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실업문제에 대한 자본의 입장*1)
노동정책연구팀
1. 들어가며
김대중 정권은 출범도 하기 전에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2월 6일 소위 ‘역사적인 대 타협’을 만들어 냈다. 정부는 노․자간의 ‘중립적 조정자’라는 외양을 강화시켰고, 자본은 그들의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반면 자주적 노동조합운동을 대표해오던 민주노총은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위한, 즉 자본측의 자의적 대량해고 등을 가능하게 하는, 제반 법제를 합의해준 대가로 노동자 대중으로부터는 크게 신뢰를 잃고,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갈등과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출범 전부터 서둘러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합의’를 유도하는 데에 유다른 노력을 기울인 김대중 정권의 논리는, IMF 관리체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외자유치와 수출경쟁력 확보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 양쪽의 고통‘분담’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본측에는 ‘재벌개혁’을, 노동측에는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요구하는 한편, 정부도 스스로를 효율화시키면서 ‘노․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가 수백만의 노동자를 실업과 불완전 고용, 장시간․저임금 노동으로 몰아넣으면서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임에 비해서 ‘재벌 개혁’은 위기에 처한 재벌을 구제하여 효율화하는 것이고, 정부가 ‘노․사간의 중립적 조정자’란 주장은 자본의 공동기구로서의 위상을 은폐하고자 하는 기만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밑으로부터의 노동자대중의 반발이 커질 조짐이 보이자1) 교원노조와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가입 인정 등의 노동기본권을 자본측이 보장할 듯한 ‘제2차 합의안’을 도출해냈지만, 이들 이른바 ‘노․사․정 3자의 고통분담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이후 국회에서의 법제화 과정에서 자본 편향적 내용이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실업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대응투쟁력을 보다 쉽게 조직할 수도 있을 ‘실업노동자의 노조가입’ 같은 사항은 삭제된 채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등의 입법이 강행되었다.(<표 1> 및 <표2> 참조)
<표1> 1998년 2월 임시국회에서 제․개정된 노동관계법의 주요내용
개정법률 |
주요내용 |
근로기준법 |
제31조(‘정리해고제’) : *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 해고대상자 선정시 남녀 성차별금지 * 60일전통보
31조의2(우선재고용) : 사용자의 노력의무, 정부의 정리해고자에 대한 필요조치.
** 2년유예 단서 제외. |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
제32조(단체협약 유효기간) : 일방해지 통보시한을 3개월전->6개월전 |
고용정책기본법 |
제28조(실업대책사업의 실시)
- 실업자에 대한 생계비, 생업자금, 의료보험료 등 사회보험료, 의료비(가족의 의료비 포함), 주택 전세자금 등의 지원
- 실업예방,고용촉진,고용안정 사업자에 대한 지원
* 법조문의 ‘노동력’을 모두 ‘인력’으로 개칭
- 28조의2(실업대책사업의 자금조성 등) : 정부 또는 정부 외의 자의 출연 또는 보조, 차입, 채권발행 등. 자금관리운용은 ‘근로복지진흥기금’ 재원으로 관리 운용. |
고용보험법 |
제8조 : ‘시간제근로자 적용제외’삭제 (99.7.1.시행)
제57조(보험료율의 결정) 1000분의15 -> 1000분의30 범위내
제76조(고용보험심사위원회) (노사) 각1인을 포함한 7인 이내 -> 각 1인 이상을 포함한 15인 이내
* 법조문의 ‘노동력’을 ‘인력’으로 ‘직업훈련’은 ‘직업능력개발훈련’으로 개칭
- 36조(구직급여액) 2항 : 구직급여일액이 최저임금법에 의한 최저임금액에 100분의 70을 곱한 금액보다 낮은 경우에는 후자(‘최저구직급여일액’)를 적용(*피보험기간은 60~210일)
- 42조의2 및 3 : 구직급여지급일수(60일)을 초과하여 60일 범위내에서 개별연장,특별연장. |
제정법률 |
주요내용 |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
제1조(목적) 이 법은 근로자파견사업의 적정한 운영을 기하고 파견근로자의 근로조건 등에 관한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파견근로자의 고용안정과 복지증진에 이바지하고 인력수급을 원활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 ‘근로자파견’이란, 파견사업주가 근로자를 고용한 후 그 고용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로자파견계약의 내용에 따라 사용사업주의 지휘,명령을 받아 사용사업주를 위한 근로에 종사하는 것. ‘파견사업주’는 근로자파견사업을 행하는 자. ‘사용사업주’는 파견계약에 의하여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자. ‘파견근로자’는 파견사업주가 고용한 근로자로 파견대상이 되는 자. ‘파견계약’이란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간에 근로자파견을 약정하는 계약.
제3조(정부의 책무) : 고용정보 수집/제공, 직업연구, 직업지도, 직업안정기관설치/운영
제5조(파견대상업무) : (1항)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 제외. 전문지식,기술,경험 등을 필요로 하는 업무. (2항)결원이 생긴경우는 제조업 직접생산공정도 가능. 절대적 제외대상(건설공사현장업무,근로자공급사업허가지역업무,선원법3항규정업무,산안보건법28조의 유해위험업무 등) (3항)노조/노동자대표와 사전협의.
제6조(파견기간) 1년. 1회에 한해 1년범위안에서 연장 가능. |
임금채권보장법 |
제1조 : 경기변동 및 산업구조 변화 등으로 사업의 계속이 불가능하거나 기업의 경영이 불안정하여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퇴직한 근로자에게 임금지급을 보장하는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안정에 이바지함.
제5조 : 노사 동수의 심의위원회가 기금의 관리운용을 심의
제6조 : 체불임금 정부가 지급. 제8조 : 사업주로부터 부담금 징수(사업주의 부담금은 당해 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임금총액에 임금총액의 1000분의2 범위내에서 부담금비율을 곱해 산정)
제15조 : 임금채권보장기금설치. 제16조 : 기금재원(사업주부담금, 체당금에 대한 사업주 변제금, 차입금[재정융자특별회계,금융기간 또는 다른 기금등으로부터의 차입] 등으로 조성). 제17조 : 노동부장관이 관리운용
** 98년 7월1일부터 시행. |
자료 : 노동부, 「국회 통과된 노동관계법 제․개정 법률」, 1998.2.14.
<표2> ‘노사정위원회’ 주요 합의사항과 처리 결과
구분 |
노사정 합의 |
관계법령
개정?제정 |
결과 |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
정리해고제 |
98년 2월 법 개정 |
근기법제31조 개정 |
○ |
근로자파견법 |
98년 2월 법 제정 |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 |
○ |
노동기본권 관련 |
공무원 |
99년 1월부터 직장협의회 설치 |
공무원직장협의회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 |
○ |
실업자 |
실업자에게 초기업단위노조 가입자격 인정(98.2월 법 개정) |
노조법 미개정 |
×△ |
교원노조 |
99년 7월부터 교원 노조결성권 보장(98년 정기국회에서 법개정) |
98년 정기국회에서 법개정 |
|
노조정치활동 |
선거법?정치자금법개정(98년 상반기중) |
98년 상반기중 |
|
단협일방해지 |
일방해지 통보기간 3->6개월로 연장 |
노조법 개정 |
○ |
노조재정자립기금 |
세제지원방안 조속 강구 |
추진예정 |
|
임금채권보장법 |
임금채권보장 |
98.2월 임금채권보장 법률을 제출한다 |
제정 |
○ |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
결합재무제표 |
99 회계연도부터 작성 의무화 |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부칙조항개정 |
○ |
사외이사제 |
상장법인 사외이사제 도입 의무화 |
증권관리위원회 규정 개정 |
○ |
소액주주권 강화 |
대표소송권(0.05%로)
장부열람권(1%로) |
증권거래법 191조 3 개정 |
○ |
기업재무구조개선 |
상호지급보증 |
98년 4월부터 신규 상호채무보증 전면 금지 |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관한 법 10조 2 개정 |
○ |
책임경영체제확립 |
재벌 대주주 및 기조실 임원 책임부과 |
대규모기업집단 지배 대주주 및 기조실 임원 등에 경영책임 부과 |
추진 중 |
△ ○ |
고용보험적용확대 |
대상적용확대 |
10인(98.1), 5인(98.7), 임시?시간제(99.7) |
개정
임시?시간제는 특례 규정 추진 계획 참조 |
△ ○ |
보험료 납부기간 6개월로 단축 |
이직전 6개월 이상 보험료 납부한 실직자에게 실업급여 지급 |
고용보험법 부칙 개정 |
○ |
특별연장
급여제도 |
전국적인 고용불안 발생시 실업급여 지급기간 30~60일간 연장 |
고용보헙법 제42조의 3 개정 |
○ |
실직자생계지원 |
실직자 주택자금 등 저리 대부사업실시 |
실직자 주택자금 등 저리 대부사업실시 |
고용정책기본법 제28조 2항 신설 |
○ |
실업대책재원 |
소요재원 |
5조원 확보 및 추후 추가 |
6조원 규모 임시국회결의안 채택 |
○ |
자료 : 민주노총, 「노사정위원회 주요 합의사항 대비 98년 2월 임시국회 처리 법령 비교․해설」, 1998.2.
이렇게 되기까지 자본측의 논리가 어떻게 제기되었고 관철되었는지, 이하에서 우리는 자본․정부측의 고용․실업문제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용 및 실업문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 관점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2. 자본가 단체의 논리
먼저 전경련, 경총 등 대표적 자본가단체들의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 금융실명제의 부작용, 대내외 경제환경변화에 대한 대응 미흡’ 등으로 꼽고 있다.2) 이들은 이러한 논리를 통하여 경제위기의 책임을 정부와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1) 허구에 찬 ‘고임금‘ 주장
‘고비용’에 관한 항목에서는 고금리․고임금․고지가․고물류비용을 들고 있는데, 그 중에서 노동자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고임금’주장이다. 그들은 ‘노동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상승’ 때문에 단위노동비용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며 <표3>과 같은 지표를 제시한다.
<표3> 전경련이 제시하는 ‘고임금’ 주장의 근거3)
|
88년 |
90년 |
92년 |
94년 |
95년 |
96년 |
노동생산성증가율 |
13.2 |
15.7 |
8.8 |
9.8 |
11.1 |
7.9 |
임금증가율 |
15.5 |
18.8 |
15.2 |
12.7 |
11.2 |
11.9 |
단위노동비용증가율 |
2.3 |
3.1 |
6.4 |
2.9 |
0.1 |
4.0 |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만일에 이들의 주장대로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인상이 10여년 동안 계속해서 이루어졌다면 사회의 부(富)는 노동자계급에게 엄청나게 축적되었을 것이 틀림 없다. 그 까닭을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생산성 증가분만큼 인상된 셈이 된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비이고, 노동력 재생산비는 노동자(그의 가족까지를 포함하여)가 생활을 위해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사회적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게 되면 생활수단의 가치가 떨어지고 따라서 노동자는 그전에 이를테면 10원으로 구입해야만 했던 생활수단을 생산성 증가분(혹은 생활수단의 가치하락분)만큼 적은 돈으로, 이를테면 8원만 주면 살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95년에 전년대비 11.1%의 생산성 증가가 있었다면 노동자들은 과거에 100원을 주고 구입해야만 했던 생활수단을 이를테면 88원을 주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측의 주장에 따르면, 거기에다가 임금을 11.2% 더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는 95년에 받았던 임금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을 하고도 남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96년에 인상된 임금은 저축을 하든지 여하튼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 1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면 노동자는 아마도 자본가보다 더 부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러한가? 노동자는 매년 임금이 인상되어도 작년에 10원주고 샀던 물건을 올해 9원이나 8원을 주고는 절대로 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대개는 오히려 더 쪼들린다.
따라서, 자본측이 주장하는 ‘생산성임금제’는 완전히 허구이거나, 아니면 노동자와 민중을 완전히 기만하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4)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 즉 ‘생산성을 상회하는 임금인상’을 더욱 ‘빛나게’ 정당화하려고 ‘명목임금증가율’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생산성과 임금 사이의 격차가 더 많이 벌어지게 만들고자 한다. 자본측(정부도 완전히 동일한 논리의 ‘생산성임금제’를 주장한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실생활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계속 확인하게 될 뿐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자계급 안에서도 주로 그러한 자본측의 논리와 동일한 맥락에서 ‘생산성임금제’를 실질임금인상률을 동원하여 ‘비판’하고 있는데, 위에서 말한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그러한 ‘비판논리’ 역시 근본적으로는 비판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생산성과 노동자의 임금에 대한 관계가 완전히 허구로 이루어져 있는 현실의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도 물가상승률이 감안된 실질임금증가율을 통하면 우리가 체감하는 생활고를 이해하기는 다소 쉬울 것이다.
자본가단체가 들고 있는 ‘국민경제노동생산성증가율’에다가 실질임금증가율을 대비시켜 보면 1988년 이후 한번도 생산성 증가율보다 더 높은 임금상승은 없었다. 생산성 증가는 또다른 한편으로 노동력 지출 증대를 의미하므로, 이것은 노동자가 오히려 더 많은 노동력을 지출하고도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셈이 된다.
<표4> 생산성 및 임금증가율 추이
|
88년 |
90년 |
92년 |
94년 |
95년 |
96년 |
노동생산성 증가율 |
13.2 |
15.7 |
8.8 |
9.8 |
11.1 |
7.9 |
임금증가율 |
7.8 |
9.4 |
8.4 |
6.1 |
6.4 |
6.6 |
못받은 임금증가율 |
5.8 |
6.3 |
0.4 |
3.7 |
4.7 |
1.3 |
자료 : 한국노동연구원, 1997년 KLI 노동통계.
(2) ‘규제완화‘ 주장이 노리는 것은?
다음으로 전경련 쪽에서는 ‘저효율의 경제구조’와 ‘금융실명제의 부작용’ ‘대내외 경제환경변화에의 대응미흡’을 경제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의들을 통하여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정부를 포함하여 노동자, 민중은 물론이고 그 어느 세력도 ‘자본측의 경제활동’에 개입하지 말고 자본이 원하는대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핵심은 ‘규제완화’로 모아진다. 그 주장들은, “경제규모의 확대와 구조다양화에 따라 정부주도 경제운영체제의 유효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와 개입 위주의 경제운영이 지속되고 있”어 “이에 따라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경쟁이 제한되어 경제의 효율성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금융실명제가, 금융거래에 대한 비밀보장과 세무행정 신뢰성 측면에서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가운데 시행되고, 자금출처조사 등의 위협적인 수단이 남용됨으로써 금융재산권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대되어 경제에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고, “정보통신의 발달 및 WTO체제의 출범 등으로 세계경제가 빠르게 통합되고 있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규제가 지속됨에 따라 기업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어 국가경쟁력 향상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5)
위와 같은 그들의 주장은 ‘공룡재벌’을 형성하여 독점적 특혜를 누려오면서 경제구조를 ‘독점적 경쟁구조’로 바꿔오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로비들을 통하여 법과 제도를 자신들이 만들어오고 향유해왔던 그 옷이 이제 낡았으니 새것으로 바꾸어달라는 식의 주장이다. 다시말해 새옷을 지어달라는 것이지 옷을 안 입겠다는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특히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는, 이를테면 ‘근로기준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노동자를 보호하는 각종의 법제도나 관행 철폐 및 노동자의 집단적 목소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제강화’를 의미한다.
“․향후 5년간 임금상승율을 총액기준 3%이내로 안정 - 향후 5년간 임금상승률을 총액기준 3% 이내로 억제. 새정부는 임금안정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
․건전한 노사관계 정착 - 노조의 정치활동, 제3자개입 문제에 있어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산업평화를 정착
․「근로기준법」을 대체하는 「근로계약법」 제정 - 시장수급 변화에 탄력적이며 다양한 고용계약이 가능하고, 노사의 자율성을 고양시키는 내용을 담은 「근로계약법」의 제정.”6)
노동자계급에 대하여 ‘억제’하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규제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위 내용 대부분은 매번 되풀이돼온 주장들이지만, 여기서 ‘근로계약법 제정’은 이번에 처음 나온 것으로서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그것도 불안정한 상태인 근로기준법을 아예 폐기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는 점을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3) ‘노동시장 안정‘ 논리
똑같은 맥락에서 ‘노동시장유연성 제고’ 논리가 전개된다.
“효율적인 인력의 수요․공급체계를 유지하고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용안정에 대한 기존 관념이 변화되어야 하며, 기업의 현실과 동떨어진 고용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다양한 고용형태를 활성화함으로써 기업 인력활용의 효율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7)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주장의 핵심내용은 ‘고용안정에 대한 기존 관념 변화’와 ‘고용관련 규제 대폭 완화’를 통해 ‘기업 인력활용의 효율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 마련’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핵심내용은 정리해고제와 파견노동제 도입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실직 사태가 만연하고 있는 상태에서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현실로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현실이 이렇게 돌아가자 여기에서 자본은 ‘고용안정에 대한 기존 관념’을 변화시키야 된다고 강변하면서, ‘노동시장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실업증가는 대내외 경제여건이 악화되고 대외경쟁력이 취약한 우리경제가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야기된 것으로서 산업구조조정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불안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중장기적인 고용안정대책은 현재 직장에서의 고용보장을 뜻하는 직장안정(job security)대책보다는 근로자가 일시적으로 실직하더라도 노동시장내에서 평생고용이 보장되는 노동시장안정(labour market security)대책이어야 한다”8)
기존에는 ‘직장에서의 고용보장을 뜻하는 직장안정’을 고용안정이라고 ‘관념’해왔는데 이제는 ‘노동시장내에서 평생고용이 보장되는 노동시장 안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논리는, 자본이 원하는 때 ‘달면 고용, 쓰면 해고’(그것도 임시직, 일용직, 파트타임 등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반(半)실업노동자가 자본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등장하는 그런 노동시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기서 왜 ‘안정’이 들어가는가 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실업폭증 등의 상황을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기에, 그것이 ‘사회불안 요인’이 되면 ‘되로 줄 것을 말로 주는 상황’이 오겠기에 ‘안정’을 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자본은 그런 불안을 미리 방지하는 차원에서 ‘보완대책’으로서 직업훈련 및 고용보험제의 확대 등을 필요로 하고 이를 주장한 것이다.9) 그들이 말하는 직업훈련제도와 고용보험제도는 철저하게 ‘자본의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를 추진하는 데서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부작용에 대한 보완장치’에 불과하다. 자본측에게 노동자 보호 혹은 능력개발 혹은 실업기간중의 생활보장 등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잉여가치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생산‘요소’인 노동력을 소유한 노동자를 어떻게 하면 기계처럼 (유연하게)부릴 수 있을까에 두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노동자가 원하는 ‘고용안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노동자 ‘보호’라는 이름을 달고 제정된 「근로자파견법」 역시 그러한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어 있다. 작년 노동법 개악 당시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로 일단 저지되었던 ‘근로자 파견제’가 98년 임시국회에서 법제화되었는데, 입법에 앞서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합의안에 대해 경총 등은 ‘대상업종의 지나친 규제로 인해 파견업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연신 문제를 제기해 결국은 ‘제조업의 직접생산 공정 업무를 제외한 모든 업무’에 대하여 파견노동이 가능하게 되었다(앞의 <표1> 참조). 근파법이 도입되기 이전에도 자본은 법과 상관 없이 파견노동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재경원과 노동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97년말 현재 파견 노동자의 수는 22만5천명으로 지난 92년의 2만7천명에서 5년동안 열 배 가까이 늘어났고, 전체 임금노동자 1,333만여명의 1.7%를 차지한다. 또한 노동자를 기업체에 공급하는 파견업체수는 1,363개에서 5,000여개로 늘어났으며 파견노동자를 사용하고 있는 기업체는 4천여개를 상회하였다.10) 자본은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여가 활용을 위해’ 파견노동을 선호한다는 근거를 내세웠으나,11) 그들에게 파견근로제의 주된 목표는, ‘노동비용’ 절감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12)
이밖에도 자본은 동시에 주휴일 유급규정 폐지, 월차휴가 폐지, 연차유급휴가 상한기간(21일) 설정, 퇴직금제도 폐지13), 그리고 단체교섭대상을 임금, 근로시간 등에 한정지을 것 등 명백하게 노동조건의 하향조정을 주장하고 있다.
3. 행정부의 논리
정부 및 관변의 고용․실업문제에 대한 인식은 큰 틀에서 근본적으로 앞에서 살펴본 자본측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즉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라는 이름하에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축으로 한 상대적 과잉인구의 양산과 노조활동기반의 와해를 현시기 자본축적 위기 돌파의 최대 현안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1) 고용안정정책의 포기와 ‘사후약방문‘
지난 2월의 노동관계법 개악에 앞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현재 한국의 금융․외환위기는 ‘정부 주도적 개발년대에 고착화된 후진적 제도와 관행을 국제화 개방화시대에 이르기까지 구태의연하게 답습하였기 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보면서 ① 기업의 과도한 차입경영 ② 금융기관의 비효율성 ③ 정부의 관치금융을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따라서 위기극복을 위해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금융구조개혁’과 ‘경제 전반에 걸친 과감하고 혁신적인 구조조정 청사진 제시와 즉시 시행’이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14) 또 KDI는 ‘고용조정과 인수, 합병은 경영난을 겪는 기업에 회생기회를 부여하여 부도라는 파국을 예방하는 매우 중요한 시장기능’이라는 인식하에 ‘원활한 구조조정’의 최대 관건이 ‘정리해고제 조기실시 등 유연한 고용관행 정착’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현시기의 실업자 중 70~80%가 중소기업의 부도에 의해 배출될 것이기 때문에 ‘고용안정대책’은 ‘감원억제’가 아니라 ‘실직자 지원 강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정부는 사실상 고용안정정책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 정권의 경제정책과 노동시장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이다.
즉 고용안정정책은 ‘구조조정을 통하여 성장을 회복하고 고용이 증대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대체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실직위험에 처한 고용노동자에 대해 사전적 구제조치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측에서는 ‘실직자 대책’에 치중하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병주고 약주고’라는 말이 있다. 문제가 근본적으로 실업과 고용불안을 가중시키는 경제정책에 연유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정책의 이러한 사후적 성격은 거의 필연적이다. 앞에서 경총 등의 입장을 분석하면서 나왔지만, 정부도 역시 자본측과 마찬가지로 ‘고용보험제 확충과 직업훈련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춘 ‘약’을 준비하였지만 그마저, 그게 또다른 ‘병’이 아닌지 의문시되는 실정이다.
(2) 충분히 ‘유연한‘ 우리나라 노동시장
앞에서 전경련 등의 입장을 검토하면서도 언급되었지만, IMF와 정부 및 자본측의 ‘유연성 제고’ 주장은 현재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이 ‘경직되어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경직성’이라는 것을 악(惡)으로 보면서 내놓은 처방이 바로 정리해고제 및 파견근로제를 필두로 한 방안들인데, 정리해고제는 직장으로부터 노동자를 자본의 필요에 따라 방출하는 것이고, 파견근로제는 소위 ‘인력공급업체’를 통하여 자본의 필요에 맞는 ‘인력’을 대려다 쓰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른바 ‘다양한 고용형태’를 일반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우리나라의 고용형태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이미 자본의 필요에 의하여 너무나도 ‘유연’해져 있다.
유연성을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의 비중을 들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임시직․일용직의 비중이 47.2%에 달한다. 시간제 노동자도 늘어나고 있다.
<표5> 임금 노동자 대비 임시직 비중추이(단위 : %)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3/4 |
상용직 |
58.7 |
57.8 |
58.0 |
56.6 |
52.8 |
임시직+일용직 |
41.3 |
42.2 |
42.0 |
43.4 |
47.2 |
시간제 노동자 |
6.6 |
6.6 |
6.3 |
6.3 |
7.6 |
자료 : 통계청, 「97년 3/4분기 고용동향」. 한국노동연구원 「단시간 근로의 실태와 정책과제」(1997)
* 시간제 노동자는 취업자 대비
또한 임시직의 비중만을 놓고 보면 1994년에 26.1%로서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표6> 94년 취업자대비 임시직 노동자 비중(단위 : %)
국가 |
유럽연합 |
벨기에 |
덴마크 |
독일 |
그리스 |
스페인 |
프랑스 |
아일랜드 |
비중 |
11.0 |
5.1 |
11.9 |
10.2 |
10.3 |
33.5 |
10.9 |
9.4 |
이탈리아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포르투칼 |
핀란드 |
영국 |
한국 |
7.3 |
2.7 |
10.9 |
9.3 |
12.9 |
6.3 |
26.1 |
자료 :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고용」, 1995.
그런데도 정부와 자본측이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주장하며 법제화시킨 것은, 자본의 논리를 은폐시키고 노동자의 저항을 사전에 방지하는 ‘제도화’의 이데올로기적, 현실적 효과 때문이다. 정리해고제 및 파견노동제 법제화는 고용불안에 대한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을 ‘불법적인 것’으로 봉쇄하고 자본의 요구를 ‘합법적인 것’으로 정당화시켜 줄 자본의 무기가 하나 더 늘었음을 의미한다.
(3) ‘고통분담론‘의 허구
우리는 지난 2월의 임시국회에서 이루어진 법개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적어도 정부가 내세웠던 고통분담이 허구였음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재벌개혁’과 관련된 내용은 ‘결합재무제표’의 경우 99년 1월 이후부터 시행하도록 하고, ‘상호지급보증’과 관련해서는 30대기업집단 소속기업에 대해 신규채무보증을 올 4월부터 금지하고 기존 채무 보증은 2000년 3월말까지 해소하도록 관련법을 개정 혹은 신설하였다. ‘재벌’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온갖 특혜를 생각하면 현재 정부가 재벌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혹시 ‘고통’일지는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소위 ‘재벌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재벌 바로 그들이 스스로 필요한 ‘개선’을 제스스로 하지 못하거나 혹은 안했던 것을 정부가 나서서 가닥을 잡아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재벌들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된다. 하물며 그조차 99년 혹은 2000년으로 기한을 연장하여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있었던 유보기간마저 폐지하고 정리해고제를 즉시 시행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덩달아 파견노동까지 즉시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더욱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것도 기실 자본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임은 이미 96년도의 노동법 개악과정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 바 있다. 정부와 자본측이 노동자에게 요구한 고통분담은 사실은 고통전담이었고, 자본측이 저질러놓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처럼 철저하게 노동자가 돌려치기당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4. 현시기 고용․실업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 ‘시지프스의 노동‘을 넘어서기 위하여
고용․실업문제는, 노동자에게는 삶의 기본권과 관련된 문제이지만 자본에게는 생산의 요소(혹은 비용)에 관련된 문제이다. 이 때문에 고용․실업 ‘문제’라고 했을 때 노동과 자본은 전혀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자본측은 불안정고용이나 불완전 취업자 증가에 대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라는 차원에서 이를 환영하고 조장하는 반면에, 노동자는 삶의 기본조건이 불안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고 저항한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현재 정부․자본은 기본적으로 노동시장(고용)의 유연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고용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을 고용문제의 핵심과제로 파악한다.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체계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용을 적게 들이고 노동력을 많이 지출하게끔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비용을 적게 들이려고 하는 자본의 노력에는 직접적인 비용인 ‘인건비’는 물론이거니와 노동자에게 이것저것 신경쓰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이를 위해 ① 자본은 정부를 통하여 법제도를 정비하고 노동자의 저항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장치들을 도입하고 이를 제도화시키려고 한다. 1990년대 들어 자본측이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그리고 파견근로제 등을 집요하게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라든지, 각 개별 사업장에서 소위 ‘신경영전략’이라 하여 노동력 이용체계를 재편해나갔던 것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② 또한 노동자의 저항을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해 부수적인 개량조치들을 취한다. 일례로 고용보험제 같은 완충제도를 설치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적으로 노동자를 갖은 방법으로 분할하여 개별화시킴으로써 집단적인 저항의지를 분산시키려 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고용문제는 생존조건의 문제이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여, 노동력 판매 이외에는 다른 생존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계급이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에 의해 주로 공장이나 사무실에 고용되어 노동함으로써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를 통해 임금(혹은 봉급)을 수령함으로써 생활하고 있다. 때문에 노동자에게 고용‘문제’라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정상적인 시간 만큼 일하여 수령할 수 없게 되는 모든 문제들’이 포함된다. 거기에는 임시직․비정규직(불완전취업)으로 떨어질 가능성,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정성, 임금 및 기타 노동조건의 문제 등이 모두 들어간다. 이러한 고용‘문제’들을 개선하고 해결해나가는 것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자리를 지키고 그것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정당하고 정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용하는 주체는 자본이다. 즉 칼자루는 자본이 쥐고 있고 노동자는 고용당하는 입장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자본이 해당 사업장에서의 자본운동을 중지하거나 경쟁에서 탈락하여 부도를 내고 철수하게 되면 노동자는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의 생리는 이윤을 쫓아 경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그 경쟁이 저들의 표현대로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해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증대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중소기업의 휴․폐업에 대응한 ‘고용싸움’에서 익히 경험하였고, 1997년부터는 대기업들까지 이러저러한 이유로 부도를 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보, 삼미, 기아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고, ‘민영화와 기업의 구조조정’이 자본의 사활적 과제가 되어 있는 현재 모든 노동자가 고용‘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자본가가 부도를 내고 도피하거나 업종변경 목적으로 공장문을 닫아버리거나 공장을 이전해버리거나 혹은 인수․합병하는 경우 ‘일자리 안정과 개선’이라는 노동자의 요구는, 실컷 굴려올린 바위가 도로 떨어져 내리는 ‘시지프스의 노동’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노동자가 고용문제 해결에 나설 때 일자리 고수와 개선 요구에 머물 경우 자본이 철수해 버리거나 혹은 철수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혹은 철수 위협을 가할 때, 노동자는 결국 아무런 전망 없이 자본이 휘두르는 칼에 제압당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는 그러한 ‘시지프스의 노동’을 넘어서지 않으면 고용문제 그 자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즉 대책이 따로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노동자가 고용관계(노자관계) 자체의 지양이라는 전망을 갖지 못할 경우 그러한 ‘시지프스의 노동’이라는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고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고용관계, 노자관계 자체의 지양에 있을 것이다. 즉 자본이 고용의 주체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결코 노동자가 원하는 고용안정성이 보장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용문제 해결의 근원적 과제인 노자관계의 지양이란 사회 전체의 변혁과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별 노동자 혹은 개별사업장 노동자들의 과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과제에 해당된다. 또한 일규성 총파업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는 과제도 아니다. 고용문제가 본질적으로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전 사회의 계급간 힘관계에 의해 판가름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고용문제는 노동자계급의 전체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해결이 모색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현실적으로 제출될 수 있는 정책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벌개혁 요구가 이러한 방향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공격이 현시기 경제위기 상황을 통하여 전이되어 노동자를 자본의 입장에 서게 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용문제, 뿐만 아니라 현시기 경제위기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방향과 차선적 정책대안은 무엇일 수 있는가?
일각에서 제출되고 있는 ‘생산성 향상노력과 고용안정’ 논리라든지, ‘임금삭감과 고용안정’ 주장은 현재의 상황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타개해 나갈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동자계급의 고용문제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생산성 향상과 고용안정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오히려 생산성 향상은 목표생산량이 불변일 경우 고용총량을 감소시키게 된다. 생산목표량을 늘려잡는다고 하여도 시장확대전망이 확실하지 않는 이상은 고용을 삭감시키게 하는 요인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세계적인 과잉생산(그것은 과잉축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공황의 시기에 생산성 향상을 통하여 고용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위와 같은 논리들은 뒤집어 놓고 보면 실질임금을 삭감하자는 주장에 불과하다. 특히 자본은 노동자의 고용‘안정성’을 전혀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쟁에서 악조건으로 파악하여 ‘노동시장의 경직성’으로 보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주장하는 자본의 요구는 그리하여 노동자의 요구와 완전히 상반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에게 타당한 과도적(현시기의 정책적) 요구는 ‘생활임금의 보장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한 고용안정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시간의 획기적인 단축을 통하여 고용 총량을 늘리고, 단축된 시간분의 임금만으로도 사회의 표준적 생활수준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임금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한 노동자간 단결의 범위 확대가 절실하다. 정리해고제의 본격 실시로 인하여 이미 정규직, 비정규직의 현실적 간극은 자본이 무너뜨려놓은 상태이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실직사태가 노조조직을 갖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자연정리해고’로 내몰고 있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고용되어 있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법제화된 정리해고’에 노출되어 있다. 실업노동자를 포함하여 노조 조직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모든 노동자의 조직화가 지금처럼 절실하고도 현실적인 때는 없었다. 이는 ‘시지프스의 노동’을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출발선이다.(1998. 3.)
* 이 글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노동정책연구’팀(유현경, 윤석주, 이은숙, 이재성, 정희석, 최경희, 허은영, 한은정)이 1997년 12월부터 수행 중인 「경제위기와 고용․실업문제」 연구 프로젝트 내용의 일부이다. 이 프로젝트 결과는 4월 초 보고서로 출간될 예정이다.
1) 1월 중의 주체적 정세는 ‘정리해고제 등의 강행 입법시에 총력투쟁’ 방침이 살아 있었으며, 실제로 서울지하철, 현대자동차, 병원노련(의료산별노조), 공익노련 등을 필두로 한 파업결의가 잇따르고 있었다.
2) 전경련부설 한국경제연구원, 「새정부의 정책과제」, 4쪽, 1997.11.24.
3) 위의 글, 4쪽.
4) ‘생산성임금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생산성임금제’론 비판(그 축약)-‘생산성임금제’론의 허구성 및 기만성 해부-”, ꡔ경제사회연구ꡕ, 1993년 7․8월 참조.
5) 전경련, 위의 글, 5쪽.
6) 전경련, 위의 글, 7쪽.
7) 조남홍(경총 상임부회장), “노사관계, 이제는 변해야 한다-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노사관계 패러다임의 모색과 기업환경의 설정-”, ꡔ새정부의 개혁과제와 21세기 국가비전 심포지엄ꡕ, 전경련 심포지엄 자료집, 1997.10., 5쪽.
8) 조남홍, 위의 글, 7쪽.
9) “① 적정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기업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직업교육과 훈련을 통한 직업능력의 개발을 통하여 인력양성의 낭비요인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② 실업발생을 흡수할 수 있는 고용보험제도의 기능과 역할을 증대시켜 실업에 따른 불안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고용조정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이직자에게 재취업을 지원해야 하지만 지나친 사회보험 혜택은 오히려 근로의욕 저하 등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따라서 고용보험제도에서는 실업급부보다는 재취업 촉진대책에 비중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조남홍, 위의 글).
10) 한국일보, 2월 11일. 그러나 이러한 조사통계는 파견노동이 합법화되지 않은 상황을 미루어보아 실제로는 더 많은 파견노동자와 파견업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과소평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1) 자본측은 노동자들이 파견근로를 ‘선택’하고 있다면서 그 이유가 ‘편리한 시간에 근무할 수 있기 때문(전체응답자의 40.7%)’이라고 응답한 조사결과를 내세웠다(조남홍, 위의 글, 7쪽).
12) “파견근로는 인력의 유연한 이용과 이에 따른 노동비용의 감소, 취업촉진, 직업정보 및 훈련기회의 제공 등의 효과를 가짐으로써 인력수급 효율성을 제고할수 있다”(조남홍, 위의 글). “파견근로제는 파견근로자의 보호 측면보다도 파견업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조속히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상무이사, 「노동시장의 활성화와 유연성 제고를 위한 고용대책」, 1997).
13) “고용보험법 재정 당시 ‘고용보험법 시행과 더불어 노동부장관은 퇴직금 제도의 개선방안을 강구’하도록 고용보험법 부칙 제3조에 규정한 바 있다. 더욱이 93년 이후 국민연금에 퇴직금의 8.3% 중 2%를 충당하고 98년부터 노사의 부담율과 퇴직금 전환금이 각각 3%로 늘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잔여법정퇴직금(5.3%)을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재원으로 전환하고 법정퇴직금 제도를 폐지하여야 한다”(조남홍, 위의 글, 13쪽).
14)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대토론회」 자료, 199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