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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독교 신도들의 MBC점거

현장에서 미래를  제44호
채만수


이렇게 본다

어느 기독교 신도들의 MBC 점거





지난 5월 11일 밤 일단의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 문화방송(MBC)을 점거하여, 자신들이 따르는 목사의 영적 능력을 의심하고 그 일련의 행적을 비난․비판하는 방송을 중단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한 계급만 빼놓고.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사건이 일어난 5월 11일이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한 12일은 4월 19일의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의 파업으로부터 불붙기 시작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비록 한국통신노조의 파업 실패와 그에 이은 지하철 노조의 파업 중지로 다소 소강상태에 있긴 했지만, 아직 진행 중이었을 뿐만 아니라 12일부터는 민주금속연맹이나 병원노조의 파업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사이비 종교 신도의 MBC 점거’라는, 일견 조금은 ‘탈계급적인’ 문제에 크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고, 사실 사건 이후 노도처럼 터져 나온 보도․분노․해설 등등도 모두 ‘탈계급적 시각’의 것들이었다. 그러니, 노동자계급이 일련의 소동에서 비켜 서 있는 것도 당연했다. -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노동자계급과 무관한, 그리하여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문제는 아니다.

사건이 제기하는 네 가지 문제

사실 이 사건은 성격이 다른, 최소한 네 가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이비) 종교의 문제, 방송․언론의 문제, 사건에 대한 사회적 대응 문제, 그리고 시민적 저항 혹은 자구(自救)의 문제, 등등. 이 사건에 대한 보도․분노․해설 등등도 분석적으로 보면 대부분 당연히, 비록 부분적으로 부족하고 또 그릇되었지만, 이 네 가지 문제에 걸쳐 있다.
이 사건이 터지자 각 신문․방송 등이 가장 본질적으로 다룬 것은 방송의, 국가 기간시설로서의 불가침성이었고, 더불어 그것을 침해한 ‘집단의 폭력과 불법행위’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보수적인 제도언론이나 정치권은 물론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참여연대 등등의 노동자․시민단체도 너나없이 “국민전파를 유린한 폭거”라며 “철저히 응징”하고 “엄중 처벌”할 것을 주문했다(ꡔ한겨레ꡕ 99. 5. 13., “국민전파 유린한 폭거” 제하의 보도 등 참조).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역시 너나 없이, “국가 중요시설에 대한 경찰 경비에 ‘구멍’이 뚫렸다”(ꡔ한겨레ꡕ)며, 이는 “국가안보 측면에서 대단히 우려되는 사태”이기 때문에 “주요시설에 대한 경비대책을 철저히 재점검해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ꡔ동아일보ꡕ 99. 5. 13., 사설 ‘주조정실이 점거되다니’)고 주문했다.
이렇게 되면, 즉 이러한 논리 속에서는 방송이나 신문 등등, 괴물과도 같은 ‘국가 주요시설’ 혹은 ‘국가 기간시설’의 횡포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나 자구(自救)의 권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명확히 확인한다.

“… 폭력적 방법은 법치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 자신들의 믿는 바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 목적달성에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방송의 사회적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킬 권리는 없다”(ꡔ동아일보ꡕ, 같은 사설).
“법치국가에서 집단의 폭력과 불법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 방송이 더욱 신중하게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문제와 공영방송 점거와 방송 중단 사태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철저한 조사와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이 따라야 할 것이다”(ꡔ조선일보ꡕ 99. 5. 13., 사설 'MBC 폭력사태').
“방송 내용에 불만을 품은 이해 관계자들이 실력으로 방송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상식이 통하는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다”(ꡔ한겨레ꡕ 99. 5. 13., 사설 ‘종교인도 법은 지켜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되면, 즉 이러한 논리 속에서는 ‘경비 강화’와 ‘응징’․‘처벌’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이번 사건에 대해서 제도언론뿐만 아니라 너나없이 요구한 ‘대응’이자 이번 사건의 귀결이다.
그런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 아니라 너나 없이 ‘파시즘의 강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파시즘의 강화를 요구하는 사람들

물론 나도 이번의 점거사태가 정당했다거나, 그들이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도언론과 기타의 사회단체 등이 너나없이, 문제를 특정한 사건으로 한정해서 그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대신에, 이른바 ‘공영방송의 불가침성’이라는 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 성격의 자(尺度)를 들이대면서, 방송에 대한 시민적 저항과 자구권리 일반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경찰경비의 강화’와 ‘철저한 응징․처벌’ 등 파시즘 강화를 요구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 집단의 폭력과 불법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거나 “폭력적 방법은 법치국가에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는 등의, 특권적 집단의 폭력은 은폐하면서 이른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폭력을 독점시키려고 하는 위선적 궤변을 문제삼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은, 위에 인용한 사설들을 패러디(parody)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만일 방송 내용이 현저하게 부당한 경우에는 ‘이해 관계자들이 실력으로 방송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도 집단의 폭력은 (예컨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항시 존재한다. 방송이 공정하게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문제와 공영방송 점거나 방송 중단 사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법치국가에서도 법 자체가 특정 사회계급의 일종의 폭력적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옳고,’ 그릇된 방송에 의한 피해가 심각할 것으로 (객관적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시민은 방송도 폭력으로 정지시킬 권리가 있다.’

이러한 일반적 원칙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 위선이고, 방송을 정지시키고 그에 영향을 미칠 권리를 특권적 집단에게만 독점시키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몰상식한’ 발언에 불과하다.
예컨대, 점거 사건이 난 다음날인가에 우리는 MBC 뉴스시간에 한 기자로부터 “쿠데타 때에도 방송이 중단 당하지는 않았다”며 점거를 단죄하는 독기 찬 발언을 들어야 했는데, 글쎄? 정말 그랬던 것일까? 쿠데타 때에도 정말 ‘공영방송의 불가침성’과 ‘공영방송으로서의 사회적 기능’이 보장되었던 것일까?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결단코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쿠데타 때마다 늘상 방송국들과 신문사들은 점거 당했고, 그들 쿠데타 세력의 의지를 대변하지 않았던가? 방송이 중단되지는 않았다고? 그야 중단시킬 필요가 없었지. 개가 주인을 따르듯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방송하고 써대는데 그걸 왜 중단시키나? 채찍질을 할지언정.
사실, 방송과 신문이 어디 쿠데타 때에만 굴절되었나? 사실상 늘상 권력의 주구였지 않았나? 언제나 힘에 굴복하고, 그에 봉사해오지 않았나 말이다.
그러한 시각에서 보면, 아래에 인용하는 몇 마디는, 나도 조금 뒤에서 몇 마디 하게 될, ‘종교’의 문제에 빗댄 것이지만, 넌지시 힘과 방송의 관계에서 “저널리즘이 나아갈 수 있는 데가 어디까지인지도 …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아래의 글이, 지금까지 발표된 글 가운데에는, 이번 사건을 바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정곡을 찌른 유일한 글일 것이다.)

포크너라는 작가는 세상은 소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됐다고 했고, 테오 앙겔로폴리스라는 작가주의 감독은 세상은 영화가 되기 위하여 창조됐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방송이 되기 위하여 창조되지는 않은 것 같다. 방송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지금 여기 텔레비전 저널리즘에서 최전선에 있다는” : 같은 글의 앞부분에서 차용 ꠏꠏ 인용자) <피디수첩>에서조차도.
만민중앙교회 사태를 보면서, 내 불경한 머리 속에는 재빨리 한가지 불경한 생각이 떠올랐다. 종교라는 거대한 성역에서 그들은 약한 고리였던 거야. 신도가 7만을 넘는다 한들, 그들은 소수자였던 거야. 프로듀서가 신변의 위험 때문에 몸을 숨겼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던 거야. 취재할 엄두도 못 낼, 거대하고 세련되고 귀족적인 무언가는 따로 있어. 그들은 절대 건물에 ‘난입’하지 않아. 상상력을 원천봉쇄할 따름이지. ‘난입’이란 늘 소수자의 수단이었어. -- (최보은, 「‘피디수첩’의 한계」, ꡔ한겨레ꡕ 99. 5. 19.)

실제로,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 감히 MBC를 점거하고 방송을 중단시킨 보다 깊은 동인은, 방송과 기타 자본의 언론의 그러한 한계, 보다 적실하게 말하면 언론의 그러한 굴절이 만들어낸 것이다. 만일 그 동안 방송과 기타 언론이 정말 객관적이었고 공평했으며 그리하여 그 자체의 활동을 통해서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다면? 그래도 감히 그 신도들이 방송국을 난입․점거하고 방송을 중단시킬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이번 사건을 통해서도 언론과 우리 사회는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정말 더럽게 굴절된 언론의 치부를 은폐하면서 다시 파시즘 강화만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나 언필칭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까지도 말이다.


‘사이비 종교’ 종교 그 자체의 문제

참고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러 신문․방송에서, 특히 ‘진보적인’ ꡔ한겨레ꡕ에서 가장 심도 깊게 다루어진 문제는 이른바 ‘사이비 종교’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각 신문의 입장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설’에 반영된 입장만을 볼 때, 예컨대 ꡔ조선일보ꡕ나 ꡔ동아일보ꡕ 등은 이른바 ‘이단’이나 ‘사이비’ 문제에 대해서 유보적 입장을 취했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는데, ‘진보적인’ ꡔ한겨레ꡕ의 경우 “함부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종교 일반론으로 말하면 목회자의 신격화가 신앙의 바른 길은 아닐 것이다” 등등이라고 운운하여, 만민중앙교회의 이른바 ‘이단’ 시비에 사실상 “제3자가 섣불리 끼여들(고)” 있다. 그리고, 예컨대, 5월 19일자 신문에서는 “사이비 종교, ‘게릴라포교’ 음지로…음지로…” 등등의 제목 하에 전면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마도 “신앙의 바른 길”을 설파하기 위해서! (아마, MBC의 문제의 ‘피디수첩’도 마찬가지의 목적에서 기획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신앙의 바른 길’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혹은, ‘이단’과 ‘정통’ 간에 어떤 절대적 차이가 있단 말인가? 물론 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접근에서, 전혀 다른 문제의식에서의 발언이지만, 윤이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꼬집었다”고 하는 문제, 즉 “이단-정통의 문제로만 문제를 바라보는 언론과 사회 일반의 시각이 더 문제”(ꡔ한겨레ꡕ 99. 5. 19.) 아닌가?
실제로 대개의 경우, ꡔ한겨레ꡕ가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문제로 종교 문제를 접근한다. 그러나, ꡔ한겨레ꡕ 자신이 윤이흠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단 개념 자체는 교리적 전통의 문제이며 사회적인 의미가 거의 없는 것”이고, “신흥교단의 이단․사이비 시비”는 “이들의 종교행위 자체를 가치판단할 잣대가 모호하고 주관적으로 흐르기 쉽다.” 아니, 일단 ‘종교’ 자체를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들면, 거기에서의 ‘이단․사이비’ 문제는 가치판단할 잣대가 모호하고 주관적인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사실은 앞에서 인용했던 최보은 씨의 말처럼, 이단은 “종교라는 거대한 성역에서의 약한 고리”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든, 불교든 기타 무엇이든, 사실 ‘정통’이란 것은 장구한 종교의 역사 속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지배권력과 일체가 되어 지배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수많은 천재들이 교리 편찬․교열자로 등장하여 그 교리가 ‘세련화’된 그런 집단을 가리킬 뿐이다. 지금 이 시대에 권위를 떨치고 있는 종교 치고 애초부터 ‘정통’이었던 종교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만민중앙교회를 ‘이단’으로 단죄한 기독교의 경우, ‘교리적 전통’으로 보면 지금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는 쪽이 오히려 극단의 ‘이단’일지 모른다. 즉, 수만 명인지, 수십만 명인지, 아니면 백만 명이 넘는 수의 사람일지 모를 수의 사람들을 ‘마녀’로 처단했던 중세 말 - 근세 초의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들이야말로 ‘마녀’의 집단으로서 화형대에 묶여 불태워져야 할 ‘이단’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만민중앙교회 같은 여러 ‘이단’ 혹은 ‘사이비’ 교회의 목회자나 신도들 보다 사실상 ‘유일 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부족해서, ‘외방의 우상’을 믿는 불경한 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려 살면서 세속의 ‘사회적 규범’을 우선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 신’을 전통적 교리로 하는 기독교는 본성상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단’이니, ‘사이비’니, ‘정통’이니, ‘신앙의 바른 길’이니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도 문제를 ‘이단’이니 ‘사이비 종교’니 하는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더구나 “교계는 지금껏 복을 팔면 흥했고 양심과 이성으로 사목하면 망했다”(ꡔ한겨레ꡕ 99. 5. 19., 인터뷰 기사에서의 윤이흠 교수의 발언) 운운하면서 마치 ‘이성적인 신앙’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미개의 유산으로서의, 부조리한 ‘종교’를 황당하게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이른바 ‘사이비 종교’의 문제는 실은 종교 자체의 문제이다. 실제로 종교 자체에 대한 이성의 비판이 없다면, 즉 종교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지금처럼 비이성적으로 관대하고 ‘사교적(社交的)’인 한, ‘사이비 종교’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독선적인 것으로, 따라서 설득력이 별로 없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질식한 사회, 종교 행위를 만연케하는 현실

더구나, 그것이 ‘정통’ 종교행위이든, ‘사이비’ 종교행위이든, 지금 종교행위가 만연한 데에는 현재의 사회상황이 밀접히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ꡔ한겨레ꡕ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굽이마다, 특히 세기말을 앞두고는 반이성적인 종말론이 인간을 걷잡을 수 없는 허무의 나락에 빠뜨리고 종국에는 엄청난 폐해를 가져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99. 5. 13., 사설.)
“신흥종단의 역사는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또 다른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과 사이비, 유사종교 등의 말에서 보이듯 신흥종단들은 대부분 정치․사회적 혼란에 기생하며 극단적인 신비주의와 구복신앙을 내세워 기성교단과 마찰을 빚으며 부침을 거듭했다.”(99. 5. 19., ‘신흥종단의 역사’.)
“세기말 전환기를 맞으면서 우려했던 반사회적 사이비종교 문제가 조금씩 불거지고 있다. … 종말론 신앙은 … 올해가 세기말이라는 시기성과 기상이변, Y2K 등 재난사고, 경제난 상황을 열거하며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운운. (99. 5. 19., ‘사이비종교, ’게릴라포교‘ 음지로…음지로…’.)

이들 발언들은, 물론 부당하게도, ‘사이비종교’를 다른 것으로부터 준별하면서 하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서 여타의 종교활동도 활발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이비) 종교활동․종교행위가 활발해지는 조건을 단지 ‘역사의 굽이’니, ‘세기말’이니,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니, ‘정치․사회적 혼란’이니 하고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은폐되어 있다. 문제는, 단지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세기 시작한 ‘세기말’이 아니라, 곧 그러한 신비주의적인 시기성의 문제가 아니라 모순에 가득 차서 앞이 보이지 않는 말기 자본주의이며, ‘파란 많은 우리 근현대사’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기염을 토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이다.
ꡔ한겨레ꡕ가 5월 19일의 기사에서 열거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종교적 집단자살이 있었지만 그들을 자살에 이르게 한 사회적 원인은, 적어도 그들 자살자들에 의해서는 명확히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집단 자살한 ‘천국의 문’이란 종교집단의 자살자들은, 그들이 거의 컴퓨터 전문가들인 탓도 있어, 자신들의 자살 동기․목적을 ‘홈페이지’에 남겨 놓았는데, 그 요지는 이 세상에서는 행복한 삶을 전망할 수 없기 때문에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절망하도록 만든 것일까? 바로 신자유주의에 질식한 사회 그 자체이다. 착취와 억압이 만연하고 갈수록 강화되는데,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노동하고자 해도 노동할 곳을 찾지 못하고 실업자로․노숙자로 병들어 죽어 가는데, 그로 인해 사회적․정치적 위기가 갈수록 격화되는데, 이 사회질서, 이 경제질서가 ‘가장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고 ‘역사의 끝’이라니! 절망하지 않고, ‘천국’을 동경하지 않고 버티기 여간 어려운 사회지 않은가?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절망이 오늘날 단지 ‘(사이비)종교’ 행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이고, 한국이고, 일본이고,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오늘날, 예컨대, 청소년들의 범죄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그들의 자살이 급증하고 있고, 드디어는 미국에서 보는 것처럼 무차별 총기난사 사건들까지 벌어지고 있다. 왜? ꠏꠏꠏ 바로 신자유주의에 질식하여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전사들이여, 목청을 높여 비난하라. ‘경제환원주의’․‘계급환원주의’라고!) 한/노/정/연

1999-06-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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