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메이데이 집회 참관기
이 상 원 (서울대 법과대학 사법학과 4년)
1. 프롤로그
대학에서의 봄은 새내기들의 활기찬 웃음과 함께 시작된다.
대학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그들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선배들의 지갑이 야위어져 가는 만큼 대학의 생명력은 살아나는
듯하다. 3월과 4월 학회니 개강파티니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때로는 깨어지는 대학의 환상에, 때로는 너무도 어려워
보이는 선배들의 모습 속에 조금씩 그들은 커져 간다.
그리고 5월 ….
아직은 이 남한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진정
자유로울 수 없는 핏빛 5월이 다가온다.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이맘때 쯤이면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자욱이 깔리게 마련이고
아직은 멍한 새내기들에게 선배들은 고민을 던져주려고 애쓰게
된다. 환한 웃음이 제일 잘 어울릴 것 같던 후배녀석들이
술자리에서, 찻집에서 고민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새 5월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5월을 맞이하는
가운데 길목에 바로 5월 1일 메이데이가 자리잡고 있다….
2. “…그렇다. 이것은 들불이다…”
93년 연세대 노천강당을 가득 메웠던 노동악법 철폐의 함성,
그리고 94년 동국대 만해광장을 총단결․총투쟁의 열망으로
달구었던 기억들이 아직 생생한데 지난 95년 메이데이 기념식이
바로 우리 학교 대운동장에서
회원/독자 투고
있었다. 몇주일 전부터 도서관과 과방에 붙었던 포스터를 보아
왔던 차라 5월 1일 오후 2시 쯤에 고시공부에 지친 친구 한
녀석을 이끌고 대운동장으로 향했다. 2시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3시에 시작될 테니까 내가 3시 30분쯤에 가면 식이 막 시작하지
않을까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관악 타임을 예상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웬걸 후생관 뒤로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식은 벌써 시작되었고 한참 순서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예상과 빗나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순간 눈에 박혀오는 장대한 물결…. 대운동장을 형형색색의
옷이며 모자, 띠 등으로 가득 메운 3만여 명의 인간의 물결이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텐드까지 채우면서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 사람들……. 한 목소리로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과 ‘민주노총 건설’을 외치는 그 장대한 광경. 멍한
눈으로 잠시 서 있다가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 밀려 앞으로 내려
왔다. 본부석 기준으로 맨 왼쪽에 자리잡은 관악깃발을 찾아
법대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가니 녹색천을 팔에 두른 채 ‘철의
노동자’를 부르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는데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든다.
“애들 다 어디갔니? 많이 안 보인다.”
새내기 여학우를 데리고 한참 열올리며 얘기하던 한 후배 녀석이
씽긋 웃어준다.
“애들 떼거지로 자원봉사단 갔어요.”
문선대의 공연이 이어지는 도중 음료수도 사올 겸 잠시 대열을
떠나 경영대 쪽으로 갔다. 아까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본부석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않은
녹색조끼의 큰 물결……. 저기가 어딜까 궁금해 하는데 옆의
자원봉사단 친구가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설명해준다.
“저기는 이번 95년 노동운동의 꽃이 될 자랑찬 우리 한국통신
노동조합분들이십니다.”
한 마디로 너무 멋있었다. 잔디밭 위로는 보기에도 처참하게
검은 조끼 입은 자원봉사단이 쓰러져 자고 있다. 오늘 행사
준비하느라 밤을 샌 모양이군. 땀 범벅이 된 그 친구들의 자는
모습이 아름다와 보이는 건 왜일까….
다년간 집회장에서 쌓은 짬밥을 걸고 말하지만 정작 집회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별게 없다. 특히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은 왠지 어수선하고 자기들의 얘기가 더 중심이 될 뿐이다.
선배는 후배에게 하나라도 더 이야기하려고 하고 후배들도
조금만 틈이 나면 저건 왜 저렇고 이건 또 왜 이런지 꼬치꼬치
캐묻고 하면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얘기하나 한 번 들어볼까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 후배 녀석이 옆으로 바짝 다가 앉는다.
“상원이형 민주노총이 건설되어야 한다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좋아져요?”
굉장히 진지하게 물어오는 그 후배의 눈빛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얘한테 무슨 얘기를 들려주어야 될까? 민주노총이
건설되면 우리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 그럼 난
알고 있나? 아니 우리 사회 그 누구가 알고 있을까?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갑자기 힘찬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노동자 문예선동단이 ‘철의 노동자’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자리에서 기립하면서 힘차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오래간만에 아는 노래가 나와서 그런지 노땅들이건 새내기들이건
모두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그 친구나 나나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염원한다 민주노총을, 총단결 총투쟁, 가자
노동해방’ 등의 노래는 사실 많이 낯설고(노래는 참 좋고 힘이
나는 것 같은데…) 철의 노동자라든지 단결투쟁가, 연대투쟁가
등의 노래가 나오면 괜시리 더 힘이 나고 그랬다. 민주노총을
11월 노동자대회에 맞춰 만들고야 말겠다는 취지의 결의서
낭독을 마지막으로 어느새 본 행사는 마무리되고 있었다.
“노동운동 탄압하는 김영삼정권 반대한다!”
“천만노동자 총단결로 95임투 승리하고 민주노총
건설하자!!”
힘찬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보라매 공원까지의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3만 이상이 왔으면 학교를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딱 맞았으니 제일 선두의
한통 노조분들이 학교를 빠져나간 시각은 4시경, 그리고 관악이
학교를 빠져나간 시각은 대략 5시 30분이었다. 1학년 때 동아리
사람들에게서 배운 ‘푸른 옷의 물결은 노동해방의 바다로’라는
노래 구절을 연상시킬 만큼 저 거대한 노동자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행진을 시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학교정문에서
까치고개를 넘어 서울대입구 전철역으로 그곳에서 좌회전해서
봉천역, 신림사거리를 거쳐 보라매 공원으로 들어가는 두
시간여의 대장정…. 때론 걷다가 조금 뛰다가 다시 섰다가 아예
주저앉고를 반복하면서 한참을 가는데 길가에 서 계시던
시민분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좋았다. 대구참사와 김영삼 정권의
잇따른 실정에 많은 분노를 가지고 계신 때문인지, 우리가
나누어 드리는 유인물을 받아 자리에서 읽어 보시면서 우리들의
구호에도 귀를 기울이는 모습들이셨다. 하지만 역시 두 시간의
행군은 사실은 지루한 것…. 번뜩이는 재치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구호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김영삼을 점지하신 삼신할미 각성하라!!”
“김영삼 안 잡아가는 귀신들은 자폭하라!!”
법대 학생회장이 개발했다는 문답식 구호, 크레센도
구호(아무래도 도용한 것 같음), ‘민주시민 동참하라’로
시작되는 고전적인 훌라송을 부르면서 보라매로 향했다. 7시
30분경 보라매로 들어와서 간단한 정리집회를 가졌다. 다시 한
번 노동악법 철폐투쟁과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 민주노총 건설의
결의를 다지고 곧 학교별로 간단한 평가를 가진 후에 하루의
싸움을 정리하고 녹두거리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그 기분, 91년의 그 뜨거웠던 종로거리가 연상되면서
나의 마음은 아주 뿌듯했다.
3. “상원이형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한마당에서 뒷풀이를 하면서 법대 친구들의 느낀 점과 결의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올바른 얘기
같다면서 수줍어하는 여학우, 술에 벌겋게 된 얼굴로 이후 힘찬
투쟁의 결의를 밝히는 친구,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지나간 날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저들의
모습이 얼마나 정다운 것인가!!
아까 얘기 도중에 노래 때문에 얘기가 끊겼던 한 후배 녀석이
자기 술잔을 들고 내곁으로 슬쩍 다가온다.
“상원이형 아까 얘기 아직 안끝났어요…. 집회하면서 느낀건데
아직은 우리의 힘이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우리 오늘 그렇게
열심히 외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과연 얼마나 되는
국민들이 우리의 얘기를 알겠어요? 내일 아침이면 사회면의 아주
구석에 조그맣게 실릴 뿐인데요…. 그것만 생각하면 너무
분해요.”
문득 1, 2학년 때의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온다. 수많은 열사들이
죽어가고 그렇게 노태우정권타도의 외침이 컸을 때 언론이
취했던 왜곡축소 보도, 하지만 정원식이 계란과 밀가루 뒤집어
썼을 땐 밤 12시 마감뉴스까지 생중계로 분노하는
‘일부시민’들의 모습을 새벽까지 비추고 발빠르게 1000여 명의
집에 전화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그 결과가 이렇더라며 열을
올리던 그 역겨운 모습들…. 쓸말은 쓰겠다던 그 입으로
최소한의 진실조차 끝내 알리기를 거부했던 그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태도에 얼마나 분노했던가. 또 다른 한쪽에 앉았던
후배녀석이 툭 던진다.
“아, 빌어먹을. 우리에게 당이 있다면….”
92년 총선후 해체되었던 민중당의 아픈 기억이 또다시 살아온다.
대중들에 기반하지 않고 상층의 몇몇 명망가들로 구성되어 기층
민중들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당의 최후를 보며 우린 얼마나
안타까워 했던가. 그리고 지금은 지배계급의 품에 안겨 있는
변절자들을 우리는 얼마나 저주했던가.
“그래 얘들아. 우리에게 당은 필요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당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당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야. 학우대중들에 기반하지 못한 학생회가 별 힘을 가지지
못하듯이 투쟁하는 민중들에 뿌리내리지 못한 당은 얼마 가지를
못해. 그 처참한 기억을 우린 민중당이라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니? 우리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고 투쟁하는
민중들의 맨 앞장에 서서 같이 싸워줄 수 있는 그런 우리의 당은
철저하게 대중조직들에 기반해서 서야만 해. 오늘 얘기한
민주노총 건설과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민중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가장 소중한
첫걸음이라고 형은 생각해. 자 힘있게 건설할 민주노총에
기반하여 만들어지는 우리의 당은 얼마나 튼튼하고
건강하겠니?”
나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후배들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인다….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며 나는 그 자리를
나왔다.
4. 에필로그
아니나 다른까 5월 2일자 조간신문 3개를 봤는데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다른 신문들에게는 메이데이 소식이 사회면에 조그맣게
실려 있었다. TV 뉴스에선 어제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여
노동부장관과 국무총리, 7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노동절 기념 행사가 열렸으며 한편 서울대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노동자와 학생 만여명이 따로 모여 집회를 했다는 짧막한
기사만이 달랑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 행간을 읽어낼 것이다.
어제 서울대 대운동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을
필두로 노동해방 민중승리를 향한 민중들의 대진군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지배계급들은 하나의 불씨는 꺼뜨릴 수 있을
것이지만 들불처럼 타오르는 우리 민중들의 거대한 함성과
진군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