타 노민추투쟁에서
해고는 그 위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조직의 양분으로 배척당했던 해고자들이 이번 투쟁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함으로써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게 되었고 어용집행부와 한타자본에 대한 본질을 더욱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으며 투쟁의 결의를 높여 내는데
기여하였다.
㈃ 민주노조운동의 주요한 특징인 자주성, 민주성, 계급성,
연대성을 이번 투쟁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고 활동가들이
이를 체득하게 되었다. 특히 현 시기에서는 계급성과 연대투쟁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 한해투를 건설하고 일사불란한 투쟁을 전개하여 조직훈련과
민주적인 훈련이 부족한 활동가들이 조직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맹목적인 반대나 조직의
규율과 질서를 파괴하고, 활동가 상호간 인간적인 존중 등을
소홀히 하는 노민추 회원이 존재하는 것이 안타깝다.
2) 문제점
① 한타투쟁이 여러 가지의 성과를 가져왔는데 이는 헌신적으로
이번 투쟁에 책임을 지고, 목숨을 걸고 투쟁한 13명의
해고자들과 전국의 노동형제들의 투쟁의 성과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투쟁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한타노민추세력간의 대립과 갈등, 반목이 더욱
심화․확대되었다는 것이다. 95년에 분열된 한타
어용노조민주화추진세력은 96년말부터 상호 실체를 인정하는
속에서 단결을 꾀해 왔고 이는 현장조직사업의 침체라는 상황을
반영한 결과임을 볼 때 이번 투쟁과정에서 상황이 조금 호전된
것을 과도하게 바라보고 투쟁전술의 변화를 요구하여 마찰을
빚고, 조직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 사업의 배치나 선전내용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호 의견 충돌과 대립은
급기야 투쟁의 목표와 내용의 변화를 요구하는 상태로 발전하여
양조직이 더욱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② 이번 투쟁에 어용노조민주화세력의 결합은 한해투의 건설과
운영, 투쟁의 목표와 전술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이견은
없었으나 투쟁이 격화되고 상황이 변화하면서 한해투의
조직체계, 요구안 등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별적인 행동과 합의된 내용의 번복, 한해투의 조직적
통제를 벗어난 개별적인 선전, 보고와 활동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는 운영의 미성숙 등 지도력의 부족이 투쟁과정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하지만 긴박한 투쟁의 시기에 노민추, 실노회가 상호 결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지도부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③ 교섭의 과정에서 단결된 힘을 가지고 최대한 교섭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이 초기에는 있었으나 교섭이 파행, 결렬상태 ―
회사측의 전적인 책임 ― 에 이르자 서기가 교섭대표의 역할을
대행하고, 의제의 순서를 임의대로 교섭석상에 내놓고 토론을
하는 등 교섭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하여 교섭단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교섭력이 현저히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민주노총에 교섭권한을 위임한 상태에서
민주노총 교섭대표에 한해투대표가 참석하지 못함으로써 1차
합의 내용에 대한 오해와 해석에 있어서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④ 한해투는 조직의 결합이 아닌 그 동안 23명의 해고자중
13명의 해고자가 투쟁의 주체가 되어 구성된 조직이다. 한해투
해고자 중에 불성실한 태도와 직무유기, 농성장 유지와 투쟁에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조직의 분열을
획책하는 등 반조직행위와 이적행위를 한 자가 있었으나 제재를
가하지 못하였다. 이후 이 해고자는 철저한 비판과 훈련이
필요하다.
⑤ 단식농성의 해산과정과 투쟁의 마무리가 조합원들에게
충분하게 공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어 조합원들이 혼란을
갖게 되었다.
⑥ 투쟁기간 내에 투쟁에 대한 잘못된 관점과 입장 ― 이는 투쟁
전반에 걸쳐 노민추와 실노회의 조직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 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원칙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하는데
이를 철저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⑦ 한해투 차원에서 투쟁의 마무리 및 투쟁평가를 계속적으로
제기하였으나 노민추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후 실노회를 중심으로
투쟁평가가 되었다.
6. 총평
지금까지 이번 투쟁이 가졌던 중차대한 의의와 의미, 투쟁의
목표와 요구, 전술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단식농성투쟁과정에서 한타해고자들과 조합원들이 보여 주었던
피눈물나는 투쟁과 노력은 결코 어느 투쟁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고 빛나는 투쟁이며 총파업투쟁과 함께
97년 상반기에 있었던 투쟁의 꽃이라고 결론을 맺을 수 있다.
또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원칙하에서 노동자 단결은 막강한
자본의 위력을 투쟁과 단결이라는 노동자의 무기로 무기력하게
만들고 끝내는 민주노조 쟁취에 한발 성큼 나아갔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애초에 하나였던 조직을 원상태로 되돌리지 못하고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투쟁이 실패했다고 평가를 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타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용노조민주화를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하고 긴 대장정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투쟁은 이러한 의미에서 누가 진정으로 한타조합원과 함께
노조민추화를 책임지고 투쟁할 주체인가를 확연하게 판결하였다.
투쟁이 끝난 시점에서 노민추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노민추가 현장대중과 함께 하는 조직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또한 어용노조민주화세력은 서로를 충분하게 파악한 만큼 좀더
겸손하고 헌신적인 태도로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자기
희생과 노조민주화의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이번 평가에서 우리는 집안싸움에 엄청난 소모전을 했다고 본다.
이 에너지를 한타자본과 어용노조를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
부어야 한다. 그래야만 반드시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해방은
우리의 희망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