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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민영화 정책의 전개과정과 교훈

현장에서 미래를  제4호
이상현

국 ◦ 제 ◦ 노 ◦ 동

칠레의 민영화 정책 이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준 한국외국어대학교 최진우, 박윤주에게 감사드립니다.

- 그 전개과정과 교훈 -


이 상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학과 석사)


1. 서 론

1973년 9월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불법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들어선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칠레사회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시장을 통한 자유경쟁’을 지향하며 실시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대외개방과 탈규제를 포함한 대대적인 민영화 정책을 통해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의 표면적인 후퇴를 그 내용으로 했다. 즉 철저한 대외개방정책과 함께 정부지출의 축소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정부의 경제규모를 줄여 나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민영화 정책을 포함한 칠레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정치적 의미와 목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상현, “칠레 국가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통권2호(1995.9) 120-129쪽을 참조할 것.

그러면 이 글에서는 1973년 쿠데타 이후부터 민간정권으로 이양한 지금까지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기조하에 이루어진 칠레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의 전개과정과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특히 민영화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피노체트 군사정권 시기(1973-1989년)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 민영화 이전 칠레의 공기업
1930년대 이후 칠레경제는 국가개입의 증대와 공공부문의 국가소유, 경제활동의 통제로 특징지워진다. 칠레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은 1939년 칠레산업개발공사(CORFO: Corporación de Fomento de la Producción)의 설립을 통해 강화되었다. 1950년대를 통해 CORFO는 자회사처럼 운영되는 많은 거대기업들을 설립함으로써 산업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회사들로는 철강, 전기발전, 사탕수수 정제, 통신부문 등이 있었다. 1970년 무렵, 법적으로 볼때 칠레의 공기업은 두가지 부문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CORFO의 자회사들로서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다른 부류는 법률에 의해 생겨난 기업들로 관계부처를 통해 국가와 관계를 맺고있는 기업들이다. 초석, 석탄, 철도와 같이 민간운영체계하에서 파산했거나, 혹은 1969년 Chilectra의 경우처럼 예외적으로 국유화되어서 공기업의 성격을 띄게된 기업들이 몇개 있지만, 칠레에서 공기업의 팽창은 국가가 기업들을 창설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수많은 민간기업의 국유화를 고려하면서 사회주의 계획을 갖고 있던 인민연합정부가 들어오자 바뀌었다.

[표 1] 법정 공기업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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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1973 1983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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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FO의 자회사
기 업 46 228 23 27
은 행 0 18 1 0

정부의 간섭 0 259 0 0

법에 의해 만들어진
기 업 20 23 22 13
은 행 1 1 1 1

총 계 67 529 47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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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한 1970년부터 1973년까지 국가가 대부분 혹은 일부분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기업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공기업 부문의 급격한 증가는 CORFO가 경제활동의 전부문에서 기업의 소유권을 획득해나가면서 이루어졌다. CORFO가 자회사나 공공기관과의 합자라는 방법으로 직·간접적으로 자본의 비율을 조정한 기업의 수는 1970년의 46개에서 1973년의 228개로 증가하였다. 나아가 CORFO는 14개 상업은행들 주식의 대부분을 획득하였으며, 나머지 4개 은행주식의 일부분을 획득하였다. 미리 국가가 최대 상업은행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1973년 당시 국가는 실제적으로 금융체계를 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259개의 기업은 비록 그 소유권이 국가에 귀속되지는 않았으나 징발당하거나 국가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또한 이 기간동안 국가는 CODELCO의 설립을 통해 칠레 산업의 핵심을 이루는 거대한 구리산업을 국영화시켰다.
이러한 과정들의 결과로 공기업을 포함한 공공부문의 기여도는 1965년 GDP의 14.2%에서 1973년 39.0%로 증가하였다. 1973년 당시 공기업은 공공서비스(전력, 수도, 하수처리 등)의 100%, 광업과 운송, 통신과 금융부문에서도 2/3이상을 담당하게 된다. 이같은 국가개입의 정당성의 큰 이유는 공공부문에서의 자연독점(natural monopoly)과 경제에 존재하는 자본시장의 왜곡, 기술적인 요인과 함께 1970년대 초반에는 사회주의 정권의 소득불균형 해소방안의 일환으로 파악된다.

3. 칠레 민영화의 전개과정

칠레의 민영화는, 1974-81년의 1단계와 1985-89년에 이루어진 2단계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두단계 사이인 1981-83년 사이에는 이 당시 촉발한 경제위기로 인해 파산한 기업에 대한 국유화가 있었다.

(1) 제 1 단계
제1단계는 1973년의 쿠데타 직후부터 1982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는 안정화 정책의 노력과 제도적인 구조조정의 시기이다. 1973년 군사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가격의 자유화와 환율평가절하, 임금규제와 통화정책과 함께 대부분의 공기업이 민간에게 이양되었다. 이 첫단계는 1973년 10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전 정부에서 몰수당했던 259개 기업들이 정상화되었다. 이 민영화 과정은 원소유주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는 것을 기본골격으로 하였는데 매우 급속히 이루어졌다. 1974년말 202개의 기업이 반환되었으며, 1978년에는 단지 2개의 기업만이 반환대상으로 남았다. 또한 이와 더불어 다른 207개의 공기업이 민간부문에 매각되었다.
기업매각은 1974년 시작되었으며 급속히 진전되었다. 1978년 CORFO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50개의 기업들이 매각되었고 8개의 기업은 공개입찰에 넘겨졌다. 또한 이 시기에 CORFO는 자본의 10-50%를 소유하고 있던 18개 기업중 10개 회사의 지분을 팔았으며 다음 해에는 그 나머지 부문도 민영화했다. 마지막으로 CORFO는 다른 공공기관들과 함께 주식자본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8개의 회사는 1974-78년에 매각하였다. 또한 CORFO의 자회사들은 소유하고 있던 주식들도 연이어 팔았으며 소유하고 있던 농공업 공장과 설비들도 매각했다. 금융부문에서는 인민연합정부하에서 국유화된 20여개의 상업은행들이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매각되었다.
기업들은 현금으로 혹은 일정기간 동안의 현금분할을 통해 매각되었다. 현금분할의 경우 이자율은 8-12%의 실질이자율 사이에서 정해졌다. 구매가 현찰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실질적인 보증·담보로 대치되었는데, 매각대상기업 자체가 될 수도 있었다. 최소한 채무의 150%정도면 가능했다. 상업은행들의 경우, 20%에 상당하는 최소 현금량이 실질이자율 8%의 신용대출과 함께 요구되었다. 즉 기업뿐 아니라 은행들도 구매자금융통이 CORFO 자체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례는 이 시기 민영화가 갖고 있던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기업이나 은행들은 주로 국내투자자들에게 매각되었다. 1978년까지 매각된 95개의 CORFO 기업이나 자회사 중에 10개가 외국회사에 의해 매각되었고, 47개가 국내 기업에게, 21개가 국내 개인에게, 16개가 그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1개가 조합에 매각되었다.
이 시기의 공기업 민영화에는 거대 공기업들은 배제되었다. 국가는 석유시추 및 정제, 전기 발전·송전, 통신, 항만, 보건, 철도, 철강, 석탄, 설탕정제, 초석과 같은 주요한 경제활동부문에서는 여전히 통제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민영화되지 않았던 기업들에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영향은 밀어닥쳤다. 경영의 합리화를 위해서 1975년 대규모의 인원감축이 있었고, 자기자본(Self-Financing)에 의한 경영방침이 부과되었으며 이들 공기업이 지니고 있는 특혜가 폐지되는 한편 투자의 결정권을 제외한 경영상의 유연성이 인정되었다. 모든 기업들은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과제에 부딪치고 이 과정에서 일부기업이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노동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노동시장의 정부규제 완화는 임금체계에 부분적 영향을 미치고 과다노동력 보유 업체에서는 새로운 고용구조 조정계획이 필요했다. 기업과 노동자간 집단교섭형태나 노조활동이 위축되고 이에 따라 기업이 회사운영의 전권을 행사할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임금의 적정수준이 기업별로 형성되었다. 1979년 노동법에서는 임금과 물가를 연동하는 물가연동제가 실시되면서 수출지향형 기업에는 생산비용이 증대했다. 이에 기업들은 건설, 서비스 등 비교역적 상품 생산에 몰두했다.
첫번째 시기의 민영화 동안 공기업의 매각에 있어서 몇가지 방법이 도입되었다. 공개입찰, 부채탕감, 직접적인 매각 등이 그것이다. 공개입찰의 경우 매각가격을 높이기 위해 도입되었으며, 예상되는 경영상의 손실이 나타나는 기업은 부채정리가 주로 이용되었고, 직접적인 매각은 규모가 적은 소기업들에 집중되었다. 민영화 이익은 재정적자를 충당하는데 이용되었다.
1단계 민영화를 통해 91년 가치로 7억3천만 달러의 자금이 CORFO 기업이나 자회사의 매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상업은행의 매각을 통해서는 91년의 가치로 4억5천만 달러의 자금이 확보되었다.
칠레 민영화의 1단계 기간 사이에 정부지출은 1974년 GDP의 44.9%에서 1981년의 24.9%로 하락했다. 또한 공기업의 비중은 1973년 GDP의 39%에서 81년 24.1%까지 하락하였다.
1단계 민영화 과정에 대한 평가는 다음의 3가지로 집중된다. 이는 1) 민영화가 이루어진 계기, 2) 매각과정 및 메카니즘, 그리고 3)민영화 된 기업들의 구매자이다.
우선 민영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선택된 시점에 관해서는 부적절하다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즉 민영화 당시의 상황이 이자율이 높고 국내의 저축율은 낮은 상황으로 국내 자본시장은 발전 초기단계였으며 대출접근이 어렵고 제한되어 있던 시기였다.
민영화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구매자들의 재정적인 면에 대한 조사가 엄격하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기업들로 하여금 민영화 기업입찰을 위해 많은 빚을 지게 만들어 불안정한 재정상황으로 기업들을 이끄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1981년부터의 재정위기를 가져오는데 한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영화되는 기업과 은행들을 몇몇 소수 경제그룹이 획득함으로써 높은 소유집중을 가져왔다. 이는 국내·외의 재정확보 통로가 소수 경제그룹에게 독점되고, 민영화과정에서 외국 투자자의 참여가 낮았던, 거의 발전되지 못한 자본시장을 가진 경제에서 민영화가 추진된 결과였다. 게다가 소유권을 분산시키는 것에 대한 배려도 없었으며, 개인과 기업들이 가질 수 있는 통제권의 최고한도에 대한 규정이 존중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거대그룹들은 다른 경제 주체들보다 더 나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2) 경제 위기와 민영화 환원
1981년 중반부터 칠레경제는 쇠퇴에 직면하였다. 1981년 실질이자율과 경상계정상의 적자는 눈에 띄게 상승하였고, 경제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1981년 5월 주요그룹인 CRAV가 도산하였고 이후 11월에는 4개의 은행과 4개의 금융회사가 파산하자 처음으로 금융기관들에 대한 대규모 간섭이 이루어졌다. 이들 도산한 은행과 금융회사 중에는 거대 경제그룹이 소유한 것도 있었다. 그 은행들 중 3개는 1970년대에 민영화되었던 것이다.
1982년 경제상황은 계속해서 쇠락해갔다. 재정위기는 1983년 1월 5개 은행에 대한 새로운 개입과 2개 은행에 대한 감사 그리고 다른 2개 은행과 2개 금융회사에 대한 해체로 절정에 이른다. 국가의 개입을 받는 은행 중 3개는 역시 1970년대에 민영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들 은행들 중 2개는 2대 민간은행이었다(Banco de Chile, Banco de Santiago).
동시에 민영화된 기업과 국영기업을 포함한 수많은 기업들이 지불정지를 시작했다. 이 경우 은행들이 주요 채권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 기업들은 사실상 국가관리하에 들어갔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때 파산상태에 놓인 기업은 1970년대 민영화된 기업의 70%에 이른다.
한편 이러한 재국유화는 결국 제1차 민영화의 실패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들 재국유화한 기업들을 1985년 이후 빚을 국가가 떠맡고 난 이후 재민영화함으로써 그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시킴으로 인해 정책의 편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기로 작용한다.

(3) 제 2 단계
1984-5년 사이 은행의 부채와 연관된 기업의 정리 이후 국가는 고유영역에서의 공기업 민영화를 실시해 나갔다. 1985-9년 사이 민영화를 통해 GDP의 24%인 공기업의 담당 영역을 88년 16%로 줄여 나갔다. 국내 재정의 불안에도 재정수입의 극대화가 본래의 목적은 아니었으며 민영화를 통한 효율성과 대외 홍보의 측면이 존재했다. 이 시기의 민영화는 국가에 의해 설립된 거대공기업까지 포함하여 대규모로 진행되었는데 민영화된 거대 기업들에는 국가기간사업이라 할 수 있는 시내·외 전화 및 전기의 발전·송전 등이 포함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민영화와 앞선 1970년대의 민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외국투자자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외국투자자들은 이미 입찰에 부쳐졌거나 또는 이미 국내 투자자가 갖고 있던 여러 기업과 은행들을 획득했다. 이를 위해 칠레중앙은행이 1985년 초 만들어낸 부채차환방식이 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운영은 암묵적인 할인이 적용되어 이루어졌다.
민영화 발표는 정부에 의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대체로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30%선에서의 민영화 목표가 설정되었으나 결국 100%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수정되었다. 공기업의 구조개편이 칠레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왜냐하면 공기업의 대부분이 이미 70년대말 80년대 초에 심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매각 위기에 처해 있는 회사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상당량의 외채를 흡수해 줌으로써 회복시켜 주었다.
이 시기의 민영화는 매각 메카니즘에서도 1970년대와 달랐다. 즉 국내외에서의 입찰과 함께 국민주 방식(Popular Capitalism)과 종업원 지주제(Labor Capitalism) 그리고 국민연금기금(AFP)에 매각하는 제도적 자본주의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거대기업의 경우 여러 기제가 동시에 사용되었다.
1985년 이후 실시되었던 민영화는 금융위기 이후 재정적자의 해소 목적 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증가 및 대외채권자에 대한 구조조정의 진행표시로서의 홍보의 의미도 있었다. 이러한 민영화 과정에서 부실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지불보증을 한 주식을 공개적으로 소액 투자자에게 매각하여 부실은행을 정리하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국민주 방식(Popular Capitalism)은 금융위기 이후 은행이 부실화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공기업 문제에 있어서도 이같은 국민주 방식은 자주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자주 사용된 방법이 노동자들에게 직접 주식을 매각하는 방법인 종업원지주방식(Labor Capitalism)이었다. 예를 들어 ENDESA(전력회사)의 처분은 직원들의 해직기금을 동사의 주식 매입으로 사용하고 사원들에게 주식을 분배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에너지 부문의 공기업은 소액투자자들에게 주식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추진했는데 1980년대 초반까지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주요 기간산업(전화, 석탄, 철강)등이 동일한 방법으로 매각되었다. 이러한 방식에서 주식구입을 위한 자금의 확보에는 여러가지의 채널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1)집단협상에서 얻은 이익과 이윤 및 다른 주식에 참여하여 얻은 이윤의 재분배, 2)기업에서의 대출, 3)금융기관에서의 대출, 4)CORFO에서의 대출, 5)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던 자금 등이다. 노동자들에 대한 주식 매각가의 결정은 거래가 이루어지기 한달전 주식시장의 폐장가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가끔은 이전시기의 가격이 이용되었는데 이는 민영화 기간 동안 가격이 상승할 경우 암묵적인 할인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어쨌든 주식들은 분명히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제공되었다.
그런데 칠레에서 공기업 매각에 이용된 이러한 국민주 방식이나 종업원지주제 방식은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즉 1989년에 실시될 피노체트의 재집권을 결정짓는 국민투표에서의 지지기반 확충을 위해 이러한 매각방식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한편 1980년의 국가 연금 기금의 민영화에 착수하고, 파산한 기금을 1981년 새로운 기금(AFP)으로 완전민영화 했다. 이는 노동자들의 연금을 관리하는 회사로 칠레 노동자는 월임금의 10%씩을 의무적으로 적립해야 한다. 매년 적립되는 불입액을 바탕으로 방대한 기금을 조성, 국채, 주식, 정기예금, 사채, 금융채 등에 투자함으로써 기관투자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2년 12월 현재 17개의 민간 연기금사가 영업중이며 이중 PROVIDA, HAMBITAT, SANTA MARIA, SUMA등 네개의 기금이 70%를 점유한다. 1992년 5월말 현재 17개 연기금의 총자산은 123억 달러이며 칠레 최대의 기관투자가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92년 이후 증가하는 외환보유고의 적정관리를 위해 총자산의 3%범위내에서 외국정부, 중앙은행, 국공영기업에서 발행하는 채권등 신용도 높은 한정된 해외증권 투자가 허용됨으로써 업무가 더욱 확대되었다.
1985-89년사이 13개의 대형 공기업이 완전 민영화 되었으며 전화회사인 CTC(주식 14% 미국소유)와 ENTEL, 항공사인 LAN -CHILE의 경우 민간부문에 대주주 자리를 넘겨주고 지배주주의 자리를 떠났다. 전력, 철강, 화학 및 석탄광업부문에서의 공기업에서는 소액주주로 하향했다. 그러나 CODELCO(국영동회사)와 ENAP(국영석유회사), 국영철도, EDELNOR(발전소), 산티아고 지하철, NATIONAL LOTTERY 및 일부 소규모 기업은 CORFO와 ENAMI(국영광업소)에서 계속 운영한다. 국영기업의 가격정책은 대체로 시장원리에 충실하고 운영도 이전보다 효율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공기업이 생산해 내는 부가가치는 1986년 GDP의 12%였으나 89년 7.5%, 1992년 6%로 낮아졌다. 공기업의 세전 운영이익은 90년 GDP의 10.9%에서 91년 7.6%, 92년 7%로 하락하고 있는데 이는 CODELCO의 금융부실에서 기인한다. 이런 공기업 금융부실의 만회를 위해 타분야의 투자도 민간정부 이후 허용되고 있다.
제2단계 민영화는 경제적 효율성과 소유의 분산을 그 목적으로 표방하고 이루어졌다. 특히 종업원 지주제를 통한 소유의 분산시도는 그 결과를 볼때 의문이 남는다. 실제로 종업원 지주제로 인해 할당받은 노동자의 지분은 시간이 갈수록 그 지분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였다. 즉 소유분산이라는 목적은 이러한 주식조차 할당받지 못한 다수의 빈곤계층은 차치하고라도 그 목적이 완수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효율성이라는 측면은 공공요금의 인상과 이로 인한 민중에 대한 부담증가라는 사회적 비용의 증가를 고려한다면 그 정답을 선뜻 내리기가 어려워진다.

4. 평가 및 결론

칠레의 민영화정책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이루어진 정책이었다.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폭압통치와 시장을 통한 경쟁의 원칙만이 경제정책 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신자유주의 경제론자들의 신념이 결합되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민영화는 이제 우리에게도 실감나는 주제이다. 어떠한 정책이건간에 그 정책으로 인해 사회적인 이익이 증대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주장일 것이다. 공기업의 민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민영화를 통해 사회적인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6가지 사항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투명성이다. 두번째는 매각가의 극대화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다. 세번째는 기본공공요금 변화에 타격을 입은 국민대중에 대한 보상이다. 네번쨰는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한 고려이다. 다섯번째는 매각수익을 반드시 사회발전에 사용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여섯번째는 효과적인 공공규제이다.
그리고 이상의 여섯가지 고려사항과 더불어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것은 민영화를 시행하는 정권의 민주성이다. 왜냐하면 칠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정통성과 민주성을 결여한 정권의 민영화 정책은 결국 가진자들을 살찌우거나 취약한 정권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노/정/연

1995-10-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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