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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영원한 외국인?

현장에서 미래를  제3호
최정규

노동자, 영원한 외국인?



최 정 규 (한국민주노동자연합 사무국장)



1. 외국인 차별은 사회적 문제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져 국경선이 그어지는 것과 흑인, 백인, 유색인을 기준으로 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자본이 자기의 이해를 지키고 늘리기 위한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과연 개인적인 문제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인 문제일까?

필자의 경험으로는 사회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74년 서독에 광부로 팔려가 한달 봉급을 받고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때 나의 봉급과 우리 형님이 1년 동안 머슴살고 받는 세경(연봉)을 비교하면서였다. 내 한달 봉급과 우리 형님이 일년간 정말 뼈빠지게 일해서 받은 세경과 거의 같았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이 땅위에서 일하는 것은 똑같은데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와 어떤 인종으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인간답게 살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지금 이 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를 올바로 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외국인노동자로 되는 과정, 비인간적 착취와 부당한 대우에 현장에서 집단적으로 투쟁한 사례, 외국인노동자의 현황 및 외국인노동자 운동을 살펴 보고자 한다.


2. 외국인노동자로 되는 길


사례1) 독일의 한국인 노동자 이야기

필자도 가난을 대대로 물려 받고 살아 가는 호남의 농촌에서 태어나 부모님들이 품팔이 일을 가면 밥을 얻어 먹기 위해 수저를 들고 부모님이 일하는 들녘으로 동생들을 업고 다녔다. 그때 소원은 나도 한번 하얀 쌀밥을 실컷 먹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농촌 일이 없는 겨울과 봄은 온 식구가 가마니 짜기와 조개 까는 일을 주야로 해야 했는데, 아침은 늦게 먹고, 점심은 건너 뛰고 저녁은 김치나 시래기를 잔뜩 넣어 풍덩하게 끓인 죽을 먹었다. 배는 고픈데 겨울의 밤과 봄의 낮은 왜 그리도 길던지 …… .

70년 초에 군대를 갔을 때 조금은 자유가 없더라도 일반 사회에서처럼 먹고 자고 입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좋았다. 그래서 필자는 제대 말년에 인사계를 찾아가서 장기 복무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학력이 국퇴라 안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제대를 해서 머슴살이를 살겠다고 농사가 많은 당숙께 말씀을 드려 승낙을 받고서 봄이 올 때까지 강뚝 보수 공사장에서 돌을 져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서독에 광부로 가는 길이 있다는 옆집 손님의 말에 형님이 동생에게는 머슴살이를 대물리지 않으시려고 했는지 브로커를 따라가서 광부 시험을 쳐 보라 하셨다. 서울 동교동에 있는 해외개발공사 별관에서 광부시험을 보았다.

첫번째로 60킬로그램 무게의 모래가마니를 들어서 어깨에 올려야 했고, 두번째로 신체검사를 받았다(이 신체검사는 육사생도보다 더 건강한 사람을 뽑는다고 말할 정도의 종합검사였다).

두 관문을 통과해서 서독광부시험에 합격한 후 약 2개월 동안 독일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서독으로 가 독일 광산에서 3개월간 언어교육과 광부 작업교육을 받은 후 지하 약 1,200미터 작업장에서 3개월 정도 실습교육을 거치고서야 진짜 광부가 되었다. 법적으로 또 제도적으로도 독일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광부고용계약서>(중요한 부분만 요약)

- 고용계약서도 한?독 정부의 인력송출계약 체결서와 동일하다.

  (제13장 1항: 국적에 관계 없이 서독 탄광에서 작업하는 한국 광부는 임금, 노동조건 및 노동보호 등에서 서독 노동자와 동등하게 취급될 것이다)

- 국적과 관계없이 서독 광부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 6주간 지상작업과 독일어 교육을 받고 어학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 어학교육은 임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채탄작업을 하기 위한 지하작업은 지하작업장에서 훈련을 받게 되며 훈련은 보통 3개월간 계속된다.


사례 2) 한국의 네팔노동자 이야기

우리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왔다. 우리들은 한국에 올 때 한국의 통상산업부와 법무부·노동부 등의 지시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통해 선정된 네팔의 ‘룸비니 맨파워’ 인력회사에 1,300불씩의 수수료를 주고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왔다. 물론 우리가 한국에 오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쓴 돈까지 합치면 총 지출비용은 약 2,000불이나 된다. 이 돈은 네팔에서 3년 동안 한푼도 안쓰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큰 액수이다.

우리들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면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게 되었다. 우리들은 한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이 되어서야 한국에서 월급이 210불이라는 통보를 인력회사로부터 받았다. 물론 그 전날까지만 해도 그들은 한국에서 일하면 생활용품과 숙식이 제공되고 월급이 500불이라 했다. 이때는 이미 인력회사에 수수료를 다 지불한 상태였고, 그들은 우리가 한국에 가지 않으면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들은 한국에 간다고 송별식까지 하고 집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갈까 난감한 입장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떠난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얼굴로 다시 돌아가는가하는 체면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인력회사 사람들은 “월급이 210달러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또 “이것이 사람을 모집하기 위한 우리들의 계획적인 선전이었다”라고…. (동료인 ‘모두람살’에게 ‘버자가이’라는 룸비니 에이전트가 이야기했다)

우리들을 속인 ‘룸비니’ 인력회사! 하지만 우리 손에서는 이미 돈이 나갔는 걸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는 네팔을 떠나 중간 기착지인 방콕에 도착하였다. 방콕부터는 룸비니 한국지사인 ‘동양인개발(주)’의 사장인 한국인 ‘미스터 전’이라는 사람이 서울까지 우리들을 인솔했다. 물론 그 때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네팔 노동자들에게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한국에 도착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그는 초기에 취업연수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네팔까지 직접 가서 인솔했지만, 그에게 당하고 귀국한 네팔 노동자들이 네팔에 오면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네팔까지는 갈 수 없다고 한다.

드디어 한국 도착!

그럴듯한 건물에서 하루동안 한국을 소개하는 문화영화 한 편을 보고, 양복입은 신사가 와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한바탕 무슨 교육인지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서울에 있는 원단 제조공장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일을 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잘못 끼워진 단추는 임금 210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팔을 떠나 오기 전 210불로 추락한 월급조차 인력회사가 매월 일한 공장으로부터 직접 받아 가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력회사는 매달 월급에서 인력관리비로 11불을 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월급의 20%는 인력회사가 보관하고, 80%는 네팔의 가족들에게 송금해 준다고 했다. 우리는 가족에게 보내는 80%라도 우리가 직접 송금하게 해 달라고 회사 사장과 인력회사 미스터 전에게 사정을 했으나 계약을 했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네팔에서는 계약서를 한번도 보지 못했고 말로만 약속을 하고 왔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공장에 도착해서 인력회사의 주선 하에 계약을 했는데, 영어로 된 것과 한글로 된 양식을 놓고 싸인을 하라고 했다. 그 때 인력회사는 “영어는 한국말과 뚯이 다를 수 있는데 상관없다”며 싸인을 하라고 했다. 영문계약서 안에는 월급을 매월 인력회사가 받아 간다는 내용은 분명히 없었다. 그후 6개월이 되어가지만 가족들은 한푼의 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가 당한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와 인력관리업체들에 의해 여권이 압류당하고 감시 속에서 일과 후나 휴무일에도 자유롭게 외출이 허용되지 않으며, 고향이 그리워 동료들과 소주 한 잔 하는 것도 허가를 받아야 했다.

또한 회사관리자나 한국인 노동자들에 의한 잦은 구타와 하루 14시간의 장시간 노동도 너무 힘들다. 잔업도 선택권이 전혀 없이 강제로 했으며,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아서 먹기가 힘들었고, 잠자는 방은 인원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 동안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꿈과 희망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이제 고국에서 지고 온 빚을 갚기 위해 불법체류자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말 한 마디 변변히 통하지 않고, 어디가 어딘지조차 모르는 낯선 이 땅에서 이제 법무부, 경찰 그리고 인력회사의 수배를 피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땅에서 일하며 산다.


<고용계약서>(요약)

- 월 임금은 미화 210불(매월 말 환율시세로)로 한다.

- 근무시간은 1일 8시간 주 48시간으로 한다. (휴식시간은 오전10분, 오후10분, 점심시간 40분)

- 작업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하며 작업시간 10분 전에 도착하여야 한다.

- 여권은 사장이 보관하며 귀국시 돌려준다.

- 일과 후 및 휴일시 외출을 하고자 할 때는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 일과 후에 음주를 할 때는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3. 분노하는 노동자


사례 3) 독일의 한인 광부들 투쟁 이야기

1970년 9월경 서독 아헨(Aachen)에 있는 에밀마이리쉬(Emil-Mayrisch)광산에서 일하던 한인 광부 73명은 대부분이 한국에서 광산노동커녕 육체노동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젊음의 패기로 위험하고 힘들어서 독일 사람들도 싫어하는 1,000미터 지하 막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봉급이 독일 사람들과 부당하게 차별 지급되고, 건강상 일할 수 없어서 다른 작업에 배치해 줄 것을 호소하면 “일하기 싫으면 한국으로 가라!”고 쏘아 붙이는 등 마이스터(Meister)나 항장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심지어 폭행까지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래서 14항으로 낮반 나가는 12명의 한인 광부들은 항의하기 시작했다.

첫째, 부당한 임금지불에 대해서 추가지불을 할 것

둘째, 각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일자리를 배치할 것

셋째, 한국인을 모욕하는 언사와 폭행을 즉시 중지할 것

12명이 연대서명한 이러한 요구서를 광산통역을 통해 번역하여 광산소장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 주일이 지나도 광산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14항의 12명은 이제 행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12명이 입항하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14항은 채탄이 중지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광산소장은 통역을 통해 만일 한인 광부 12명이 늦게라도 입항을 하지 않으면 즉각 해고할 것이며, 당장 한국으로 돌려 보낼 것이라고 통고하였 다. 그러자 한인 광부들은 분노하여 12명 뿐만 아니라 73명 전체가 집단적인 행동에 들어 가게 되었다. 한국인 광부들의 정당한 요구사항이 관철되느냐 아니면 12명이 해고 당해 한국으로 귀국하느냐하는 문제로 팽팽한 긴장상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계속 입항을 거부하자 해고 협박에 입항할 줄 알았던 광산측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1964년 이래로 많은 한국인 광부들이 에밀마이리쉬 광산에 와서 3년의 계약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집단적인 입항 거부, 소위 불법파업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태가 이쯤 이르자 광산측의 제의로 광산측, 광산노동자평의회(Betriebsrat), 한인광부 73명이 참석한 조정회의가 열렸다. 광산소장은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우리가 요구한 사항들을 앞으로 잘 참작할 것이며, 오늘 전원이 입항해서 일을 하면 12명에 대한 해고도 취소하겠다고 말했다. 소장의 말을 통역하던 통역자가 우리들에게 제발 입항하라고 호소하듯 하자 73명의 한인광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12명이 강제귀국은 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일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말고 입항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농성을 주도하고 있는 14항의 12명은 광산측이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받아 들이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받자고 하여 두 개의 안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하였다. 그러자 우리들의 분열된 모습에 만족했는지 광산측은 퇴장해 버렸다. 우리들은 장시간 토론을 통해 우리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결정을 했다.

다음날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3명, 광산측 그리고 우리들 73명이 참석하여 조정회의가 다시 열렸다. 그런데 이 날은 대사관측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들만 설득하였다. 수석노무관은 “왜 우리가 독일에 왔느냐, 우리들의 집단행동(파업)은 불법적이고 부당하며, 조국의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겁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석노무관 말에 우리들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래도 우리를 지켜줄거라는 기대가 산산히 깨지면서 일방적인 대사관의 태도에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국대사관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 독일 광산주 편인가? 부당한 차별과 대우을 받고 항의하는 한인 광부들 편인가?”고 따지면서 울고 말았다.

이국 땅에서 조국이 우리들을 지켜줄거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일했던 한인 광부들은 조국도 우리를 버리는 것만 같아서 설음과 분노를 씹으며 더욱 단결하여 싸웠다. 마침내 우리들은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그래서 해고된 한인 광부가 전원 복직되었고 부당하게 지불된 임금도 추가로 지불 받았으며 한국인을 모욕하는 언행과 폭행은 사라졌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 주먹밖에 없는 우리 노동자들도 똘똘 뭉치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광산업주도 이길 수 있음을 배웠다.


사례 4) 한국의 베트남 노동자들 투쟁

지난 8월 2일 경남 김해에 있는 신발 제조업체 태광실업(주)에서 일하고 있던 베트남인 산업기술연수생 387명이 임금 50불 인상, 휴가비 25불 인상, 국내관광 실시 등을 요구하며 집단적으로 작업을 거부(파업)했다. 이에 회사는 휴가비 지급과 국내관광 실시는 수용했으나 임금 50불 인상은 거부했다. 그러자 베트남 노동자들이 7일 임금 50불 인상을 요구하며 집단으로 작업을 거부, 사실상 파업을 단행했다. 회사측은 노동자들의 단결된 집단행동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9일 전면 수용하였다. 그러나 주동자 14명을 “업무방해혐의”로 고소하면서 천민자본가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한 베트남 인력송출기관인 JP센타 관계자들을 입국시켜 대책을 논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태광실업에서 일하고 있는 베트남 산업기술연수생은 현지법인이나 베트남투자회사를 통해서 입국한 연수생으로서 임금은 연수수당 100불 + 생활보조비 150불 등 월 250불(19만5천원)이다. 현재 태광실업의 전직원은 1,778명이다.

태광실업의 베트남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작업을 거부한 것은 외국인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처음 일어난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사례는 주간노동자신문 8월 15일자에서 인용)


4. 외국인 노동자 현황


1) 외국인노동자 수입 배경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수 천 개의 노동조합 결성으로 국내의 자본가들이 예전처럼 자신들 마음대로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자, 자본은 국제경쟁력에서 이기기 위해서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외국인 노동력 수입을 요구하고 나섰다.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김영삼 정부는 출입국관리법 시행령 제12조 별표 제12호(D3) 등에 의해 착취제도라 할 수 있는 ‘산업기술연수생’ 제도를 시행하여 지원하고 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경제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이 땅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어느덧 10만 2천 여명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 통계는 노동부가 7월 15일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노동자상담소 실무자들은 은폐된 수를 포함해서 이보다 훨씬 많은 약 15만 명 선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분류 현황>(노동부발표 95년 7월 15일 )

종  류

합법취업자

기술연수생

불법취업자

합   계

인 원 수

6,475

34,931

61,472

102,878


2) 외국인취업자 분류 현황


가. 합법취업자 현재 6,475명

전문인력 취업자들은 아래 직종별 현황과 같이 거의가 미국 등 선진국에서 온 전문인력들이며, 이들은 국내 노동자보다 고임금을 받으며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에 대한 법이 개정되어 18년까지 체류할 수 있 도록 되었다.


<합법취업자 직업별 현황>(노동부발표 95년 7월 15일 )

직업별

회화지도

예술흥행

교 수

기술지도

연 구

전문직업

기 타

합 계

인원수

3,044

629

597

454

207

182

1,362

6,475


나. 산업기술연수생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① 해외투자 등 해외진출기업의 현지 고용인력의 기능 향상을 위한 연수자로 대개가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으며, 약 9,512명(95년 2월 13일 노동부장관 기자회견시 발표)이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기숙사나 회사에서 제공하는 건물에서 거주하며,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는 편이다. 이들의 임금은 연수비란 명목으로 약 100불 정도이다. 이들의 인권 실태가 잘 파악되지 않으나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②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지정한 인력송출회사를 통해 들어와 중소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산업기술연수생은 약 24,552명(95년 4월 법무부 자료)이다. 올해 초 명동성당 앞에서 네팔의 산업기술연수생 13명이 농성한 후 노동부는 개선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현장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 외국인 연수생들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은  1차 연수입국자 19,702명중에서 6,111명(한겨레신문 95년 5월 10일)이 연수사업장에서 이탈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 불법취업노동자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입국하여 저임금과 부당한 대우로 사업장을 이탈한 노동자와 관광비자 등으로 입국하여 현장 단순인력으로 취업하여 일하고 있는 노동자는 61,472명(95년 7월 15일 노동부 자료)이다. 그러나 은폐된 수를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외국인 노동자운동을 하는 실무자들의 의견이다. 불법취업한 외국인 노동자 현황은 아래와 같다.


<불법 체류자 현황>(노동부발표 95년 7월 15일)

국  가

중국(중국교포)

필리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

태국

기타

계

인원수

25,970(20,722)

8,476

5,533

2,217

2,222

1,653

15,201

61,472


5.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현황


90년부터 개별적으로 운동을 했는데 94년 ‘외국인노동자 피난처’(김재오 소장)의 실천적인 노력으로 소규모였지만 경실련에서 외국인노동자 산재보상을 위한 농성을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집단적인 실천이 시작되었다. 경실련 강당에서 한 농성의 결과로 비록 불법외국인노동자라도 산재를 당했을 경우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산재를 당한 후에 귀국해서 살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소급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았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서 외국인노동자들은 단결된 실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경실련 농성을 주도해 온 ‘피난처’ 김재오 소장의 노력으로 민주노총(준)을 중심으로 매주 목요일 전노협 사무실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후 네팔에서 온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들이 저임금, 감금노동과 폭행 등을 견디다 못해 이탈하여 호소하는 것을 접하면서 연수생들의 인권상태가 정말 얼마나 심각한 지 알게 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인권상태를 깨닫고서 공청회를 열고 항의하는 집회 등을 가졌으나 정부와 중소기업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특히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의 인권문제가 심각한 것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서 두번째 집단행동으로 외국인 노동자와 텐트 농성을 준비하였다. 지난  95년 1월 9일 명동성당 농성을 통해 실천적인 투쟁을 하면서 연대투쟁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그 결과 40여 개의 단체가 모여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이하 공대위).

그 후 실천적인 사업을 해 가면서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실무자들은 7월 1일부터 3일까지 대성리 남사당에서 지도적인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수련회를 하면서 외국인노동자 문제와 운동과 관련한 문제를 중심으로 검토, 토론을 하였다. 그 결과 좀 더 능동적인 실천을 위해서 폭이 넓은 공대위 체계보다는 적극적인 외국인노동자 상담소, 실천으로 연대할 수 있는 단체를 중심으로 ‘외국인노동자 운동’을 지향하는 운동체로서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이하 외노협)를 7월 9일 결성하게 되었다. 외노협에는 외국인노동자 조직들이 일 주체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새롭다.

그러나 현 상황으로는 외국인노동자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며 그것을 지향해 가고자 노력하는 수준이다. 외노협의 회원단체들이 외국인노동자들의 문제를 타 단체보다는 노동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외국인노동자 운동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외국인노동자 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단체나 상담소는 거의가 선교적인 종교단체의 지원이나 지지로 운영되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이념 부재와 실무자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실천적 경험의 부족으로 아직도 노동운동으로서의 내용을 만들어 내는데 어려움을 갖고 있다. 물론 역량부족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현재 상담소 실무자들의 일들이 체불, 산재보상, 폭행 등의 문제에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문제를 통해서 외국인노동자들과 접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과 동시에 외국인노동자가 외국인노동자 운동의 주체로 서게 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 일은 미래에 다가 올 노동자의 국제적인 연대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땅의 노동자는 역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의식에서 외국인노동자 운동을 힘있게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

1995-09-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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