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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의 한국인

현장에서 미래를  제45호
이성백

20세기 후반의 ‘한국인’

이 성 백
연구위원장/서울시립대/철학



20세기 후반 한국은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사람 사는 사회는 변했지만 산하는 여전하지 않느냐고?
한강과 낙동강은 공장 폐수 등 온갖 오염물질로 찌들어 물고기가 제대로 살 수 없는 죽은 강이 된지 이미 오래이며, 산지 또한 댐 건설, 탄광 개발 등으로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두메산골 내고향”이란 것은 옛말이다. 강원도 산골 깊숙이 전기, 텔레비전, 전화는 물론이고 노래방, 단란주점이 안 들어간 곳이 없다. 변한 것은 겉모습만이 아니다. 사람마저 변했다. 5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세월 동안에 5천년을 이어온 한민족은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우리 ‘한국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누누이 배워온 대로 여전히 ‘백의민족’의 그 민족성을 간직하고 있는가, 국제 올림픽을 치룬 나라의 품위에 걸맞는 선진적인 문화시민이 되었는가, 아니면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이기적인 인간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20세기 후반 한국인의 인간형은

20세기 후반의 ‘한국인’,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물음은 필자에게 지금 문뜩 떠올라서 즉흥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10년이 될 정도로 상당한 기간 동안 나는 이 물음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답을 찾느라고 틈틈이 생각해 왔다. 내가 이 물음을 갖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우리처럼 몇 십년간 분단을 겪으면서 동독과 서독 사람들이 상당히 다른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다른 사회 속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도 달라지게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일정한 사회 체제 및 제도가 그 속에 사는 사람들도 바꾸어 놓는다는 데에 강한 인식을 심어주었던 것은 1991년 소련에서 발행된 한 연구 보고서였다. ꡔ소련인ꡕ이란 제목으로 발행된 이 연구서는 70여 년간의 소련 사회체제가 그것에 부합하는 인간형을 창출시켰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 연구보고서를 읽고 나서 나는 바로 한국사회에도 이러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50년간 ‘한국인’은 정말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숨가쁘게 앞으로만 달려 왔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한 유형의 인간으로 만들어졌다.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의 인간형에 대한 고찰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인간을 만들어 놓은 현대 한국 사회를 평가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 중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예로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씩 각종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구입하게 된다. 상점주인 내지는 점원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70년대 보다 80년대에 그리고 80년대보다는 90년대로 올수록 더 상냥하고 친절해졌다. 이러한 친절함은 대한민국 상점의 꽃인 백화점에서 가장 잘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들어가자 마자 예쁘게 화장을 하고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젊은 아가씨들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거의 90도로 숙이면서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살피게 되면, 즉시 담당 점원이 쫓아와서 손을 대는 물건마다 일일이 설명을 한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점도 친절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네 슈퍼집도 심지어는 동사무소 직원마저도 상당히 친절해졌다.

그런데 이 친절함에 대한 감격은 그것이 단지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술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면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 혹 어느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길 같은 것을 물어보면, 이 때 점원의 반응은 귀찮다는 표정이다.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인데, 내가 일전에 물건을 산 적이 있던 한 가게에서, ‘가’라는 곳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물었더니, 물건 살 때에는 매우 친절했던 그 가게 주인 아저씨는 그저 턱을 약간 치켜올리면서 냉담하게 한 쪽을 대강 가리키는 것이었다. 귀찮다는 듯한 신경질적인 표정에 길을 물은 것 자체가 너무 무색하게 느껴졌다. 이 주인의 상반된 반응은 나에게 현재 한국인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 때의 실망감과 허망함이란 아마도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열거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비리

이는 일상적인 한 사례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국사회 도처에서 현재 한국인의 얼굴을 보여주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용돈 때문에 도둑질을 했다, 강도 폭행을 했다는 비행청소년 사건들은 이제는 하도 많아서 기사거리가 되지 못할 정도이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을 살해
하고, 사회의 양심이어야 할 대학교수가 재산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다. 여고생, 여중생을 납치하여, 단돈 몇 십만 원에 윤락가에 팔아 넘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인신매매단까지도 횡행하고 있다. 이런 비인간적인 일은 어디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수입해온 굴비가 버젓이 영광굴비로 팔리고, 수입소고기는 한우로 둔갑하고, 모든 참외는 금싸라기요, 채소 반찬의 대명사 콩나물은 농약나물로 바꾸어 불러야 할 상황이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급식마저 상한 것을 공급해 집단 식중독을 유발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의 보건마저 어른들의 파렴치한 상혼의 희생제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대 한국인의 부정 행위들은 일부의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지닌 구조적 생리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 행위 외에 더 거대한 문제로 언급해야 하는 것이 공직 사회의 비리이다. 공직사회의 비리는 특히 한국사회가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비리로 점철되어있는 사회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공직사회가 말단에서부터 최고 상부까지 온갖 비리의 온상임은 최근 들어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익히 알고 있다. 관할 관청 직원과 경찰관들이 상납을 받고 무허가 유흥업소를 그대로 눈감아 주고, 중간에서 상부에 이르기까지 각 직급의 관리들은 여러 국가사업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돈을 챙기기에 바쁘고,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할 검찰, 변호사들은 나눠먹기에 여념이 없다. 심지어 “나는 정치헌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TV에 나와 대국민성명까지 한 대통령이 알고 보니 재임기간 동안 통치는 제껴두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치부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현대 한국사회의 비리는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간의 병을 고치는 병원과 의료계, 인간을 키워내야하는 교육계마저 갖은 비리의 온상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는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이 행하고 있는 행위들이며, 이 행위들은 바로 현대 한국인이 누구인지 그 얼굴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요컨대 현대 한국인은 무엇보다도 나도 한번 큰돈을 만져보아야 되겠다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인간유형이다. 물론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돈을 번다면야 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문제는 현대 한국인이 너무나 강렬한 재물축적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렬한 열정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인간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많은 경우에 심지어는 돈을 버는 기회가 되면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서는 넘어서는 안될 도의의 선을 넘어서 온갖 비행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리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ꡔ죄와 벌ꡕ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있어봤자 서민들에게 해만 되는 늙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그 죄책감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최근의 사극, ꡔ왕과 비ꡕ에서도 세조는 자신이 단종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것 때문에, 괴로움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죄를 저지르면 죄책감을 느껴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은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도덕불감증’에 걸려 있다. 그것도 중증이다. 단지 다른 사람의 재산과 돈을 갈취하는 정도는 그래도 사람은 상하지 않았으니까 봐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과 인생을 해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은 도덕불감증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돈 몇 푼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자기 여동생이나 딸 정도될 나이의 어린 여고생, 여중생의 인생을 파괴하고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는다.



재물 지향적인 한국인

이렇듯 돈을 버는 것에 골몰하는 재물 지향적 인간이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이다. 이 재물지향성이 한편 다른 인간적 가치관들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왔으며, 다른 한편으로 현대 한국사회의 모든 비리의 근원이 되고 있다. 정도를 넘어서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벌려는 탐욕이 각종 비리로 비화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을 재물 지향적 인간으로 만들어놓았느냐는 것이다. 요새만이 아니라 옛부터 사람 사는 사회는 늘 그래왔다고 할 수 있다. 또 각종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전에 탐욕심과 부정부패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 차이에 있다. 한민족 유사이래 이렇게 백의민족이 탐욕심에 젖은 적이 없으며, 이렇게 부정부패, 비리, 인간성 상실이 만연한 적이 없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악하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주변 환경에 따라서 악하게 될 수도 있고, 선하게 될 수도 있을 뿐이다. 쟝발장이 천성이 악해서 빵을 훔친 것이 아니다. 현대의 한국인을 돈만을 최고로 아는 재물 지향적인 인간으로 만든 것은 바로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이고, 만일 현대 한국인이 악하다면, 그것은 현대 한국사회의 병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70년간의 소련사회가 특정한 인간형을 만들어 내었듯이, 40여 년간의 한국사회가 재물 지향적인 한국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40여 년간의 한국사회는 한 마디로 말해 천민자본주의라는 표
현으로 집약될 수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강력한 독재와 탄압 하에서 추진된 경제개발은 시간이 흐르면서 천민자본주의의 고착화로 귀결되고 말았는데, 우선 자본주의라는 것이 이미 여러 사상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돈을 기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제도로서 물질만능주의를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재물지향성은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포함하여 자본주의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인간형이다. 이기주의, 개인주의, 경제적 이해에 입각한 인간관계는 여기에서도 일반화되어 있고, 각종 사기, 부정부패 및 비리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서구에서는 자본주의화가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이 덜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또한 경제와 정치에서의 부정부패는 법적 장치를 통해 어느 정도 통제가 되고 있기는 하다. 한국사회에서는 군사독재하에서 매우 급속한 속도로 사회의 자본주의화가 파행적으로 수행됨으로써 그러한 자본주의에 내장되어있는 재물지향성이 매우 천박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군사독재정권 자체가 사회의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정경유착과 이에 따른 정치, 경제적 비리들은 군사독재정권이 여러 이권 및 특혜를 통해 재벌을 키워주고, 다른 한편 이들로부터 정치헌금을 수뢰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로운‘인간형’의 충출을 위한 노력이 필요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경제지상주의에 입각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다른 모든 사회적 가치를 무시한 데에서 초래되었다. 위에서 본 모든 것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경제를 이끌어간다는 기업인과 자본가가 철저히 천민의식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기업인과 자본가는 경제적 정의에 대한 의식은 박약하고 기업을 키워나가는 것이 제일이고, 이에 어긋나는 어떤 것도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다는 의식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기 기업의 근로자는 한갖 기업이윤을 위한 도구로만, 따라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보인다. 이런 한국 기업인의 의식은 심지어는 같은 서구의 기업인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비춰진다. 적어도 이들은 근로자 또한 일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이들을 함부로 해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한국 기업인의 천민의식은 IMF체제하에서의 기업구조조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근로자를 인간이 아니라 도구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근로자의 생존권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조건 정리해고를 고집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은 인간주의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관은 퇴화되고, 각종 물질적 욕망에 쉽게 노출되는 일차원적인 재물 중심적 인간형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20세기 후반의 ‘한국인’은 다름아니라, 천민자본주의라는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인간형이다. 특히 이 점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는데, 현재 한국사회에 밑에서부터 위까지 만연하고 있는 각종 부정부패, 비리, 패륜적 만행들은 그것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성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연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결은 현재 국민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사정 정도로는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도 김대중 정부의 사정 작업이 대단한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그 뿌리가 한국사회의 구조적 생리에 있는 한, 바로 이것이 바뀌어야지만 원천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의미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한의 외형적 경제성장에 현혹되어 있고, 또한 스스로가 소유중심적인 사고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의 한국을 대단한 발전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일차원적인 재물 중심적 한국인, 이들에 의해 빚어지는 각종 부정부패 및 사회의 야만화, 그리고 이런 것들의 뿌리로서의 천민자본주의를 들여다 보고 나면, 우리는 20세기 후반 남한에서의 사회 건설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 외형적 경제성장마저도 흔들거리는 상황에 봉착했다. 이제 21세기를 맞이하면서 한국인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천민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방향전환과 실천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한/노/정/연

1999-07-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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