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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방향성과 누락된 실천성
 - 남구현 교수의 “현시기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에 대한 평가 -

현장에서 미래를  제46호
문 국 진



열린마당

이 글은 지난 4월 17일ꡐ『진보평론』발간모임ꡑ주최 창립기념 심포지움ꡒ현 시기 한국의 사회운동과 이론활동ꡓ에서 남구현 교수가 발표한 글 「현 시기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에 대한 논평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남구현 교수의 글도 전문을 게재하였다.



옳은 방향성과 누락된 실천성
- 남구현 교수의 “현시기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에 대한 평가 -
문 국 진
정치평론가









1. 앞서 가는 노동자 전위와 노동자 총단결?

이제 최근 제출된 남구현 교수의 주목할만한 글 “현시기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이라는 글에 대해 감상을 정리하여 평가를 시도해 본다. 이 때 평자는 남교수의 글에 담긴 매우 긍정적인 측면도 부각시킬 것이며, 지적되어야 할 부분도 빠뜨리지 않고 지적해 나갈 것이다.

우선 첫째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남구현 교수가 마치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단결”이라는 것이 실현가능하고 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당면과제인 듯이 말하고 있는 점이다. 남교수는 이렇게 말한다--“무엇보다도 내부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해,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단결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3쪽)
그러나 노동조합운동은 실질적으로는 그 전체가 단합하거나 총단결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노동조합운동, 그것은 늘상 지도부와 평조합원 대중으로 나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둘은 행동상으로 큰 편차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합에서 간부 및 지도층과 조합원 대중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경향이 많다.
조합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전체 노동자들의 요구와 주장을 대리 집행한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본과의 협상과 타협의 명분을 내세워 계급적 갈등을 절충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취할 때가 많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틀과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남구현 교수의 말처럼 ‘조합 전체의 단결이라는 허상’을 과감히 버려야만 한다. 이제까지 남한 노동운동이 그러했듯이, 투쟁의 정치적 결정권이 전투적인 대중에게 전취되는 구도가 아니라면, 대중이 아무리 전투적으로 싸우더라도 그 귀결은 조합 집행부에 의한 투쟁의 종결이라는 결정과, 협상에 의한 마무리였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내버리는 상황이 반복될 뿐일 것이다.


2. ‘노동조합적’ 단결과 밑으로부터의 통제

물론 ‘노동자 총단결로!’라는 슬로건은 기본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과연 그 단결이 어떠한 단결인가가 더욱 문제가 된다. 단결이란 실제로는 어떤 입장을 중심으로 한 단결이냐의 문제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옳은 결정에 따른 전체의 단결이 가능하다면 그건 좋은 일이고, 이견으로 분열된다면 그것은 조직상의 분열로 귀결될 수도 있다. 현실의 노동조합에서는 조합원 총회로 결정된 사항을, 그리고 대의원대회에서 결론이 난 사항을 끝에 가서는 지도부 마음대로 전도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본주의하에서 실제로 노동조합이 가지는 궁극적 한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중적 총파업은 ‘행위에서의 의사통일’의 표출이다. 파업투쟁이 궁극적으로 성과를 얻으려면, 노동자들이 조합의 현존 체계에 국한하지 않으면서도 별도의 현장권력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되어야 한다. 공장위원회는 바로 합법적 노동조합과는 다르게 밑으로부터의 노동자권력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될 수 있으며, 또한 ‘이중권력’의 양상으로 발전될 수 있다.

한편 남구현 교수는 “내부민주주의의 강화로”라는 슬로건을 제기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이 문구는 기본적으로 ‘밑으로부터의 통제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 노동자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내부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장노동자 대중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선진노동자들의 네트워크가 건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적 단결’만으로도 부족하다. 조합적 운동형식을 적극 활용할지라도 그에 머물지 않고, 옳은 지도노선의 구축, 비타협적인 투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대중 교육, 그리고 조직상의 발전 - 이러한 것들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현단계 자본주의가 제기하는 온갖 문제들을 받아 안아야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노동운동이 담지해야 할 영역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투쟁의 대상과 내용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남구현 교수의 다음의 말은 적절하다. ---“노동자의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전체 사회적 모순의 지양을 가능케 하는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당한 주장은 단지 선언적 주장으로만 제기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주장들에서도 역시 구체성은 결여되어 있는 게 상례이다.
「현장에서 미래를」이 추구하는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정책 개발 방향에서도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이 제기되어 있다---“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는 환경, 여성, 문화 등 새롭게 제기되는 사회 전체 문제들에 대해 노동자 입장에 선 이론과 정책을 개발해 나갈 것입니다.”
자, 그런데 과연 현재의 노동자-민중운동이 이처럼 ‘사회 전체의 문제들’에 반응하고 결합하고 적극 연루되어 있는가?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언제 노동운동진영이 시민운동이나 환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연대했었는가? 오히려 이종회씨의 주장처럼 ‘그러한 운동들은 계급적이지 않기 때문에 거부되어져야 한다’는 식의 사고만이 횡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남구현 교수가 말하듯이, 노동운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금의 노동자 정치운동과 그 이론진영은 오히려 시민운동보다 뒤처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모순에서 야기되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투쟁에서 환경운동진영과 함께하는 연대 전선을 펼친 바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운동을 쁘띠부르주아운동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시민운동 차원에서 전개되는 온갖 건전하고 유의미한 캠페인들과 적극적인 정부 비판활동이 가지는 긍정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선언적 주장만을 내세운다고 사회운동의 지도계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은 이제 여타의 민중운동, 시민사회적 운동들, 환경운동 등 그 외의 무수한 운동들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더불어 함께 할 주체적 대안 프로그램을 가진 명실상부한 지도계급으로 도약해야 할 것이다.


4. 생존권 투쟁과 전체 사회적 모순에 대한 투쟁의 결합론

남구현 교수의 이번 글에서 제일 돋보이는 부분은 아마도 다음의 구절일 것이다.--“(이제 우리 운동은)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하여 전체 사회적 모순의 지양을 가능케 하는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자. 바로 지금의 시기, 국면, 상황에서 “전체 사회적 모순의 지양을 가능케 하는 투쟁”이란 어떤 투쟁이어야 하는가? 그러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며 궁극적인 대안을 가능케 하는 투쟁의 방법과 경로는 어떤 것인가? 남구현 교수는 이에 대해 아무런, 한가지 단초조차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자고로 이론이든 실천적 과제이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이 더 과학적인 태도라고 한다면, 남구현 교수가 제기한 추상적 투쟁과제, 즉 그러한 추상적 유토피아는 어떤 구체성과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인가? 평자는 이 단언이 구체적인 형태로 제기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고자 한다.

즉 그러한 사실은 당적 요소들이 대중투쟁에 실제적으로 연루되지 않고서 현단계의 계급투쟁을 강화할 수 있다는 발상들을 ‘종파주의’라고 지적한 레닌의 <공산주의와 좌익 소아병>에서 찾을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권 투쟁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전체 사회적 모순의 뿌리와 관련된 투쟁으로 나아가자’는 남구현 교수의 시의적절한 제안은 현시기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기본 방향을 그대로 지적한 것으로 본다.


5. 이행과 이행의 주체에 대하여

우리 대중투쟁은 주로 생존권 문제에 한정되는 투쟁의 한계, 즉 투쟁의 경제주의적 성격과 노동정치의 개량주의적 지도라는 두 질곡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금의 경제주의적 투쟁의 한계와, 개량적 운동의 횡행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남구현 교수가 제기한 해답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 “경제주의와 개량주의의 문제는 경제투쟁과 정치-사회적 영역에서의 투쟁을 이행의 관점에서 배치함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이 왜 타당하냐면, 경제투쟁이든 정치투쟁이든 그 모든 투쟁들은 거의가 ‘자본주의체제내 투쟁’이고, 양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국회로 진출하는 노동정당 역시 의회주의라는 부르주아정치체제로의 편입을 통해서 개량적 계급운동을 지향하는 것일 뿐이다. 사회주의적 길은 한가지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수정주의적 사회주의라든가 쁘띠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라든가 혹은 평화적 이행 - 특히 합법적 수단을 통한 -의 길 등이 다양하게 존재해왔던 것이다.

남구현 교수는 여기서 ‘이행의 관점에서 경제투쟁과 정치(사회)투쟁을 배치하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남한 내에 현존하는 모든 개량주의자들과 그들의 개량주의 운동을 적확하게 타격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분명 이는 옳은 ‘전략’의 제기로 보여진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서 보자면, ‘경제투쟁과 정치(사회)투쟁을 이행의 관점에서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와는 달리 평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라는 체제내적 투쟁들을 그 모두를 당적 운동의 관점에서 배치한다.’ 이렇게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중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개량주의자들의 개량주의적 지도체계와 싸울만한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이행’이라는 근본적 변혁의 객관적 과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행의 주체형성’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 상황에서 ‘이행의 주체형성’은 다름아니라, 혁명적 노동자군의 집적과 전위지향적 직업적 변혁운동가의 배출, 그리고 그러한 역량의 중앙집중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향후의 노동운동은 이제 노동자들의 머리 속에 “이행의 관점”과 “자본주의적 모순의 지양”이라는 변혁적 전략사상이 형성되는 단계로, 그리고 개량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혁명적 투사들의 네트워크와 순수한 조직화가 대중조직과 전위조직의 불가분적 융합이 이루어진 단계로 발전해야 하며, 그리고 이러한 단계들을 뛰어넘는 영속적인 투쟁의 발전이라는 현 단계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야하고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6. ‘노동자 정치’ 그리고 전위당

끝으로 남구현 교수는 “지금의 위기의 극복과 모순의 척결은 오직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과감한 결론을 맺고 있다. 이는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교훈에도 합치하며, 1917년 러시아혁명의 교훈에도 합치하고, 그 이후 수많은 사례, 즉 역사발전을 실질적으로 전진시킨 모든 동력은 바로 아래로부터의 대중행동의 압력과 저항이었다는 역사의 교훈에도 합치한다. 자본주의가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남한에서도 위의 원칙은 그대로 진실로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이상의 역사적 진실은 다른 또 하나의 역사적 동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행동의 정치적 귀결이나 결실이나 그 성패 여부에는 무엇보다도 ‘전위당’의 존재와 역할이 불가결했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권력투쟁에까지 나서려면 바로 그 노동자적인 정치권력의 상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남구현 교수는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무수한 소위 진보정당들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노동자 정치를 관념적으로 협소하게 이해한 데에 있다”는 언급이 그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할만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어휘가 하나 있다. 그것은 흔히 혹자는 ‘노동 정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인데, 남 교수는 ‘노동자 정치’라고 한 부분이다. ‘노동 정치’가 좀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노동자 정치’는 평자에게는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개념이고 따라서 거기에서 어떤 현실적인 메시지를 느끼게 된다.
즉 그 개념에는 ‘노동자가 스스로 발전시켜가는 정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앞에서 강조된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한 쌍을 이루는 전략 원칙으로 간주될 수 있다.
‘노동자 정치’는 노동자가 정치에, 그리고 국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사상, 그리고 정치영역에서 노동자가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역할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현시기에 이의 실현은 노동자․지식인 모두의 집중적 과제로 나타나고 있다. 실천, 이론 모두에서 ‘한 발자욱 더’ 나갈 것이 요청되고 있다.

1998-08-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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