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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건국 50주년 - 살아있는 모택동과 노동자

현장에서 미래를  제48호
백원담





칼 럼

중국 건국 50주년 - 살아있는 모택동과 노동자
백 원 담
문학평론가/중국학






등소평 이후의 중국, 지식인들과 대다수 인민의 무력감

일생을 살면서 가장 벅찬 감격의 순간을 묻는다면 사람들은 무얼 꼽을까. 42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 천안문 앞에 선 순간, 더위조차 씻긴 듯 문득 스친 생각이다. 산뜻하게 단장한 거대한 천안문의 붉은 장벽, 지도자 본연으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모택동의 초상, 천안문광장을 향해 굳건하게 서있는 중국의 두 상징은 대다수 중국인에게 무엇보다 벅찬 감격의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쉴 새없이 오가는 사람들, 그들의 속내야 일일이 들여다볼 수 없는 노릇이지만, 건국 50주년, 12억의 중국인들이 천안문도 모택동도 그자리에 늘 새롭게 자리매김해두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중국 특유의 도저한 힘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감상인가.
물론 대약진운동의 실패, 문화대혁명, 모택동의 중국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던 역사적 사실 또한 중국인들에게는 가장 아픈 상처일 터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 또한 모택동의 시대로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잣대로 이후 정권의 통치정도를 가늠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모택동과 그의 시대가 대다수 중국민의 삶의 잣대, 가치기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구소련이 붕괴한 뒤 레닌의 동상이 끌어져내리고 오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에 낭패감과 분노를 되씹으며, 인간과 그 역사의 진보지향에 근본적 물음을 던졌던 사람들이라면, 중국의 건국과 50년후 오늘의 중국, 그 간난의 역정 속에서도 건재한 중화인민공화국건국의 두 상징으로부터 중국역사의 전진이 가능케 했던 묵중한, 그 어떤 거대한 힘의 무게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정말 올해는 중국에게 특별한 년도인 것 같다. 5‧4운동 80주년, 건국 50주년, 천안문사건 10주년, 20세기 중국의 굵직한 대목들이 세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지난 세월을 제대로 뒤짚어보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말이다. 줄을 잇는 각종 기념행사들, 상점마다 가득한 기념품들, 그러나 단순한 기념만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역사적 숙제들을 인식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모색의 노력들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천안문과 모택동의 건재라는 외견상의 표상들로 중국의 저력과 미래를 가늠하기에는 그 도저한 힘은 힘대로 느끼되 지극히 감상적이라는 혐의를 벗기가 힘들 것이다. 중국 자체의 평가대로 중국은 아직도 발전중인 개발도상국가에 속하며, 그러한 상정 자체가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기획을 따라잡는 또다른 근대주의기획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 이후의 중국은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사회주의의 깃발은 내리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시장경제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중국을 사고할 때 우리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다. 이것은 중국 근대의 시작 5‧4운동 당시로부터, 그리고 이후 모택동식 사회주의가 서구자본주의에 대해 던진 문제제기의 핵심을 스스로 껴안고 나자빠진 형국에 비유될 수 있다.
요즈음 중국 지식계에 신좌파가 등장, 모택동식 사회주의에 대한 재인식과 등소평식 효율위주의 개혁개방 및 사회주의시장경제제도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들이 던지는 문제제기는 그야말로 문제제기수준으로서 대다수 중국민의 삶의 실제로부터 등소평식 사회주의에 대한 개혁논리가 야기해낸 문제의 실상에 다가가고, 그로부터 현실극복의 동력을 추동해내는 과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일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판단이다. 말하자면 모택동이 그처럼 사랑했던 노농병(노동자‧농민‧병사, 요즈음은 병사가 도시빈민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대다수 기층민중은 실업위기와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 부정부패문제 등 등소평식 중국현대화기획이 낳은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정신적 물질적 곤혹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러나 현재 그 해결의 열쇠는 오직 중국정부만이 쥐고 있는 듯, 기층민중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차단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과 대다수 인민이 느끼는 무력감 또한 크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정부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기층민중, 중국 라오바이싱(老百姓, 중국의 보통인민들을 이르는 말)의 현재상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택민이 올해 들어 국유기업의 전면 해체를 유보한 것이나, 이제까지 무상분배했던 주택을 각자 해당금액을 내고 구입하라고 했던 지시를 유예한 것 등은 중국정부가 일반 라오바이싱들의 잠재적 불만을 감지하고, 그 엄혹한 현실을 타개해나가고자 마련된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아깡(下剛, 우리식으로 하면 국유기업에서의 대기발령상태로 최고 24개월 동안 적게는 100원에서, 최고 300원까지 최저 생활비를 지급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주택과 의료보험 등 각종 보험을 유지시켜준다. 그러나 이후 2년동안 재취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실질실업상태로 볼 수 있다) 등 올해만 1600만에 달하는 대량 실업사태는 계속되고 있고, 농촌의 유휴노동력으로 도시에서 임시직(打工)에 종사했던 민공조(民工潮) 1억2천만정도가 직할시 및 성급 대도시, 연안경제특구를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농업생산력은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데(95년 4만1천톤의 곡물생산, 전세계 생산량의 22%를 차지하지만 1인당 생산량은 350Kg에 불과하고, 생산력의 제고는 85년이후 하강국면에 있다.), 인구증가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16억에서 18억(중국 공식통계는 95년 현재 12억)까지 추산되는 인구의 급증은 곧바로 식량문제‧농업문제‧실업문제‧교육문제‧ 범죄문제로 현재화되고 있다.
아울러 빈부격차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월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금융자본의 직접투자를 전면금지할 만큼 자본의 운동이 중국정부의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IMF치하 우리 정부의 꼭둑각시놀음으로 야기된 경제식민상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국면이다. 그러나 중국 전체 저축보유액의 55%를 상위 20% 세력이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내 빈부격차의 심각정도를 말해주고 있거니와, 이것이 부정부패와 직접적 연관이 있고, 자본의 집중도 또한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은 새로운 계급문제의 박두를 눈앞에 두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중국사회의 지니지수가 0.59를 상회하고 있다는 비공식자료의 보고(중국정부의 공식보고는 0.35, 지니지수가 0.6이 넘어가면 기층민중의 자연발생적 폭발투쟁으로 국가가 전복될 위험이 있다고 한다)가 있을 정도로 중국에 내재한 빈부격차 등 사회문제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대다수 중국인민들의 눈길은 모택동시대로 되쏠려간다. 적어도 그때는 낮은 수준의 평등은 이루어졌었고, 최소한 굶지는 않았고, 이처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지는 않았었노라고. 박정희시대를 회고하는 식이라는 감이 없지 않지만, 모택동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평등분배-앞에 지금 중국정부와 중국인민이 보이지 않는 중대한 한판 씨름을 벌이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중국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강화가 필요

중국의 한 친구에게 우리나라 민주노총의 현황을 설명해주었더니, 정부단위냐고 해서 한참을 해명한 적이 있다. 워낙 문제인식이 첨예했던 친구라 곧장 우리의 노동운동의 역사를 자신의 간접경험으로 돌리고 혁명기의 중국을 재고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그 친구를 비롯하여 중국의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어이가 없었던 것은 중국 북경대학을 비롯한 유수대학의 그 뛰어난 영재들이 정작 자신들의 변혁적 전통, 오늘의 중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전혀 무지한 헛똑똑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뇌리와 가슴 속에는 대다수 인민들의 보편적 이해, 사회주의시장경제시대를 사는 대다수 라오바이싱들의 삶의 곤혹은 낑겨들 여지가 없다. 민생현안, 국가에 대한 헌신보다는 어떻게 외자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까 영어공부와 공채시험공부에 매달려 있거나, 좀 생각이 있는 친구들이라도 책에서 책으로 이론상의 논쟁 속에서만 중국의 현안문제들이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오히려 우리의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들이 건국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치면 100여년의 치열한 항쟁을 거쳐 비로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 그 역사적 전말을 연구대상화만 할 뿐, 그 역사적 현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건국 50주년, 아무리 문제가 산적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이룬 역사적 쾌거, 그리고 그 오늘이 한없이 부러운 것은 솔직한 심정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 손으로 우리의 진정한 통일국가를 일구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봤으면…

많은 이들이 21세기는 중국의 시대라고 한다. 중국의 21세기 국제전략 또한 정확히 미국의 패권적 세계관철의 역학을 깨고, 미국을 다원공생의 세계사의 진정한 일원으로 연착륙시키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외부세계의 눈길은 조금 삐딱하다. 특히 중국을 백안시하는 입장이나, 헌팅턴처럼 문명의 충돌 운운하며 중국이 일어선다 서양사람 조심하라식의 중국패권주의에 대한 경계 혹은 허구적 대립의식은 모두가 분명한 저의를 가지고 있다. 즉 중국문제를 중국 자체의 시각과 세계사의 관계적 발전, 그 발전을 이끄는 주체적 의식의 발로로 인식해가기보다는 국가단위, 혹은 세계적인 자본운동의 논리로 중국의 역사와 현재를 함부로 재단하고, 중국의 미래를 속단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지식사회에는 동아시아론이라는 것이 대두되면서 유교자본주의와는 다른 진정한 아시아적 가치를 숙고하며, 자본주의문명에 대한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를 아시아적 전통과 간난의 현대사역정으로부터 찾아내고자 하는 입장이 대두하면서 담론의 중심을 만들어가고 있다. 세계사의 전환을 이끌 수 있는 동력과 계기가 동아시아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는 이런 입장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동아시아지역사회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중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동북아질서를 주체적으로 견인하면서 세계사의 문명적 전환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 중간다리로서 동아시아지역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러한 입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진정한 동아시아단위라는 지역단위를 설정하는 근거가 분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세계를 대상으로 전면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밑으로부터의 연대라는 관점과 그 실제적인 동력의 확보를 근간하지 않을 때, 그러한 중간다리의 설정은 방법론이라는 미명하의 추상적인 이론놀음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거기서 문제는 우리 노동자의 시각과 노동운동의 방향타이다.
우리 노동자들도 자기문제에만 집착하여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중국식 표현대로라면 세기지교(世紀之交), 세기를 넘는 역사적 시점에서 세계사의 전환국면을 한눈에 장악해내는 현실읽기와 역사읽기의 독법(讀法)을 갈고 닦아야 할 터이다. 무엇보다도 중국 대다수 인민의 삶의 곤혹이 우리와 별개의 상황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세계공세 및 국내자본의 도저한 자기관철방식에 대한 공동대응의 모색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 노동자의 주체적 조직단위가 없다고 해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면, 그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발상이다. 예전에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변혁을 배웠다면 이제 우리가 자본의 시대를 살면서 스스로 돌파해오고 일구어왔던 조직적 정치적 투쟁의 경험을 중국에 전파할 수 있는, 그리하여 문제인식의 공유와 공동해결의 방안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모색해갈 것인지 고민해가는 적극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공세를 가하고 있는데, 우리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민중의 눈이 우리의 현실문제에 닫혀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것을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중국의 중화주의에 대한 인식도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패권주의로 치달을 우려가 정말 있다면 그것은 정확하게는 중국의 자본화, 그 자본가세력의 정확한 논리관철, 이해의 관철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라 지역사회를 지배해갈 가능성을 혁파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적 문제로서 사고해야 할 것이다.

대다수 중국민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택동, 그가 정말 오늘에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문제제기,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직도 유효하고, 그것을 넘어설 주체적 동력과 방향을 대다수 기층민중의 삶의 실제로부터 다잡아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오늘의 중국을 저처럼 당당하게 기념하고 미래를 구도할 수 있도록 단단하게 받침하고 있다. 중국의 라오바이싱들의 현실을 살아가는 삶의 잣대이자 미래를 이끄는 단꿈이 모택동을 다시 되살려낸 것이고, 그것이 현실의 구체적인 조직적 정치적 동력을 구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의 미래를 견인하는 잠재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공세가 조성한 위기국면에 수세적으로 대응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우리, 여타 제3세계 국가의 민중이 각기 처한 현실의 조건 속에서 민중의 보편적 이해관계의 수준을 확보하고, 그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밑으로부터의 연대고리를 형성하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사의 전진을 이끌 수 있는 주동성을 발휘해 나가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이 한 세기를 총괄하고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의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 노동운동의 방향타라면 누가 그것을 단단히 쥐고 물살 헤쳐 나갈 것인가. 한/노/정/연

1999-10-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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