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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의의와 원칙

현장에서 미래를  제47호
채만수

구체화되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점검한다


【특집】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의의와 원칙
채 만 수 (부소장)

노동자의 힘(준) 건설의 의미와 전망
박 장 근 (노동자의 힘(준) 방침작성위원)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진단과 현시기 과제
김 삼 연 (정년진보당 정책기획국장)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발기인 대회자료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표현은 지난 90년대를 통하여 이미 대중적 화두로 그 자리를 잡아왔다. 그것은 우리 운동의 지향점이자 이를 그 직접적인 목표로 놓을만큼 성장한 우리 운동의 반영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이제 99년 들어서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그 실체를 갖기 시작했고 99년 하반기를 맞이하면서 그 성격과 지향을 달리하는 다양한 정치조직들이 대중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호는 이 조직들의 현황과 과제를 중심으로 기획하였다. 각 조직의 발전단계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추상적인 지향이나 원칙적인 수준의 논의와 함께 이제 운동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각 조직들이 현 시점에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드러내 보고자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번 호 특집은 세 편의 글과 자료로 구성하였다.
노동자의 힘(준)의 박장근 씨의 글은『현장에서 미래를』편집위원회의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지난 8월 29일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당명을 갖춘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글은 발기인 대회에 실린 자료 중 이번 호 주제와 연관되는 부분을 게재하였다.

특/집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의의와 원칙






정치세력화 문제의 제기* 이 글은 민주노총 전해투의 수련회(99년 8월 18일)에서의 강의를 보완한 것이다.


정치세력화는 지금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절실하고도 시급한 역사적 과제 중의 하나이다. 아니, 진정한 정치세력화 혹은 재(再)정치세력화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뿐만 아니라 전세계 노동자계급이 당면한 그러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우선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신의 위력적 정치부대를 갖지 못한 이유로 노동자계급이 아예 사실상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서유럽 등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일견 정치세력화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의 가면을 쓴 독점자본주의의 정치노선인 사민주의의 포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정치세력화를 통해서만이, 전반적 위기의 재격화로 급격히 반동화하면서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전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를 지양하고, 착취와 억압 없이 사회가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자유의 왕국의 문을 열어 젖힐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돌이켜 보면, 50년대 초의 전쟁과 그후의 파쇼적 억압을 거치면서 진보적 정치운동․정치세력과 노동운동이 압살 당한 이후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문제가 새롭게 대중적으로 제기된 것은 불과 십수년 전부터인 8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무엇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하였는가?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발전과 그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형성․거대화가 당연히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특히 그 자본주의적 생산의 단기간에 걸친 압축적인 발전, 다시 말하면 고율의 착취를 통한 급격한 자본축적과 이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이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유발하고, 그러한 저항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문제가 제기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근대사를 관통해온 파쇼적 억압과 그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급격한 자본축적을 위한 고율의 착취 및 그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단순히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소부르조아적 관점이다. 한국전쟁 후에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이 성숙하기 전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소시민들의 일반적인 ‘민주화 투쟁’이 성장․발전해온 것은 그 기간이 한국자본주의사에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소생산의 구축(驅逐), 즉 소생산자로부터의 생산수단의 수탈과 소생산자의 임금노동자화가 가장 급격하고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도의 혁파와 자유로운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을 위한 농민들의 투쟁의 성과로서의 농지개혁에 의한 소농적 자작농, 즉 농민적 분할지 소유의 창출은 동시에 그들로부터의 그 토지 재산의 수탈,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정치세력화의 문제는 자본에 의한 고도의 착취와 가혹한 억압을 배경으로 그에 대항한 저항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그것은 한편에서 비타협적인 것이었고, 변혁 지향적인 것이었다. 물론 아직 정련(精鍊)되지 못하고 수많은 이질적 요소들을 내포한 채 말이다. (이렇게 이질적 요소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한 표현으로, 실제로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로서라기보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로서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식의 문제제기는 정치세력화의 외연이 결국은 농민 및 도시 소생산자 등에게까지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긍정적인 측면과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독자적 성격’을 희석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굴절

80년대 후반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문제가 기본적으로 비타협적이고 변혁 지향적으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치열한 정파적 실천과 논쟁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므로, 새삼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80년대 말엽을 경과하고 9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타협적이고 개혁․개량 지향적으로 변해서, 최근 표면상의 흐름만을 보자면 그러한 개량주의적 조류가 주류인 것과 같은 형세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형세 변화에는 당연히 여러 배경과 원인, 계기가 있다. 그 가운데 그 영향이 가장 광범하고 강력했던 것은 80년대 말 이후의 쏘련 및 동유럽에서의 ‘뻬레스뜨로이까’로 대표되던, 사회주의 체제의 변질과 붕괴일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출발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물론이려니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지위와 임무 대신에 이른바 ‘전인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뻬레스뜨로이까’의 등장은 노동운동 내부에 개량주의․기회주의를 부추기는 강력한 계기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고 잠깐 숨을 추스르고 나니까 한국의 노동자계급의 시야에도 그것이 확대되어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성숙과 붕괴가 그렇듯이, 한국에서의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 혹은 민중운동 또한, 외부 여건과의 관계에서의 그 조숙성(早熟性)으로 말미암아 그 비타협성과 변혁 지향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80년대까지의 저항과 투쟁의 일대 결절점이었던 87년의 6월 항쟁 및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역설적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타협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이질적 요소들이 득세하는 조건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투쟁의 성과로 약간의 정치적 공간이 열렸지만 그 정치적 공간이 변혁적 대중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한 장으로 되기에는 아직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가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공간을 ‘합법적으로’ 활용하여 노동운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이 한편에서 유포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공간으로 진출하려는 정치적 출세욕 역시, 앞의 환상을 조장하면서, 강하게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인적 요소들은 한편에서 (소)시민적 민주화 운동의 주요 추동력이었고, 노동운동에서도 역시 주요한 추동력의 일부였다. 다만, 80년대 중반과 같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격화된 시기에는 성격상 적어도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그들이 그러한 개량적 주장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87년 대선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합법적 정치공간에서의 ‘정치세력화’ 논의와 실천은 대부분 이들 요소에 의해서 선도되고 주도되어 왔다.
이들이 추구하는 바 ‘정치세력화’의 특징은, 그들 자신이 어떻게 표현하고 규정하든 객관적으로는, ‘합법적 대중정당’, 즉 정당법이 정하는 틀 내에서의 ‘대중정당’의 결성, 각급 선거를 통한 각급 의회 및 자치단체장으로의 진출과 그를 통한 ‘노동자․민중의 권익 신장’이다. (지금까지 실패해왔고 또 앞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결국 이른바 ‘부르조아 의회주의’의 틀 안에서의 ‘세력화’인데, 부르조아 의회주의는 노동자계급에게 그것이 폐쇄되어 있고 노동자계급이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을 때는 노동자계급의 쟁취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이 열려 있고 참여가 보장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를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는 있지만 그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그에 안주한다면, 예컨대 서유럽의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타락에서 보는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은 거세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르조아 의회주의는 극복․지양해야 할 대상인 것인데, 그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세력화’의 필요성과 필연성, 목표

오늘날 타협적이고 개혁․개량주의적 노선에 입각해서 ‘노동자계급의’ 혹은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동자․민중의 권익 신장’이다. 무엇이 문제냐고?
여기서 잠시 다른 비유를 해볼 필요가 있다. 저들의 그러한 ‘정치세력화’ 논의와 때를 같이 해서 일부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경제민주화’니 ‘분배정의’니 하는 주장들이 난무하면서 순진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컨대 ‘경실련’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경제민주화’나 ‘분배정의’를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경제민주화’니 ‘분배정의’니 하는 주장들은 언뜻 듣기엔 대단히 정의로운 주장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수는,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그러한 정의로운 동기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벽창호처럼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소리를 외면하는 우둔함을 문제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정의로운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해악이다.
왜? 분배란 결코 생산관계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산관계 자체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인데, 그들은 이 점을 은폐하면서 마치 어떤 ‘분배정책’을 통해서 그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듯이 주장하고, 대중을 그렇게 오도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통한 ‘노동자․민중의 권익 신장’이라는 주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문제 본질이 마치, 적대적인 생산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조아 국가의 특정한 정책이 문제이고, 따라서 의회에서 그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집행기관에서 그 정책을 노동자․민중에게 유리하게 집행할 수 있는 장(長)의 문제인 것처럼 왜곡하고, 오도하고 있다.
물론 ‘노동자․민중의 권익 신장’의 문제가 노동자계급(그리고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무관한 문제도 아니고, 앙상하게 ‘생산관계의 변혁’만을 외치면서 경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노동자․민중의 현실적인 생생한 삶의 문제이고 삶의 조건의 문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중시하고 추구하고 그를 위해 투쟁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혹은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의 근거나 목표가 되는 것이거나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착취와 억압을 재생산하는 생산관계의 지양이 없는 ‘노동자․민중의 권익 신장’이란 착취와 억압의 존재를 당연시하여 전제하는 것이고, 따라서 설령 일정한 성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노동자 대중을 착취와 억압의 굴레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일정한 조건 속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고 하더라도 그 성과조차 극히 취약해서 자본의 위기가 격화될수록 파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에 서유럽과 미국 등에서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노동자계급의 기득의 권익이 급격히 파괴당하고 있는 데에서 우리는 그 현실적인 예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의 필요성과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적대적인 계급 분열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속에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고 강화되고 있다는 데에, 따라서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근거와 목표가 단순히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 근거가 적대적인 계급 분열이고 그에 기초한 착취와 억압이라면, 그 목표는 단순한 ‘노동자․민중의 권익 신장’이 아니라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다.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근거와 목표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르조아지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에 그토록 적대적인 것이고, 그것을 봉쇄할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변질․타락시키기 위해서 그토록 필사적인 것이다.


내용과 가능성, 경로 등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노동자 중심의 대중정당 건설과 그에 기초한 의회 등으로의 진출’로 강변하는 주장이 최근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주장은, 몰계급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오류 말고도, 이른바 ‘대중정당’을 ‘전위정당’과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전위정당’을 소수 엘리트들의 폐쇄적이고 음모적인 정치조직으로 규정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당연히 전위정당에 대한 자유주의적 모함에 깊이 침윤된 입장이다.
그러나 전위정당이란 결코 그들이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소수 엘리트들의 폐쇄적이고 음모적인 정치조직이 아니다. 사실, 가장 추상적․일반적으로 얘기한다면, 정당은 어떤 계급․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부대라는 의미에서 모두 계급정당이고, 그 계급의 전위정당이다. 예컨대, 우리 정치사에서 위선적․기만적으로 ‘국민의 정당’임을 내세우면서 명멸해갔고 또 오늘날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정당들은 실은 ‘국민의’ 정당이 아니라 ‘(독점)자본가계급의’ 정당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독점)자본가계급의 전위정당이다.
하지만, 전위정당의 개념을 이렇게 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만 논한다면, 저들이 그것과 대립적인 개념으로 제시하는 이른바 ‘대중정당’과의 관련에서, 그들의 대중정당도 어느 계급인가의 전위정당임을 지적하는 것일 뿐, 그 개념상의 차이가 명확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들이 개념을 왜곡하여 모략적으로 비판하고 우리가 그 본래의 모습을 옹호하는 전위정당이란 노동자계급 선진대오의 규율 있는 대중적 정치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전위조직에야말로 조직의 공개적인 이념이 있고, 민주주의가 있고, 조직원(당원)들의 책임과 의무가 있고, 대중과의 광범한 접촉면적, 대중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저들이 대중정당이라는 말로 추구하는 것, 즉 무규율하고 무정형한 대중적 정치조직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들 ‘대중정당’에는, 오늘날 수많은 ‘국민의 정당들’에서 전형적으로 보는 것처럼, 일견 대중의 참여가 있지만, 그들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실제적으로는 허구의 구성원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는 당원으로서의 어떤 권리를 누리지도 못하고 의무를 진지하게 이행하지도 않는다. 혹은 그러한 것을 조직이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소수 정치적 야심가들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이러한 ‘대중정당’에서는 엄격한 자격과 의사를 가진 사람들만을 당원으로 가입시켜 그들을 더욱 당원답게 훈련하고 활동하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대중’에게 당원가입원서를 내줄 것을 애원하고, 그들이 선거 때 ‘이탈하지 않기’를 애원한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가 이런 것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세력화’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대중정당’이란 이름으로 추구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것임을 유감스럽게도 부인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상황이 요구한다면 노동자 대표의 의회 등으로의 진출을 결코 배제하지 않지만, 결코 그것을 정치세력화의 주요한 내용이나 목표로 간주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전술적 고려에서 배치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 단결하고, 언제고 상황의 요구에 따라서 투쟁할 수 있도록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훈련하면서 노동자계급 내부에 정치적 지도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당연히 대중과 결합된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 우리의 상황에서 보면 ‘현장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다. 이들 현장활동가들은 자신들을 올바른 계급적 정치․투쟁노선을 가진 조직으로 조직하고 훈련하면서 끊임없이 대중과의 접촉면적을 확대해야 한다.
합법주의적 노선을 옹호하고 추진하는 사람들 중에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계급적 역관계로 보아 원칙적이고 계급적인 노선은 불가능하다’거나, ‘대중이 그러한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 언뜻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계급적 역관계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왜 그러한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그것은 그러한 노선만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대중이 그러한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역시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정치세력화를 봉쇄하려는 자본의 온갖 선전과 공작이 대중을 끊임없이 그로부터 분리해내기 때문이고, 나아가 노동운동 내외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과 그들의 운동 자체가 대중으로 하여금 그러한 계급적 노선에 대해서 회의하도록 작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는 물론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독점자본의 지배가 강화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진지하게 ‘과연 노동자계급의 자주적․계급적 노선은 가능한 것일까’ 하고 고뇌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해방의 필요성은 물론 그 가능성과 필연성도 바로 거기에, 즉 그러한 착취와 억압의 강화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정치세력화로의 구체적인 경로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현장활동가’ 각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명확히 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위한 운동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와 운동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동단결’이 강조되어 왔으나, 차이를 은폐한 ‘대동단결’ 추구는 사실은 치유하기 어려운 분열과 대립․갈등을 낳고 있다. 우리 사회운동사에서도 87년 말의 민통련의 분열, 90년대에 와서의 전민련 및 전국연합의 분열 등 수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이들 조직들은 성격상 ‘계급연합적’이고 ‘전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존중하면서 그 자체에 당파적 혹은 정파적 결의를 강요해서는 안되었는데, 일부에서 그 숫자상의 상대적 우위를 이용하여, 예컨대 이른바 ‘비판적지지’ 같은, 그러한 당파적 결의를 강요했기 때문에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파적․정파적으로는 서로 차이를 명확히 하여 그 조직과 활동을 달리하여 경쟁하면서도, 전선적으로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는 속에서 단결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정치․투쟁노선을 객관화하고 대중 속에 검증하면서 실질적으로 노동자․민중의 단결을 도모하는 길이다. 이러한 당파적․정파적 차원의 활동․실천과 전선적 차원의 그것을 혼동할 때, 거기에는 ‘단결’이라는 구호 밑의 불화와 분열밖에 있을 수 없다.
정치세력화의 조직적 표현인 정당은 어디까지나 계급적․정파적 조직이지 계급연합 조직이나 ‘국민적’, ‘민중적’ 조직이 아니다. 계급연합당이나 ‘민중’의 당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관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객관적으로는 그러한 ‘연합’ 때문에 필연적인 당의 소부르조아적 성격을 은폐하는 주장일 뿐이다. 그러한 정당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닌 것이다. 명확히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당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은 그 이념적, 노선적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경제적으로 ‘비노동자계급’ 출신의 참여를 배제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적 이념과 노선을 체현하고 있는 <‘비노동자계급’ 출신의> 인텔리겐챠의 참여는 조직을 더욱 튼튼하게 하고 많은 경우 필수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위에서 ‘계급연합’이든 ‘민중전선’이든 전선적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국가)독점’ 단계에 이른 오늘날 여러 이유로 노동자계급 자체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정치세력화에서는 이를 고려해야 한다. 그 분열의 가장 커다란 이유는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 일부의 매수․견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 독점자본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는 이른바 대중매체에 의한 강력한 이데올로기 조작일 것이다. 그런데 그 분열의 이유야 무엇이든, 아무튼 노동자계급의 분열된 당파 혹은 정파는,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든 실제로는, 각자의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추구하게 되고, 이는 오늘날 우리 노동운동의 내부에서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의 하나는 정당 즉 정치조직과 노동조합과의 관계이다. 특히 정치적 분열 때문에 당파적 혹은 정파적 지향을 달리하는, 최소한 수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가지는 산업별 조합이나 ‘내셔날 센터’(노총)가 정치조직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로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조합원들의 정파적․당파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노동조합 조직으로서의 단일한 대오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그 자신도 정파적․당파적 분열에 따라 별개의 조직으로 분열될 것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즉 민주노총과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민주노총이 단일의 통일된 대오를 유지하는 길은 어떤 특별한 정치조직에 대한 배타적 지지 결의를 삼가고 ‘반(反)노동자계급적이지 않은’ 제정치조직과 등거리의 우호적․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어떠한 이유나 사정에서든, 특정한 정치조직을 배타적으로 지지할 경우, 그 의의는 당연히 민주노총을 구성하는 가맹단체, 즉 산업연맹이나 개별 조합들만이 아니라 그에 가입하고 있는 조합원들 역시 그 정치조직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현실과 상반되는 것이다.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당파적․정파적 대립이 치열하지 않은 동안엔 아직 분열을 현실화시키지 않은 채 크고 작은 갈등만이 어지럽겠지만, 노동자계급 내부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더욱 진전되면서 그 대립이 격화되면 어떻게 될까? 민주노총이 지지한 특정한 정치조직을 지지하지 않고 다른 조직을 지지하는 조합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조직에 대해서도 민주노총이 동등한 지지를 보내주기를 요청하게 될 것인데, 이는 다시 민주노총의 기존 결의와 충돌하게 되고, 따라서 기존의 결의를 취소하던지, 기존의 결의와 모순되는 또 다른 지지 결의를 하든지, 아니면 그 요청을 거부하거나 아예 그러한 요청이 공식적으로 제안되지 않도록 봉쇄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 가장 현실적일까? 아마도 요청을 거부하거나 봉쇄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정당에 대한 기존의 결의는 결코 우연이 아니고, 민주노총 대의원 혹은 중앙위원의 세력분포를 반영하는 것이고, 여러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의 지지의지를 관철한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결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는 어쩌면 기존 결의의 취소나 자신의 조직에 대한 지지 결의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지도 않고, 다음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른다.
다음의 행동이란 무엇이겠는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지지하는 새로운 조합, 새로운 노총의 조직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일본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복수의 노동자(?) 정치조직과 그에 상응한 복수의 노동조합 내셔날 센터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한국의 자주적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의 단일대오이기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불행한 시나리오다.
그런데, 많은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과 관련해서 불행히도 일부의 ‘책임감 있어야 할’ 간부들조차 이 방향에의 열정을 삼가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책동은 필히 멈춰져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

1999-09-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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