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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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너도밤나무

현장에서 미래를  제109호
이영민


세상만사


너도밤나무

이영민 / 철도 노동자



계기, 그리고 사기

처음에는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시작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차량 지부장 일곱 명이 지역본부장 면담을 청하고 면담 중에 그대로 주저앉아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점거농성이다. 이때만 해도 사측이 여유가 있어 고소고발을 하네, 공안을 불러다 끌어내네, 하더니 다음날 아침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때는 고작 4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다. 이들을 끌어내는데 무려 100여명 가까운 공안과 관리자들이 동원되었다.
끌려 나갈 때 우리는 재판을 받으러 가는 도중, “어떻게 하지요? 사람들을 집결시켜야 할 텐데….” 하는 전화를 받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고 다음 대책을 잘 세워야지요.” 하고 얼버무렸는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밀려나 버렸다. 때마침 가까운 서울역에서 새마을호 여승무원 집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지부장들이 그냥 두라고 했다 한다. 자기 조합원들은 없고 다른 노동자들 도움을 청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현관 앞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집회를 급조했다. 그럭저럭 모인 사람이 사십여 명. 이들을 데리고 100여명이 지키는 현관을 뚫을 수 있었다. 현관문을 잠갔는데 창문으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이 양동작전을 펼친 덕이다. 억지로 동원된 공안들과 치고받았으나 금방 제압했다. 관리자들은 몸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창문으로 뛰어드는 흉맹한 기세에 기가 꺾였을 것이다. 이층 복도를 점거하고 오후 세시까지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는 후퇴다. 이틀 뒤 더 많은 조합원을 집결시켜 농성하기로 하였다.
지부장들이나 간부들 사기가 되살아나서 다행이다. 집회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지부장들 사기가 말이 아니어서 무산된 일도 있다. 결국 싸움이란 사기가 좌우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기는 투쟁에 대한 결의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부딪쳐 돌파할 때 극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잘 기획되고 조절된 투쟁은 보기에는 좋겠지만 피 끓는 사기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 지도부가 지나치게 대오를 통제해서도 사기를 만들 수 없다. 왜 그런가? 그 어떤 투쟁도 전체적인 흐름이 있고 개개의 치열한 전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도부가 그 전투현장에서 개인의 행동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기는 집단의 힘과 개인의 흥분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남의 뜻에만 따라 움직이는 대오가 그 무슨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지도부가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통제할 수 있는 경우는 진짜 싸움을 벌이지 않을 때이다. 위력시위만 하고 말겠다는 뜻을 가졌을 때 개인의 투쟁의지도 급격히 사라져서 앞장서는 사람이 없게 된다. 오늘도 창문으로 뛰어들어 결의를 보여준 간부들이 없었다면 점거농성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부는 다만 투쟁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기본전술이나 방침을 결정할 뿐이다. 그 다음에는 대오를 지휘하는 사람들의 결의나 사기를 높여주면 된다. 그러면 각각의 전투에서 대중을 책임지며, 대중을 지휘하며 돌격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판에 박은 집회나 판에 박은 행진은 결코 사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공허한 연설도 사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국면을 뒤흔들 수 없으며 상대방에게 혼란과 공포를 줄 수 없다. 오로지 부딪쳐 돌파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사기는 극적으로 올라가고 상대방의 사기는 급전직하하여 국면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런 투쟁을 일컬어 ‘계기를 잡아챈다.’고 하는 것이다. 전에는 그와 같은 투쟁이 흔하게 벌어졌는데 요새는 보기 힘들어졌다. 먼저 정권과 자본이 금을 그어놓고,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 넘을 수 없는 선을 그려놓고 지레 포기한 탓일 것이다. 아니면 간부들이 각 전투에서 몸을 던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임 - 오늘 힘센 후배들이 공안들 몇몇을 쥐어박았다. 평소 같으면 말릴 것을 그냥 두었다. 지난번 연행 때 당한 게 있어 속으로 고소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공갈치기를 “너희들 나중에 그냥 안 둔다.”고 했는데 흰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요즘은 개나 소나 노동운동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 가끔씩 혼이 나지 않으면 결코 무서워하지 않는다. 내가 공안 사무실에서 흥분한 것도 “노동조합 똑바로 해! 어설프게 날뛰지 말고….” 하며 노동조합을 멸시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연행

모처럼 강제연행을 당하였다. 서울역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공안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우리는 겨우 십여 명. 그중 태반이 여성 동지들이다. 함께 농성중인 철도 매점 동지들은 마침 수련회를 떠나고 없었다.
앉아서 쉬기도 하고 누워서 자기도 하는 농성장에 구둣발을 신고 들어왔길래 우선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이것들이 신발 신고 어디를 올라와? 썩 물러나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란다법칙인가 뭔가를 한다. 나는 힘도 없고, 개처럼 끌려가는 것은 아주 질색이다. 그래서 “놔, 이 자식들아. 내발로 걸어 갈 테니 몸에 손대지 마.” 하고 두리번거리며 가방을 찾았다. 신발을 찾아 신은 다음 순순히 일어섰다. 옆에서는 난리법석이 따로 없다. 동갑내기 해고자 동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고 여성동지들은 중과부적인데도 용감히 싸우고 있다.
“국장님처럼 자발적으로 오시면 좀 좋아요? 꼭 저렇게 해야 하나?” 공안 중 책임자 격이 속없이 아부를 한다. 그러더니 “그런데 우리가 미란다 법칙을 말할 때 분명히 들었죠?” 하고 확인하려 든다. 사람을 골리는 것도 여러 가지다. 역시 강제연행을 당할 때는 있는 힘껏 저항을 해야 했는데 하고 잠깐 반성을 하였다. 현대 중공업 같았으면 벌써 어딘가 부러졌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공무원 신분인 공안들은 우리 같은 자들을 상대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온갖 욕설에, 동네친구의 한심한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자기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박 3일을 꼼짝없이 유치장에서 지낼 줄 알았더니 불과 여섯 시간 만에 풀려났다. 피곤에 지쳐 냄새나는 모포를 덮고 정신없이 자고 있었는데 뜻밖의 석방이다. 듣자하니 공대위 동지들하고 해고자, 간부들 60여명이 서울역 공안분실을 점거했다 한다. 남대문서에서 3개 중대가 출동했는데도 꼼짝하지 않으니까 포기하고 풀어줬다는 것이다. 결국 잠깐의 소동이 되고 말았다. 나는 취객과 싸우고 경찰서에 끌려간 속없는 사람처럼 망신만 당하게 되었다.

덧붙임- 진짜 취객과 싸웠기 때문에 끌려가게 되었다. 농성장에 와서 찍자를 놓고 플래카드를 잡아 뜯고 해서 붙었던 것인데 그 사람 옷이 모두 찢어진 것이다. 농성에 골치를 앓고 있던 서울역 관리자들과 공사에서 “보았다. 찍었다.” 하여 환호하고, 취객을 부추겨 고소를 하게 한 다음 현행범으로 체포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벌금이라도 맞게 되면 벌써 폭력전과가 5범쯤 되게 된다. 노동관계법이나 쟁의조정법은 하나도 없고 대개는 폭력이니 동네깡패 수준의 잡범이 되는 셈이다.

특채

여승무원 22명이 특별채용시험을 본다. 26명을 정규직으로 하고 나머지를 걸어둘 수 있는 고리를 만들고자 하였는데 끝내 매듭을 짓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한번 소동을 겪었기 때문에 한결 의연한 모습이다. 시험을 거부하자는 쪽도, 치르자는 쪽도 서로 치고 박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전원이 응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씁쓸한 기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중운동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목적이나 조직적 성과를 위주로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런가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투쟁에 몸을 실은 여승무원 동지들은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이나 회의가 생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회의나 환멸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다. 대중이란 원래 그런 것, 이라고 생각해온 탓에 모두 투사가 되지 않는데 대한 절망이나 기대도 가지지 않았다. 운동을 십몇 년씩 했다는 인사들도 하루아침에 표변하는 세상인데, 그 차별과 멸시 속에 비정규직으로 지낸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편하게 마음먹고 있다. 정규직이 눈앞에 있는데, 나머지 4명에 대하여는 사측이 6개월 이상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데, 한 두 사람이 고집을 피우며 막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대중들은 진짜로 밥그릇이 위험하다고 여기면 정말 잘 싸운다. 자연스럽게 앞장을 서는 사람도 생기고 또 일치단결하여 투쟁의 파괴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투쟁이 늘어지고,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고, 또 목전에 이익이 닥치면, 대개는 끝까지 싸우자는 소수와 이익을 찾아가는 다수로 나뉘는 것 같다. 그런 것을 뛰어 넘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대중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이나 일부 집단의 이익을 넘어서 운동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활동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모름지기 활동가라고 하면 패배할 때나 혹은 분위기가 늘어져 있을 때를 잘 견뎌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대중에 대한 배신감이나 회의를 갖게 되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장기간 쓰러져 있거나 아예 활동을 떠나게 된다.
전원이 특채에 합격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다. 대중은 대중이고 간부는 간부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특채에 합격한 사람들에게도 축하를 해주고 싶다. 그것이 당신들, 투쟁의 결과라고, 당신들이 다 떠나 있을 때도 끝까지 남아 싸운 당신들의 동료가 있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덧붙임 - 여승무원 22명이 특별채용 차 적성검사를 받았는데 2명이 낙방했다. 함께 시험을 본 해고자 1명, 순직 유가족 1명도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 시간에 연수원 적성검사실 앞에서 모두 농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너도밤나무

요즘은 웬일인지 동료를 배신하고 떠난 자들이 더 큰 소리를 치는 세상이 되었다. 변절한지는 십년쯤 되고 이제는 기득권 세력이 된 이 아무개인가 하는 의원이 계속 노동운동을 능멸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노동부 장관에 국회의원까지 한 아무개는 산재승인을 요구하는 노동자들 앞에서 “나도 노동운동을 삼십년 했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꼼짝하지 않네.”하고 흰소리를 했다 한다. 그는 아예 자기 부하들에게 지시해서 “말썽피우는 산재환자들을 조기에 진압하라.”고 했다고도 한다. 이런 자들은 입에 올리기도 귀찮은 존재들이지만 우리 쪽은 또 어떤가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쪽에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니까 그자들이 그런 식으로 막나가는 게 아닌가? “어차피 너희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어 하잖아?” 이런 심리가 그 자들을 철면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 자들을 진짜로 호통 칠 수 있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그 자들을 멸시하는 사람들만 대해 왔다면 어찌 감히 너도밤나무가 진짜 밤나무에게 큰소리칠 수 있을 것인가? 그 자들이 그쪽 동네에서 “그쪽 판을 잘 아는 능력 있는 친구들”이라는 평을 받고, 그것으로 기득권을 인정받고 하는 것도 아마 반쯤은 우리 책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재판

모처럼 또 재판정에 나갔다. 모두 싹싹하게 혐의사실을 인정하였다. ‘철도공사 출범식’인가 하는 사측의 집회를 방해하여 약식기소로 벌금이 나왔는데 정식재판을 청구한 것이다. 모두들 가벼운 기분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좋은데, 10여명이 한꺼번에 출정하다보니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다. 아무렴 어떠랴, 아무나 시켜도 똑같은 대답을 하려니 하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되지 않고,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가수

노래하고는 영 담을 쌓고 지내는지라 가수들에게는 무조건 한풀 꺾이고 본다. 가수들은 대개 태도가 참 좋다. 나는 노래하는 재주밖에는 없으니까 그걸로 복무하겠다. 하지만 싸우는 곳에는 아무데나 다 가겠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노동운동은 가수들을 참 푸대접하는 것 같다. 그냥 아무 때나 부르고 돈이 없거나 투쟁 중에 있으면 차비조차 안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일본에 갔는데 그 동네에는 이른바 노동가수나 민중가수가 씨가 말랐다. CD 스무 장을 가지고 아주 여러 곳에 생색을 낼 수 있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방송차로 노래를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우리 그렇게도 해요. 목이야 아주 절단 나겠지만….” 하고 흔쾌하게 대답한다. 그래서 에라, 스피커 좀 비를 맞췄다고 무슨 일이 나겠냐 하여 부랴부랴 방송장비를 준비했다.
하이텍 알시디인가 하는 곳에 갔더니 거기서 함께 밥을 먹는 가수들을 보았다. 그리고 노래를 가르쳐 주고, 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하여간 격의를 느낄 수 없어 보기 좋았다. 우리는 운동의 이런 보배들을 아껴야 한다. 맨날 최저임금도 안 되는 공연비로 혹사를 시키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식으로 알아서는 우리 운동이 그들을 착취해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연

서울역에서 두 차례인가 음악회를 열었다. 대합실에서 공연을 하니 손님들도 매우 흥겨워하는 것 같다. 어차피 지루한 시간일 텐데 얼마나 좋겠는가? 노래도 좋고, 평소에 듣지 못하던 신기한 음악도 듣고 운이 좋은 승객들이나 음악회를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측이나 일부 시민들(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회원류들)에게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공연 때문에 열차를 놓쳤다는 사람을 한 명도 못보았는데 방송이 안 들리네, 시끄러워 견딜 수 없네 하며 시비를 거는 것이다. 시비를 걸면 더 엇나가는 게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더 큰 규모의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음악회 뒤 서울역장실에 항의전화가 60여 통이 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농성자들에게 해줬더니 아주 즐거워한다. 공연 뒤에는 막걸리파티,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데, 그리고 ‘바르게살기운동’류나 서울역장에게 각성의 기회를 준다는데 어찌 즐겁지 않으랴. 그런데 조만간 가처분 신청이 나면 음악회가 중단될 것 같아 걱정이다. 이번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막걸리나 왕창 사다가 실컷 마시게 하려고 한다.

무료신문

무료신문이 아무래도 운동의 중요한 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전철 안에서 보면 대부분 무료신문들을 펼치고 있다.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하여간 노동자 민중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무료신문을 애독하고 있다. 그 내용이란 것은 뻔해서 골치아플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이거나 보면서 세상을 잊고 사세요.” 식의 편집이다.
인터넷으로 개별화시키고(정보의 소통이라고 하지만 혼자 앉아서 즐기는 풍토가 더 문제이다.) 무료신문으로 사고능력을 마비시킨다. 세상이 이런 식이면 갈수록 사람들이 가벼워져서 골치 아픈 운동과 멀어질 것 같다.
운동도 즐겁게, 이런 생각으로 유행을 막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싸이월드, 머리염색, 옷차림, 기타 이러저러한 유행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운동 자체가 그렇게 감각적으로 즐거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가벼운 것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구세대인 나는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대중들에게 뭔가 좀 생각을 하게 하고, 심각한 얼굴이 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그런 것이 운동의 본질이지 대중을 단순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급기야는 운동하는 활동가들도 (감각적으로) 즐겁게 하자는 식은 가능하지도 않고 옳은 방향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생각

연맹에 있던 어떤 사람이 열린우리당 전문위원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한때는 치열하게 운동하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언젠가 그 사람이 생태, 자연, 동지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야말로 너그러운 어투로 쓴 글을 읽은 일이 있다.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며 공감도 하였는데 열린우리당 노동관련 전문위원이라니…. 열린우리당이 그 사람 주장을 일퍼센트라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 사람이 그렇게 되고 보니 그 잡지까지 그렇고 그렇게 느껴진다. 그 사람은 그 잡지의 편집위원인데 그대로 놓아둘지 모르겠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잡지는 운동판의 ‘좋은 생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솜사탕 같은 소리만 잔뜩 늘어놓은 ‘좋은 생각’, 나는 그 잡지를 동생네 화장실에서 처음 보았다. 지하철에 가면 ‘풍경소리’라는 불교 쪽 ‘좋은 생각’을 늘어놓은 판대기가 붙어 있다. 기독교 윤리 실천위원회인가 하는 곳에서 붙여놓은 기독교판 ‘좋은 생각’도 있다.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문화연대’에서 붙여놓은 화장실판 ‘좋은 생각’도 있고 텔레비전을 보면 텔레비전판(이거 왜, ‘테레비’로 쓰면 자꾸 컴퓨터 마음대로 바뀌는지 모르겠다. 컴퓨터까지 ‘좋은 맞춤법’으로 쓰라고 훈계하는 건지) 좋은 사람들이 나와서 훈계를 하고 있다. 이발소에 붙어 있는 푸시킨의 싯구절 “세상이 너를 속여 먹을지라도 결코 슬퍼하지도 말고 성질내지도 말아라. 언젠가 쥐구멍에도 햇볕들 날이 있으리니, 그저 좋은 생각이나 하면서, 다 인정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라.” 이렇게 약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래 너희들이나 실컷 좋은 생각하고 살아라. 나는 그냥 이대로 살란다. 내 팔뚝이 시키는 대로 삿대질하며, 팔뚝질하며 그렇게 살겠다고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
양비론이나 양비양시론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법, 이른바 당파성을 가지고 태도를 분명히 하면 대중적으로 고립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요즘은 ‘좋은 생각’을 말하고 싶으면 아예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서로 ‘좋은 생각’을 나누어가며,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유별난 짓을 삼가다 보니 노동운동이 독한 맛도 없고, 결기도 없고, 그저 점잖은 사람들이 훈계하는 대로 따라 가는 것 같다.

계급, 원칙 그리고 당파성

“그러니까 우리가 계급적 입장에서 판단해 볼 때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지 않나, 자본가들은 계급적인데 우리는 왜 계급적, 당파적이지 못한가 이렇게 늘 판단해 보아야 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노동자 계급은 왜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떠나, 자본가 계급의 계급적 분리책동에 분할되어 계급적 단결을 이루지 못하냐 이겁니다.”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부담 없는 자리였는데 실제로는 매우 부담이 되었다. 묵묵히 듣다가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일이 기본이죠. 활동하는 사람이 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먹고는 살아야….”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하고 주고받는 중에 “동지,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자본가들에게 종속되어 임금노예가 되자, 이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하고 추상같이 묻는다. “아니요, 저는 지금 그냥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인데….” 겁이 덜컥 나서 얼른 발뺌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할 때는 그렇다 치고 토론회라도 하게 되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계급, 원칙, 당파성, 일정 정도, 동력, 전략, 전술 등 관념적인 단어들을 그야말로 과다하게 혼합 사용한다. 익은 밥에 섞인 뉘처럼 입안에 걸리고, 머릿속을 빙빙 돌아다니며 돌대가리를 물려주신 조상을 탓하게 한다.
글로 쓴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싯적에 “현단계 남한 민주노조 운동의 전망과 과제”인가 하는 책을 읽는데 수십 쪽을 넘겨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운동권 책은 다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하고 나쁜 머리를 탓하였는데 지금은 쓴 사람을 원망하게 되었다. “대중들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래서 나하고 별 차이가 없는데 이런 식으로 어렵고 딱딱하게 써놓으면 대체 어느 놈이 알아 듣는담.” 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말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장이 없다고 회사가 당장 문이라도 닫는다 이거여? 사장 잽혀간 지 한달이 넘어도 끄떡없이 굴러 가잖여? 하지만 우리덜 백 명만 없어봐? 당장 난리가 나두 열 번은 나게 될 걸” 내가 있던 소속의 어느 기관사가 한 말인데 이런 식이 노동자 계급의 언어이고 당파성이 아니겠는가?
노동관련 잡지나 신문이 손에 들어오는 게 열 가지가 넘는다. 나는 그중에서 제목을 먼저보고, 그 다음에는 필자를 보고, 소제목을 들여다보게 된다. 제목에서부터 계급이니 원칙이니 하고 걸리적거리기 시작하면 그중 맨 뒤로 밀어놓게 된다.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많이들 읽어 주었으면 하고 애를 써 만든 사람이 안타깝지 게으른 내가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다.
굳이 한마디 더 한다면 ‘불파’니 ‘노급’이니 ‘계투’니 이런 말 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고 나름대로 익숙한 사람도 입에 걸리게 된다.
“나도 집에 가면 토끼 같은 새끼들이 있다 이겁니다. 죽어라고 일하지 않으면 정말 어렵다 이겁니다.” 헤어지기 직전에 귓등으로 들은 말이다. 내가 무서워서 대화를 피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비로소 ‘좀 더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어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끼리끼리 한겨레

한겨레 재창간 운동에 이름 올린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노동운동판에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름이 올라 있다. 열린우리당에서 이름난 사람들도 차례로 실려 있다. 한나라당에도 있고 민주당에도 있다. 그러니까 노동자, 시민, 사장, 자영업자해서 구색 맞춰 다 이름을 빌려주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끕’들은 소개 기사를 곁들여 자세히 올라온다. 중소기업 사장들, 그 옛날 옛적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기명칼럼으로 돈 내라고 호소하고 있다. 한겨레는 아마 지금 겪고 있는 경영위기를 넘기게 될 것이다. 저렇게 범국민적으로 한겨레 돕기를 하고 있는데 나 같은 객꾼이 굳이 한 다리 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한겨레가 처음 배달되었을 때는 읽는데 두어 시간이 넘게 걸렸다. 요즘은 화장실에서 제목이나 십분 쯤 훑어보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처음에는 국민체육을 그렇게 강조하더니 요새는 골프특집을 몇 달째 연재하고 있다. 주식투자나 재테크, 외국여행 아니면 멋진 국내여행 소개들은 한겨레가 더 이상 노동자, 민중들이 읽어야 하는 신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골통들이 노동운동의 이빨을 빼기 위해 뻰찌를 들고 달려들었다면, 한겨레는 콜라를 계속 퍼 먹여 이빨을 삭게 하려는 것 같다. 스웨덴, 네덜란드를 계속 소개하더니 이제는 노동운동이 폭삭 망한 일본, 그중에서도 도요타 자동차의 사례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다가 1,047명의 해고자를 내고 조직을 풍비박산케 했던 국철사례까지 올라올까 걱정이다.
끼리끼리 한겨레를 칭송하며 서로 돈 내자고 부추기는 꼴을 보니 갈 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창간독자이니 나도 이십년 가까이 묵은 단골인데, 이렇게 소외감을 느끼다니 쓸쓸한 기분이다. 나는 그래도 대기업 중의 대기업 노동자, 내가 이렇게 소외감을 가질 정도면 대다수 노동계급에게는 어떤 느낌이 되는 것일까.
예전에 ‘주간 노동자 (부조)신문’은 불과 한 두해 만에 색깔이 점점 흐려지더니 문을 닫았다. ‘내일신문’은 도대체 왜 창간했는지, 내일도 계속 나올 것인지 흥밋거리이고, 노동관련 잡지들은 정예간부들이나 시험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어볼 뿐(어렵고 딱딱하니까)이다. 그리고 상투적이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서 만든 신문, 글씨크기도 12포인트, 내용은 정말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만들어 죽어라고 배포했더니 누가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 “솔직히 하루 일을 마치면 파김치가 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출동해서 없는 사무실 문짝에 유인물을 끼워 두셨던데 읽을 시간도, 읽을 기운도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애쓰시는데 미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다수 노동자, 민중들의 실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노동자, 민중들도 공짜신문은 스스로 집어가서 재미있게 보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쩔 것인가?

개

개 두 마리를 사무실에서 키우고 있다. 한 놈은 스피츠 변종이고, 한 놈은 얼룩개 잡견이다. 스피츠는 영리하다. 잡견은 멍청하다. 두 놈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자빠져 자고, 길거리에 똥을 내갈겨 치우는 영감에게 “한 번만 더 밖에 내놓으면 잡아먹을 것”이라는 위협을 듣게 한다. 간부들은 못생겼어도 스피츠 변종을 사랑한다. 얼룩개는 멍청하다고 미워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굳이 강변한다. 스피츠 변종은 늘 꼬리를 치고, 얼룩개 잡견은 사람을 보아도 무신경하다. 스피츠 변종은 일부러 똥을 밖에 나가서 싼다. 왜, 그래야 집에 있는 주인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니까. 얼룩개 잡견은 앞마당에다 저 싸고 싶은데 그냥 아무데나 갈겨 버린다. 왜, 신경 쓰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스피츠는 사람에게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고 얼룩개는 아무리 가르쳐도 길이 들지 않는다. 이놈이 멍청해서 그런지, 자기 맘대로 살고 싶어서 그런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는 굳이 이놈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피츠 변종에게도 굳이 ‘개 같은 것’이라고 욕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어느 할 일 없는 놈이 개를 미워하거나 편애한단 말인가?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게 괴로운데 개한테까지 신경 쓰랴? 하루에 한 번씩 밥이나 부어주고, 마당에 똥이 널려 있으면 치우면 될 일이다. 문밖에 사는 영감이 소리를 지르면 사과하면 될 일이다. 그 두 놈은 지금도 에어컨 밑에서 사이좋게 포개져 세 시간째 낮잠을 자고 있다. 개 같은 놈들, 그렇게 개처럼 마음 편히 살아라. 아무 생각 없이, 걱정도 없이, 밥이나 먹고 시원한데 잠이나 자면 걱정할 게 뭐 있겠느냐. 개는 개이고 노동자는 노동자다. 말하자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세상이 정말 그런 것이냐?.

2005-07-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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