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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책,민중참여 그리고 과학기술자들

현장에서 미래를  제35호
최형록




과학과 삶(1)








이번 호부터 새로운 기획시리즈로 ‘과학과 삶’이 연재됩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인식하던 아니던 첨단과학의 영향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이 우리의 삶과 점점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과 동시에 매우 전문화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문화된 과학과 무지한 다수 인간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획연재 ‘과학과 삶’에서는 과학을 소재로 과학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인간생활에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가를 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이 란은 관심있는 몇 분이 공동으로 참여하기로 하였으며, 우선 첫번째로 연구소 회원이신 최형록씨가 당분간 작성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만약 칼럼버스의 산타 마리아 호에 냉장고가 있었더라면 선원들이 괴혈병(신선한 야채의 섭취 부족으로 발생)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레닌이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전해 주는 BBC 뉴스를 볼 수 있었더라면,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느라고 조선 8도를 걸어다닌 김정호에게 자동차가 있었더라면, 근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으로 관성의 법칙을 세운 갈릴레이가 컴퓨터 시뮬레이션(Computer simulation)을 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시름 속에 일성호가로 애끓던 이순신에게 이동 전화가 있었더라면? 만약 당신들에게 이런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오늘날 우리는 생활 필수품의 소비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기술 그리고 과학의 성과와 비중을 느낀다. 그러한 소비의 편리함과 느긋함은 과학기술혁명에 근거하는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노동과정) 앞에서 사라진다. 노동운동의 성장에 대해서 자본가계급이 사무 자동화, 공장 자동화로 대응함으로써 노동자는 노동소외의 심화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혼란으로, 그리고 실업으로 생존권이 위협당함으로써 심신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

미국의 진보적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O. Stone)의 영화 ?J. F. K?는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퇴임 연설로 시작한다. 그는 미국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군산(軍産)복합체임을 지적한다. 즉 베트남전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려는 케네디의 정책이 자신들의 이윤 창출과 권력 확대에 장애물이 된다고 판단한 군산복합체의 Power elite들이 케네디 암살의 배후 세력임을 스톤은 보여준다. 이 군산복합체야말로 과학기술을 반(反)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주범이다.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의 악마)는 ‘인간이 어떤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사는데 이성을 써먹고 있다’고 말한다.

이성적 노동의 소산인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를 극복할 때 비로소 인간해방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은 상호 관련된 세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문제 영역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노동과정)에 있어서 과학기술 혁명의 의미이다. 두번째는 과학 지식의 생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식론적, 인지 과학적 문제 영역이다. 세번째는 과학의 윤리적 측면, 특히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 영역이다. 본란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대 과학이 삶에 대해서 제기하는 도전적 문제점들의 성격을 짚어 보고 불완전하나마 제시되는 해결 방안들을 소개할 것이다.


과학기술정책, 민중참여

그리고 과학기술자들



최 형 록

회원






머리말


한국민 개개인은 ‘주권자’로서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하기만 하면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것인가? 해방 후 53년간 야수적 민간․군부파쇼체제 아래서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정치 세력의 성장이 극도로 억압되었던 까닭에 한국 자본주의는 한국전쟁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 할 책무가 부여된 국회는 양대 보수정당의 당리당략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국가 수준에서 그리고 지방 수준에서 선거 후에도 선량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그들의 활동의 질적 수준을 다음 선거에서 정확히 반영함으로써 합법영역에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생활의 모든 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인도주의적 삶을 위한, 민중 해방을 위한 민주주의의 기반을 탄탄히 다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의 주도로 (과학기술) ‘합의회의’를 구성․운영하려는 시도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 합의회의의 취지는 과학기술 정책의 수립 과정에 일반 시민 10~15명을 참여시켜 최소한의 관련 지식을 습득한 다음, 전문가와의 토론을 거쳐서 ‘합의 회의 최종 보고서’를 작성․공개한다는 것이다.1)

본란에서는 이런 방식의 시민 참여를 시행하고 있는 덴마크와 프랑스의 경우를 소개하고 과학 기술자들의 사회적 책임 의식과 윤리 의식을 다룰 것이다.



1. 과학기술 정책 수립과 민중 참여


과학기술 정책 수립과 관련된 ‘시민 합의회의’는 독일, 영국, 네덜란드에서도 몇 년 전부터 구성되었는데 그것의 모델이 된 것이 덴마크의 합의 회의이다. 현재 덴마크에는 그런 합의 회의가 13개가 넘는다. 최초의 합의 회의는 1987년에 구성되어 ‘공업과 농업에 있어서 유전 공학’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이어서 다룬 주제들은 ‘식품의 방사능량’ ,‘대기오염’, ‘불임’, ‘전자주민카드’ 등이었다.2) 합의 회의의 노력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켜서 실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예 두 가지를 들자. 유전 공학에 관한 합의가 있은 다음, 국회는 동물에 대한 생물 공학적 프로젝트에 재정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인간 유전자 지도 작성(La cartographie du genome humain)3)에 관한 합의 회의가 있은 다음, 국회는 취업할 경우 혹은 보험 가입을 할 경우 유전자 테스트를 금하는 중대한 의미가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런 한편 대기오염 문제와 관련해서는 직접적인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합의 회의 운동의 주동자인 Lars Kluver는 운동의 중요한 성과로서 상호 관련된 두 가지에 주목한다. 첫째, 합의 회의에서 일단 토론된 주제가 정치가들의 중요한 의제에 포함되었다는 점과, 둘째, 시민들이 용기를 가지고 토론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런 성과야말로 합의 회의의 존재이유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그런 토론 주제들은 너무 복잡한 것들이어서 전문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것이다. 많은 시민들은 합의 회의를 민주적 토론과 관련해서 ‘최후의 외침’ 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금년 6월 20일과 21일 최초로 시민들의 합의회의에서 하나의 과학 논쟁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그 논쟁의 주제는 유전자이식식물(Les plantes transgeniques)4)인데 경제는 물론 건강, 환경 그리고 윤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고 한다. 프랑스의 시민 합의 회의의 절차는 덴마크의 경우와 거의 같다. 우선 시민 14명으로 토론단(Le panel)을 구성한다. 14명의 구성원으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각계각층을 대표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고 한다. 이들은 2회의 주말기간에 토론 주제와 관련한 강의를 각분야 전문가들 ― 식물학자들, 생리학자들, 분자 생물학자들,5) 그리고 법학자들과 사회학자들 ―로부터 받는다.

약 4일간의 강의가 목표로 하는 것은 14명의 비전문가들로 하여금 유전자 이식 식물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이해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시민 합의 회의에서 전문가들과 토론할 수 있도록 비전문가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주목할 것은 이들 14명과 지도 위원회(Le comite de pilotage : 시민 합의 회의를 조직하였음)가 직접 기업가들, 전투적 생태주의자들 그리고 관련 분야의 현역 연구자들 가운데서 대화의 상대자가 될 전문가들을 선임한다는 것이다. 지도 위원회의 일원인 Dominique Donnet - Kamel은 합의회의의 장점들 가운데 한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합의 회의는 기층 시민들이 일단 정보를 가지게 되기만 하면 유전자 이식 식물들과 같이 복잡한 주제들에 대해서 현명한 조언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합의 회의에는 몇 가지 문제 혹은 한계가 있다. 왜 하필이면 14명으로만 구성되는 것인가? 전문가들이 과연 (필자: 기업,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가? 그리고 시민 합의 회의라는 것이 사실상 여론 조작의 보조 수단으로 전락되고말 위험성은 없는 것인가? 이런 까닭에 합의 회의의 14명의 시민들의 의견이 전국적 규모의 공개 대토론회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 있다. 따라서 국회의 과학기술정책 선정 평가국은 앞으로 100차례의 공청회를 통해서 의견 수렴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상으로부터 유네스코 한국위가 추진하는 ‘합의회의’는 덴마크를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의 선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 만큼 프랑스에서 제기된 문제들 혹은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과학이 직접적으로 하나의 생산력으로 전화되었다’6)고 말해지는 이 시대에 과학과 산업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민중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과학이 독점자본의 이윤 창출에 주로 활용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서 이 소중한 시도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 구성과 운영에 있어 진보적 사회운동세력으로부터 가능한 최대한의 의견수렴을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서 국회의 무능이 너무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부패한 관료집단의 반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암적존재’인 재벌의 저항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진보적 사회운동세력과의 제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합의회의’의 추진이 가지는 의의는 민주주의가 Elite에 의한 지배(Meritocracy)나 중우(衆愚)정치, 어느 쪽으로든 편향되지 않고 ‘긴장속의 균형’을 잡아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고 말할 때 그 지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적․공학적 지식이다. 그리고 그런 지식은 갈수록 전문화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화된 지식의 통합을 지향하고 새로운 지식이 삶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를 탐구하는 움직임 역시 존재한다. 즉 자연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일반대중 사이의 쌍방향적 의사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자연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자신들의 전문지식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보다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일반대중은 생활기기의 소비에서 오는 편리함․불편함의 과학적 원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과학 지식의 ‘사회적 함의’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지식 혹은 정보의 공유에는 자연과학적․기술적 지식 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인간과학(Sciences humains) 그리고 예술 역시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편 극소전자(Micro-electronic)7)혁명으로부터 가능해진 정보통신혁명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과학기술혁명이 인간의 노고를 줄여주고 개개인의 타고난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지식과 정보의 생성방식은 차치하더라도, 생성된 지식․정보가 공정하게 분산․공유되지 않거나 그것의 ‘사회적 함의’에 대한 공유기반이 넓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균형을 잃고 Elite 지배나 중우정치로 전락할 것이다.



2. 자연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


‘합의회의’의 의의를 민주주의의 ‘긴장 속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학기술 지식이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힘이라면 거기에는 쌍방향적 책임이 따른다. 즉 중우정치를 심화시키는 경향을 저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일반대중의 책임이라면,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Elite에 의한 지배경향을 저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연과학자들의 책임이다. 한국의 자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어떻게 보고있는가?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여기서는 대표적인 과학사가인 김영식 교수의 ‘한국과학의 특성과 반성’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의 과학의 위치와 과학활동의 성격’을 검토하면서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한국과학의 특성과 반성’8)의 요지를 논의와 관련해서 정리하면 이렇다.

개항기 한국의 서양과학 수용태도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9)이었다. 이런 태도는 수용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한 중인계층의 의식과 함께 오늘날까지 과학기술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남아있다. 그 ‘중인의식’이란 자신들은 단지 그 주변인에 불과할 뿐 전체사회와 국가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의식이다. 한국인들은 국가적 불행의 원인을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과 동화과정의 상대적 실패에서 찾음으로써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과학기술에 대한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관점은 전래의 ‘동도서기론’과 ‘중인의식’의 전통과 결합,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자기분야의 전문 과학기술 활동 이외의 것, 전체 사회와 국가문제들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상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사실 비판적 눈으로 보아야 할 한국사회 특유의 교육열(?),10) 과학주의,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있어서 미․일에의 의존과 두뇌유출을 언급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이렇듯 단순히 도구로만 인식된 과학기술에는 독자적인 문화적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많은 경우 경제의 일부분으로 분류되었다”고 한국 과학기술계의 경제주의적 기술결정론적 (필자) 문제상황을 지적한다.

추측컨대, 과학기술이 한국문화 전체속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그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서구과학의 정신적 기초, 이성적 사고, 이성적 분석과 종합의 사고를 한국적 문화전통에 접맥시킬 수 없었음에 대한 유감일 것이다. 김 교수를 포함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보다 깊이 생각해야할 것은(주어) 과학기술과 경제의 밀접한 관계를 시장에서의 상품의 수요 - 공급 관계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근본을 파고드는 과학자답게 잉여노동과 잉여가치를 둘러싼 노­사 간의 대립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김교수의 이런 관점의 결여는 ‘현대사회에서의 과학의 위치와 과학활동의 성격’ 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과학의 세가지 속성으로서 1. 경험적․실험적 성격,11) 2. 논리적․체계적 성격, 3. 객관적, 가치 중립적 성격을 들고 있는데 특히 객관적․가치 중립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즉, 외부세계를 기술하는 데 있어 얻게되는 과학의 법칙이나 이론이 인간의 가치에 관계되는 결점이나 선택을 내려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이다. … 그러한 결점에는 그 이론이나 법칙이 가지는 일관성, 체계성, 정확도, 간결성, 예측능력, 수식화 등 여러 ‘가치척도’가 개입된다.”12) 그는 가치 중립성 문제를 과학의 ‘내재적 가치척도’ 만으로 논할 뿐 ‘외재적 가치척도’로는 논하지 않고 비켜간다. 사실 과학기술 혁명의 시대에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외재적 가치척도, 즉 ‘사회적 제반관계와 사회적 생산관계’라는 역사적 맥락속에서 과학의 위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의 결여가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대공황과 실업, 나치즘의 발호, Taylorism - Fordism 에 의한 노동착취 그리고 현대과학의 혁명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정초(定礎)되었던 1930년대 영국을 비롯한 구미의 다수 과학자들의 태도 역시 비슷했다. “일부 과학자들이 과학의 순수성과 자유를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작업의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적 변화가 초래할 과학 자체의 미래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마음이 편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3)

그러나 소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과학이 간접적으로는 공업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지평을 넓히고 사람들의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보다 큰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해방의 힘’이 될 수 있음을 이해했다. 이를테면 1930년대에 Cambridse 大의 수학자, 자연과학자들인 J.D. Bernal, J. Needham, J.B.S. Haldane, H. Levy 그리고 L.Hogben은 대중용 수학책을, 심지어는 생화학자인 J.Needham은 ‘수평파와 영국혁명’14)이라는 책을 Left Book Club에서 출판하고 BBC 방송의 프로그램, ‘변화하는 세계 속의 과학’에 도움을 주며 ‘과학과 문화 도서관’ 관련 순회강연과 노동자교육에 열성을 다했다. 나아가 그들은 1932년 영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케임브리지 반전(反戰) 위원회를 조직하여 과학연구가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수행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가치중립성’ 논쟁과 관련해서 과학기술지식을 생각할 때 그것은 지식의 활용, 지식의 생성 및 연구주제의 선정에 있어서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은 예전과 달리 몇 사람의 재원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고가의 기기가 없으면 연구를 수행할 수 없다. 이론물리학자와 입자가속기(Cyclotron)의 관계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과학자는 정부출연연구소든 재벌소유연구소든 대학교든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정신노동자’로서 자본 - 노동의 사회적 생산관계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관계의 지배자인 자본가의 결정 앞에서 자연과학자가 연구주제를 선택할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대체로 연구주제는 국가안보를 위한 군비증강이나 이윤의 제고의 관점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국가안보라는 것은 군수산업계의 살인적 이윤욕 그리고 군부와 정계의 권력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학연구의 군사화와 상업화의 좋은 예가 바로 군사첩보위성기술의 경우이다. 미국은 이미 1956년부터 소련영토 깊숙히 정찰기를 발진시켰는데 1960년대 초 CIA와 공군의 주도로 비밀리에 Corona라는 첩보위성계획을 추진했다. 첩보위성의 기술수준은 부단히 향상되어 오늘날 그 수준은 거의 환상적이다. 미국의 사진정찰위성인 KH-II(2)는 해상도가 높은 비디오 영상처리체제를 이용해서 목표물의 열방출을 감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Real time) 수신지에 영상을 전송한다. 또한 국가정찰국이 시험하고 있는 ‘hyperspectral sensors’는 목표물의 형태, 온도, 운동은 물론 심지어는 화학적 구성까지도 탐지한다고 한다.15) 이렇게 정교성의 극치랄 수 있는 이 기술은 자본주의적 이윤창출의 새로운 영역으로서 위성이용 위치확인체제(Global Positioning System)로 상용화(商用化) 단계에 있다. 그리고 GPS를 이용해서 2m짜리의 첩보용 헬리콥터를 개발했다. 그것은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적외선 카메라를 장착하여 특히 적의 위치 혹은 전장에 매설된 지뢰를 정탐하여 즉각 (temps reel) 지상으로 송신할 수 있다.16)

나아가 ‘악의 제국’이라던 소련이 붕괴되었음에도 미군의 직접 개입없이 수행할 수 있는 첨단 전쟁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즉 원격조정으로 움직이는 무인전투기와 항공모함, 가상공간(Cyber Space 즉 computer)에서의 해킹으로 적국의 교통, 통신, 금융망을 파괴, 마비시키고, 그리고 국방성-에너지성-첨단프로젝트국이 개발 중인 무기로서 적을 살해하지 않고 무력화 시키는 ‘비살상 (non-lethal)무기’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17) 이것이야말로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하는 ‘어떤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사는 데 이성을 써먹고 있는’18) 것이 아닌가?

한국자본주의가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위기 속에서 산업구조재조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자들은 자본에 대해서 ‘노예적’ 관계에 있는 자신을, 그리고 무엇이 ‘준비된’ 것인지 우왕좌왕하는 국민의 정부를 보게될 것이다.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의식은 한국자본주의의 사회적 생산관계, 반(反) 이성적 정상배 집단에 의한 국가권력의 분점화 경향, 문화의 자본주의적 상품화와 국수주의적 문화, 역사관의 대두 그리고 세계자본주의의 재편과정 속에 있는 한국 등의 상호관련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삶의 위상과 의미를 찾는데에 있다. 한편 이런 사회적 책임의식이 극복해야할 여러 가지 부정적 심성(mentality) 가운데 중요한 것이 한국전쟁 이래 강박적으로 내면화된 군국주의적 심성(military mentality)일 것이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이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존재, 인간의 소망과 사상 - 요컨대, 여러 가지 심리적 요인들 -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비인간적 요인들(원자폭탄, 전략적 요충, 온갖 종류의 무기들, 원료자원의 확보 등)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기계론적 군국주의적 심성이 여실히 드러난 한가지 예가 ‘금강산 댐’ 소동이다. 그당시 토목공학자, 지리학자, 물리학자 등 관련 자연과학자들 - 물론 여타 ‘인간과학자들’ 역시 예외없이 - 은 얼마만큼이나 과학적 의심의 눈초리로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을 따져 보았을까? 사실 그런 사리분별력이 작용하려면 우선 사회적 책임의식으로부터 정치적 상황판단이 작용하여야 한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한번도 아닌 수 차례나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의 연구개발에 인류 최고의 두뇌들 일부가 몰두하고 있는 시대, 동일한 푸른 창공 아래 한쪽에서는 식량이 창고에서 썩고 비만으로 절식(節食) 하고 있는 같은 시각에 다른 한쪽에서는 아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시대에, 모든 이들, 특히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윤리의식과 관련해서 모범적인 인물이 아인슈타인이다. 그의 ‘왜 사회주의인가’19)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다.

1. 인간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제약당하는 동시에 문화를 창조한다. 바로 이점에서 인간의 문명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 오늘날 악의 진정한 근원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정부상태이다. 개개인의 삶은 ‘사회’라는 낱말의 뒤에 숨어있는 과거와 현재의 수백 수천만 사람들의 노동과 노동의 성취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상품의 생산은 효용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서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노동자가 생산해 내는 것 그리고 노동자가 받는 것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는 거대한 제조업자들이 끊임없이 상호간에 집단적 노동의 과실들을 ―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립된 법적 규제를 따름으로써 ― 빼앗느라고 분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적인 자본은 소수의 손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사적 자본가들은 재정지원 등의 방법으로 국회에 영향을 미치므로 국회는 유권자 가운데 기본적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사실상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 더욱이 사적 자본가들이 정보의 주된 원천들(출판, 라디오, 교육)을 통제함으로써 일개 시민이 객관적인 결론을 내려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행사하기란 지극히 어렵거나 실로 대부분의 경우 거의 불가능하다.

3. 사회주의의 목적은 Venblen20)이 지칭했던 인간발전의 포식적(捕食的) 단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규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4. 사회주의는 사회 윤리적 목표(Social-ethical ends)를 지향한다. 확신컨대 심각한 사회악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계획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고 아울러 사회적 목표들을 지향하는 교육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5. 사회주의의 여러 가지 목표와 여러 가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현재와 같은 이행의 시대에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3. 만인의 윤리의식


과학기술자들은 여타 노동자․민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보수를 적절히 받고 사회적 존경도 받는다. 그는 ‘과학적’ 건강지식에 따라서 신선한 야채를 섭취하려 하고 쾌적한 주거생활을 하면서 컴퓨터를 사용하고 차량을 이용한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은 자신들과는 다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덕택으로 가능하다. 동시에 다수의 노동자․민중은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지식의 교육을 과학기술자를 포함한 지식인들의 노동에 맡긴다. 즉 인간 사회는 상호의존관계에 의해서 유지되고 진화한다. 나아가 그런 상호의존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와 여타 모든 생명체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내장의 박테리아는 우리의 소화를 도와준다. 팔랑거리는 나비, 광합성을 하는 온갖 식물이 또한 그렇다. 이러한 상호 의존성으로부터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라는 윤리의식을 도출할 수 있는데 이것과 함께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윤리의식은 불교적 ‘공(空)’의 사상21)이다. 공의 사상은 불교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대개 윤리와 관련해서 추구하는 것은 ‘자아를 찾아서’이고 올바른 자아의 정립과 자아실현을 향해서 노력한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공’의 사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통찰을 깊이 사색해보는 것은 절실한 문제이다. “나는 어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판단할 때 한가지 척도를 따른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목적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로 자신의 나(moi)로부터 해방되어 있는가라는 것이다.”22) 아인슈타인의 이런 생각은 ‘공’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죄의식에 기초한 윤리의식이나 인간존재의 유한함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허무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자본주의 모순에 지혜롭고 용기있게 투쟁함에 있어서 ‘공’의 사상은, 견실한 윤리적 근거가 될 것이다.

한/노/정/연


1) ꡔ한겨레ꡕ, 1998. 7월 6일자.


2) ꡔ과학과 미래ꡕ, 1998. 6월호, 파리, 13쪽.


3) 본란에서 두 번째로 다룰 예정이다.


4) 앞의 책, 12쪽.


5) 생물학의 첨단분야. 1940년대부터 생화학과 유전학이 융합하여 성립된 하나의 새로운 학문분야.


6) B. Coriat, ꡔ과학, 기술, 그리고 자본ꡕ, 파리, Senil, 1976년판, 23쪽.


7) 마이크로미터는 10-6m인데 지금은 분자의 크기인 나노미터, 10-9m 수준을 넘어서 요크토미터(yoctometre), 10-24m 수준까지 과학기술은 파고 들어가고 있다. ꡔ과학과 미래ꡕ, 5월호, 파리, 92~102쪽.


8) 김영식, 김근배 엮음, ꡔ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ꡕ, 창작과 비평사, 1998년, 342~363쪽.


9) 이것은 동양의 정신․가치(東道)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으로부터는 실용적인 과학기술(西道)만 수용하자는 태도였다.


10) 교육열이 진정 높다면 하찮은, 박세리의 골프사건에는 그렇게 열광하고 수십억을 투자하면서도 과밀학급 등 교육현안에 대해서는 왜 분노하여 개혁하는 것이 거의 없는가? 그리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근시안적 발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문화유적을 불도저로 밀어버려도 시위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있는가? 교육열이라는 ‘양반탈’의 정체는 봉건적 핍박으로부터 형성된 열등감과 자본주의체제에서 내면화된 극단적 이기주의가 엉킨 ‘출세지향주의’가 아닐까?


11) 그는 새로운 과학지식이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일반상식이 오류임을 지적하면서 과학연구에 있어서 이론적 사고가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김영식 편저, ꡔ과학사 개론ꡕ, 다산출판사, 1990년판, 429~30쪽. 이런 지적은 과학지식의 생성과정과 관련된 것인데 Einstein은 사실과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뉴튼은 자신이 세운 체계의 근본개념들과 법칙들이 실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초실험으로부터 근본개념들과 가정들을 연역논리적으로 도출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론물리학의 공리적 기초는 자유롭게 발명(Librement inventee)되기 마련이다.” Einstein, ꡔ나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ꡕ, 파리, Flammarion, 1978년, 150~151쪽. P. Thuillier, ꡔ아르키메데스로부터 아인쉬타인까지ꡕ, 파리, Fayard, 1988년판, 353쪽에서 재인용. 김 교수가 이론적 사고의 중요성과 관련해서 갈릴레이의 유명한 ‘사고실험’을 왜 거론하지 않았는지 쉬 이해가 되지 않는다.


12) 앞의 ꡔ과학사 개론ꡕ, 432쪽.


13) J. D. Bernal, ꡔ역사 속의 과학ꡕ, 케임브리지, M.I.T 출판부, 1979년판, 720~721쪽.


14)Needham은 가명으로 출판했는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Christopher Hill은 이 저작을 높이 평가했다. G. Werskey, ꡔ볼 수 있는 대학 : 1930년대 영국의 사회주의적 자연과학자들에 관한 집단전기ꡕ 뉴욕, Holt, Rinehart and Winston, 1978년판, 169쪽.


15) ꡔ대중과학ꡕ, 미국, 1992년 2월호, 42~47쪽.


16) ꡔScientific Americaꡕ(과학과 미국), 1996년 2월호, 뉴욕, 32~38쪽. ꡔ과학과 미래ꡕ, 1998년 7월호, 파리, 8쪽. 그 기술은 고고학적 탐사의 첨단도구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ꡔ과학과 미국ꡕ, 1997년 8월호, 60~65쪽.


17) 앞의 과학잡지, 1995년 12월호, 74~80쪽.


18) 괴테, ꡔ파우스트ꡕ, 정서웅 옮김, 민음사, 1997년판, 20쪽.


19) 그의 원문은 ‘상대적으로’ 약간 질서정연하지 못한데 필자가 원문의 뜻을 손상함이 없이 정리한 것이다. 아인쉬타인, ꡔ사상과 의견ꡕ, 뉴욕, Crown 출판사, 1982년판, 151~158쪽. 이 글은 1949년 5월 미국의 맑스주의자들이 창간한 ꡔ월간평론ꡕ에 처음 아인쉬타인이 기고한 글이다. 그후 이 글은 1992년 5월 44~1호에 다시 실렸다. 필자는 이 글을 ꡔ민중회의 소식ꡕ, 19호, 1992년 7월 8일자에 번역한 바 있다.


20)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자로서 ꡔ유한계급론ꡕ의 저자.


21) 달라이 라마(티벳의 지도자로서 노벨 평화상 수상), ꡔ독단을 넘어ꡕ, 파리, Albin Michel, 1994년판, 25~26쪽, 208~280쪽 참고. 그리고 F. J. Varela와 2인 공저, ꡔ몸과 일체를 이루는 정신: 인지 과학과 인간의 경험ꡕ, 런던, MIT 출판부, 1995년판, 105~130쪽 참고. 달라이 라마는 관념론적인 불교도가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야말로 바람직한 경제체제라고 지적할(앞의 ꡔ독단을 넘어ꡕ, 32쪽)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F. J. VARELA 등 편저, ꡔ구름다리: 정신과학에 대한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ꡕ, 파리, Albin Michel, 1995년판 참고.


22) 달라이 라마의 앞의 책, 211쪽.


1998-08-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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