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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의 인권과 독립을 옹호하는 길

현장에서 미래를  제48호
엄혜진

국/제/노/동



동티모르의 인권과 독립을 옹호하는 길










1. 들어가며


어리둥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름조차 낯선 동티모르라는 작은 섬이 24년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지내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전후 맥락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한국군 파병과 관련해 여․야 간 당리당략적 논쟁을 들어야 했고 어느새 가족들의 눈물의 배웅 속에 “전장”으로 떠나는 상록수 부대를 지켜봐야 했던 상황이 그러하다. 인구의 3분의 1이 학살을 당했고, “독립지지 78.5%”라는 국민투표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민병대의 학살을 피해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동티모르인들을 본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여당 측이 한국군 파병의 근거로 제시한 “6․25전쟁 당시 유엔에 입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심정을 갖게되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6․25 전쟁을 선과 악의 대결, 그리고 악을 물리치는 데 지원해준 유엔이라는 단순논리로 설명할 수 없듯이 동티모르 사태 또한 분명한 원칙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설사 당장의 학살은 봉합된다 할지라도 6․25 전쟁 이후 한국이 겪은 뿌리깊은 정치, 경제적 예속과 민주적 후진성을 동티모르에 그대로 답습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호흡을 좀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인권만큼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인류의 가치는 없지만, 인권은 늘 강대국의 정치, 경제적 이권 개입을 위한 그럴싸한 수사로 농락당해 왔으며 그 역사의 한 장면을 동티모르 사태와 관련해 벌어지는 양상들에서 또다시 발견하게 된 착잡함으로부터 이 글은 출발한다.    



2. 침략과 학살, 묵인과 공모   

TOP-부상당한 사람들이 딜리 대학살중에 묘지에 나뒹굴고 있으며 군중들이 뒤에서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사격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다.

TOP-부상당한 사람들이 딜리 대학살중에 묘지에 나뒹굴고 있으며 군중들이 뒤에서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사격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다.

사격후에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묘지 안으로 들어와 생존자를 끌어갔다.       

사격후에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묘지 안으로 들어와 생존자를 끌어갔다.       

INSET-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아무런 경고 없이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INSET-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아무런 경고 없이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SANTA CRUZ묘지의 다른 쪽 면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를 피하려는 시민들이 출구쪽에 엉켜 넘어져있다. 한 청년이 사격을 피해 달리고 있다.

SANTA CRUZ묘지의 다른 쪽 면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를 피하려는 시민들이 출구쪽에 엉켜 넘어져있다. 한 청년이 사격을 피해 달리고 있다.

BOTTOM- 심하게 부상을 당한 생존자들. 하지만 다음날 대부분의 생존자는 처형되었다 .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의 정상들이 뉴질랜드에서 열리고 있는 아펙 정상회담에 모여 인도네시아 정부와 동티모르 사태에 관해 협상을 하고 있던 9월 중순에도 그들 간의 군사적 협력관계는 계속되었고 민병대에 의한 대량 학살 또한 계속되고 있었다. 이는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한 1975년, 유엔이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인정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 첫해에만 동티모르인 10만 명이 학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인도네시아가 400년간의 포르투갈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에 환호하고 있던 동티모르인들을 짓밟으면서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강제 편입시켰던 1975년 12월 7일은 미국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카르타에서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떠난 하루 뒤였다.

74년 포르투갈에서는 일부 청년 장교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마르셀로 카에타노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내고 포르투갈의 민주화는 물론 옛 식민제국의 일부로 그때까지 남아있던 앙골라와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동티모르의 독립을 약속했다. 이런 고무적인 정치환경 속에서 티모르민주연합(UDT)과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이라는 두개의 정당이 출현했고, 두 정당은 연립정부를 구성, 독립 국가를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은 반공주의를 정권 정당성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며 서방과의 경제적 협력을 통해 인도네시아 내부의 정치안정을 꾀하는 한편, 동티모르 정치세력 간의 반목과 갈등을 교묘히 조장하면서 70년대 들어서부터 준비해온 군부세력의 동티모르 침략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관료, 플랜테이션 경영자, 봉건 토호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UDT는 마침내 인도네시아가 의도했던 데로 “좌익”인 프레틸린(Fretilin)과 갈라서서 독자적으로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대다수 동티모르 주민들의 지지를 받던 프레틸린(Fretilin)은 곧바로 투쟁에 나서 정권을 되찾았다. 그 와중에 UDT 세력과 그 가족들(약 2만 5천 명)은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 국경 너머로 축출되었고 인도네시아는 이를 빌미삼아 침공해 들어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은 인도네시아를 제2의 쿠바를 막을 수 있는 반공 투쟁의 값진 동맹군으로 대접했고, 군사적 원조와 훈련, 무기들을 제공함으로써 결국 동티모르인들을 뚫고 나간 총알을 공수했다. 물론 미국과 다른 회원국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인도네시아의 침략에 대해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비난하고 동티모르의 민족자결권을 천명했지만 인도네시아를 수지맞는 무역상대국으로 사고했던 서구 열강들에게 있어 동티모르인의 인권이나 주권은 애시당초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또한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매장량만 210조원에 이르는 티모르해의 석유 이권을 챙기기 위해 주판알을 튕겼고 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최근까지도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한 나라로 기록된 최초의 원죄이다.  

군사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동티모르 75만 인구의 대부분이 프레틸린의 군사력인 동티모르 민족해방군(Falintil)을 따라 섬 동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굶주림과 융단 폭격으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군이 통제하는 캠프나 마을에 정착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처형과 학살, 그리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동티모르인 20만 명이 죽어갔다. 이때 외국 기업들은 소위 “투자자들의 천국”, 인도네시아로 몰려들었고 수하르토 군사정권에 의해 행해진 살인과 테러는 2차대전 이후 최대의 대학살이었지만 그는 세계 언론에서 “온건주의자”로 칭송 받았다. 인도네시아와 공모한 강대국에 의해 동티모르의 상황이 묵인 혹은 은폐되고 있는 동안, 서구 대기업들은 수하르토와의 협잡 속에서, 그리고 동티모르인들의 희생을 댓가로 주머니를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1991년 수도 딜리에 있는 산타크루즈 묘지에서 인도네시아 군이 수백 명의 비무장 독립 시위대에 발포하는 장면을 한 사진기자가 공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동티모르를 기껐해야 그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티모르 해의 동쪽 섬 정도로만 알고있을 지 모를 일이다. 이름하여 산타크루즈 대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만 271명이 사망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동티모르의 독립 운동은 국제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96년 프레틸린(Fretilin) 지도자 호세 라모스 오르타와 카를로스 벨로 주교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국제 인권단체들의 동티모르 연대운동이 가속화되었고 이에 고무받은 프레틸린(Fretilin)은 무장독립투쟁 보다는 국제사회에 인권옹호를 호소하는 방향으로 자기 노선을 선회하게 된다.  


3. 인도네시아 민주화 운동과 주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


2억 명의 인구 중 수하르토 일가를 정점으로 한, 단 200명의 자본가가 20개 대재벌의 54개 회사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지배세력은 97년 아시아 통화 위기를 계기로 민중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카르타에서만 연인원 수십여만 명이 참여한 시위와 항의가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군사독재의 청산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동시에 인도네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소수민족 독립 운동에 물꼬를 텄다. 결국 98년 5월 수하르토 정권은 퇴진하였고 하비비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친수하르토 세력인 군부는 여전히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고 경제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수하르토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낸 하비비로서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경제개혁과 동티모르 인권탄압을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일정한 제스츄어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99년 5월 5일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은 유엔의 감독 하에 인도네시아의 자치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데 공식 합의했다. 이 합의서에는 자치안이 거부될 경우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하르토 대통령의 사임은 인도네시아 민주화를 향한 하나의 중요한 발걸음이다. 그것은 또한 동티모르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명목상의 변화가 반드시 인도네시아나 동티모르에서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배적 권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군의 축소나 제거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유엔 관리하에 독립에 국민투표가 합의될 때, 어떠한 무기나 탄약이나 군사훈련이 인도네시아에 제공되어서는 안되다고 믿는다.”라고 주장했던 동티모르 독립운동 세력(동티모르행동네트워크)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였다. 국민투표 실시를 앞두고 인도네시아 군부와 동티모르 기득권세력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는 독립세력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고 무장한 채 거리를 활보하며 “독립에 표를 던질 경우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과 위협으로 동티모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의 완전한 철수와 민병대 해체, 그리고 자유로운 독립투표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평화유지군 파병’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동티모르 독립세력의 요구를 유엔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8월 19일 “무기 인도식”이라며 단 10개의 총자루만 넘겨주며 언론쇼를 벌인 민병대를 추켜세우거나 “인도네시아 군은 절대적 중립을 취하고 있다”는 발언을 해 24년 전처럼 동티모르인들을 또다시 배신했다. 그러나

체포된 동티모르 청년이 인도네시아 군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다.

체포된 동티모르 청년이 인도네시아 군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다.

고문을 당한 대부분의 포로 등은 대부분 사망하였으면 이는 현 인도네시아 정권의 심각한  인권침해의 예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Fretilin 등 동티모르 독립세력 조차 민병대의 폭력에 맞서는 행동이나 인도네시아 군에 대항하는 대중 시위를 섣불리 조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행동이 폭력을 자극하거나 촉발시켜 또다시 투표 연기나 중단의 구실로 이용되거나 투표 이후에도 인도네시아의 재침범의 핑계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유권자 등록과정이 민병대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병대의 테러를 모르는 척하는 인도네시아 군경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95% 이상이 등록을 하고 78.5%라는 절대적 지지를 표명한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자결권을 지켜내기 위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그 동안 핍박의 역사 앞에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다는 그네들의 절박함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티모르인들의 외로운 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했던 세력은 사실상, 문제의 진앙지를 언제나 비켜가 있던 유엔도 아니었고, ‘인권’이 아닌 ‘이권’의 관점으로 동티모르나 인도네시아를 바라보았던 미국이나 호주국도 아니였다. 동티모르라는 발음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인권외교를 외치는 한국 정부는 더더욱 아니었다.

30여년간 군사정권의 지배하에서 민주적 권리도, 정당한 경제적 댓가도 누리지 못했던 인도네시아 민중들은 44년만에 실시된 자유 총선거에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PDIP)에 개혁에 대한 기대를 몰아주었다. 인도네시아의 군사독재의 청산과 민주화는 동티모르인들과 인도네시아 민중이 공히 가지고 있는 희망이지만 이들을 동지로 엮어 소수민족 독립운동에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투쟁을 전개한 세력은 인도네시아의 48개에 이르는 다른 모든 정당 중 민중민주당(PRD)뿐이다. 이번 선거에서 골카르당의 부정행위를 폭로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며 거리에서 투쟁을 벌였던 민중민주당은 그 이전부터 동티모르학생저항연합(Renetil)과 아체운동학생연대(Somaka) 등과 계속적인 연계를 가지면서 어느 세력보다 단호하게 “민족자결권”을 보장할 것을 인도네시아 군부에 주장해왔다.

동티모르 외에도 아체, 이리안자야, 암본제도 등 인도네시아가 이들 소수 민족의 자결권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은 동티모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월 수백명이 사망한 암본섬 사태는 이슬람교인 승객과 기독교인 버스운전자 간의 말다툼이 불씨가 되어,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갈등으로 비쳐졌지만 사실상 70년대 이후 자바섬의 이슬람교도들을 계획적으로 이주시키면서 수하르토와 그의 지지세력들이 경제적 기반을 거의 독점하고,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 신자인 암본섬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한 데에 본질적인 뿌리가 있다. 지난 7월 아체에서는 반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비무장 상태의 마을주민 51명을 무차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70년대 이래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아체 독립세력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1960년대에 강제로 인도네시아에 합병된 서파푸아 또한, 풍부한 천연가스와 다른 자원들을 갈취하고 있는 군부와 그에 결탁한 인도네시아 본토인들로 인해 원주민들은 토지와 생활기반을 모두 잃었다. 동티모르 독립은 이들 소수민족 들의 독립 운동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로 작용해, 분리요구가 훨씬 거세어질 전망이어서 인도네시아 정권은 동티모르를 녹녹히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4. 평화주의자의 딜레마


국민투표 이후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는 약탈, 강간, 강제 이주, 살인 등을 저지르며 거의 초토화 전술에 가까운 작전을 수행했다. 유엔감시단(UNAMET), 외국인 기자, 신부, 수녀 등 그들의 공격은 무차별적이었지만 공격의 효과를 노리는 대상은 역시 독립을 원하는 동티모르인들이었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무고한 동티모르 민간인들이 죽어갔고 이를 피해 30만명에 이르는 동티모르인들이 난민이 되어 서티모르와 산악지대로 피신을 했다. 각국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의 동티모르 철수와 민병대 해체를 외치는 시위가 조직되었고, 유엔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갔다.

주요한 무기 수입국이자 초국적 자본의 투자처인 인도네시아의 눈치를 보고있던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은 세계적으로 거세어지는 이러한 요구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도 마침내 다국적군 파병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토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대의명분 삼아 주권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을 때처럼, 그리고 미국이 자국 군사물품의 단일 최대수입국인 터키의 쿠르드족 인권탄압에는 오히려 눈감았을 때처럼, 강대국의 군사적 개입은 일관성 있는 인권 옹호나, 해당국 혹은 해당 민족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민병대의 배후에 있는 인도네시아 군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협력 관계를 포기할 의사가 없는 강대국으로써는 단지 인권 단체들을 향한 외교용 발언으로 ‘IMF 추가지원 중단’, ‘군사원조 중단’ 등을 외쳤을 뿐이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략하기 하루 전날, 자카르타 회담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키신저는 “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우리가〔동티모르 침략을 이유로〕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제재를 가했을 경우, 우리 미국의 국익은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비공개 석상에서 말했다. “국익”, 아니 일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동티모르의 침략에 공모했던 그들에게 동티모르 평화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이 어쩐지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가? 특수 정예군 코파수스를 포함해 인도네시아 군과 정기적인 군사합동훈련까지 실시하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동티모르의 자원과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도네시아 군과 진정으로 단절할 의향이 있겠는가?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누구의 손”을 빌어서라도 일단 처참한 학살이나마 중단시키고 보자라는 생각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확실한 현실 처방전인 것처럼 보인다. 세계 인권 단체들과 NGO가 유엔에 “평화유지군”을 시급히 파병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도 이러한 맥락 하에서 도출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9월 14일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는 10여개 시민/사회 단체들이 연대집회를 열어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평화유지군 파병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지켜지는 인권이냐에 따라 인권 수호의 결과적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평화유지활동”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 분쟁을 무력으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과 인권탄압의 씨앗을 제거하고 평화 정착을 위한 제반의 조건을 형성하는 활동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분쟁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에서 ‘인권’은 강대국의 이권적 개입을 위한 또 다른 원천이 되고 있다. 학살의 가해자인 인도네시아 정권이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정당한 국가권력으로 인정받고, 이권개입을 위한 강대국의 군사적, 경제적 관계가 비판받고 청산되지 않는 한 “평화유지군”은 이라크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던 “다국적군”과 다를 수 없다. 

Pope의 방문에 앞서 일어나 시위 현장에서 젊은 동티모르 청년이 인도네시아의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가고 있다. 이 당시의 시위는 인도네시아의 강압적인 탄압과 포로에 대한 고문으로 인하여 수년간 중지되었던 독립운동의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Richard Ellis 1989

반공을 국시로 한 정권의 권력 유지수단이었던 국가보안법조차 철폐하지 않고 주한미군 범죄는 여전히 치외법권처럼 되어있는 한국이 세계의 인권수호에 앞장서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도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한국은 안타깝게도 그들이 꿈꾸는 “인권국가”의 위상은 절대로 지닐 수 없다. 일부 강대국만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통해 이를 ‘지키거나’ ‘파괴’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국적군이 이미 파병된 상황에서 그것의 찬반을 논하는 것이 어찌보면 때늦은 객담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강대국의 군사력에 의지한 인권의 옹호가 자칫 군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거나, 허약한 나라들의 민중과, 그들간의 연대를 객체화시켜버릴 수 있는 함정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무고한 양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는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서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공개되었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강간, 폭력, 살인으로 인해 희생된 넋들처럼 이들의 희생을 보면서 ‘국익을 위한다는 자부심’도, ‘불쌍한 사람들의 인권을 지켜준다’는 오만함도 아닌 인간으로써의 겸허함만을 한국의 파병군들이 지니길 바랄 뿐이다.  

    


5. 동티모르의 자주적 독립을 위하여  


동티모르의 식민지 탈출과 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유혈사태의 참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동티모르 독립국가 형성에 대한 논의들은 이미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유엔은 9월 20일, 동티모르가 안정과 자생력을 되찾을 때까지 ‘장기간’ 유엔의 감독 하에 과도정부를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엔의 구상에는 동티모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결의 주체세력 또한 동티모르인들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현상적인 비극의 종말을 어서 알려, 동티모르 사태가 마치 자신들의 손에 의해 해결된 것처럼 보이길 바랄 뿐이다. 동티모르 독립국가 건설의 첫 출발은, ‘자생력을 되찾을 때까지 장기간 통치할 것’이라는 유엔의 정책이 아니라 학살의 책임자인 인도네시아 군부 독재정권의 완벽한 해체와 과거 청산,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총선 결과에 따라 메가와티와 하비비가 대통령직을 두고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총선을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과 군부 당연직을 포괄하고 있는 국민협의회(MPR)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데다, 군부의 권력이 막강한 인도네시아의 정치구조상, 군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메가와티가 동티모르 국민투표 이후 인도네시아 군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다국적군 파병’ 등 군부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상 소수민족 분립 독립에 반대하는 그녀는 국민투표 이전에도 “국민투표 결과가 독립으로 결정이 난다면 이 독립안을 찢어버리겠다”고 까지 공언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혹여, “개혁의 상징”인 메가와티가 집권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곧 군부독재의 완정한 청산과 인도네시아 노동자․민중을 위한 민주화를 의미하는 것도,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2의 동티모르가 암본제도에서, 이리안자야에서, 그리고 서파푸아에서 계속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배세력의 변화가 어떠한 본질적 변혁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민중,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들의 연대만이 진정한 민주화와 자결권을 쟁취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각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티모르가 안정과 자생력을 획득하는데 기반이 되는 경제적 여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이권을 챙겨온 강대국들의 조건없는 보상을 반드시 강제해 내야 한다. 인도네시아 침략기 동안 동티모르에 남겨진 처참한 결과는 80%에 달하는 극빈율과 30%의 문맹율이다. 학살 희생자 중 다수가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갔다는 사실은 티모르 해의 거대한 유전이 강대국 기업의 주머니속으로 들어갔으며 56만 헥타르를 소유하고 있는 수하르토 일가의 뱃속에 채워졌다는 반면(反面)의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동티모르 재건을 위해서는 막대한 이윤을 착취한 거대 석유회사들과 초국적 기업들의 보상금이 사회기반시설 및 교육, 경제재건에 쓰이도록 해야 한다. 흔히 IMF와 세계은행의 차관을 제공해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소국을 또다시 최빈국으로 전락시키고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경제에 예속시키는 기간의 관행이 동티모르에 적용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또한, 동티모르의 독립국가 건설과정에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세계의 모든 자발적 진보진영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인도네시아 통치 기간 동안 자행된 모든 학살과 만행을 낱낱히 파헤쳐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역사의 댓가를 치르도록 해야하며 인도네시아 군부의 배후에서 민병대를 지원했던 모든 동티모르 기득권, 관료 집단의 부정한 재산을 모두 몰수해 동티모르 독립국가의 재건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동티모르의 학살이 알려지기 시작한 1991년부터 동티모르행동네트워크(http://www.etan.org),동티모르해방(http://www.freetimor.com) 등 인터넷상의 네트워크를 포함해 인도네시아․동티모르와의 연대를 위한 오스트레일리아 위원회(ASIET)와 같은 연대 행동 단체들이 다수 건설되어 연대행동을 펼쳐왔다. 이와 같은 인권적 국제연대 활동이 동티모르의 인권과 평화에 기여했음은 두말 할 나위 없지만 피억압자로서 동티모르 민중들과 진정한 연대를 꾀해야 할 세력은, 또한 전세계의 노동자․민중이다.

한/노/정/연


1999-10-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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