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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철 5.28대회에 다녀와서

현장에서 미래를  제45호
강연자


일본 국철 민영화와 해고자 1047명의
강고한 10년 투쟁에서 배운다
-국철 5․28 대회에 다녀와서-참관기

강 연 자
연구기획2실장







이 글은 지난 5월 28일 일본 동경에서 열렸던 일본 ‘국철투쟁의 전면 승리 해결을 위한 5․28 대궐기대회’(이하 국철 5․28대회)에 참가했던 방문기이다.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경위는 일본 국철노동조합(이하 ‘국노’) 다까사끼 지방본부가 한국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철도노민추)에 참가를 요청함으로써 철도노민추 정책부장과 철도연구사업을 하고 있는 본 연구소에서 1인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번 방문은 국철 5․28 대회 참가 이외에도 본 연구소가 진행중인 철도연구사업 일환으로 일본철도사례를 조사하는 목적도 있었다. 3박 4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후 일본 노동운동을 대표하였던 일본 국철 노동운동을 이해하고 사례조사까지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국노 관계자들의 세심한 도움으로 비교적 많은 자료 수집과 현장인터뷰를 할 수 있었기에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
국노 방문 과정 중 일본의 진보운동을 접촉하면서 많은 관심이 생겼다. 특히 1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투쟁해 온 국철 해고자 1047명의 원직복직 투쟁 속에서 많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고 이를 한국 노동운동에 꼭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기는 주로 국노 해고자 투쟁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그 어느 때보다 해고자가 많이 발생한 한국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국노 방문의 기회를 갖게 해준 철도노민추에 감사드린다.


1. 국철 5․28대회 개최 배경 - 일본 국철 민영화의 허와 실

26일 오후 나리따 공항에서 다까사끼로 가는 전철 차창 밖, 어느 철도노조 지부 건물에 걸려 있는 ‘합리화반대, 감원반대’라고 쓰여진 커다란 플랭카드를 보면서 국철의 합리화, 민영화 과정에서 수만 명을 퇴출시키고도 여전히 감원을 획책하는 자본과 또 이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서 이국땅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26일 저녁은 ‘5․28동경지재 부당판결 1주년 규탄 국철투쟁 승리해결을 위한 5.26 군마(群馬)현(‘현’은 우리 나라 ‘도’에 해당된다고 함) 집회’에 참석하였다. 5․26 군마(群馬)현 집회는 5․28 동경 집회의 지역 사전집회로 군마(群馬)현 지역공투회의와 국노 다까사끼 지방본부군마(群馬)현 내에 소재)가 주최하였다. 집회에는 650여명 정도가 참여하였는데 군마(群馬)현 거주 해고자 70~80여명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해고자들도 많아 흘러버린 긴세월을 느끼게 하였다. 집회는 문화행사가 전혀 없어 조금 건조하게 느껴졌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집회 후 참가자 전원은 JR지역지부 사무실까지 가두행진을 하였다.
27일은 철도현장과 지역 콜로니(사회복지단체) 노동조합을 방문하였다. 지역활동에 깊게 개입해 있는 공무원들의 노조 활동이 인상깊게 다가왔다.
28일 동경집회는 3500여명 정도가 참석하였는데 최근 일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대규모 집회라고 했다. 물론 우리 나라와 견주어 보아도 단일 사안임을 감안할 때 적은 규모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회에는 우리를 초청해 준 다까사끼 지방본부 조합원과 군마현 공투위 분들도 참여하였다. 조합원들은 모두 자비로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5․28 전국대회를 위해 5․28 대궐기집회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에는 중앙공투, 전노련수도권공투, 전노협, 동경지방노조평의회, 국노투쟁단, 전동노투쟁단이 함께하고 있었다. 집회 식순에 한국 철도노민추 이철의 의장의 연대사 대독이 있었고, 연대사를 대독 할때 참가자들은 단상에 있던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일본에서도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집회유인물에는 집회 진행순서가 분단위로 되어 있었다. 집회는 정확하게 시작하고, 정확히 끝나 전체적으로 1~2분의 오차밖에 없었다. 집회는 차분하게 진행되었지만 열기가 있었고, 투쟁단(해고자) 가족의 연설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 우리에게까지 가슴 절절한 감동을 일으켜 끝내는 모두가 눈물짓고 말았다. 집회 이후 동경 번화가를 가로질러 동경역까지 가두행진을 하고 동경역에서 각 단위별 해산집회를 하였다.

국철 5․28대회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정부는 누적된 철도채무를 해결 일본 국철 채무의 대부분은 신간선 등의 건설비용이다. 이는 정부가 건설비용 부담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부채이다. 1987년 청산사업단이 국철로부터 인계한 부채는 25조 5천억 엔이었으나 1998년 10월 청산사업단이 해산할 당시의 부채는 28조 8천억 엔으로 증가했다. 그간 지불된 이자만도 14조 6천억 엔이나 되었고 남겨진 28조 8천억 엔이란 부채는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다.
한편 분할․민영화 당시 JR각사의 경영이익은 대부분이 흑자였다. 이를 근거로 여론에서는 민영화가 대성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민영화를 모색하던 각국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3島회사와 화물회사에 경영안정화기금을 지원하고 국철 부채를 대부분 청산사업단이 인수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1998년 현재 4개 회사는 모두 적자상태다. 현재 일본 국철 민영화는 완전 실패로 판명됐으며 이는 일본 정부에 엄청난 부담으로 남겨져 있다. 이로써 공공성과 민영화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아울러 증명되었다.
하겠다는 명분으로 1987년 국철 민영화를 단행했는데 보다 근저적으로는 전후 일본 노동운동을 대표하던 국노 무력화, 총평 무력화가 주요 목적 이는 中重根元 수상의 발언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총평을 붕괴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죠. 국노가 붕괴하면 총평도 붕괴한다는 점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AERA 1996월 12월- 30호) - 국노 발간 소책자에서 재인용
이었다. 87년 민영화를 전후하여 국노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고, 현재도 산별노조 포기, 일상적 노조 활동 금지 등 국노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민영화 당시 일본 국철은 6개 여객회사와 1개의 화물회사로 매각되었는데 노동자 전원을 해고하고 선별 채용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채용되지 않은 노동자 2만 1,150명에 대해 3년 동안 임기를 보장하겠다며 국철청산사업단으로 귀속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국노 조합원이었고 이들의 선별 채용조건으로 국노 탈퇴를 주요하게 강요했다. 청산사업단으로 귀속한 2만여 노동자 중에서 7,628명은 JR 각사로 재취업할 것을 희망하였다. 이들 중 많은 노동자가 청산사업단의 가혹한 억압을 견디지 못해 퇴사하였고, 3년간의 임기보장이 끝났던 90년까지 전직을 거부한 1047명은 90년 4월 1일 마침내 청산사업단으로부터 모두 해고되었다.
이후 1047명은 지노위와 중노위로부터 복직판결을 받았고, ‘JR채용 차별사건 조기해결을 요구하는 지자체 의견서’가 408개 지자체에서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JR은 중노위 결정에 불복하고, 동경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그리고 98년 5월 28일 ‘중노위 명령을 취소하라’는 법원 판결이 내려졌던 것이다. 이번 5․28 집회는 법원의 부당판결 1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규탄하고 투쟁 결의를 다지는 집회였다. 한편 99년 3월 국노 집행부는 국철개혁법을 인정하면 1047명 해고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정부의 구두 약속에 따라 민영화의 근거인 ‘국철개혁법’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국노는 공식적으로 민영화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현재 국노 중앙은 국철개혁법 수용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문제제기와 교섭의 성과 등에 대해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고 한다. 5월 28일 당일은 1047명 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노와 정부가 1차 협상을 재개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5․28 집회는 교섭 당사자인 정부와 국노 중앙에 대해 압력을 강제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 국철 해고자의 10년 투쟁 개요

(아래의 내용은 국노 투쟁단전국연락회의 의장인 神宮義秋씨와 국노투쟁단전국연락회의 사무국장인 金兒順 一씨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때문에 해고자 투쟁은 국노투쟁단 중심으로 정리되었고 자료를 참조하지 못해 내용이 풍부하지 않은 한계가 있음을 밝힌다.)

1990년 청산사업단으로부터 해고된 노동자는 모두 1047명이었다. 이중 국노조합원이 962명이고 전동노 등 다른 노조에 소속된 조합원들도 있었다. 1047명 중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조합원도 다수 있는데 이러한 일은 해고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났다.
현재 투쟁하는 해고자들의 요구는 첫째, 해고 철회와 JR로의 원직․복직. 둘째, 임금․연금의 원상회복. 셋째, 해결금(위로금)의 지급. 넷째, 국노조합원에 대한 차별대우 철회(노사관계 정상화) 등이다.
1999년 들어 정부는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전환하였는데 이러한 입장 변화의 배경은 분할 민영화 자체가 무리한 결정이었으며 민영화 이후 도리어 채무가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98년 10월 해산할 때까지 청산사업단은 이자 상환에 급급한 상태였고, 1987년 25조엔 이었던 부채는 1998년 28조 8천억 엔으로 늘어난 채 청산사업단은 해산되었다. 이로써 채무는 모두 국민의 부담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또한 국노는 해고를 인정하지 않았고, 나아가 국노조합원 차별 철폐투쟁을 지속함으로써 여론을 반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하여간 국철 민영화 문제와 국노 노사문제는 언젠가는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서 정부의 부담으로 남겨져 있는 상태이다. 정부는 분할민영화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국노 해고자들은 최북단의 稚內 투쟁단에서 최남단의 都城班 투쟁단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36개 투쟁단을 조직하였고, 중앙에는 국노투쟁단 전국연락회의가 있다.
또한 이 투쟁단을 지원하는 공투위가 각 지역과 중앙에 조직되어 있어 투쟁단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다. 투쟁단에 소속되어 있는 해고자들은 아르바이트(예를 들어 트럭운전, 건설노가다 등), 물품판매, 기부 등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투쟁단으로 집중하였고, 이를 해고자 각자의 조건에 맞게 재분배하였다. 예를 들어 젊은이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할 수 있으므로 30~40만 엔을 벌었고, 나이 많은 분은 20만 엔을 벌었다고 할 때, 분배는 부양가족이 있거나 자녀가 학생인 경우 등의 조건을 고려하여 나이 많은 노동자의 경우는 30~40만 엔을 받았고, 젊은 노동자는 20만 엔을 가져가는 식이다. 해고 초기에 해고자들은 국가에 반항하는 자라고 낙인이 찍혀 아르바이트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여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했으며 아르바이트는 동경(초기 2년동안 22명이 동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였음) 둥 대도시에서 해야 했으므로 가족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후 아르바이트의 비정기성 문제나 가족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투쟁단별로 기업을 운영하게 되었다. 기업운영은 경제문제 차원에서 출발하였지만 현재는 단결대오 유지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투쟁단은 다양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해도에 있는 稚內투쟁단은 오징어 말리는 사업, 博多 투쟁단은 청소회사, 音威子府 투쟁단에서는 과자공장과 목공품 공장, 留萌 투쟁단에서는 폐식용유 재활용비누공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36개 투쟁단 중 27개 투쟁단에서 21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투쟁단별 기업운영은 투쟁을 장기화하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즉 기업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보험가입을 할 수 있었고,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음으로써 가족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어 자녀의 교육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가족을 투쟁대오로 조직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업운영 과정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므로 운영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면 즉시 공론화해서 해결한다는 방침도 마련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은 많다. 현재 국노 해고자 962명(전체 1047명) 중 72%가 투쟁단으로부터 생계비를 받고 있다. 나머지 인원은 개인적으로 생계를 해결한다.
투쟁단의 기업 운영은 해고자 투쟁을 가족과 함께 하는 투쟁, 지역의 공동투쟁으로 발전시켰으며 투쟁단이 공동체를 이루게 됨으로써 해고자들이 투쟁 대오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나의 투쟁, 나의 생활에서 우리의 투쟁, 우리의 생활’로 의식이 개혁될 필요가 있고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까 같이 해야한다는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느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외부 지원에만 의존하는 운동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국노는 해고자의 투쟁에 많은 힘이 되었다.
국노는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포용하고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다. 역시 투쟁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노조이기 때문에 이런 자세가 가능하다고 본다. 다른 노조였으면 벌써 해고자들은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고자들은 당연히 조합원 자격이 있고 현직 조합원보다 적은 액수이지만 조합비도 내고 있다. 국노는 전체 조합원으로부터 매월 3천만엔 정도를 모금(조합의 방침이기는 하지만 의무는 아니다. 금액도 급여액에 따라 다르다.)해서 해고자 1인당 3만엔 정도를 배분해 준다. 3천만엔×12개월×8년째 이를 계속하고 있다.
국노는 대단한 노조라고 생각한다. 현재 해고자들의 평균 연령은 46세이다. 87년 당시 최연소 22세이던 사람이 34세가 되었고, 51세이었던 분이 63세가 되었다. 해고자들은 같은 근속연수의 현직 조합원과 비교하면 약 1/2 정도의 생계비를 받고 있는 셈이다. 생계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850명 정도가 공동 투쟁기금으로 매달 5천엔씩 적립하고 있다. 현재 투쟁단별로 5~6천만엔 정도는 항상 가동이 가능하다. 이 투쟁기금으로는 중앙(동경)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번 5․28 집회에도 모든 해고자들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적립금을 갖고 다른 사람이 참여했으므로 자신이 투쟁에 함께 했다는 공감대를 갖을 수 있게 된다. 5․28 집회에서 가족 대표로 연설한 분은 북해도에서 왔다. 북해도에서 동경에 오는 차비만 6만엔(우리 돈으로 약 60만원) 정도 필요하다. 이런 경비를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이런 경우에 적립한 투쟁기금을 사용한다. 또한 투쟁단은 각종 기금을 운영한다. 예를 들어 진학기금 등을 조성하여 자녀들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킨다. 해고 초기에는 돈이 없어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조성된 진학기금으로 85% 정도가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투쟁단은 1년에 한번씩 동경에서 단결축제를 하고 있으며 1년에 2번 정도 큰 행사를 한다. 그리고 1년에 5번 정도는 행동의 날로 정하여 해고자들이 같이 숙식을 하면서 교류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투쟁의 결의도 높아진다. 행동의 날 과정을 촬영한 비디오도 있다. 해고 초기 자녀들은 아버지가 실업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아 많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투쟁의 시간이 흐를수록 착하고 이해심 많은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다. 공동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되는 것같다. 특이하게도 해고자 자녀들 중에는 문제아가 없다. 투쟁이 재미있는 것은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잘하던 사람이 장기적으로 투쟁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기업운영)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람은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숨겨진 능력이 발휘되는 것같다. 투쟁이 사람을 키운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다. 해고는 단순히 일터를 잃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을 잃는 것(가족 해체), 삶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래야 투쟁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정부는 국철해고자 문제에 대해 아직 입장을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 해결하려 할 듯하다. 청산해야 할 임금만 수백 억 엔이다. 물론 정신적 위로금은 별도로 받아야 한다. 연금은 25년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는데 정년 후에 연금지급을 받는 문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일본은 현재 고용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만일 국노가 돈으로 이 투쟁을 마무리한다면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을 해고시킨 후 일시금으로 해결해도 된다고 볼 것이다. 아주 나쁜 선례가 될 것이다. 돈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최대한 피해 나가야만 한다. 한/노/정/연

1999-07-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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