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 구 ◦ 논 ◦ 문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에 관한 연구 : 1987-1992
노 중 기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이 글은 노중기 박사가 학위 논문을 요약하여, 지난 9월
28일(토) 본 연구소 제 5차 이론연구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을
재작성한 것이다. 당일 토론 자리에서는 지정 토론자의
문제제기와 참여한 분들의 많은 질의와 응답이 있었으나, 필자가
토론된 내용을 적절히 수용하여 재작성한 글이기 때문에 별도의
토론문은 싣지 않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정치의 역동적인 과정을 국가의
노동통제와 노동운동의 저항이라는 전략적 상호작용의 분석틀로
분석하고 있는 이 글은, 지난 8년 간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국가
노동통제전략의 변화와 그 성격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 서론 : 문제제기
한국사회의 노동운동에서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하나의
전기를 이루었다. 오랜 동안 억압되어 왔던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역량은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급격히 분출되었고, 이는 새로운
노동정치구조의 도래를 예견케하였다. 1987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에 진행된 노동운동의 급속한 성장은 이와
같은 기대와 예측을 더욱 고무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8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면 노동자계급의 계급세력화는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단선적인 과정이라기보다 후퇴와 전진을
거듭하는 매우 역동적인 과정이었으며, 향후의 발전전망 역시
매우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90년 시점에서 정점에
달하였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이후 계속하게 낮아져서 1987년
대투쟁 이전의 조직률에 다시 접근하고 있으며, 쟁의발생건수
또한 1987년 이전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수 차례의 열정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실패하였다. 노동운동의 위기감은 1992년에 정점에 달하였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노동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형기, 1992; 최장집, 1992; 임혁백, 1992; 임영일, 1992;
박승옥, 1992; 허명구, 1992; 노중기, 1994;
박준식․김영범, 1995; 김동춘, 1993 등을 참고.
이와같이 1987년 이후 한국사회 노동정치의 전개과정은 매우
역동적인 것이었다. 노동운동은 크게 위축되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질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노동정치는 국가정치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이 과정을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의 변동과 그
한계라는 맥락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노동정치의 역동적
변동을 국가의 노동통제와 노동운동의 저항이라는 전략적
상호작용의 분석틀로 파악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의 물음으로 요약된다.
첫째, 1987년 이후 국가의 노동통제체제를 설명하고, 그
변화양상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운동과 노동정치의 양상이 6공화국 국가의
노동통제가 갖는 효율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노동정치의 전개과정을 몇 개의 소시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 국가노동 관계의 내적 동학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의 전개과정을 국가의 노동통제에 대응한 노동운동의
전략선택이란 맥락에서 간략히 설명할 것이다.
2. 억압적 배제전략과 헤게모니적 배제전략
6공화국 국가의 노동통제체제의 변화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노동정치체제의 변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그것은 노동정치가 국가자본노동 간 상호작용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며, 특히 국가의 노사관계에 대한 직, 간접적 영향력이
매우 큰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한다.(임현진․김병국,
1991; 최장집, 1992) 그리고 노동자대투쟁 이래 노동운동의
전개양상을 규정하였던 일차적 요인 또한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이었다. 본고에서는 6공화국 노동통제전략은
군부독재체제의 그것과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 1987년 이후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이 권위주의 체제의 그것과 비교하여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다.
최장집(1992), 임영일(1992), 김준(1989), 차성수(1989),
김용기(1989) 등은 커다란 변화가 없었음을 강조하였던 반면,
김형기(1992), 박승옥(1992), 허명구(1992), 박준식(1992) 등은
변화의 추이와 그 가능성을 주목하였다.
, 그 통제효과와 내적 한계가 노동정치와 노동운동의 변동양상을
규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한국사회 국가의 노동통제를 설명하는 기존의 개념들은 크게
국가조합주의적 노동통제(최장집, 1988, 1992), 시장기제적
억압(송호근, 1991), 의사개량화전략(차성수, 1989; 박형준,
1989; 한국산업사회연구회, 1989; 김준, 1989),
법적․경제주의적 통제(김형기, 1992; 박승옥, 1992;
허명구, 1992)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개념들은 국가의
노동통제의 특정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으나,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진전과 국가성격의 변화에 따른 노동통제전략의 변화를
적절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국가조합주의적 노동통제는
무엇보다 조합주의적 이익대표와 노동통제의 교환기제가 존재치
않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신광영, 1991;
송호근, 1991; 노중기, 1993) 그리고 그것은 노동조합조직을
매개로 하는 통제방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여타
통제수단들을 매개로 한 국가의 노동통제를 간과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국가조합주의를 비판하였던 시장기제적 억압 또한
시장개념이 불명료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이며, 유기체적 국가론을
전제로 함으로써 그 개념적 정밀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 두 가지 개념이 기본적으로 1987년 이전의 노동통제유형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법적․경제주의적 노동통제나
의사개량화는 1988년 이후 국가의 노동통제양상의 변화에 주목한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의사개량화론은 물질적 토대가 직접적으로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을 규정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경제결정론적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고, 의사(疑似)의
개념범주를 한정짓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
법적․경제주의적 통제는 새로운 통제방식의 출현에
민감하게 대응한 개념이었으나, 지나치게 서술적이어서 통제의
내적 기제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노중기(1993)를 참고.
그러므로 민주주의이행기 국가의 노동통제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이론적 고려가 필요하다. 먼저 통제전략의 변화는 질적인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통제수단, 예컨대
경찰력 동원의 양적 크기나 물질적 양보의 정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되며, 질적인 통제기제의 변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어야 할 것이다.
두번째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정치적 이해에 대한 국가의
전략적 태도와 이를 위해 동원되는 구체적인 여러가지
노동통제수단들 및 통제방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전략의
차원에서 자본주의국가의 대노동전략은 배제전략, 대변전략,
방임전략 등의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동원되는 노동통제수단들로서는 물리적 강제수단,
법적․행정적 수단, 이데올로기적 수단, 조직적 수단,
사회보장적 수단 등이 있다. 이들 각 통제수단들 간의
상호관계에 의해 구체적인 통제방식들이 구별될 수 있다.
노동통제(labor control), 노동정치(labor politics),
노동통제전략, 노동정책, 노동통제방식 등의 개념범주에
대해서는 노중기(1995: 25-26) 참고. 본고에서는
‘노동통제전략’을 국가의 노동계급에 대한 전략적 행위의
결과인 ‘노동정책’과 이를 위해 국가가 동원하는 구체적인
노동통제의 기제인 ‘노동통제방식’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셋째로 국가의 대 노동통제전략과 통제방식의 역동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국가론의 함의가 담겨있는 개념이 요구된다.
즉 노동통제전략은 국가의 성격이나 형태의 직접적인 종속변수는
아닐지라도 국가에 작용하는 여러가지 정치적․경제적
요인의 복합적인 중층결정과정이 구체화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제솝(Jessop, 1990)의 ‘전략으로서의 국가’
개념을 수용하여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을 설명한다.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해서 본고는 한국 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변동을 ‘억압적 배제전략으로부터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6공화국 국가는 1988년 한 해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1989년부터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1990년 초 3당합당을 거치면서 그것은
일정하게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먼저 억압적 배제전략은 헤게모니 없는 정치적 지배체제의
노동배제전략 중 한 유형을 말한다. 배제전략의 하위유형들은
구체적인 노동통제방식의 내용에 따라 억압적 배제전략,
헤게모니적 배제전략, 국가조합주의적 배제전략으로
나뉘어진다.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가 직접적인 물리적 강제수단에
기초해서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배제하는 것에
있다. 억압적 배제전략은 노동조합과 노동정당의 일상활동을
봉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내적 계급역량’ 성장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물리적 강제수단과 함께 동원되는
여타 통제수단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물리적 억압을 부분적으로
분식(粉飾)하는 기능만을 수행한다. 예컨대 5공화국 체제에서
반공이데올로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선성장후분배 이데올로기
등 이데올로기적 통제 수단들의 통제 효과는 “이데올로기
자체의 침투․확산력의 효과였다기보다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강한 물리력”에 있었다. 임영일(1985), 248-249쪽
즉 여러 통제수단들 간의 결합이 기계적이며, 그 내적 연관이
미약하여 분산적 위계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노동통제전략의 계급성이 최대한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통제의 효율성을 잠식하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국가가 물리적
강제력을 사용하는데 제한을 받는 정치적 위기상황은 노동통제의
위기상황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은 노동계급에 대한 배제적
국가전략이란 점에서는 억압적 배제전략과 동일하지만 배제의
구체적인 방식, 즉 노동통제방식의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에서는 물리적 강제보다 이데올로기나
법적․행정적 수단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이들 세
가지 통제수단들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집중적 위계체제를
형성하며, ‘헤게모니’효과를 발산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주의할 것은 헤게모니효과를 초래하는 이데올로기공세가
궁극적으로는 노동계급의 계급역량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지만,
직접적으로는 일부 여론주도층 중간계급․계층을 주요한
동원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통제의 대상은
노동계급에 한정되지 않으며, 중간계급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함으로써 노동계급의 ‘헤게모니역량’ 노동자계급의 내적
역량과 헤게모니역량의 개념구분에 관해서는 테르본(Therborn,
1983)을 참고.
을 통제하는 형식을 갖는다. 형식적 민주주의체제에서 나타나는
헤게모니적 배제전략 하에서 국가는 노동조합과 노동정당의
활동의 자유를 법적으로 제한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전략적 목표를 갖는다.
그리고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통제효과는 억압적 배제전략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가하지만 그것의 통제 효과는 여전히
제한적이며, 정치지형의 변동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우선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피하기 힘들다는
내재적 결함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국민대중에 대한
헤게모니동원이 난관에 봉착하는 정치적 위기상황에서는 역으로
노동계급의 계급적 연대를 급속히 강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일부 중간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또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통제효과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체계적으로 선별하여 배제할 수
있는 국가기구의 ‘전략적 선택성’ 전략적 선택성(strategic
selectivity)은 오페(Offe, 1972)의 정치적 선택성(political
selectivity)개념을 제솝(Jessop, 1990)이 확대․발전시킨
개념이다. 오페가 자본주의국가는 국가제도 내부에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해를 체계적으로 선별하여 배제하는 기제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면, 제솝은 국가의 구조적 측면과 전략적 측면
모두에서 그러한 기제가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기제가 필요하다.
3. 6공화국 노동정치의 전개과정
1) 노정권 전반기의 노동정치(1988. 3 - 1990. 1)
노태우 정권의 첫 해인 1988년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은 매우
과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군부정권의 억압적
노동배제전략을 대신해서 비록 형식적이나마 국가는 노사관계에
대한 개입을 상대적으로 자제하고 노사자율적인 노동행정을
실시하였다. 억압적 국가기구가 노동통제의 전면에서
후퇴하였고, 공식적인 노동행정의 주무부서였던 노동부와
국회(노동위원회)의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개입이 강화되었다.
의사개량화론이 주목하였던 것도 1988년의 노동통제전략의 이와
같은 측면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1988년의 노동통제전략은
경제적 조건을 강조하는 의사개량화로 파악되기 어렵다.
한국사회가 독특한 ‘개혁유형’의 민주주의이행을 경험한
결과로 6공화국 지배세력은 독점대자본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대변하였으며, 독재체제의 지배세력과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았다. 이들은 군부체제의 억압적 국가기구와 제도들을 거의
손상받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로 말미암은 정당성 자원까지도 새로이 갖추고 있었다. 즉
계급역관계의 측면에서 6공화국체제는 취약했던 정당성 자원을
확보하고, 국가기구들을 재정비함으로써 노동계급을 압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6공
지배블럭이 그들의 계급적 기반과 달리 매우 온건한 초기
노동통제전략을 실행한 이유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과도기 노동통제전략을 규정하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라기보다는 몇가지 정치적 요인이었다. 정권창출 과정에서
민주화의 담론을 주요한 선거전략으로 사용하였던 점, 4월
총선으로 형성된 여소야대의 정치지형에서 강한 반대세력이
존재하였다는 점, 지배블럭 내부에 5, 6공세력 간의 균열이
심하였던 점 등 제반 정치적 상황은 노동배제전략을 실행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또 이런 요인들은 당시 급격히 고양되고
있었던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발전과 맞물려 노동통제의
정치적 부담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완되었던 국가의 노동통제는 1988년 말을 뜨겁게
달구었던 5공청문회를 전환점으로 해서 크게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12월 28일 대통령의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담화’를 시발점으로 강화된 국가의 노동통제는 1989년
상반기 임금투쟁을 거치면서 최고조에 달하였다. 1989년
노동정치는 구체적으로 세 개의 소시기로 나누어진다.
먼저 3월까지의 ‘중간평가’ 시기에 국가정치의 핵심적 사안은
대통령선거 공약사항인 중간평가문제였다. 이 시기 노정권은
중간평가를 회피하는 정치전략을 선택하였고, 노동통제의 강화는
이를 위한 단기적인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월 2일
풍산금속노동조합에 대한 대규모 경찰력투입, 3월 서울지하철
파업과 울산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파업에 대한 경찰력투입은 모두
국가정치와의 일관된 전략적 구상 하에 실시된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력투입 직전에 이루어진 언론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공세는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타진한 중요한
실험이었다.
4월부터 8월까지 두번째 시기인 ‘공안정국’ 시기는 일련의
방북사건(3월 25일 문익환목사, 6월 28일 서경원 평민당의원,
6월 29일 임수경)을 계기로 해서 국가의 노동배제전략이 보다
강화된 시기였다. 국가는 방북사건을 노동통제 강화 뿐만
아니라, 당시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던 정계개편(지배블럭의
재편)작업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임금가이드라인제도의 부활, 무노동 무임금 제도,
경영권․인사권 수호원칙 등 6공화국 노동통제전략의
중요한 제도적 장치들이 구상되었던 시기였던 점에서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골격을 완성한 시기였다.
세번째 ‘3당 합당’ 시기에는 6공화국 지배체제를 안정화하는데
결정적인 관건이었던 지배체제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5공화국
청산 문제로 표면화되었던 지배블럭 내부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완결되었다. 이미 공안정국을
거치면서 제도권 정치지형의 재편에 합의했던 합당세력들은
한편으로 그 형식적 절차를 마무리지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배블럭 전체의 관심사였던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제전략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도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9월 이후 정권은
다양한 종류의 ‘노사관계대책’들을 속속 발표하였으며,
12월에는 ‘전국경제단체협의회’를 결성하여 국가자본의 대
노동전략을 단일화하였다.
요컨대 1989년의 노동정치는 국가정치의 전개와 긴밀한 연계
하에 진행되었으며, 국가의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이 완성되어 간
중요한 계기였다. 노동정치가 국가 정치전략을 실행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새로운 노동정치체제의
중요한 특성을 드러내준다. 즉 군부체제 하에서 대체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던 노동문제가 6공체제 하에서는 국가
정치전략과 나선형적으로 서로를 강화하는 긍정적 요인으로
동원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체제의 형성이 가져다 준 국가의
새로운 권력자원, 즉 정당성 자원이 노동통제전략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 노정권 후반기의 노동정치(1990.2 - 1993.2)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통제 효과는 1990년 상반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대한 범 정부적 대응과 현대중공업파업과
KBS노동조합파업에 대한 대처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후반기의 노동정치는 6공화국 국가의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이
가진 내재적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던 시기였다.
지배블럭이 안정화되고 노동운동을 일정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조건 아래서 노동정치를 규정하였던 것은 경제적 요인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임금상승, 구조적인 노동력수급 불균형현상,
산업구조의 전환 등이 진행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우루과이라운드와 같은 국제 교역질서의
재편,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시장개방과 경제개방 요구 등 범
세계적인 경제체제 변동의 여파가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국가의 노동정책 실행에서도 그
‘계급성’은 명료하게 드러났다.
먼저 임금정책을 보면 1990년 1991년 ‘한자리수 임금억제’와
1992년의 ‘총액임금제’는 급속하게 상승하던 기업의
임금비용을 하락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특히 총액임금제는
상대적 고임을 받는 노동자계급 상층의 임금삭감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였는데, 이것은 노정권의 임금정책이 노동자계급
전체를 배제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시장정책에서는
노동력의 양적 공급을 확대하고, 기존 노동력 이용의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대안들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근로자파견제도의 도입, 시간제근로자제도 도입,
외국인노동력 수입 등 핵심적 사안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배제하고 자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였다. 또
노동기준보호정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동시간의 연장,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해고요건의 완화 등 자본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정책대안들이 제시되었다. 결국 이 시기에
도입되었던 사회보장정책안들의 내용이 매우 빈약한 것임을
감안한다면(김종일, 1992; 정원오, 1992; 장세훈, 1992), 노정권
후반기의 노동정책은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1987년 이전으로
후퇴시키는 ‘노동배제적’ 계급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국가기구 내에서 노동정책들이 다루어진 방식에서도
노동배제전략의 성격이 분명히 나타났다. 임금정책,
노동시장정책, 근로기준정책 등의 정책사안들은 경제기획원,
상공부, 재무부 등과 같은 경제부처가 주관하고 결정하였으며,
노사관계정책 일반에 대해서는 대통령, 안기부, 내무부, 검찰
등과 같은 치안 및 기타 행정기구들이 정책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성’의 기제는 노동문제를 일차적으로
경제문제와 치안문제로 환원하는 계급적 기제가 국가기구 내부에
제도화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들 노동배제적 노동정책의 실행을 위해서는
노동관계법의 개정 및 제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만큼, 이
시기에는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려는 국가의 노력이 계속되었다.
노정권 후반기에 집중된 노동관계법 개정시도들(1990년 3월
상공부, 1991년 노동부, 1992년 대통령지시)은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여러가지 통제수단들을 제도화함으로써 국가의
통제력을 제도적으로 복구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특히 그것은
자본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6공국가가 개정이 시급하다고 제시하였던 주요 개정조항들이
대체로 근로기준법조항들이었던 것에서 잘 나타났다.
그러나 노동배제전략을 실행하는데 있어 핵심적 관건이었던
노동법 개정시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만큼
국가의 노동배제전략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3당합당
이후 계급역관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국가와
자본이 노동법개정에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내적 한계 때문이었다.
예컨대 가장 개정 가능성이 높았던 1991년 하반기 노동관계법
개정 시도의 경우 이 점은 분명히 나타난다. 노동부의 안은
민주노조측이 요구하던 문제 조항 중 일부(정치활동금지 조항과
쟁의의 장소 제한)를 개정하는 대신, 총액임금제의 법적
근거조항, 변형근로시간제, 시간제근로자제도, 노조대표자의
협약체결권, 임금협약․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
핵심적인 통제조항들을 도입하려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6공체제의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던 노동부장관이 정력적으로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개정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정부가 노동법개정방침을 철회하면서 밝힌 공식적인 이유는
노총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진영의 거센 저항이 충분히 예견되었으며,
그것이 1990년 이후의 노사관계체제에 상당한 변화를 야기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총은 위원장이 사상 초유의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등 극한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법개정을
반대하였다. 노총의 이와 같은 극한적인 반대의 배경에는
노사화합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노총조차도 포섭할 수 없었던
‘노동배제전략’이 있었다. 그리고 1991년 10월 결성된
‘ILO공대위’는 민주노조진영의 조직적 반발의 산물이었다.
더욱이 지배블럭 중 일부가 1992년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무리한 노동법개정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어, 중간계급․계층들을 결정적으로 이탈시킬 것을
염려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행은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통제효과를 크게 강화하였지만, 노동자계급 전체를 배제함으로써
노동자대중의 강한 정치적 저항을 야기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6공화국 노동정치체제에서는 국가와 노동 간에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노동법 상의 4가지 문제 조항들에 대해 국가와
자본측이 전혀 양보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럴 경우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을 법적 장치로 제도화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비용은 더욱 더 높아질 것이며, 이는 거꾸로 행정적
조치와 형법에 의존하는 계급편파적인 노동정책을 지속하게 만들
것이다.
4. 요약과 토론 : 헤게모니적 배제전략과 노동운동
1993년 7월 현대계열사노동조합의 연대파업,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파업은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통제효과와
관련해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특히 그것은 1992년
노동연구자들 간에 논쟁의 초점이었던 노동운동위기론의
적실성에 대한 경험적 반증을 의미하였다. 한국의 생산직 사업장
가운데 가장 높은 임금, 상대적으로 양호한 근로조건, 온건한
노동운동노선 선택의 경험 등을 갖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문민정부시대에 돌연히 파업(87.2%찬성)을 단행한 것은
노동운동위기론의 논쟁을 종식시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론에서 지적하였듯이 한국 노동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조직률의 지속적인 하락, 노동조합수의 감소, 1987년 이전
수준의 노동쟁의건수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노동운동의 두 가지 모습을 본고에서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의
통제효과와 그것이 갖는 내적 한계의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은
억압적 배제전략이 야기하는 정치적 비용을 크게 낮추면서도 그
통제효과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통제방식이었다. 1990년 초
3당합당으로 크게 변화한 계급역관계에 기초해서 6공화국 국가는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것은 1992년
시점까지 노동운동을 크게 위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6공화국 국가는 노동배제전략의 계급성을 충분히 은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실패하였고,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연대의식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노동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은 노동자계급의
단기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잠식당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적 노동조합활동이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 제한받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1990년 몇 차례의
쟁의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개별 단위노동조합 차원에서는
국가의 노동통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다. 실제로 1989년부터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노동조합은 저항과 묵종의 두 가지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경우 저항은
노동조합활동의 실질적 무력화로 귀결되었다. 단위노동조합의
전략선택을 규정하였던 주요한 변수는 조합의 이데올로기적
지향과 노동조합의 규모였다. 1991년까지 소수의 노동조합이
저항전략을 선택하였지만, 1992년에 이르면 저항의 동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사업장별로 노동조합의 자원동원능력이 분단되어 있는
기업별노조체제 아래서 개별 노동조합차원의 대응이 한계에
부닥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구조적 상황은
결국 노동운동측으로 하여금 국가의 배제전략에 대해 개별
단위노동조합의 고립된 대응이 아니라, 조직적인 연대에 기초한
대응전략을 강화하도록 강제하였다. 1990년 1월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5월의 ‘업종별 노동조합회의’,
1990년 11월의 ‘대기업연대회의’, 1991년 10월 결성된
‘ILO공대위’는 모두 이와 같은 노동조합연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이 야기한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노동조합연대의 추세는
김영삼정권 시기에 들어와 한 단계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변화는 이 시기에 들어와서
산업별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점이다.
1994년 4월 15일 결성된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 산하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은 최초의 단위 소산별노조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조선산업 관련 노동조합, 자동차산업 관련 노동조합,
금속산업관련 노동조합들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또
1994년 11월 결성된 공공부문노조대표자회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1992년까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하였던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 철도파업,
지하철파업과 1995년의 한국통신노조쟁의는 법적 제약과 오랜
임금가이드라인정책에 의해 배제되어 온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새로운 전략을 선택하여, 조직적 연대를 강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이탈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도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였다. 그것은
1993년과 1994년 임금타협의 반대급부였다. 요컨대 1995년 11월
11일로 예정된 민주노총 결성은 이와 같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흐름들이 하나의 조직적 단위로 결집한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노동운동의 조직발전은 국가와 자본의 계급역량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특수한 노동정치상황에서 진행된 헤게모니적
배제전략의 산물이다. 강한 국가의 강한 노동통제전략은 역으로
약한 노동운동을 점차 강화시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